한식 인문학 - 음식 다양성의 한식, 과학으로 노래하다
권대영 지음 / 헬스레터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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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 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심지어 우리 신랑도 이 사실을 정설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이게 정말이야? 아닌거 같은데?’ 싶을 정도로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에는 여러 모순이 보인다. 


예컨데 우리나라에는 고추를 메인으로 한 음식들이 있는 반면, 일본에는 고추를 메인으로 한 음식이 없다. 무엇보다 고추가 임진왜란 당시 전래되었다는 것 치고는, 한반도에서 대중화된 시기가 너무 빠르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전래되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서 발효식품인 고추장이 되고, 갈아서 사용하는 고추가루가 되고, 고추가루를 이용해 만든 발효식품 김치가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외국에서 들어온 식자재가 그 나라의 환경에 맞춰 적응하고, 토착화되고, 전국적으로 퍼지고, 그로 인한 음식이 만들어지는데는 지난한 시간이 걸리니까. 그걸 백년도 안되서 해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점을 기준으로 고추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고추를 이용하여 만든 수많은 한식들 역사까지 축소시켰다. 고추를 즐겨먹는 한국인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한식을 깎아내리려는 중국과 일본에선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한식 역사 왜곡에 참전한다. 중국은 파오차이, 일본은 기무치 같은 배추 짱아찌들을 들먹이며, 자신들이 김치 원조라고 나서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고추가 일본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에는 의문점들이 많았다. 일본에는 고추로 만든 음식이 없는데 임진왜란 때 무슨 이유로 우리나라에 갖고 들어왔을까? 유럽에서 중남미 고추인 아히가 들어왔다면, 그 당시 함께 들어왔다는 토마토, 타바코처럼 적어도 ‘아히’ 아니면 ‘피망’같은 유럽식 이름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순 우리말 ‘고추’만 남아있고 심지어 ‘당초’, ‘번초’, ‘만초’ 등 순전히 중국식 이름이 붙어졌을까? 고추는 일본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도 없고, 따로 용도가 없을 때인데도 어떻게 전국으로 퍼졌을까? 어떻게 고추가 들어오자마자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만들어 질 수 있었을까? 식품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한’ 가설, 즉 있을 수 없는 주장이다. 인문학자라도 조금만 더 세심하게 바라보면 합리적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다. p 051


소위 지식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에서 발견된 모순을 검증하지 않았다. 그저 ‘관심’에 받는 것에 기뻐했다. 대중매체도 여기에 합류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식품과학자가 나타났다. 바로 이 역사책의 저자다.


본투비 순수 자연과학자이자 식품과학자인 저자는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검증해서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박살내는데 앞장섰다. 한국학 박사 출신인 배우자 도움을 받아 오롯이 1차 원문(고문서 등)을 기준으로 연구했고, 본인 전공인 자연과학을 십분 활용했다. 무엇보다 저자는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 출신이다. 태조 이성계도 그 맛에 반해 진상하라고 했다는 ‘순창 고추장’을 만드는 그 순창이다. 태조 이성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 조선을 건국했던 사람이다.


결정적으로 1990년 일본을 방문하였을 당시, 일본 《식품원료학》이라는 책에서 ‘고추는 조선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가지고 들어왔다’는 내용을 접하고 나서 고추의 일본 전래설에 문제가 있다는 과학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고추의 전래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였다. p 052


결정적으로 저자가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파헤치기 시작한 또 다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고추가 전래된 시점을 확인하고 나서다.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고추가 전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고추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래된 역사를 파헤치는 건 이 책의 백미다. 덧붙여 고추로 이용한 한식의 역사를 비롯하여, 과거 한자 사대주의자들로 인해 왜곡되어버린 한식의 역사도 알려준다. 순 우리말인 닭도리탕이 일본어 잔재라는 이상한 논리를 앞세우며, ‘닭볶음탕’이라고 창씨개명한건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음식 이름을 지을 때 음식의 주재료, 요리방법, 종류를 의미하는 말을 붙여서 이름을 지었다. 닭을 고아서 만든 탕은 ‘닭곰탕’, 김치를 넣어서 끓인 찌개는 ‘김치찌개’, 닭을 기름에 볶으면 ‘닭볶음’, 닭을 찌면 ‘닭찜’, 닭을 도리쳐서 만든 탕은 ‘닭도리탕’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놈의 한자 사대주의자들이 우리말 ‘도리치다’는 생각치 않고, 고스톱의 ‘고도리’만 생각하며 ‘닭도리탕’을 일본어 잔재라고 몰아세웠다. 그런 한자 사대주의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도리치다’라는 말은 칼 등으로 돌려가며 거칠게 쳐내는 요리 방법이란 걸.


요즘은 한자 사대주의를 넘어 영어 사대주의가 기승이다. 해외에서 소개하는 한식 이름을 보면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냥 한식 명 그대로 영어로 쓰면 될껄, 굳이굳이 한식을 영어로 번역하는 정성을 들이니 외국인들이 ‘피쉬케이크’라는 단어를 보고 기겁을 하지. 심지어는 외국 요리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다. 김치를 소개할 때 중국 배추요리인 파오차이를 사용하기도, 일본 배추 요리인 기무치를 사용하기도 한다. 청국장은? 코리아 낫토라고 소개한다. 두부는? 일본 발음인 토후로 소개한다. 그저 웃을뿐!



고추 역사왜곡! 고추는 임진왜란 전래설

‘고추 일본 유래설’이 시작된 시기는 1980년대 들어서다. 한양대 이성우 교수가 1984년 《고추의 역사와 품질평가에 관한 연구》에서 ‘1492년 콜롬버스에 의해 고추가 서인도 제도에서 포르투갈로 들어갔다가 100년 동안 인도 등을 거쳐 일본을 통하여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위 ‘고추의 일본 도입설’을 주장하면서다. (…) 이러한 주장이 기존 관념을 깨는 현대의 학문으로 인식되어 국민적 반향을 일으킨 것인지는 모르겠다. 가장 의아스러운 점은 음식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 전문가들이 이런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자들도 이러한 주장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방치한 셈이다. ‘고추 일본 도입설’은 여러 가지 반증의 문헌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나 후학들을 통해 어떤 결정적인 근거도 확보되지 못한 채 철통같은 방어 논리로 이후 다른 문헌과 책을 통해, 반복 또는 확대 재생산 되었고 어느새 정설로 굳어져 버렸다. p 085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은 명문대 식품사학과 교수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교수 역시 나름대로 검증과 연구를 했겠지만, 그 검증이 과학적인 검증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게 아닐까. 더 아쉬운건 이 논문을 다시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가공 재생산하는 일부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그들로 인해 한식의 역사가 대폭 축소 및 왜곡되었으니까.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표적인 근거로 드는 것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남만초에는 독이 있다. 일본에서 건너 온 것이라 그 이름을 왜개자라고 한다. 소주에 타서 팔기도 하는데 이것을 마시다 죽는 자가 다수 있었다.’


이 고서에 등장하는 남만초에 대한 설명이 바로 고추가 일본을 통해 건너 온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봉유설에 적힌 남만초는 말 그대로 남만초다. 품종학적으로 지금의 태국, 인도네시아 등 당시 중국에서 보면 남쪽 지방 오랑캐들이 먹었던 고추로, 우리 고추와는 종과 속이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남만초가 언급된 글의 맥락을 살펴보자. 남만초를 술에 타 먹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평소 술에 고추를 타 먹는 문화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대로 해석하면 남만초가 얼마나 매운지, 독성이나 효능에 대해 잘 모르고 평소 우리 고추처럼 술에 타 먹듯이 했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이다. p 080


옛 문헌을 보면 조선시대 초기에 김종서가 북벌 당시 고뿔이 나거나 맹추위를 견뎌야 할 때면 우리 고추를 술에 타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으로 보면 우리 고추와 다른 남만초를 우리 고추처럼 술에 타 먹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p 122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내세운 조선시대 저서 《지봉유설》, 《오주연문장전산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근거는 파괴되었다. 앞뒤 맥락없이 근거라고 내세웠다가, 역풍을 맞게된거다. 심지어 내용을 찬찬히 살펴본 결과 우리나라에도 이미 고추가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증거가 되었다. 



고추가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은 전혀 없다. 이들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들어 일본 전래설을 뒷받침하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그 문헌에 우리 고추가 있었다는 문구가 발견되어 역풍을 맞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고추의 종류인 번초 또는 남만초가 들어왔으며, 담배, 토마토도 임진왜란 전후에 들어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 눈 여겨 볼 것은 이 책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매운 번초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바로 뒤에 ‘아초’라고 하여 우리나라 고추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명한 고추장이라고 한다. 순창군 천안군에 나오는데, 한 나라에 이름이 났다. - 중략 - 요사이 ‘우리 고추’는 품질이 좋아 왜관에 팔면 심히 이익이 난다.’ p 082


고추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 시기 많은 문헌에 이미 고추장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식료찬요(1460년)》, 《향약집성방(1433년)》, 《의방유취(1477년)》 등에서 다양하게 발견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비위나 위가 약해 몸이 허해질 때, 닭이나 꿩을 도리쳐서 고추장을 넣고 끓여 먹거나 찍어 먹으면 밥맛이나 얼굴색이 좋아진다’고 하여 주로 식치의 개념으로 많이 쓰인 음식으로 소개되었다. p 091


고추가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은 꽤 많이 발견된다.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온건 절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계속 재배해왔던 우리의 두가지 전통 고추를 유전자 분석한 결과, 이미 47만 년 전에 분화된 두 품종으로 밝혀졌다. 하나는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는 데 쓰이는 우리 고추이고, 다른 하나는 약간 매운 고추로 국과 탕에 맛을 내는 고추, 그러니까 청양고추의 원조로 보면 된다. 지금도 일부 지방에는 좀 매운 고추를 ‘땡초’라고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청양고추가 최근에 남만초인 태국 고추와 우리 고추의 교잡종이라고 생각하는데, 식물유전학자로 세계적인 전문가인 최도일 교수는 청양고추의 뿌리는 우리나라 약간 매운 고추를 근간으로 종자 개령한 것이라고 한다. p 103



심지어 고추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니, 이 땅에 이미 우리나라 고추가 자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콜롬버스가 들여온 고추와 우리 고추는 품종이 다르다. 완전 다르다. 동남아 고추랑 우리나라 고추랑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있다면 그사람 시각과 미각, 후각에 문제가 있는 듯.


