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식 인문학 - 음식 다양성의 한식, 과학으로 노래하다
권대영 지음 / 헬스레터 / 2019년 10월
평점 :
‘고추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 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심지어 우리 신랑도 이 사실을 정설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이게 정말이야? 아닌거 같은데?’ 싶을 정도로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에는 여러 모순이 보인다.
예컨데 우리나라에는 고추를 메인으로 한 음식들이 있는 반면, 일본에는 고추를 메인으로 한 음식이 없다. 무엇보다 고추가 임진왜란 당시 전래되었다는 것 치고는, 한반도에서 대중화된 시기가 너무 빠르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전래되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서 발효식품인 고추장이 되고, 갈아서 사용하는 고추가루가 되고, 고추가루를 이용해 만든 발효식품 김치가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외국에서 들어온 식자재가 그 나라의 환경에 맞춰 적응하고, 토착화되고, 전국적으로 퍼지고, 그로 인한 음식이 만들어지는데는 지난한 시간이 걸리니까. 그걸 백년도 안되서 해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점을 기준으로 고추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고추를 이용하여 만든 수많은 한식들 역사까지 축소시켰다. 고추를 즐겨먹는 한국인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한식을 깎아내리려는 중국과 일본에선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한식 역사 왜곡에 참전한다. 중국은 파오차이, 일본은 기무치 같은 배추 짱아찌들을 들먹이며, 자신들이 김치 원조라고 나서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고추가 일본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에는 의문점들이 많았다. 일본에는 고추로 만든 음식이 없는데 임진왜란 때 무슨 이유로 우리나라에 갖고 들어왔을까? 유럽에서 중남미 고추인 아히가 들어왔다면, 그 당시 함께 들어왔다는 토마토, 타바코처럼 적어도 ‘아히’ 아니면 ‘피망’같은 유럽식 이름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순 우리말 ‘고추’만 남아있고 심지어 ‘당초’, ‘번초’, ‘만초’ 등 순전히 중국식 이름이 붙어졌을까? 고추는 일본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도 없고, 따로 용도가 없을 때인데도 어떻게 전국으로 퍼졌을까? 어떻게 고추가 들어오자마자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만들어 질 수 있었을까? 식품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한’ 가설, 즉 있을 수 없는 주장이다. 인문학자라도 조금만 더 세심하게 바라보면 합리적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다. p 051
소위 지식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에서 발견된 모순을 검증하지 않았다. 그저 ‘관심’에 받는 것에 기뻐했다. 대중매체도 여기에 합류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식품과학자가 나타났다. 바로 이 역사책의 저자다.
본투비 순수 자연과학자이자 식품과학자인 저자는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검증해서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박살내는데 앞장섰다. 한국학 박사 출신인 배우자 도움을 받아 오롯이 1차 원문(고문서 등)을 기준으로 연구했고, 본인 전공인 자연과학을 십분 활용했다. 무엇보다 저자는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 출신이다. 태조 이성계도 그 맛에 반해 진상하라고 했다는 ‘순창 고추장’을 만드는 그 순창이다. 태조 이성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 조선을 건국했던 사람이다.
결정적으로 1990년 일본을 방문하였을 당시, 일본 《식품원료학》이라는 책에서 ‘고추는 조선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가지고 들어왔다’는 내용을 접하고 나서 고추의 일본 전래설에 문제가 있다는 과학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고추의 전래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였다. p 052
결정적으로 저자가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파헤치기 시작한 또 다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고추가 전래된 시점을 확인하고 나서다.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고추가 전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고추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래된 역사를 파헤치는 건 이 책의 백미다. 덧붙여 고추로 이용한 한식의 역사를 비롯하여, 과거 한자 사대주의자들로 인해 왜곡되어버린 한식의 역사도 알려준다. 순 우리말인 닭도리탕이 일본어 잔재라는 이상한 논리를 앞세우며, ‘닭볶음탕’이라고 창씨개명한건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음식 이름을 지을 때 음식의 주재료, 요리방법, 종류를 의미하는 말을 붙여서 이름을 지었다. 닭을 고아서 만든 탕은 ‘닭곰탕’, 김치를 넣어서 끓인 찌개는 ‘김치찌개’, 닭을 기름에 볶으면 ‘닭볶음’, 닭을 찌면 ‘닭찜’, 닭을 도리쳐서 만든 탕은 ‘닭도리탕’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놈의 한자 사대주의자들이 우리말 ‘도리치다’는 생각치 않고, 고스톱의 ‘고도리’만 생각하며 ‘닭도리탕’을 일본어 잔재라고 몰아세웠다. 그런 한자 사대주의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도리치다’라는 말은 칼 등으로 돌려가며 거칠게 쳐내는 요리 방법이란 걸.
