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 섬 제주 유산 - 아는 만큼 보이는 제주의 역사·문화·자연 이야기
고진숙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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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제주 역사·문화에 꽤 관심이 많은 편이다. 왜? 제주도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섬 하나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굵직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반도 본토 역사를 축소하면 제주 역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수많은 국내 여행지 중에서도 유독 제주를 아꼈다. 여행지로써 제주를 아낀만큼, 제주여행을 할때마다 ‘답사’를 기반으로 제주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때로는 제주 고대사와 관련된 지역을, 때로는 근·현대사와 관련된 지역을 찾아다니곤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은 고대사부터 중세를 지나 근·현대를 거쳐, 모든 시간대에서 일어났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있기도 했다.

이런 내 여행 기질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답사 개념의 제주여행이다보니 어디를 가든 배경지식이 꼭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시중에 출간된 제주여행 관련 여행책, 여행에세이, 답사기행문, 제주신화 등을 자주 읽었다. 각각의 책들은 모두 영양가가 높았지만, 그만큼 아쉬운점이 있었다. 이런 책들은 기본적으로 제주 여행과 제주 역사, 제주 문화, 제주 풍속 등을 한데 엮어놓은 책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여행’을 중점으로 쓴 여행책인반면, 어떤 책은 제주의 ‘신화’를 담은 역사서, 또 어떤 책은 제주의 근현대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 등등. 오롯이 하나의 카테고리 기준으로 쓰여진 책들이었다. 즉, 내가 원하는 제주 여행지, 역사 유적지, 제주 문화나 풍속 등을 전부 알고자 한다면, 이 모든 책들을 전부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었기도 했고. 앞으로도 더 읽을 예정이기도 했고.

그런데, 존버는 승리한다고 했던가! 이번에 제주 여행과 제주 역사, 제주 문화, 제주 풍속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제주 여행책이 나왔다. 음 여행책이라고 하기엔 교양서 개념이 더 강하니, 제주 여행 에세이라고 해야하나?

감히 말하건데 이 책은 명실공히 제주 백과사전이다.

극찬을 해도 부족하지 않을 이 책의 이름은 『신비 섬 제주 유산』이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는 조금 놀랐었다. 두께가 솔찬히 있었으니까. 두께만 보면 약간 벽돌책 느낌이랄까? 시중에 출간된 일반 제주여행책이나 여행에세이, 제주 신화 역사책 등이랑 비교해봐도 이 책만큼 두께가 두꺼운 책은 흔치 않을 것 같다. 아 그렇다고 범접하기 어려운 책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글 자체가 읽기 쉽게 쓰여져있으니까.

아! 갑자기 떠올랐는데, 이 책의 저자 ‘고진숙’님은 초면이 아니다. 저자의 저서 중 하나인 『제주 4.3을 묻는 십대에게(서해문집)』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렵다면 어려운 현대사, 그것도 현재 진행형인 제주4.3사건을 청소년에게 알려주는 책을 썼다는 건, 저자가 쓰는 글은 읽기 쉬운 글이자, 이해하기 쉬운 글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신비 섬 제주 유산』으로 돌아와서. 저자의 전작들은 대체로 제주와 관련된 책들이다. 그 이유를 단순하게 찾자면 저자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고씨 성을 가진 저자. 제주 고씨. 제주 역사속에 오랜 기간 있었던 탐라국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삼을나를 떠올리면 쉽다. 삼을나는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사람을 말하며, 탐라국을 건국한 시조로 보면 된다. 한마디로 제주 고씨, 제주 양씨, 제주 부씨의 시조들. 저자는 이런 역사를 지닌 제주 고씨다.

이쯤에서 제주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래와 같다. 짧게 요약한다고 요약했지만, 그럼에도 길다면 길다.

제주 역사 타임라인

주호국

3세기 무렵 쓰여진 진수의 『삼국지』에는 제주를 ‘주호’라 불렀다. 탐라국이 1세기 무렵 세워졌으니, ‘주호’는 탐라 초기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탐라국(~통일신라)

‘탐라’라는 이름이 역사 속에서 등장한 건 5세기 무렵 쓰여진 『삼국사기』다. 백제 제후국으로 등장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신라 조공국이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만해도 ‘탐라’는 신라를 괴롭히는 9대 오랑캐 중 하나였다(황룡사 9층 목탑). 탐라가 신라 조공국이 된 후, 신라는 정식으로 ‘탐라’라는 국호를 내린다. 뿐만 아니라 탐라를 지배하는 직위인 ‘성주’와 ‘왕자’도 신라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성주 및 왕자 가문은 제주 고씨가 세습하고 있었다.