아주 박박 우겨서 콜롬버스가 가지고 온 고추가 포르투갈을 지나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치자. 당시 콜롬버스 고추가 우리가 먹는 고추로, 진화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다. 100~200년이라는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 본디 생물이란 n만년, n천년이라는 오랜 기간, 아주 천천히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며 진화한다. 본투비 문과인 나도 이건 아는데,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은 왜 안해봤나몰라.


또 다른 한식 역사 왜곡: 김치, 고추장, 비빔밥, 떡볶이

고추의 역사를 왜곡했으니, 그에 따른 부차적인 한식 역사 왜곡도 당연이 줄을 이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중국과 일본이 김치를 자기네거라고 우기지!


이 잘못된 설을 무리하게 합리화하고 꿰맞추려 하다 보니 임진왜란 이전 옛 문헌에 나오는 모든 한차 초(椒)를 일률적으로 후추, 산초 등으로 번역하고, 임진왜란 전의 문헌에 나오는 김치는 모두 백김치라 주장하고, ‘순창 고추장’도 흑색의 후추고추장이라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p 085

김치를 장아찌와 짠지의 후손으로 폄하나는 이들도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떤 학자는 김치는 원래 배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로 만들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리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김치였다는 잘못된 논리에 빠져, 근거 없이 김치의 원조가 일본의 츠케모노, 중국의 파오차이라고 한다 보니, 김치의 원조가 장아찌와 짠지라는 말을 무리하게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다. p 160


김치와 고추장은 엄연한 과학이다. 발효과학이라고 들어는 봤나? 그것도 아주 고급 발효과학이다. 


인류는 발효기술을 터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음식을 오래 보관하면 기본적으로 음식은 부패한다. 부패한 음식을 먹으면 복통을 일으키거나, 심하면 사망한다. 그렇게 몇 천년 간 인류는 부패한 음식을 먹고 아프거나 죽었다. 하지만 어떤 부패한 음식은 오히려 맛이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친 깨달음으로 먹어도 되는 부패한 음식을 가려낼 수 있게되었고, 심지어 손수 부패한 음식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게 ‘발효’라는 과학적인 기술이란건 나중에야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게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나 고추장, 된장, 삭힌 홍어 등이다.


고급 발효과학이 들어간 김치는 일본 장아찌나 중국 파오차이와는 그 결이 다르다. 아주 다르다. 걔들은 발효식품이 아니라, 절임식품이다. 장아찌와 짠지 같은 절임식품은 미생물의 성장과 부패를 막기 위해 수분활성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소금을 쓰거나, 식초를 사용한다. 즉 부패를 막아야 먹을 수 있고, 부패하면 못 먹는다. 미생물의 성장을 도와 발효시키는 발효식품과는 그 원리가 다르다. 태생부터 완전 다르다.


아, 이 책에 따르면 또 다른 소위 지식인들이 주장하길 우리나라엔 결구배추가 없어서, 최초 김치는 무김치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결구배추는 호배추(중국배추)라고 해서, 결구배추는 중국에서 들어온지 1백여년 밖에 안되었다는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최초 한반도에는 결구배추가 없었고, 기록에 나오는 모든 김치는 무김치라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저자는 또 한번 강력한 역공을 펼쳤다. 《고려사절요》, 《삼국사기》에 이미 찢어먹는 통배추 김치 비유 기록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배추와 배추김치를 나타내는 표현은 우리의 오래된 고문헌에 승(㮱), 추승, 승저, 승제, 침승제 등으로 다양하게 나온다.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 남아있는 기록물만해도 서거정의 《사가집(1488년)》, 김창업 《연행일기(1712년)》 등에 배추김치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나온다. 그런데도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왔다고? 고추가 없는 배추김치는 있을 수 없으니, 임진왜란 이전에는 무로 만든 김치만 먹었다고? 아유, ㅈ랄도 이정도면 정성이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배추 말고도, 이미 옛날부터 우리나라 전통배추가 있었다. 조금은 작지만, 알찬 조선배추가.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도입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비빔밥이란 기록이 1890년경 쓰인 《시의전서》에 처음 등장한다며, 그 이전 비빔밥의 기록이나 역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 역사를 축소한다. 고추장의 역사를 짧게 할 수 밖에 없으니 고추장을 이용한 비빔밥의 역사도 짧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당연한 논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p 113


일반적으로 음식이 옛 문헌에 기록으로 등장한다면, 그로부터 수 백 년전, 수천 년 전에 이미 백성들이 먹고 있던 음식일 가능성이 높다. 《시의전서》에 ‘비빔밥’이 처음 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를 100년으로 확언할 수는 없다. 당연히 비빔밥은 이미 16세기 말엽 박동량의 《기재잡기》에 ‘혼돈반’으로, 1724년 권상일이 쓴 《청대일기》에 ‘골동반’으로 한자로 쓴 명칭이 수록되어 있다. 《명물기략》에서는 소리를 빌려와 ‘부비반’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시의전서》보다 300여 년 앞선 문헌 기록이다. 비빔밥의 한글 명칭도 1819년 《몽유편》에 ‘브뷔음’으로 한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의전서》보다 100여 년 전에 비빔밥을 한글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p 114



고추 전래시기를 축소하니 각종 한식의 역사가 축소되고 왜곡되었다. 비빔밥 역사까지 왜곡되었을 줄 누가 알았나. 뜬금없이 왠 비빔밥이냐고 할 수 있다. 비빔밥을 잘 생각해보자. 비빔밥의 백미는 고추장이다!


간장으로 만든 떡볶이는 궁중떡볶이고 고추장으로 만든 떡볶이는 일반 떡볶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고추로 만든 음식은 서민음식이고, 고추장을 넣지 않은 음식은 궁중 음식이라는 것도 잘못됐다. 꼭 집어서 말하자면, 고추나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궁중 음식’이 아니라 ‘제사 음식’이었다. (…) 일반사람이나 군왕이 평소에 먹는 떡볶이는 오늘날의 떡볶이와 같이 고추장 등으로 양념한 떡볶이였다. 《승정원일기》 등에 떡볶이가 나오는 걸로 보아 떡복이가 왕이 좋아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대부가의 남인 이익의 문집 《성호집》에도 떡볶이 기록이 있어, 사대부가에서도 떡볶이는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식의식감》이나 《규곤요람》 등을 보면 서민들은 고추장을 중심으로 양념을 한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궁중이나 사대부가들은 전복, 해삼, 쇠고기, 돼지고기 등 서민들이 구하기 어려운 귀한 식재료를 사용한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p 118


이제는 떡볶이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빨간 고추장 떡볶이도 옛날부터 즐겨 먹었다는거. 이 내용이 생소한 당신, 당신도 한식 역사 왜곡에 세뇌된 사람이다. 이 책을 읽기전 까지는 나역시 그랬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중에 파는 떡볶이가 대중화 된건 1960년대 이후다. 밀가루 수입과 기계를 이용한 밀떡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다.



고추 일본 전래설, 부침개와 주파수의 상관관계 외에도 일본 말이라고는 고스톱 판의 ‘고도리’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닭도리탕이 일본 말이다’라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는가 하면, 여기에 몇몇 언어학자까지 가세해 어느순간 ‘닭도리탕’이 ‘닭볶음탕’으로 뒤바끼기도 했다. 일부 전문가들의 그릇된 연구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가는 잘못된 식품 정보에 의해 우리 음식 역사가 왜곡되고 때로는 누군가 선의의 피해를 겪기도 한다. p 061



한식은 자랑스런 우리 음식이다. 빛내지는 못할망정, 제발 까내리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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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다. 정확히는 로마시대 시인 오비디우스가 지은 『변신 이야기』 속 한 챕터의 주인공이다. 피그말리온 효과의 그 피그말리온이 맞다. 고전 속 피그말리온의 일화에서 파생된거니까. 고전 속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대략 이렇게 진행된다.



키프로스에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살았다. 그는 몸을 파는 여성들을 혐오했다. 여성혐오가 심했던 그는 집안에 틀어박혀, 자기 이상에 딱 들어맞는 여인상을 조각했다. 그 여인상은 새하얀 상아로 조각했다. 피그말리온은 언제나 이 여인상과 함께했다. 여인상을 ‘연인’으로 대했다. 피그말리온은 연인에게 옷도 갈아입히고 입맞춤도 했다. 하지만 이 연인은 어디까지나 조각상, 상호작용은 단연 없었다. 결국 피그말리온은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여인상을, 진짜 여자로 변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사랑에 감동하여 소원을 들어주었다. 여인상이 생명을 얻어 진짜 여인이 되었고, 그 여인은 피그말리온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의 이름은 ‘파포스’다.


이 이야기는 ‘진실한’ 사랑 이야기 대표주자가 되었고, 수많은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심지어 여인에게 이름도 생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은 후대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 원전에는 여인의 이름이 없었다. 