요즘은 한자 사대주의를 넘어 영어 사대주의가 기승이다. 해외에서 소개하는 한식 이름을 보면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냥 한식 명 그대로 영어로 쓰면 될껄, 굳이굳이 한식을 영어로 번역하는 정성을 들이니 외국인들이 ‘피쉬케이크’라는 단어를 보고 기겁을 하지. 심지어는 외국 요리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다. 김치를 소개할 때 중국 배추요리인 파오차이를 사용하기도, 일본 배추 요리인 기무치를 사용하기도 한다. 청국장은? 코리아 낫토라고 소개한다. 두부는? 일본 발음인 토후로 소개한다. 그저 웃을뿐!
고추 역사왜곡! 고추는 임진왜란 전래설
‘고추 일본 유래설’이 시작된 시기는 1980년대 들어서다. 한양대 이성우 교수가 1984년 《고추의 역사와 품질평가에 관한 연구》에서 ‘1492년 콜롬버스에 의해 고추가 서인도 제도에서 포르투갈로 들어갔다가 100년 동안 인도 등을 거쳐 일본을 통하여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위 ‘고추의 일본 도입설’을 주장하면서다. (…) 이러한 주장이 기존 관념을 깨는 현대의 학문으로 인식되어 국민적 반향을 일으킨 것인지는 모르겠다. 가장 의아스러운 점은 음식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 전문가들이 이런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자들도 이러한 주장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방치한 셈이다. ‘고추 일본 도입설’은 여러 가지 반증의 문헌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나 후학들을 통해 어떤 결정적인 근거도 확보되지 못한 채 철통같은 방어 논리로 이후 다른 문헌과 책을 통해, 반복 또는 확대 재생산 되었고 어느새 정설로 굳어져 버렸다. p 085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은 명문대 식품사학과 교수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교수 역시 나름대로 검증과 연구를 했겠지만, 그 검증이 과학적인 검증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게 아닐까. 더 아쉬운건 이 논문을 다시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가공 재생산하는 일부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그들로 인해 한식의 역사가 대폭 축소 및 왜곡되었으니까.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표적인 근거로 드는 것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남만초에는 독이 있다. 일본에서 건너 온 것이라 그 이름을 왜개자라고 한다. 소주에 타서 팔기도 하는데 이것을 마시다 죽는 자가 다수 있었다.’
이 고서에 등장하는 남만초에 대한 설명이 바로 고추가 일본을 통해 건너 온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봉유설에 적힌 남만초는 말 그대로 남만초다. 품종학적으로 지금의 태국, 인도네시아 등 당시 중국에서 보면 남쪽 지방 오랑캐들이 먹었던 고추로, 우리 고추와는 종과 속이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남만초가 언급된 글의 맥락을 살펴보자. 남만초를 술에 타 먹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평소 술에 고추를 타 먹는 문화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대로 해석하면 남만초가 얼마나 매운지, 독성이나 효능에 대해 잘 모르고 평소 우리 고추처럼 술에 타 먹듯이 했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이다. p 080
옛 문헌을 보면 조선시대 초기에 김종서가 북벌 당시 고뿔이 나거나 맹추위를 견뎌야 할 때면 우리 고추를 술에 타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으로 보면 우리 고추와 다른 남만초를 우리 고추처럼 술에 타 먹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p 122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내세운 조선시대 저서 《지봉유설》, 《오주연문장전산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근거는 파괴되었다. 앞뒤 맥락없이 근거라고 내세웠다가, 역풍을 맞게된거다. 심지어 내용을 찬찬히 살펴본 결과 우리나라에도 이미 고추가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증거가 되었다.