고려(~무신정권)

신라 멸망 후 고려가 건국되었다. 탐라는 이 때도 고려에 조공하며 제후국이 되었다. 하지만 1105년 고려 숙종 때 탐라는 고려에 강제 합병되며 ‘탐라군’이 되어버렸다. 고려 행정구역이 되면서, 중앙정부 지방관도 파견되었다. 단, 고려 중앙정부도 탐라의 ‘성주’와 ‘왕자’ 직위를 인정한다. 탐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성주와 왕자에 이어 지방관(고려정부)도 포함되었다. 무신정권 시기 제주 고씨가 세습하던 ‘왕자’ 직위가 제주 양씨에게 넘어간다. 1223년 고려는 ‘탐라’를 ‘제주’라는 이름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후기(~원 간섭기)

1270년 대몽항쟁이 시작되었다. 여몽연합군에 밀린 삼별초군은 밀리고 밀려서 제주에 도착했다. 친원파였던 제주 양씨가 삼별초에 의해 몰락했다. 본토에서 온 문벌귀족 문씨 가문이 제주 고씨 가문과 결혼동맹을 맺고, ‘왕자’직위를 세습하기 시작했다. 원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제주를 원나라 직할시로 만든 뒤 말 목장 등을 직접 관리한다. 1295년 원은 제주를 간접지배방식으로 바꾼다. 제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어느새 고려정부, 성주 및 왕자 가문에 원나라까지 포함되었다. 원나라가 망한 뒤, 고려 말에 일어난 ‘목호의 난’은 원의 철수를 반대한, 친원 목장주들이 일으킨 난이다. 최영장군이 진압했다.


조선(~중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했다. 조선은 제주를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이라는 3개의 행정구역으로 분리했다. 제주 성주 및 왕자 가문도 폐지했다. 1445년 제주에는 중앙정부를 제외한 기득권층이 사라졌다. 기득권층이 사라졌다고 해서 제주민 삶이 나아지진 않았다. 중앙정부는 제주에 토지세를 면제해주는 대신 과도한 진상을 요구했다. 중앙정부가 요구한 대표적인 진상품으로는 말, 귤, 전복등이 있었다. 과도한 진상으로 인해 제주 남자들이 제주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제주에 여성 노동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제주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반토막나자, 인조 때 이르러 제주에 ‘출륙 금지’ 시행령이 반포되었다. 이는 약 200년간 지속된다.


조선(~후기)

출륙금지령이 지속된 상황에서 엄청난 기후변화로 인해 제주사람들이 굶어죽시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사태의 시급성을 인정하고, 제주에서 상업을 허용했다. 이때 나타난 이가 거상 김만덕이다. 뿐만 아니다. 제주는 고려말 부터 유배지 핫플레이스(!)였다. 특히 조선 중기이후부터는 격화된 당쟁으로 수많은 유학자 및 왕족들이 제주로 유배를 왔다. 당시 제주는 여성 노동이 중심인 사회였고, 따라서 제사권과 재산권도 여성이 중심이었다. 본토와는 매우 이질적인 다른 문화를 지닌 섬이였다. 하지만 유배온 유학자들로 인해 유교가 전파되었고, 이는 제주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특히 남아선호사상 등 여성차별을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현대

일제강점기는 제주를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일제로 바뀌었을 뿐, 제주 사람들의 삶이 크게 달라진건 없었다. 탐라, 조선, 고려 모든 시기가 제주민들에겐 수탈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제주 당시 제주 해녀들은 항일운동 및 노동운동을 진행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그렇게 한반도가 해방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겼다. 하지만 제주는 그때도 제대로된 독립을 맞지 못했다. 그들을 기다린건 대다수의 제주인이 학살된, 제주4.3 사건이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월별로 추천하는 제주 여행지와 관련된 역사 및 문화 등을 소개한다. 제주 역사·문화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였것만, 그럼에도 초면인 내용들이 나와서 포스팅에 옮겨본다.