고대에는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각광받았다. 아니 고대를 지나서 중세. 중세를 지나서 근세까지도 쭈욱. 이런 피그말리온 이야기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반대로 이야기해보자. 피그말리온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각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부계사회(남성중심사회)다. 피그말리온이 쓰였던 로마시대는 남성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그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던 시대였다. 부계사회가 시작되기 이전, 그러니까 철기 문명이 들어서기 전까지만해도 전 세계적으로 모계사회였다는 역사적 흐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확실한 건 그런 사회적 환경에 힘입어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아주 오랜기간 사랑을 받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은 21세기다. 2천년이 흐른만큼 사회상도 바뀌었고, 가치관도 달라졌다. 여기저기서 피그말리온이 진정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 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요즘 말로 피그말리온을 해석해보면 이렇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



여성혐오가 지나쳐 집안에만 틀어박혀 살던 피그말리온. 심각한 여성혐오자였지만 사실상 집안에서 그가 만들었던 건 하얀 살결을 표현하기 위해 대리석으로 조각한, 아름다운 여인상이었다. 심지어 그 여인상을 실제 여인이라 생각하며, 자기 연인이라 생각했다. 옷갈아입히고, 포옹하고, 입맞추고, 같이 자고.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하나. 피그말리온의 여성혐오는 ‘선택적’ 여성혐오라는 사실이다. 즉 피그말리온이 혐오하는 여성은 ‘자기 주장이 있는 여성,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여성’인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그저 자신이 만든 여인상처럼 자기에게 순종하는 여인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자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피그말리온은 자기에게 순종하면서,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했다.


아름다우면서 자신에게는 순종적인 여자를 원했던 피그말리온. 주변에 그런 여자가 없어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찌질이. 피그말리온은 그저 찌질한 남자였다. 


피그말리온은 여신 아프로디테 은혜로 여인상이 정말 여인이 되었을 때도, 그녀에게 이름하나 주지 않았다. 아니, 이름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원전 속에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2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주 유명하고 진실한 사랑이야기 중 대표작이 되었다. 심지어 후대 사람이 이 여인상에게 ‘갈라테이아’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갈라테이아.

과연 이 이야기는 모두가 인정한 진실한 사랑이야기가 맞을까? 

누군가에게만 듣기 좋은 사랑이야기는 아닐까? 



매들린 밀러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매들린 밀러, 그녀는 고대 고전 연구를 전공자였다. 그녀는 익히 알려진 고전 『갈라테이아』를 다시 썼다. 시점을 바꿔써. 원작이 누군가에게만 좋았던(예컨데 ‘피그말리온’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 시점이었다면, 저자가 쓴 『갈라테이아』는 이름도 없었던 여인 시점이다.


원작에는 없었지만, 분명히 있었을 상황.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는 주제를 위해 생략된 현실적인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이 책에서 살아났다. 무엇보다 원작에서는 생략되었던, 하지만 누구나 추측가능한 피그말리온의 찌질함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내가 탄생된 이후에 남편은 기를 쓰고 나를 안에 가두어두려고 했지만 하인들 보는 눈도 있었고, 게다가 사람들이 조각가의 아내를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특이한지 모른다는 둥, 그런 미모는 신이나 빚어낼 수 있다는 둥. 그걸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갑자기 너도나도 남편의 작품을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남편은 돌을 깎고 또 깎아 처녀를 만들었고, 어느 날 나는 물었다. 그 중에서 살아 움직일 작품이 하나라도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p 15


돌이었지만 사람이 된 여인. 그녀는 항상 침대 위에 누워서, 남자가 고용한 사람들의 감시를 받는다. 남자가 방에 들어왔을 땐 항상 남자가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해야한다.


“자고 있나?”

그가 물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야. 이 여자는 대리석에 불과한데.”

그는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을 들었다.

“오, 여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는 이런 베필을 찾을 수 었는 것일까요? 이토록 완벽한 여인이 어찌하여 인간이 아니라 대리석이라야 합니까? 만약 그녀가-” p 17


“하지만 분명해, 따뜻하다고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오 여신이시여, 이것이 꿈이라면 깨지 않게 하여주소서.”

그는 잠시 후에 자기 입술을 내 입술에 대고 눌렀다.

“살아나라. 살아나라, 내 생명, 내 사랑이여. 살아나라.”

나는 바로 이 순간, 이슬을 머금은 새끼 사슴처럼 눈을 떠 마치 태양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그를 보고 경외와 감사가 담긴 탄성을 조그많게 터트려야 한다. 그러면 그가 나를 따먹는다. p 19


그가 손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얼굴을 찡그렸다.

“저게 뭐지?”

나는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은색 실금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우리 아이가 남긴 흔적이잖아요. 살이 튼 자국이요.”

그가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언제 생긴 거야?”

“아이가 태어났을때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었다.

“보기 싫구먼. 당신이 돌이라면 깎아서 없애버릴텐데.” p 25



생략되었던 고전 속 피그말리온의 찌질함. 그가 정말 이랬을지는 모른다. 그저 가정일뿐. 하지만 적어도 고전 속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가 절대적으로 여인상에게 친절했던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추측되는 찌질함의 정도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뭐. 진실한 사랑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보기엔 좀 문제가 있어보인다는 것.


물론 이것도 요즘 시대 가치관에 빗대어 하는 말일 뿐, 기백년 흐르면 피그말리온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평가가 달라진다 한들,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까 싶은?


역시 고전소설은 비틀어 읽어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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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섬 제주 유산 - 아는 만큼 보이는 제주의 역사·문화·자연 이야기
고진숙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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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제주 역사·문화에 꽤 관심이 많은 편이다. 왜? 제주도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섬 하나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굵직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반도 본토 역사를 축소하면 제주 역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수많은 국내 여행지 중에서도 유독 제주를 아꼈다. 여행지로써 제주를 아낀만큼, 제주여행을 할때마다 ‘답사’를 기반으로 제주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때로는 제주 고대사와 관련된 지역을, 때로는 근·현대사와 관련된 지역을 찾아다니곤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은 고대사부터 중세를 지나 근·현대를 거쳐, 모든 시간대에서 일어났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있기도 했다.

이런 내 여행 기질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답사 개념의 제주여행이다보니 어디를 가든 배경지식이 꼭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시중에 출간된 제주여행 관련 여행책, 여행에세이, 답사기행문, 제주신화 등을 자주 읽었다. 각각의 책들은 모두 영양가가 높았지만, 그만큼 아쉬운점이 있었다. 이런 책들은 기본적으로 제주 여행과 제주 역사, 제주 문화, 제주 풍속 등을 한데 엮어놓은 책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여행’을 중점으로 쓴 여행책인반면, 어떤 책은 제주의 ‘신화’를 담은 역사서, 또 어떤 책은 제주의 근현대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 등등. 오롯이 하나의 카테고리 기준으로 쓰여진 책들이었다. 즉, 내가 원하는 제주 여행지, 역사 유적지, 제주 문화나 풍속 등을 전부 알고자 한다면, 이 모든 책들을 전부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었기도 했고. 앞으로도 더 읽을 예정이기도 했고.

그런데, 존버는 승리한다고 했던가! 이번에 제주 여행과 제주 역사, 제주 문화, 제주 풍속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제주 여행책이 나왔다. 음 여행책이라고 하기엔 교양서 개념이 더 강하니, 제주 여행 에세이라고 해야하나?

감히 말하건데 이 책은 명실공히 제주 백과사전이다.

극찬을 해도 부족하지 않을 이 책의 이름은 『신비 섬 제주 유산』이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는 조금 놀랐었다. 두께가 솔찬히 있었으니까. 두께만 보면 약간 벽돌책 느낌이랄까? 시중에 출간된 일반 제주여행책이나 여행에세이, 제주 신화 역사책 등이랑 비교해봐도 이 책만큼 두께가 두꺼운 책은 흔치 않을 것 같다. 아 그렇다고 범접하기 어려운 책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글 자체가 읽기 쉽게 쓰여져있으니까.

아! 갑자기 떠올랐는데, 이 책의 저자 ‘고진숙’님은 초면이 아니다. 저자의 저서 중 하나인 『제주 4.3을 묻는 십대에게(서해문집)』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렵다면 어려운 현대사, 그것도 현재 진행형인 제주4.3사건을 청소년에게 알려주는 책을 썼다는 건, 저자가 쓰는 글은 읽기 쉬운 글이자, 이해하기 쉬운 글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신비 섬 제주 유산』으로 돌아와서. 저자의 전작들은 대체로 제주와 관련된 책들이다. 그 이유를 단순하게 찾자면 저자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고씨 성을 가진 저자. 제주 고씨. 제주 역사속에 오랜 기간 있었던 탐라국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삼을나를 떠올리면 쉽다. 삼을나는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사람을 말하며, 탐라국을 건국한 시조로 보면 된다. 한마디로 제주 고씨, 제주 양씨, 제주 부씨의 시조들. 저자는 이런 역사를 지닌 제주 고씨다.

이쯤에서 제주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래와 같다. 짧게 요약한다고 요약했지만, 그럼에도 길다면 길다.

제주 역사 타임라인

주호국

3세기 무렵 쓰여진 진수의 『삼국지』에는 제주를 ‘주호’라 불렀다. 탐라국이 1세기 무렵 세워졌으니, ‘주호’는 탐라 초기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탐라국(~통일신라)

‘탐라’라는 이름이 역사 속에서 등장한 건 5세기 무렵 쓰여진 『삼국사기』다. 백제 제후국으로 등장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신라 조공국이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만해도 ‘탐라’는 신라를 괴롭히는 9대 오랑캐 중 하나였다(황룡사 9층 목탑). 탐라가 신라 조공국이 된 후, 신라는 정식으로 ‘탐라’라는 국호를 내린다. 뿐만 아니라 탐라를 지배하는 직위인 ‘성주’와 ‘왕자’도 신라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성주 및 왕자 가문은 제주 고씨가 세습하고 있었다.