고추가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은 전혀 없다. 이들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들어 일본 전래설을 뒷받침하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그 문헌에 우리 고추가 있었다는 문구가 발견되어 역풍을 맞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고추의 종류인 번초 또는 남만초가 들어왔으며, 담배, 토마토도 임진왜란 전후에 들어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 눈 여겨 볼 것은 이 책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매운 번초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바로 뒤에 ‘아초’라고 하여 우리나라 고추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명한 고추장이라고 한다. 순창군 천안군에 나오는데, 한 나라에 이름이 났다. - 중략 - 요사이 ‘우리 고추’는 품질이 좋아 왜관에 팔면 심히 이익이 난다.’ p 082
고추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 시기 많은 문헌에 이미 고추장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식료찬요(1460년)》, 《향약집성방(1433년)》, 《의방유취(1477년)》 등에서 다양하게 발견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비위나 위가 약해 몸이 허해질 때, 닭이나 꿩을 도리쳐서 고추장을 넣고 끓여 먹거나 찍어 먹으면 밥맛이나 얼굴색이 좋아진다’고 하여 주로 식치의 개념으로 많이 쓰인 음식으로 소개되었다. p 091
고추가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은 꽤 많이 발견된다.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온건 절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계속 재배해왔던 우리의 두가지 전통 고추를 유전자 분석한 결과, 이미 47만 년 전에 분화된 두 품종으로 밝혀졌다. 하나는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는 데 쓰이는 우리 고추이고, 다른 하나는 약간 매운 고추로 국과 탕에 맛을 내는 고추, 그러니까 청양고추의 원조로 보면 된다. 지금도 일부 지방에는 좀 매운 고추를 ‘땡초’라고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청양고추가 최근에 남만초인 태국 고추와 우리 고추의 교잡종이라고 생각하는데, 식물유전학자로 세계적인 전문가인 최도일 교수는 청양고추의 뿌리는 우리나라 약간 매운 고추를 근간으로 종자 개령한 것이라고 한다. p 103
심지어 고추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니, 이 땅에 이미 우리나라 고추가 자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콜롬버스가 들여온 고추와 우리 고추는 품종이 다르다. 완전 다르다. 동남아 고추랑 우리나라 고추랑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있다면 그사람 시각과 미각, 후각에 문제가 있는 듯.
아주 박박 우겨서 콜롬버스가 가지고 온 고추가 포르투갈을 지나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치자. 당시 콜롬버스 고추가 우리가 먹는 고추로, 진화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다. 100~200년이라는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 본디 생물이란 n만년, n천년이라는 오랜 기간, 아주 천천히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며 진화한다. 본투비 문과인 나도 이건 아는데,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은 왜 안해봤나몰라.
또 다른 한식 역사 왜곡: 김치, 고추장, 비빔밥, 떡볶이
고추의 역사를 왜곡했으니, 그에 따른 부차적인 한식 역사 왜곡도 당연이 줄을 이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중국과 일본이 김치를 자기네거라고 우기지!
이 잘못된 설을 무리하게 합리화하고 꿰맞추려 하다 보니 임진왜란 이전 옛 문헌에 나오는 모든 한차 초(椒)를 일률적으로 후추, 산초 등으로 번역하고, 임진왜란 전의 문헌에 나오는 김치는 모두 백김치라 주장하고, ‘순창 고추장’도 흑색의 후추고추장이라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p 085
김치를 장아찌와 짠지의 후손으로 폄하나는 이들도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떤 학자는 김치는 원래 배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로 만들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리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김치였다는 잘못된 논리에 빠져, 근거 없이 김치의 원조가 일본의 츠케모노, 중국의 파오차이라고 한다 보니, 김치의 원조가 장아찌와 짠지라는 말을 무리하게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다. p 160
김치와 고추장은 엄연한 과학이다. 발효과학이라고 들어는 봤나? 그것도 아주 고급 발효과학이다.
인류는 발효기술을 터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음식을 오래 보관하면 기본적으로 음식은 부패한다. 부패한 음식을 먹으면 복통을 일으키거나, 심하면 사망한다. 그렇게 몇 천년 간 인류는 부패한 음식을 먹고 아프거나 죽었다. 하지만 어떤 부패한 음식은 오히려 맛이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친 깨달음으로 먹어도 되는 부패한 음식을 가려낼 수 있게되었고, 심지어 손수 부패한 음식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게 ‘발효’라는 과학적인 기술이란건 나중에야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게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나 고추장, 된장, 삭힌 홍어 등이다.
고급 발효과학이 들어간 김치는 일본 장아찌나 중국 파오차이와는 그 결이 다르다. 아주 다르다. 걔들은 발효식품이 아니라, 절임식품이다. 장아찌와 짠지 같은 절임식품은 미생물의 성장과 부패를 막기 위해 수분활성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소금을 쓰거나, 식초를 사용한다. 즉 부패를 막아야 먹을 수 있고, 부패하면 못 먹는다. 미생물의 성장을 도와 발효시키는 발효식품과는 그 원리가 다르다. 태생부터 완전 다르다.