2월: 신들의 교대 기간, ‘신구간’에 이사하는 이유

제주에는 1만 8천 신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그 흔적이 바로 ‘신구간’이다. 일정 기간 동안 신이 이 땅에 없으니, 어떤 일을 해도 동티날일이 없다. 그러니 이사를 간다면 이때 가라. 뭐 이런 느낌이다. 이 내용은 분명 초면인데, 이상하게도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일본사에도 관심이 많은 터라, 일본 역사 문화에도 조금 많이 알고 있는 편인데, 일본에서도 제주 신구간과 비슷한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신구간은 절기상 대한 후 5일째부터 입춘 3일 전까지 7~8일 동안 이어지는 구간이다. 대략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가 신구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신들의 교대 기간이라서 세상에 신들이 없다고 한다. 신구간이란 ‘신의 교대 구간’이라는 말의 줄임말 쯤된다. p 071

자연재해가 많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인간들은 모든 재앙과 생로병사를 신이 주관한다고 믿었다. 신들은 결코 관대하지 않다. 신들의 땅인 제주에선 더욱 신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두려워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사람이 사는 집 또한 온갖 신들의 영역이었다. 만일 잘못해서 인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노하게 되면 동티가 난다. 이 두려운 통이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제주 사람들을 구원한 시나리오가 ‘신구간’이다. p 072

옆 나라 일본은 음력 10월을 ‘신없는 달(칸나즈키)’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일본 팔백만 신들은 음력 10월에 ‘이즈모 타이샤’에 모여서 이른바 회합을 한다. 해서 이즈모 지역을 제외한 일본 전역은 음력 10월을 ‘신없는 달(칸나즈키)’라고 부르는 반면, 팔백만 신이 모이는 이즈모에선 ‘신있는 달(카미아리즈키)’ 라고 부른다.

 

과학적으로 신구간은 증명 가능한 신의 부재기간, 엄밀하게 말하면 동티를 피할 수 있는 시기이다. 제주학 연구자인 제주대학교 윤용택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 평균 기온이 5~20℃ 이상이면 여름, 5℃ 미만이면 겨울이라는 계절분류를 가지고 1971년부터 (…). 분석결과 제주에는 일평균 기온 5℃ 이하인 날이 한 해 8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부르는 신구간과 거의 일치하는 8일이었다. 기온이 5℃ 밑으로 내려가면 세균들이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데 5℃ 이상이면 세균이 활개를 펴 사람들을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게 하고 (…).” - 제주도 ‘신구간’ 풍속에 대한 기후 환경의 이해, 탐라문화 29호

p 073

촘촘하고 단단하고 납작한 초가지붕인 데다 온도와 습도가 다른 지역보다 높기 때문에 제주의 가옥은 온갖 세균과 벌레가 살기 좋은 환경이다. 게다가 집집마다 통시라고 하는 돼지우리 겸 화장실을 두고 살았다. 통시에서 나오는 거름을 쌓아 두었다가 늦가을에 보리 파종을 할 때 썼다. 이렇게 쌓은 낟가리를 ‘눌’이라고 하는데, 제주 사람에겐 이것 또한 두려운 존재라 제주에는 눌굽지신이 살고 있다. 이런 가옥 구조 때문에 제주에선 신구간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던 거이다. 제주 사람들이 ‘신들의 교대 시간’을 알아낸 것은 그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p 076

어떤 신화든 그냥 신화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그 신화속에는 과거의 현재가 들어있다. 예컨데 건국신화가 만들어진 이유는 건국의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다. 제주의 신구간도 그렇다.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 속에서 별 탈 없이(이른바 동티나지않게)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을 보다 빠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우리 조상들은 신화를 만드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4월: 삼별초여,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 (부제: 탐라 왕자?!)

난 개인적으로 삼별초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고려 중앙정부가 원과 강화교섭한 이후의 삼별초 행보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력을 놓지 못한, 무신정권의 잔재라고 본다. 이런 삼별초를 드높게 평가했던게, 과거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 출신 박정희 정권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뭐. 무엇보다 제주도로 간 삼별초가, 제주 사람들에게까지 버림받은 점만 봐도 삼별초는 민초들의 대몽항쟁이 아닌, 권력을 놓지 못한 무신들의 발악이라 볼 수 있다.