고려(~무신정권)

신라 멸망 후 고려가 건국되었다. 탐라는 이 때도 고려에 조공하며 제후국이 되었다. 하지만 1105년 고려 숙종 때 탐라는 고려에 강제 합병되며 ‘탐라군’이 되어버렸다. 고려 행정구역이 되면서, 중앙정부 지방관도 파견되었다. 단, 고려 중앙정부도 탐라의 ‘성주’와 ‘왕자’ 직위를 인정한다. 탐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성주와 왕자에 이어 지방관(고려정부)도 포함되었다. 무신정권 시기 제주 고씨가 세습하던 ‘왕자’ 직위가 제주 양씨에게 넘어간다. 1223년 고려는 ‘탐라’를 ‘제주’라는 이름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후기(~원 간섭기)

1270년 대몽항쟁이 시작되었다. 여몽연합군에 밀린 삼별초군은 밀리고 밀려서 제주에 도착했다. 친원파였던 제주 양씨가 삼별초에 의해 몰락했다. 본토에서 온 문벌귀족 문씨 가문이 제주 고씨 가문과 결혼동맹을 맺고, ‘왕자’직위를 세습하기 시작했다. 원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제주를 원나라 직할시로 만든 뒤 말 목장 등을 직접 관리한다. 1295년 원은 제주를 간접지배방식으로 바꾼다. 제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어느새 고려정부, 성주 및 왕자 가문에 원나라까지 포함되었다. 원나라가 망한 뒤, 고려 말에 일어난 ‘목호의 난’은 원의 철수를 반대한, 친원 목장주들이 일으킨 난이다. 최영장군이 진압했다.


조선(~중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했다. 조선은 제주를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이라는 3개의 행정구역으로 분리했다. 제주 성주 및 왕자 가문도 폐지했다. 1445년 제주에는 중앙정부를 제외한 기득권층이 사라졌다. 기득권층이 사라졌다고 해서 제주민 삶이 나아지진 않았다. 중앙정부는 제주에 토지세를 면제해주는 대신 과도한 진상을 요구했다. 중앙정부가 요구한 대표적인 진상품으로는 말, 귤, 전복등이 있었다. 과도한 진상으로 인해 제주 남자들이 제주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제주에 여성 노동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제주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반토막나자, 인조 때 이르러 제주에 ‘출륙 금지’ 시행령이 반포되었다. 이는 약 200년간 지속된다.


조선(~후기)

출륙금지령이 지속된 상황에서 엄청난 기후변화로 인해 제주사람들이 굶어죽시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사태의 시급성을 인정하고, 제주에서 상업을 허용했다. 이때 나타난 이가 거상 김만덕이다. 뿐만 아니다. 제주는 고려말 부터 유배지 핫플레이스(!)였다. 특히 조선 중기이후부터는 격화된 당쟁으로 수많은 유학자 및 왕족들이 제주로 유배를 왔다. 당시 제주는 여성 노동이 중심인 사회였고, 따라서 제사권과 재산권도 여성이 중심이었다. 본토와는 매우 이질적인 다른 문화를 지닌 섬이였다. 하지만 유배온 유학자들로 인해 유교가 전파되었고, 이는 제주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특히 남아선호사상 등 여성차별을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현대

일제강점기는 제주를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일제로 바뀌었을 뿐, 제주 사람들의 삶이 크게 달라진건 없었다. 탐라, 조선, 고려 모든 시기가 제주민들에겐 수탈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제주 당시 제주 해녀들은 항일운동 및 노동운동을 진행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그렇게 한반도가 해방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겼다. 하지만 제주는 그때도 제대로된 독립을 맞지 못했다. 그들을 기다린건 대다수의 제주인이 학살된, 제주4.3 사건이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월별로 추천하는 제주 여행지와 관련된 역사 및 문화 등을 소개한다. 제주 역사·문화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였것만, 그럼에도 초면인 내용들이 나와서 포스팅에 옮겨본다.



2월: 신들의 교대 기간, ‘신구간’에 이사하는 이유

제주에는 1만 8천 신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그 흔적이 바로 ‘신구간’이다. 일정 기간 동안 신이 이 땅에 없으니, 어떤 일을 해도 동티날일이 없다. 그러니 이사를 간다면 이때 가라. 뭐 이런 느낌이다. 이 내용은 분명 초면인데, 이상하게도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일본사에도 관심이 많은 터라, 일본 역사 문화에도 조금 많이 알고 있는 편인데, 일본에서도 제주 신구간과 비슷한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신구간은 절기상 대한 후 5일째부터 입춘 3일 전까지 7~8일 동안 이어지는 구간이다. 대략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가 신구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신들의 교대 기간이라서 세상에 신들이 없다고 한다. 신구간이란 ‘신의 교대 구간’이라는 말의 줄임말 쯤된다. p 071

자연재해가 많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인간들은 모든 재앙과 생로병사를 신이 주관한다고 믿었다. 신들은 결코 관대하지 않다. 신들의 땅인 제주에선 더욱 신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두려워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사람이 사는 집 또한 온갖 신들의 영역이었다. 만일 잘못해서 인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노하게 되면 동티가 난다. 이 두려운 통이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제주 사람들을 구원한 시나리오가 ‘신구간’이다. p 072

옆 나라 일본은 음력 10월을 ‘신없는 달(칸나즈키)’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일본 팔백만 신들은 음력 10월에 ‘이즈모 타이샤’에 모여서 이른바 회합을 한다. 해서 이즈모 지역을 제외한 일본 전역은 음력 10월을 ‘신없는 달(칸나즈키)’라고 부르는 반면, 팔백만 신이 모이는 이즈모에선 ‘신있는 달(카미아리즈키)’ 라고 부른다.

 

과학적으로 신구간은 증명 가능한 신의 부재기간, 엄밀하게 말하면 동티를 피할 수 있는 시기이다. 제주학 연구자인 제주대학교 윤용택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 평균 기온이 5~20℃ 이상이면 여름, 5℃ 미만이면 겨울이라는 계절분류를 가지고 1971년부터 (…). 분석결과 제주에는 일평균 기온 5℃ 이하인 날이 한 해 8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부르는 신구간과 거의 일치하는 8일이었다. 기온이 5℃ 밑으로 내려가면 세균들이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데 5℃ 이상이면 세균이 활개를 펴 사람들을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게 하고 (…).” - 제주도 ‘신구간’ 풍속에 대한 기후 환경의 이해, 탐라문화 29호

p 073

촘촘하고 단단하고 납작한 초가지붕인 데다 온도와 습도가 다른 지역보다 높기 때문에 제주의 가옥은 온갖 세균과 벌레가 살기 좋은 환경이다. 게다가 집집마다 통시라고 하는 돼지우리 겸 화장실을 두고 살았다. 통시에서 나오는 거름을 쌓아 두었다가 늦가을에 보리 파종을 할 때 썼다. 이렇게 쌓은 낟가리를 ‘눌’이라고 하는데, 제주 사람에겐 이것 또한 두려운 존재라 제주에는 눌굽지신이 살고 있다. 이런 가옥 구조 때문에 제주에선 신구간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던 거이다. 제주 사람들이 ‘신들의 교대 시간’을 알아낸 것은 그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p 076

어떤 신화든 그냥 신화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그 신화속에는 과거의 현재가 들어있다. 예컨데 건국신화가 만들어진 이유는 건국의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다. 제주의 신구간도 그렇다.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 속에서 별 탈 없이(이른바 동티나지않게)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을 보다 빠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우리 조상들은 신화를 만드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4월: 삼별초여,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 (부제: 탐라 왕자?!)

난 개인적으로 삼별초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고려 중앙정부가 원과 강화교섭한 이후의 삼별초 행보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력을 놓지 못한, 무신정권의 잔재라고 본다. 이런 삼별초를 드높게 평가했던게, 과거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 출신 박정희 정권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뭐. 무엇보다 제주도로 간 삼별초가, 제주 사람들에게까지 버림받은 점만 봐도 삼별초는 민초들의 대몽항쟁이 아닌, 권력을 놓지 못한 무신들의 발악이라 볼 수 있다.

김통정 신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애기 업개 이야기는 왜 삼별초가 제주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망했는지 보여준다. 신화에 의하면 고려 정부군 김방경 부대가 항파두리성에 들이닥치자 성문을 닫았는데 그만 애기업개를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난 애기업개는 김방경 부대에게 성문을 열 방법을 알려 주고 김통정의 탈출 통로와 그를 생포할 방법도 알려 준다. 결국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에겐 이런 말이 있다.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 p 139


김통정 신화에 나오는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라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애기업개’는 아기를 업은 사람, 아기를 돌보는 사람, 나이도 어리고 어리숙한 사람 등을 지칭한다. 즉 일반 민초다. 당시 제주에 진을 쳤던 삼별초는 제주 민초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제주에 남아있는 항파두리성 같은 삼별초 진지를 건설할 때 제주 민초들을 이용했으면서, 정작 삼별초는 제주 민초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거다. 원나라는 자신과 강화를 맺은 나라는 대우를 해주지만,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나라는 잔혹하게 짓밟는다는 것을. 고려조정은 원나라와 강화협상을 하면서 일명 〈세조구제(불개토풍)〉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원나라 황실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제주도는 달랐다. 원나라 입장에서 제주도민은 삼별초를 도운 반역세력이다. 그렇게 여몽연합군(고려조정+원나라) 토벌대상에는 삼별초를 비롯해 제주도민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삼별초는 제주도민을 이용만하고 보호하지 않았으니, 과연 삼별초를 대몽항쟁의 상징이라고 부르는게 맞을까?