아, 이 책에 따르면 또 다른 소위 지식인들이 주장하길 우리나라엔 결구배추가 없어서, 최초 김치는 무김치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결구배추는 호배추(중국배추)라고 해서, 결구배추는 중국에서 들어온지 1백여년 밖에 안되었다는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최초 한반도에는 결구배추가 없었고, 기록에 나오는 모든 김치는 무김치라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저자는 또 한번 강력한 역공을 펼쳤다. 《고려사절요》, 《삼국사기》에 이미 찢어먹는 통배추 김치 비유 기록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배추와 배추김치를 나타내는 표현은 우리의 오래된 고문헌에 승(㮱), 추승, 승저, 승제, 침승제 등으로 다양하게 나온다.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 남아있는 기록물만해도 서거정의 《사가집(1488년)》, 김창업 《연행일기(1712년)》 등에 배추김치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나온다. 그런데도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왔다고? 고추가 없는 배추김치는 있을 수 없으니, 임진왜란 이전에는 무로 만든 김치만 먹었다고? 아유, ㅈ랄도 이정도면 정성이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배추 말고도, 이미 옛날부터 우리나라 전통배추가 있었다. 조금은 작지만, 알찬 조선배추가.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도입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비빔밥이란 기록이 1890년경 쓰인 《시의전서》에 처음 등장한다며, 그 이전 비빔밥의 기록이나 역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 역사를 축소한다. 고추장의 역사를 짧게 할 수 밖에 없으니 고추장을 이용한 비빔밥의 역사도 짧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당연한 논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p 113
일반적으로 음식이 옛 문헌에 기록으로 등장한다면, 그로부터 수 백 년전, 수천 년 전에 이미 백성들이 먹고 있던 음식일 가능성이 높다. 《시의전서》에 ‘비빔밥’이 처음 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를 100년으로 확언할 수는 없다. 당연히 비빔밥은 이미 16세기 말엽 박동량의 《기재잡기》에 ‘혼돈반’으로, 1724년 권상일이 쓴 《청대일기》에 ‘골동반’으로 한자로 쓴 명칭이 수록되어 있다. 《명물기략》에서는 소리를 빌려와 ‘부비반’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시의전서》보다 300여 년 앞선 문헌 기록이다. 비빔밥의 한글 명칭도 1819년 《몽유편》에 ‘브뷔음’으로 한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의전서》보다 100여 년 전에 비빔밥을 한글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p 114
고추 전래시기를 축소하니 각종 한식의 역사가 축소되고 왜곡되었다. 비빔밥 역사까지 왜곡되었을 줄 누가 알았나. 뜬금없이 왠 비빔밥이냐고 할 수 있다. 비빔밥을 잘 생각해보자. 비빔밥의 백미는 고추장이다!
간장으로 만든 떡볶이는 궁중떡볶이고 고추장으로 만든 떡볶이는 일반 떡볶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고추로 만든 음식은 서민음식이고, 고추장을 넣지 않은 음식은 궁중 음식이라는 것도 잘못됐다. 꼭 집어서 말하자면, 고추나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궁중 음식’이 아니라 ‘제사 음식’이었다. (…) 일반사람이나 군왕이 평소에 먹는 떡볶이는 오늘날의 떡볶이와 같이 고추장 등으로 양념한 떡볶이였다. 《승정원일기》 등에 떡볶이가 나오는 걸로 보아 떡복이가 왕이 좋아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대부가의 남인 이익의 문집 《성호집》에도 떡볶이 기록이 있어, 사대부가에서도 떡볶이는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식의식감》이나 《규곤요람》 등을 보면 서민들은 고추장을 중심으로 양념을 한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궁중이나 사대부가들은 전복, 해삼, 쇠고기, 돼지고기 등 서민들이 구하기 어려운 귀한 식재료를 사용한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p 118
이제는 떡볶이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빨간 고추장 떡볶이도 옛날부터 즐겨 먹었다는거. 이 내용이 생소한 당신, 당신도 한식 역사 왜곡에 세뇌된 사람이다. 이 책을 읽기전 까지는 나역시 그랬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중에 파는 떡볶이가 대중화 된건 1960년대 이후다. 밀가루 수입과 기계를 이용한 밀떡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다.
고추 일본 전래설, 부침개와 주파수의 상관관계 외에도 일본 말이라고는 고스톱 판의 ‘고도리’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닭도리탕이 일본 말이다’라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는가 하면, 여기에 몇몇 언어학자까지 가세해 어느순간 ‘닭도리탕’이 ‘닭볶음탕’으로 뒤바끼기도 했다. 일부 전문가들의 그릇된 연구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가는 잘못된 식품 정보에 의해 우리 음식 역사가 왜곡되고 때로는 누군가 선의의 피해를 겪기도 한다. p 061
한식은 자랑스런 우리 음식이다. 빛내지는 못할망정, 제발 까내리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