김통정 신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애기 업개 이야기는 왜 삼별초가 제주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망했는지 보여준다. 신화에 의하면 고려 정부군 김방경 부대가 항파두리성에 들이닥치자 성문을 닫았는데 그만 애기업개를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난 애기업개는 김방경 부대에게 성문을 열 방법을 알려 주고 김통정의 탈출 통로와 그를 생포할 방법도 알려 준다. 결국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에겐 이런 말이 있다.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 p 139


김통정 신화에 나오는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라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애기업개’는 아기를 업은 사람, 아기를 돌보는 사람, 나이도 어리고 어리숙한 사람 등을 지칭한다. 즉 일반 민초다. 당시 제주에 진을 쳤던 삼별초는 제주 민초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제주에 남아있는 항파두리성 같은 삼별초 진지를 건설할 때 제주 민초들을 이용했으면서, 정작 삼별초는 제주 민초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거다. 원나라는 자신과 강화를 맺은 나라는 대우를 해주지만,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나라는 잔혹하게 짓밟는다는 것을. 고려조정은 원나라와 강화협상을 하면서 일명 〈세조구제(불개토풍)〉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원나라 황실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제주도는 달랐다. 원나라 입장에서 제주도민은 삼별초를 도운 반역세력이다. 그렇게 여몽연합군(고려조정+원나라) 토벌대상에는 삼별초를 비롯해 제주도민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삼별초는 제주도민을 이용만하고 보호하지 않았으니, 과연 삼별초를 대몽항쟁의 상징이라고 부르는게 맞을까?

탐라 왕자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면 탐라국 왕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아는 왕자란 그렇다. 그러나 탐라국에서 왕자는 왕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2인자란 뜻이자 공동 지배자란 뜻이기도 하다. 제주는 보통 고, 양, 부 세개의 성씨가 탐라국을 만들어 다스려 왔다고 했으니 이들이 성주, 왕자 자리를 나눠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보다 복작하다. 확실한 것은 마지막 왕자 가문은 문씨 가문이란 것이다. 그 후손들은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383번지에 탐라 왕자 기념탑을 만들고 제주 입도조인 문착을 비롯해어 탐라국 왕자들을 봉안하였다. p 127

제주에서 성씨를 가진 가문은 고, 양, 부 즉 탐라 건국 씨족을 제외하곤 없었다. 문씨 가문이 제주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성주 가문이 중앙 정부에 줄을 대기 위해 끈질긴 노력 끝아 찾아낸 문벌귀족이었다. 제주에 들어와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입도조라고 하는데, 탐라국 지배 가문 외에 성씨를 가진 첫 번째 입도조가 바로 이들이다. p 139

성주 가문과 왕자 가문은 고려, 원, 삼별초가 제주를 무대로 벌인 세계사의 격동 속에서 아슬아슬 줄타기에 성공했다. 원, 고려, 탐라국 성주, 왕자까지 가세한 층층시하 핍박으로 탐라국 사람들은 다시 고통속에 빠졌다. p 140

삼별초와는 별건으로 ‘탐라왕자’ 이야기는 오우, 놀라운 내용이다. 제주에 탐라왕자 묘소가 있다는 건 알았으나, 진짜 탐라국 왕자(대충 고려 병합 전) 묘소라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탐라왕자의 ‘왕자’는 일반적인 개념의 왕자가 아니었다. 무려 지배계급 직위였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 인정되었던....! 이야 이거 참. 우와. 심지어 세습된 직위였다는 거에 놀랐고, 세습한 성씨가 삼을나를 시조로 둔 고씨, 양씨에 이어 바다 건너 들어온 문벌귀족인 문씨까지 이어질 줄이야. 진짜 제주 역사는 새롭고 짜릿해★




4월: 백비는 일어날 수 있을까_제주4.3

제주의 4월은 더없이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믿기지 않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4월에는 동백꽃이 진다. 그 모습이 마치 그날 하염없이 쓰러져 간 제주 사람을 닮았다 해서 제주 4.3의 상징 꽃이다. 당시 학살이 벌어졌던 장소로는 절벽, 폭포, 계곡, 바닷가나 움푹한 웅덩이가 많다. 시체가 쌓여도 치우지 않고 대량 학살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시체들이 바다에 버려졌다. 그 시기 제주 사람들은 갈치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p 162