탐라 왕자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면 탐라국 왕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아는 왕자란 그렇다. 그러나 탐라국에서 왕자는 왕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2인자란 뜻이자 공동 지배자란 뜻이기도 하다. 제주는 보통 고, 양, 부 세개의 성씨가 탐라국을 만들어 다스려 왔다고 했으니 이들이 성주, 왕자 자리를 나눠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보다 복작하다. 확실한 것은 마지막 왕자 가문은 문씨 가문이란 것이다. 그 후손들은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383번지에 탐라 왕자 기념탑을 만들고 제주 입도조인 문착을 비롯해어 탐라국 왕자들을 봉안하였다. p 127

제주에서 성씨를 가진 가문은 고, 양, 부 즉 탐라 건국 씨족을 제외하곤 없었다. 문씨 가문이 제주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성주 가문이 중앙 정부에 줄을 대기 위해 끈질긴 노력 끝아 찾아낸 문벌귀족이었다. 제주에 들어와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입도조라고 하는데, 탐라국 지배 가문 외에 성씨를 가진 첫 번째 입도조가 바로 이들이다. p 139

성주 가문과 왕자 가문은 고려, 원, 삼별초가 제주를 무대로 벌인 세계사의 격동 속에서 아슬아슬 줄타기에 성공했다. 원, 고려, 탐라국 성주, 왕자까지 가세한 층층시하 핍박으로 탐라국 사람들은 다시 고통속에 빠졌다. p 140

삼별초와는 별건으로 ‘탐라왕자’ 이야기는 오우, 놀라운 내용이다. 제주에 탐라왕자 묘소가 있다는 건 알았으나, 진짜 탐라국 왕자(대충 고려 병합 전) 묘소라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탐라왕자의 ‘왕자’는 일반적인 개념의 왕자가 아니었다. 무려 지배계급 직위였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 인정되었던....! 이야 이거 참. 우와. 심지어 세습된 직위였다는 거에 놀랐고, 세습한 성씨가 삼을나를 시조로 둔 고씨, 양씨에 이어 바다 건너 들어온 문벌귀족인 문씨까지 이어질 줄이야. 진짜 제주 역사는 새롭고 짜릿해★




4월: 백비는 일어날 수 있을까_제주4.3

제주의 4월은 더없이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믿기지 않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4월에는 동백꽃이 진다. 그 모습이 마치 그날 하염없이 쓰러져 간 제주 사람을 닮았다 해서 제주 4.3의 상징 꽃이다. 당시 학살이 벌어졌던 장소로는 절벽, 폭포, 계곡, 바닷가나 움푹한 웅덩이가 많다. 시체가 쌓여도 치우지 않고 대량 학살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시체들이 바다에 버려졌다. 그 시기 제주 사람들은 갈치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p 162

제주 4.3의 시작은 미군정 시대였지만 정작 대학살의 시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였으니 놀랍게도 제헌헌법이 제정된 이후였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한 권리’가 어떤 이유로도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을 성문화한 것이다. 오로지 법류에 의해서만 이 권리를 제한할 수 있으며, 개인은 재팬받을 권리와 변호사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은 제주 사람을 재판없이 처형했다. 그리고 학살에 살아남아 재판에 넘겨진 사람들에 대한 절차 역시 법률을 따르지 않았다. 어떻게 군인이 국민을 향해 ‘초토화 작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국가가 국민을 단지 무장대와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피난처를 구해 주지도 않고 삶의 터전을 불태워 없애고, 젊은 사람이란 이유로 처형한단 말인가. 어떻게 국가가 어린아이와 노인, 임산부 등 노약자와 비무장 민간인을 단지 무서워서 숨었단 이유로 처형한단 말인가. 헌법을 위반한 것은 국가였다. p 169

평화공원에 있는 ‘비설’이라는 모녀상은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두 살배기 딸을 안고 눈 덮인 거친오름 쪽으로 피신 도중 희생당해 눈 더미 속에서 발견된 엄마와 아이를 기리고자 설치된 조형물이다. 차디란 겨울, 더 이상 오를 데도 없이 산으로 올라야 하는 절박함,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아이를 안은 엄마의 절망이 오롯이 느껴진다. 엄마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준단 말인가. 그저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게 고작이었으리라. p 172

 

제주 4.3 사건 관련해서 많은 포스팅을 해왔으니, 여기서는 가타부타 하지 않기로.




몽골이 남긴 제주 유산

원 간섭기 당시 고려와 원은 서로의 풍습이나 문화 등 여러방면으로 교류를 했다. 그 흔적이 알게모르게 우리 일상에 많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제주는 더했다. 원 간섭기 당시 제주는 본토와는 달리 원나라 직할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다보니, 제주는 본토보다 원나라의 영향력이 더 강했고, 강했던 만큼 원나라의 풍습이 제주어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제주에 남아있는 몽고의 흔적은 대부분 초면이라, 여기도 정말 놀랍고 새롭고 짜릿하고★

메밀의 원산지는 타타르족의 주 무대였던 동아시아 북부 바이칼호, 만주, 아무르 강변 일대에 걸친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그래서 메밀은 타타르 메밀이라 불리기도 하고 씨앗의 형태가 삼각형이라 삼각형쌀이라 불리기도 한다. 메밀 원산지에서 아주 먼 제주로 메밀 씨앗을 들고 온 이들은 몽골인들이다. 물론 메밀만이 아니라 한국에 가장 많은 외래 식물이 들어온 때가 원 간섭기였다. 전해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몽골인들이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이후 탐라 사람들의 기질을 억누르기 위해 메밀농사를 장려헀다고 한다. p 199

비록 몽골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메밀을 전했든 간에 제주 사람들에게 메밀은 아주 고마운 음식이다. 쌀농사가 불가능한 제주에서는 보리농사가 흉년이면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런 제주 사람들을 구한 것이 메밀이다. 메밀은 아무렇게나 둬도 잘 자라고 특별히 거름이 필요하지 않으며 병충해에도 강하고 생육기간도 석 달이면 충분하다. 가을에 수확한 메밀로 보릿고개를 넘겼다. p 200

메밀음식 말고도 제주 음식 문화에서 몽골의 유산은 꽤 많다. 제사 음식중에 상애떡이란 것이 있는데,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서 찐 빵이다. 상애떡은 쌍화점이란 고려가요에서 나오는 상화라는 중국식 만두가 제주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진 떡이다. (…) 제주의 음료 중에 쉰다리라는 것이 있다. 먹다 남은 밥을 발효시켜 먹는 음료로 몽골의 타라크에서 나왔다. 수애(순대)는 몽골 군인들의 야전식량인 게데스에서 나온 것이다. 몸국과 같은 탕도 슐랭이라고 하는 몽골 음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p 202

특히 제주 조랑말 역사는 정말 와우. 결과적으로 제주 토종말은 원간섭기 이후로 사라졌고, 현재 남아있는 제주말은 제주 토종마+원나라 말이 교잡종이라는게 참. 이런 제주 조랑말이 조선시대에는 주요 진상품이라, 제주민들 수탈하는 또 하나의 족쇄였다는 사실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확실한 역사 기록으로는 1073년과 1258년 탐라에서 고려 정부에 제주마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원나라가 말 목장을 제주에 만들면서 몽골의 말이 들어왔지만 그 말은 엄격하게 관리되었기 때문에 제주 말과 섞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호의 난으로 제주의 말 목장은 사실상 방치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목호의 난이 벌어진 지 불과 50년도 못되어서 말을 관리하는 기관인 병조에서 “제주 목장의 말이 날로 키가 짧고 작아진다”고 우는 소리를 한다. (…) 목호들이 전부 사라진 후 말들은 방치되었고, 제주 전통 말과 섞이면서 유전적으로도 다른 말이 나타났다. 이 말이 조랑말이다. p 329

조랑말은 ‘조르모르’라고 하는 몽골말에서 나온 것인데, 조르모르는 기동력을 얻기 위해 어릴 때부터 말의 다리를 묶어서 훈련시키는 기법이다. 제주 조랑말은 이런 흔적을 갖고 있지만 훨씬 왜소하다. 제주 전통 말은 과하마 또는 토마라고 하였다. 과하마란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고구려에서 유민이 들어오면서 같이 온 것을 보인다. 이 말이 제주에서 몽골 말과 교잡이 이뤄지면서 조선 초 조랑말로 새롭게 등장한 듯하다. p 329

말은 제일 먼저 제주에서 선정된 진상품이었다. 매해 200필은 기본으로 바쳐야 했고 임금이 탈 말도 20필 씩 매해 바쳐야 했다. 무슨 제사는 그리 많은지 그때에 맞춰 바쳐야 했고, 혹시 날이 날지 모르니 여분의 말도 있어야 했다. (…) 제주 말 목장의 총 책임자는 목사와 그 아래 층층시하 관리들이었지만 실제 말을 기르는 사람은 목자였다. 이 목자를 제주에선 테우리라고 한다. 테우리는 목자란 뜻의 몽골어이다. 테우리는 나라에서 정한 책임을 벗을 수가 없다. 벗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역할을 넘겨야 한다. 하지만 워낙 일이 고되어서 제주에서도 가장 천한 일로 여겨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p 332

 

고렴(조문), 고적(부조떡), 구덕(바구니), 복닥(껍질, 모자), 허벅(동이), 호랑(처마), 술(줄), 살래(찬장), 눌(낟가리), 촐래(반찬) 같은 제주어는 몽골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안채와 바깥채를 제주에서는 안거리, 밖거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쓰이는 ‘거리’도 몽골 전통 천막인 ‘게르’에서 빌려 온 말이다. ‘웡이자랑’도 몽골의 자장가였다고 한다. 몽골어 ‘모르’는 제주어 ‘ ’로 정착된다. ‘혼저’도 ‘빨리’라는 몽골어에서 유래했고, 아기, 마누라 등도 몽골어라고 한다. p 374

정말 제주민들은 섬 내 지배계급에 치이고, 본토 사람들에 치이고, 외세에 치이고. 다시금 느끼지만 제주민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탈의 역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모진 수탈과 핍박을 견뎌가며, 제주 역사·문화를 지켜온 제주도민들이다. 물론 출륙금지령이라는 대외적인 요소로 인해 제주를 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떤 이유로든, 자의든 타의든 본토와는 다른 제주 역사·문화를 만들어온 것은 제주도민들이며다. 본토와는 다른 문화로 제주는 본토 사람들에게 여행지로 각광받게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지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제주에 외지인이 많이 유입되면서, 제주의 역사·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다. 지자체에서도 꽤 오랜기간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외지인 유입에 혈안을 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요즘 제주 곳곳에서 그들의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불씨가 보인다는 점이랄까? 부디 제주가 제주답게 있을 수 있기를.