제주 4.3의 시작은 미군정 시대였지만 정작 대학살의 시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였으니 놀랍게도 제헌헌법이 제정된 이후였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한 권리’가 어떤 이유로도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을 성문화한 것이다. 오로지 법류에 의해서만 이 권리를 제한할 수 있으며, 개인은 재팬받을 권리와 변호사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은 제주 사람을 재판없이 처형했다. 그리고 학살에 살아남아 재판에 넘겨진 사람들에 대한 절차 역시 법률을 따르지 않았다. 어떻게 군인이 국민을 향해 ‘초토화 작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국가가 국민을 단지 무장대와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피난처를 구해 주지도 않고 삶의 터전을 불태워 없애고, 젊은 사람이란 이유로 처형한단 말인가. 어떻게 국가가 어린아이와 노인, 임산부 등 노약자와 비무장 민간인을 단지 무서워서 숨었단 이유로 처형한단 말인가. 헌법을 위반한 것은 국가였다. p 169

평화공원에 있는 ‘비설’이라는 모녀상은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두 살배기 딸을 안고 눈 덮인 거친오름 쪽으로 피신 도중 희생당해 눈 더미 속에서 발견된 엄마와 아이를 기리고자 설치된 조형물이다. 차디란 겨울, 더 이상 오를 데도 없이 산으로 올라야 하는 절박함,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아이를 안은 엄마의 절망이 오롯이 느껴진다. 엄마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준단 말인가. 그저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게 고작이었으리라. p 172

 

제주 4.3 사건 관련해서 많은 포스팅을 해왔으니, 여기서는 가타부타 하지 않기로.




몽골이 남긴 제주 유산

원 간섭기 당시 고려와 원은 서로의 풍습이나 문화 등 여러방면으로 교류를 했다. 그 흔적이 알게모르게 우리 일상에 많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제주는 더했다. 원 간섭기 당시 제주는 본토와는 달리 원나라 직할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다보니, 제주는 본토보다 원나라의 영향력이 더 강했고, 강했던 만큼 원나라의 풍습이 제주어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제주에 남아있는 몽고의 흔적은 대부분 초면이라, 여기도 정말 놀랍고 새롭고 짜릿하고★

메밀의 원산지는 타타르족의 주 무대였던 동아시아 북부 바이칼호, 만주, 아무르 강변 일대에 걸친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그래서 메밀은 타타르 메밀이라 불리기도 하고 씨앗의 형태가 삼각형이라 삼각형쌀이라 불리기도 한다. 메밀 원산지에서 아주 먼 제주로 메밀 씨앗을 들고 온 이들은 몽골인들이다. 물론 메밀만이 아니라 한국에 가장 많은 외래 식물이 들어온 때가 원 간섭기였다. 전해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몽골인들이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이후 탐라 사람들의 기질을 억누르기 위해 메밀농사를 장려헀다고 한다. p 199

비록 몽골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메밀을 전했든 간에 제주 사람들에게 메밀은 아주 고마운 음식이다. 쌀농사가 불가능한 제주에서는 보리농사가 흉년이면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런 제주 사람들을 구한 것이 메밀이다. 메밀은 아무렇게나 둬도 잘 자라고 특별히 거름이 필요하지 않으며 병충해에도 강하고 생육기간도 석 달이면 충분하다. 가을에 수확한 메밀로 보릿고개를 넘겼다. p 200

메밀음식 말고도 제주 음식 문화에서 몽골의 유산은 꽤 많다. 제사 음식중에 상애떡이란 것이 있는데,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서 찐 빵이다. 상애떡은 쌍화점이란 고려가요에서 나오는 상화라는 중국식 만두가 제주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진 떡이다. (…) 제주의 음료 중에 쉰다리라는 것이 있다. 먹다 남은 밥을 발효시켜 먹는 음료로 몽골의 타라크에서 나왔다. 수애(순대)는 몽골 군인들의 야전식량인 게데스에서 나온 것이다. 몸국과 같은 탕도 슐랭이라고 하는 몽골 음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p 202