올 겨울에는...뿡뿡이와 동백꽃보러 제주여행에 도전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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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레스토랑 - 오지랖 엉뚱모녀의 굽신굽신 영업일기
변혜정.안백린 지음 / 파람북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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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누구든, 무엇을 하든 ‘친환경’을 생각해야하는 시대다. 대기업들은 이미 앞다투어 ESG경영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소규모 기업이나 영세업체들은 ESG는 고사하고, ‘친환경’도 어려운게 현실이다. 사업주 본인이 환경을 생각하고, 지구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사업장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그리 녹록치 않기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해낸 모녀가 있다. 이 모녀는 현재 서울에 위치한 비건 레스토랑 ‘천년식향’을 꾸려가는 오너이자, 이 에세이를 쓴 사람들이다. 여기서 조금 놀라운 건, 그들의 이력이다. 모녀 모두 소위 말하는,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자영업을 시작했다. 그것도 특정 소비자를 타겟으로 하는 ‘비건음식’을 만들고 ‘제로웨이스트’ 까지실천하는 고급 식당을 말이다.

누가봐도 어려운 길인데, 이 어려운 길을 뛰어들다니! 이 일을 강력하게 밀어부친건 다름아닌 딸 안백린 쉐프였다.

동물권 옹호자이자 비건을 하며 환경을 생각하는 딸 안백린. 딸이 못마땅에 언제나 잔소리를 했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있던 엄마 변혜정. 엄마는 딸이 하는 일을 못마땅했고, 딸은 엄마가 하는 말이 ‘입 발린 소리’라고 못마땅해했다. 딸은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엄마는 딸을 지지했다. 그렇게 고급 파인 다이닝 식당이자, ‘비건’식당이며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천년식향이 탄생한 것이다.

그냥 ‘장사’도 힘든데, 그들이 선택한 길은 일반적인 ‘장사’보다 더 힘든 자갈+가시밭길 콜라보! 그럼에도 그들은 그 힘든 길을 걸었다.

물론 그 순간의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자들에게 나의 말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었으며, 때로는 불편한 내 말은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또 대안 없이 비판적 주장만 한다는 비난도 많았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질문하고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지만, 정작 내가 실천하려고 하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참 많은 말들을, 쉽게도 했구나 싶다. 그러나 장사는 내가 ‘꼰대’라는 것을 매일 깨닫게 해준다. p 032


저자는 천년식향을 운영하면서 많은 반성을 했다. 별다른 의미없는 본인의 행동이, 어떤 식당 주인에게는 진상으로 다가서진 않았는지 말이다. 무엇보다 특권층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특권층에 속했고 아주 당연히 그에 대한 대우를 요구했던 사실에 대해서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싫어하는 건 남도 싫어한다는 모토를 가지며 살았다.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아는 누군가가 철저하게 내 기준에서 ‘진상’짓을 하려고 하면, 먼저 나서서 제지하고는 했다. 그런데 정작 이런 내 행동이야말고 그 사람에게 진상으로 보이진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저 모든 이에게 민폐가 아닌, 오로지 내가 그 행동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러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딸은 말했다. 52시간 노동법을 지키고 있지만, 그렇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자기는 문재인이 아니라 홍준표를 지지해야겠다고. 평소 인권과 차별에 감수성 있었던 딸은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사장이 살아야 직원도 산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알아야 한다며, 과연 식당에서 일해보고 정책을 만드는 것인지를 따지며, 나를 원망했다. 직장 내 괴롭힘부터 노동법까지 매일 훈수했던 나는 자영업자의 딸의 이야기를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p 040

지나고 나니 가장 안타까운 점은 본인이 한 공사비용은 지출 처리나 부가세 공제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딸이 몸으로 때운 비용들, 그리고 제로 웨이스트를 위한 황학동 중고물품 구매 등은 영수증 처리가 되지 않아 실비용조차 지출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 당시는 몰랐던 이 사실은 종합소득세를 신고할 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통장 잔고를 넘는 부가세가 폭탄처럼 날아와 거의 기절할 뻔 했다. 이런 일에 대비한다고 개업 초부터 세무사와 거래하고 있었으나, 알고보니 그들도 맞춤형으로 알아서 조언해주지는 않는다. p 048

52시간 노동법, 인건비, 세금문제…. 이 모두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자영업자들이 고스란히 겪고 있는, 언제까지고 해결해나가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들은 입바른 말을 한다. 현실적인 대안은 무시한채. 엄마 저자 역시 그런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딸 저자는 그런 지식인들을 원망하는 현실을 사는 자영업자였다. 실제 자영업자들 현실문제를 눈 앞에서 목도한 엄마저자는, 그저 침묵했다. 아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마저자의 침묵은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달은, 참회의 침묵이었다.

천년식향은 ‘가치를 판매하는 사업장’이 되고 싶었다.

현재 한국의 미식 문화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잠정적 결론이지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천년색향의 불편함을 소개하면서도

감히 손님들에게 그 불편함을 요청했으니

참 건방지고 불편한 가게다.

불편한 레스토랑 p 070

여기까지가 자영업을 시작하며 느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소회라면, 아래는 ‘천년식향’ 운영방향에 대한 소회다. 일반 적인 고급 다이닝이 아닌, 무려 ‘비건’ 음식에다가,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식당인 만큼 일반적인 식당과는 운영방향이 사뭇다르다. 여기선 음식을 소비하는 고객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환경 아니 지구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고객은 지구를 위해 어느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게 이 식당의 룰이다.

그동안 얼마나 불편하셨어요? 정말 힘드셨죠. 참 죄송합니다.

천년식향은 제로 웨이스트를 추구하여 일회용 물티슈도, 냅킨도 없습니다. 깨져도 괜찮은 돌그릇을 사용합니다. 앞접시는 부득이한 경우에 요청시 바꿔드립니다. 설거지 세제 또한 석유가 아닌 코코넛 베이스의 인체에 무해한 세제를 쓰며, 대부분의 음식 재료는 친환경 또는 못난이 채소입니다. 모든 음식을 맞춤형 수제로 만들기 위해 적은 손님만 모십니다. 외부 음식 반입이 되지 않습니다. 영업시간 전에는 직원복지를 위하여 출입이 불가합니다. 모든 성적 지향을 존중하며 화장실도 남녀 구분 없는 젠더 프리 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올라오기 힘드십니다.

식물성이지만 비건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음식의 시즈닝이 복합적이라 강하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비슷한 재료가 들어간 자극적인 메뉴 세 개 주문을 지양합니다. 빵, 밥, 피클이 메뉴에 없습니다. 내추럴 와인만 와인 리스트에 있습니다. (이하 생략)

불편한 레스토랑 p 070

간혹 TV에서 비건 음식을 본 적이 있다. 육류는 일절 없는게 확실한데, 분명 TV에서 나오는 음식 형태는 ‘스테이크’다. 육류가 아닌 채소로 육류의 질감과 맛을 표현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모르긴 몰라도 몇 배의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다.

딸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지점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주부 나이대 여성들이 가성비만 따지는 모습이었단다. 좋은 재료로 정성들여 요리를 해야 맛있다는 것도, 그것이 얼마나 수고스러운 일인지까지도 몸소 느끼고 있을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같은 주부로서 너무나 씁쓸한 이야기였다. p 040

심지어 천년식향은 유기농 채소를 사용한다. 유기농을 사용하면 금액대는 더 오른다. 요즘 아기를 키우면서, 유기농을 자주 사다보니 ‘유기농’이라는 단어만 붙어도 얼마나 비싸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도 가성비를 따지는 한국인. 참 슬프게도 아기가 먹는 것을 제외하면, 언제나 가성비 위주로 장을 보고 음식을 사먹는다.

조금 생각해보면, 유기농이 왜 비싼지는 답이 나온다. 시중에는 채소 포함 식물을 키우기 위한 여러 비료 및 농약들이 많이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약품들이 환경에 좋은지 생각해보면, 그 답은 NO 다. 농약을 생각해보자. 다년간 농약 살포는 토양을 오염시켰다. 뿐만아니라 꿀벌들을 사라지게 했다.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 생태계는 무너진다. 단순히 꿀벌만 사라지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농약’ 사용에 대한 단적인 예시다.

비건 음식도 그렇다. 비건은 그 속에서도 종류가 나뉘긴 하지만, 뭐 단순하게 육류를 안먹는 사람이라고 치자. 사람들이 먹는 육류는 보통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다. 소, 돼지, 닭 같은 가축들은 대규모 농장에서 키운다. 가축의 양이 많은 만큼 폐기물이나 분뇨가 어마무시하게 나온다. 그에 따른 탄소 배출도 어마무시하다. 뿐만 인가? 가축들을 먹이기 위한 사료를 공급하기 위해, 또 어딘가에서는 많은 양의 물을 끌어다쓰고 농약을 치며 곡식을 키운다.

지금까지 수많은 다큐를 보며 알게된 내용들이다. 어라? 이렇게보니 나도 환경 자체에는 꽤 관심은 많은 편인..것 같기는 하다. 다만 실천이 어려울 뿐.

천년식향의 또 다른 모토인 ‘제로웨이스트’. 이건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해볼수 있고, 어쩌면 누군가는 이미 실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실천하는 장소가 사업장이라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보통의 한국 소비자들은 깨진 접시에 내가 먹을 음식이 나오는 것을 반기지 않을 테니까. 왜? 돈을 낸 만큼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급 식당을 표방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근데 잘 생각해보면, 그 옛날 인류는 지구에 친절한 토기를 사용했다. 지금처럼 지구에 불친절한 플라스틱이나 여러 소재가 짬뽕된 그릇들이 아니라!

천년식향은 깨진 그릇도 사용한다. ‘제로 웨이스트’ 컨셉트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고, 실은 그릇값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가격이 있는 식기를 손님도 깨고 직원도 깬다. 그러나 손님들은 이 나간 그릇을 싫어한다.손 다칠 수 있어서 싫어하나 했는데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깨진 그릇에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이것은 손님이 나를 부르는 첫째 이유이기도 하다. p 090

최근데 시카고의 미슐랭 1스타 다이닝에 갔었다. 그곳의 식기들은 찌그러진 깡통에서부터 돌, 조개껍데기, 일회용 케첩까지 정말 다양했다. 가격도 비싼 미슐랭 3스타부터 가이드까지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떤 누구도 가게의 특별함, 기이함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즐긴다고 할까? 외국의 다이닝 경험이 물론 모범사례는 아니지만, 그 다양성만큼은 존중하고 싶다. p 092

해외 유명한 식당 중에는 제로웨이스트를 시행하는 곳들이 있다. 심지어 미슐랭 스타를 받은 고급 식당이다. 그 식당을 갔던 고객들은 이에 대해 클레임은 커녕,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국내에서 이런 모습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음. 향후 1백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그들과 다른 문화권인 이유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정말 깨끗하게 세척해서 재활용하는게 맞는지에 대한 신뢰도가 없기도 하고.

조금 씁쓸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는 그놈의 돈 때문에(!) 음식가지고도 장난하는 업자들이 워낙 많은 세상이다. 그렇다보니 버려지는 기물들을 깨끗하게 세척해서 재활용한다는 자체를, 그저 돈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돈 아끼려고 그러는거 같은데 세척은 제대로 하기나 할까? 라는 식으로 꼬아서 생각하게 된다. 분명 좋은 취지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게 다 이기적인 일부 업자들 때문에 생겨난 편견이라면 편견이랄까.

​​

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친환경 신기술, 비용 같은 그런 물질적인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마도 미래에는 우리가 기존에 생각했던 ‘아름다움’, ‘불편함’의 정의가 변해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기후위기 대책을 보니 너무 배울 것이 많았다. ‘추우면 겉옷을 입고, 냉방을 하면서 절대 문을 열어놓지 않는다’같은 기본적인 부분부터 실천하려는 자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p 076

이처럼 환경을 고려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순간 귀찮지만 결국 나, 그리고 내가 사는 지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을 믿고 현재의 문제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스스로 불편함을 선택하자! 어쩌면 환경을 생각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창과 방패처럼 각 개인이 직면한 모순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닐까. p 079

천년식향은 비건,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면서 여러 문제점을 마주했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그들의 가치관과 정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마주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들을 읽으면서 생각해봤다.

인간은 보다 편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바다를 메웠고,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았다. 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수많은 교통기관을 만들었다. 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수많은 가축을 키우기 시작했다. 보다 편리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일회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환경오염이 발생했다. 빙하가 녹고, 바다 수온이 오르고, 생태계가 파괴되었다.

인간이 ‘편리한 삶’을 추구하기 시작하자, 환경이 파괴되기 시작한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환경파괴로 인해 제일 큰 피해를 입게 될 대상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다른 동, 식물들도 많은 피해를 입겠지만 말이다. 문득 일전에 읽었던 김상욱 교수의 저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런식으로 환경이 파괴되면, 종국에는 인간의 대멸종을 불러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수차례 대멸종이 있었는데, 대멸종의 대상은 언제나 당시 지구상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현재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인간이다. 인간이 그저 ‘편리함’만을 위해 환경파괴를 지속하면, 그 부메랑은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부메랑은 반환점을 돌았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부메랑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방법 뿐이다.

천년식향은 부메랑의 속도를 늦추기 위한 최전선에 나와있는 것 뿐이다. 비건이나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여, 인간이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하는 걸로 지구 환경에 안정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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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운 역사 첫걸음 - 인물열전 편
이영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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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책들은 대게 그들의 굵직한 업적(과오 포함)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업적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A~Z까지 설명한다. 거기에 더해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조미료처럼 들어간다. 빛나는 업적은 잘했다는 해석과 과오는 못했다는 해석이. 그래서 대다수는 역사적 인물의 굵직한 업적은 눈 감고도 술술 외울정도로 잘 알고 있다. 예컨데 이런식이다. ‘세종대왕=훈민정음/겨레의 스승!’, ‘정조=초계문신제, 장용영설치/ 조선의 르네상스!’ 같은.

그러다보니 이 책도 그런 류의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열었다. 그런데...웬걸?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역사책들은 한 인물에 대해 평면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함과 동시에, 인물에 대한 편향적인 해석도 최대한 지양했다. 문득 저자가 머릿말에 쓴 문장이 떠올랐다.

“나만의 해석을 내리고 또 타인과 그 해석을 공유해 보는 것도 좋은 역사공부가 될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있을 때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

이 역사책은 타인의 역사적 해석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역사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소양을 길러주기 위한 일종의 역사 지침서였다.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것도 맘에 들었지만,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이 책의 구성이다. 뭐랄까, 구성방식이 국사책스럽달까? 물론 요즘 국사책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왠지 국사책스러운 느낌이다. 내 개인적으로도 학창시절 국사책을 제일 좋아했어서 그런가, 괜시리 더 손이간다.


책 구성도 그렇고 내용도 읽기 쉽다보니, 청소년 역사책 추천도서로도 이만한 책이 없지않나 싶다. 우리 딸이 응애 애기만 아니었어도, 같이 읽는 건데. 아쉬울 따름!

보수의 방패와 개혁의 칼을 동시에, 정조


조선 제 22대왕 정조. 우리나라에서 정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극 드라마/영화 주인공(또는 조연)으로도 자주 나왔던 왕이고, 학교 국사시간에서도 무조건(!) 배우는 왕이니까. 어떻게? 영조와 함께 탕평책을 실시하고,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일으켰으며, 지금의 수원을 핫하게(!) 만들어준 수원화성을 조성한 사람이니까.

TMI이긴 한데, 나에게 정조는 아직까지도 이서진인데ㅋㅋㅋㅋㅋㅋ 흐흐흐흐. 요즘 친구들에게 정조는 이준호라며! 아 물론 나도 그 드라마를 잘 보긴 했지만(개인적으로 덕화쌤의 영조 정말 와 진ㅉㅏ 와!!!), 그래도 나에게 정조는 이서진bb.

세손은 자신의 외척인 홍봉한-홍인한 형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의 외할아버지도 모두 노론 사람이었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손은 정순왕후를 자주 찾았고 정순왕후도 차기 국왕이 될 세손과 척을 질 필요가 없었기에 두 사람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홍봉한은 그런 세손을 어느정도 이해했으나 홍인한은 노골적으로 외가를 멀리하는 세손을 탐탁지 않아 했다. 혼자서는 세손을 막을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홍인한은 정후겸과 손을 잡았다. 정후겸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양아들이었다. p 115

정조는 홍인한의 형 홍봉한만은 지켜주었는데,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홍봉한마저 압박했다. 이에 대한 정조의 대응이 충격적이었다. 정조는 김귀주를 파직한 뒤 유배를 보내 버렸다. 김귀주는 평생 복귀하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이런 처분에 큰 배심감을 느꼈다. 정순왕후 쪽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지만 척신정치 청산을 원했던 정조에게는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김귀주 또한 외척 출신으로 척신정치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토사구팽이었다. p 116

1777년(정조 1년) 7월 28일 정조의 집무실이었던 경희궁 존현각에 자객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책을 읽느라 자지 않고 있던 정조는 다행히 지붕 뜯기는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국문결과 이들을 사주핸 배후는 홍상범으로, 바로 홍봉한-홍인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이 일로 정조는 홍봉한을 제외한 홍씨 집안 전체를 풍비박산 냈고,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었지만 은전군에게도 사약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778년 정조가 끝까지 지켜 주었던 외조부 홍봉한까지 눈을 감으면서 마침내 영조 대의 척신들이 모두 사라졌다. p 117

정조의 세손시절 일생이야 많이 알려져있고, 등극 이후의 일생도 잘 알려져있지만, 대중들이 잘 모르는 점이 있으니 바로 정조가 인력활용에 있어서 종종 사용한 ‘토사구팽’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뒤를 이어 까면 안되는 왕 중 하나인 정조다보니, 역사교육이건 대충매체건 정조의 안좋은 면은 왠만하면 부각을 시키지 않는 편이다. 무엇보다 정조가 잘한 업적들만 이야기해도 몇 시간은 훌쩍 지나가니, 굳이 안좋은 면을 부각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정조 업적: 규장각/초계문신제도,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수령권한 강화(및 암행어사 파견빈도 多), 수원화성 조성(인부들에게 임금 지급) 등등. 겁나 많음.

하지만 이 책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조금이긴 하지만 정조의 토사구팽 사례를 포함하여, 정조 후반대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신해박해), 문체반정, 세도정치 시발점까지도 이야기한다.