특히 제주 조랑말 역사는 정말 와우. 결과적으로 제주 토종말은 원간섭기 이후로 사라졌고, 현재 남아있는 제주말은 제주 토종마+원나라 말이 교잡종이라는게 참. 이런 제주 조랑말이 조선시대에는 주요 진상품이라, 제주민들 수탈하는 또 하나의 족쇄였다는 사실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확실한 역사 기록으로는 1073년과 1258년 탐라에서 고려 정부에 제주마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원나라가 말 목장을 제주에 만들면서 몽골의 말이 들어왔지만 그 말은 엄격하게 관리되었기 때문에 제주 말과 섞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호의 난으로 제주의 말 목장은 사실상 방치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목호의 난이 벌어진 지 불과 50년도 못되어서 말을 관리하는 기관인 병조에서 “제주 목장의 말이 날로 키가 짧고 작아진다”고 우는 소리를 한다. (…) 목호들이 전부 사라진 후 말들은 방치되었고, 제주 전통 말과 섞이면서 유전적으로도 다른 말이 나타났다. 이 말이 조랑말이다. p 329

조랑말은 ‘조르모르’라고 하는 몽골말에서 나온 것인데, 조르모르는 기동력을 얻기 위해 어릴 때부터 말의 다리를 묶어서 훈련시키는 기법이다. 제주 조랑말은 이런 흔적을 갖고 있지만 훨씬 왜소하다. 제주 전통 말은 과하마 또는 토마라고 하였다. 과하마란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고구려에서 유민이 들어오면서 같이 온 것을 보인다. 이 말이 제주에서 몽골 말과 교잡이 이뤄지면서 조선 초 조랑말로 새롭게 등장한 듯하다. p 329

말은 제일 먼저 제주에서 선정된 진상품이었다. 매해 200필은 기본으로 바쳐야 했고 임금이 탈 말도 20필 씩 매해 바쳐야 했다. 무슨 제사는 그리 많은지 그때에 맞춰 바쳐야 했고, 혹시 날이 날지 모르니 여분의 말도 있어야 했다. (…) 제주 말 목장의 총 책임자는 목사와 그 아래 층층시하 관리들이었지만 실제 말을 기르는 사람은 목자였다. 이 목자를 제주에선 테우리라고 한다. 테우리는 목자란 뜻의 몽골어이다. 테우리는 나라에서 정한 책임을 벗을 수가 없다. 벗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역할을 넘겨야 한다. 하지만 워낙 일이 고되어서 제주에서도 가장 천한 일로 여겨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p 332

 

고렴(조문), 고적(부조떡), 구덕(바구니), 복닥(껍질, 모자), 허벅(동이), 호랑(처마), 술(줄), 살래(찬장), 눌(낟가리), 촐래(반찬) 같은 제주어는 몽골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안채와 바깥채를 제주에서는 안거리, 밖거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쓰이는 ‘거리’도 몽골 전통 천막인 ‘게르’에서 빌려 온 말이다. ‘웡이자랑’도 몽골의 자장가였다고 한다. 몽골어 ‘모르’는 제주어 ‘ ’로 정착된다. ‘혼저’도 ‘빨리’라는 몽골어에서 유래했고, 아기, 마누라 등도 몽골어라고 한다. p 374

정말 제주민들은 섬 내 지배계급에 치이고, 본토 사람들에 치이고, 외세에 치이고. 다시금 느끼지만 제주민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탈의 역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모진 수탈과 핍박을 견뎌가며, 제주 역사·문화를 지켜온 제주도민들이다. 물론 출륙금지령이라는 대외적인 요소로 인해 제주를 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떤 이유로든, 자의든 타의든 본토와는 다른 제주 역사·문화를 만들어온 것은 제주도민들이며다. 본토와는 다른 문화로 제주는 본토 사람들에게 여행지로 각광받게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지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제주에 외지인이 많이 유입되면서, 제주의 역사·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다. 지자체에서도 꽤 오랜기간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외지인 유입에 혈안을 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요즘 제주 곳곳에서 그들의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불씨가 보인다는 점이랄까? 부디 제주가 제주답게 있을 수 있기를.

올 겨울에는...뿡뿡이와 동백꽃보러 제주여행에 도전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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