* 신해박해

1791년(정조 15년) 보수적인 유교적 가치를 지향하던 정조에게 시험대 같은 사건이 터졌다. 오늘날의 충남 금산 진산군에서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며 천주교식으로 신주를 불태워버렸다(진산사건). 진산사건은 조정에도 논의의 대상으로 보고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서양에서 전래된 학문, 즉 ‘서학’이라고 불렀다.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을 처형했고,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를 포함 관련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삭탈관직 되거나 유배령을 받았다. p 124

* 문체반정

정조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지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기 중국에서 대중문학이 크게 유행하고 조선으로까지 넘어왔는데 정조는 대중문학이 성리학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다며 패관잡기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신해박해 사건이 있고 1년 후였던 1792년(정도 16년) 정조는 당시 노론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패관문학의 풍조를 맹비난하고 고전의 문체를 부활시키라며 특명을 내린 ‘문체반정’을 일으켰다. p 125

* 세도정치의 길을 엶

정조는 본인이 없어도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들을 보필할 정치적 동반자를 키우기로 한다. 자신의 정책에 따르는 시파이면서 충분히 아들을 보필할 수 있는 명문가 출신의 인물을 물색한 결과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을 선택했다. 김조순은 정조의 사돈이자 곧 왕이 될 세자의 장인어른이 되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척결한 외척을 자기 손으로 다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해에 정조는 사망했다. 11살의 어린 아들이 외조부인 김조순의 보호 속에 23대 왕 순조로 즉위했다. p 131

물론 이 책이 정조가 시행한 신해박해, 문체반정과 손수 없었던 외척등용 등 어두운 업적을 자세하게 서술한 건 아니다. 예컨데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사상통제 및 학문이 억압되었고, 실학자들이 청에서 배워온 개혁안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웠다거나 이런 내용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정조의 과오도 설명한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내리고 싶다.

동양 평화를 위해 ‘이것’ 해야 한다, 안중근

누군가 당신에게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가 누구인가요? 하고 물어본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떠올리는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안중근’이다. 익히 알려진 그의 행적은 이렇다. 하얼빈에서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동양평화론’을 주장하였으며,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수많은 글을 남겼다는 것. 여기서 조금 더 보태면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이 예정된 아들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 정도가 있겠다. 이러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행적은 공교육에서도 아주 당연하게 배우고, 여러 대중매체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이 책에서도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행적이 실려있다.

여기까지라면 이 책 역시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이야기하는 수 많은 역사책(또는 교과서)와 다를바 없었을 거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책은 거기에 더해 잘 알려지지 않은 안중근의 이야기 및 안중근의 가족 이야기를 포함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바라보려한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특히 안중근 사후 남은 가족이야기들을 읽어보면 말이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에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

북풍은 차가워도 내 피는 끓는구나

강개한 뜻으로 한번 가면 기필코

쥐새끼 같은 도적을 죽이고 말리라

우리 동포여, 우리들이 힘들인 임무를 잊지 마소서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안중근 <장부가>

독립운동 당시 안중근 의사 행적은 워낙 잘 알려져있고, 유명하기도 하니 생략하고. 안중근 의사 사후 남겨진 가족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안중근의 가족들은 모친과 형제, 아내와 아들 딸로 나뉠 수 있다.

* 안중근 모친 조 마리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두 아들 안정근과 안공근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조마리아 여사도 거처를 상하이로 옮겼고 이곳에서 김구의 모친이었던 곽낙원 여사와도 침하게 지냈다.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여러가지 이유로 무너지고 있을 때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조마리아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의 임원이 되어 물질적 후원을 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인 1927년 위암으로 별세하셨다.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 여사의 장례를 치러 주었지만 상하기 교민회 쪽 사람들의 실수로 묘소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현재는 묘소를 찾을 수가 없다. p 147

* 안중근 여동생 안성려

(안중근의)첫째 여동생 안성녀는 오빠의 죽음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구체적인 기록 없이 증언으로만 전해질 뿐인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편과 함께 독립군에게 피복을 제공해주었고, 남편 사후엔 만주로 넘어가 문서 정리 및 자금 조달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어 묘소도 부산에 있다. p 147

* 안중근 남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안중근의 남동생들인 안정근과 안공근은 안중근의 사형집행 후 둘다 러시아군으로 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했다. 첫째 동생 안정근은 김구와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의원이기도 했다. 그는 상하이와 북간도를 오가며 독립전쟁을 격려하고 주도했으며 형 안중근이 존경했던 안창호를 따르기도 했다. (…) 해방 후에도 몸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다가 1949년 상해에서 영면했다. 현재 그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 p 148

둘째 남동생 안공근의 초반 독립운동은 형 안정근과 비슷했따. 한때 김구의 참모라고도 불렸지만 후반기에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에 김구는 안공근을 멀리했다. 무엇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와중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보호해주고 있었지만 상하이 여의치 못하자 안공근에게 안중근의 가족을 부탁했는데, 안공근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으면서 김구와 더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했을 때였던 1939년 안공근은 실종되었고 아직까지도 죽음의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p 148

안중근의 모친과 동생들도 독립운동을 했다. 특히 안정근은 안창호를, 안공근은 김구를 따랐다. 그들의 결말은 아니나 다를까,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비슷하다. 다만 둘째 남동생 안공근의 행보는 조금 미심쩍다. 특히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의혹과 안중근의 아내와 자녀를 챙기지 못한 일들이. 아래에서 서술하겠으나, 안공근이 안중근의 아내와 자려를 챙기지 못한 일은 엄청난 후폭풍으로 돌아온다.

* 안중근 아내 김아려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 여사는 남편의 의거 후 일제의 지난한 취조와 심문을 받았으며 남편 사후에는 헤이룽장성 무링에 숨어 살다가 시댁이 임시정부 활동을 위해 상하이로 갔다는 소식에 그곳으로 갔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안중근의 둘째 동생 안공근이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의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아서 김구와 멀어졌을 때, 그 가족이 바로 김아려 여사와 그녀의 아들들이었다. 이 때문에 김아려 여사는 일본군에게 잡혀가 협박과 감시에 시달려야만 했다. (…)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 여사도 두 자식의 박문사 참배로 인해 위신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중국 상하이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중 두 남매의 귀국 직전인 1946년 사망했다. 김아려 여사의 무덤도 소재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p 148~149

* 안중근 큰 아들 안문생

안중근과 김아려 여사 슬하에는 2남 1녀의 자식이 있었다. 장남 안문생은 아버지 사형 이후 가족이 다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가 얼마 안 있어 1911년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누군가 건네준 과자를 먹고 즉사했으며 그의 나이 겨우 7살이었다. p 148

* 안중근 둘째 아들 안준생과 딸 안현생

안중근의 딸 안현생은 아버지의 의거 후 명동성당에 숨어 살다가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족들과 합류한 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독립운동가 황일청과 혼인했다. (…) 1939년 식민지 조선의 7대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가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을 강제로 귀국시켰다. 그리고 서울 남산에 있던 박문사로 데리고 갔다. 안준생을 협박하여 아버지 대신 사죄하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참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년 후에는 누나 안현생과 남편 황일청도 강제로 귀국하여 역시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참배했다. 안준생과 안현생의 이토 히로부미 참배는 대서특필되었고 김구를 포함해 수많은 조선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배신자라며 두 사람을 맹비난했다. 친일파 낙인이 찍혀버린 안현생의 남편 황일청도 독립운동가들에게 살해됐다. 안준생과 안현생 남매도 독립운동가들의 표적이 되어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숨어 살아야만 헀다. 안준생은 1951년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누나 안현생은 그나마 천주교회의 도움으로 교편을 잡으며 생활하던 중 1959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p 149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아내와 자녀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보호아래 있었다. 하지만 최재형 역시 일본에 의해 죽었고, 최재형 가족들 역시 누군가를 온전히 챙길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실제로 최재형 사후 최재형 가족들 역시 힘들게 살았으니). 뿐만 아니라 당시 어렸던 큰아들 안문생이 독살을 당한 사실도 거처를 옮기는데 힘을 보탰을 것이다. 그렇게 안중근 아내 김아려 여사는 자식들을 대리고 상하이로 넘어갔다. 당시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고, 임시정부 안에는 시댁식구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자신과 어린 자식들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임정 및 안중근의 시댁식구(안중근 둘째 동생 안공근)들은 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든.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박문사를 참배할 수 밖에 없었던 안준생과 안현생. 그런 그들을 맹비난하고, 심지어 친일파라 낙인하며 죽이려 했던 독립운동가들. 나는 당시 독립운동과들과 달리 안준생과 안현생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들을 친일파로 낙인하고, 죽이려 했던(실제로 죽였던) 독립운동가들은 잘못이 없는가 되묻고 싶다. 물론 그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단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안중근의 자녀를 친일파라고 비난하고 죽일 자격이 있는가? 적어도 난 그들에게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안중근의 자녀들을 보호할 책무를 저버린건 다름아닌 당대의 독립운동가였으니.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당시 환경은 살벌하고 엄혹했다. 다시금 말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안중근의 가족들을 보호하지 못한 제일 큰 원인은 다름아닌 안중근의 남동생 안공근이었다. 그래서 김구가 안공근을 멀리했었고.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안공근이 안중근의 자녀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로인해 안공근을 멀리했다면! 김구를 포함하여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나서서 직접 안중근 자녀들을 보호했다면 어땠을까. 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거룩한 희생이라고 찬양하며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키워내면서, 정작 남겨진 안중근 자녀들은 등한시했을까. 아쉬운 대목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역사는 평면적으로 보고 해석하면 안된다. 뿐만아니라 누군가의 해석을 답습해서도 안된다. 역사란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해석하고자 해야, 제대로 된 역사공부라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과정이 있어야 역사공부로 인해, 내 삶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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