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쉬운 역사 첫걸음 - 인물열전 편
이영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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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책들은 대게 그들의 굵직한 업적(과오 포함)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업적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A~Z까지 설명한다. 거기에 더해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조미료처럼 들어간다. 빛나는 업적은 잘했다는 해석과 과오는 못했다는 해석이. 그래서 대다수는 역사적 인물의 굵직한 업적은 눈 감고도 술술 외울정도로 잘 알고 있다. 예컨데 이런식이다. ‘세종대왕=훈민정음/겨레의 스승!’, ‘정조=초계문신제, 장용영설치/ 조선의 르네상스!’ 같은.

그러다보니 이 책도 그런 류의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열었다. 그런데...웬걸?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역사책들은 한 인물에 대해 평면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함과 동시에, 인물에 대한 편향적인 해석도 최대한 지양했다. 문득 저자가 머릿말에 쓴 문장이 떠올랐다.

“나만의 해석을 내리고 또 타인과 그 해석을 공유해 보는 것도 좋은 역사공부가 될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있을 때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

이 역사책은 타인의 역사적 해석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역사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소양을 길러주기 위한 일종의 역사 지침서였다.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것도 맘에 들었지만,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이 책의 구성이다. 뭐랄까, 구성방식이 국사책스럽달까? 물론 요즘 국사책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왠지 국사책스러운 느낌이다. 내 개인적으로도 학창시절 국사책을 제일 좋아했어서 그런가, 괜시리 더 손이간다.


책 구성도 그렇고 내용도 읽기 쉽다보니, 청소년 역사책 추천도서로도 이만한 책이 없지않나 싶다. 우리 딸이 응애 애기만 아니었어도, 같이 읽는 건데. 아쉬울 따름!

보수의 방패와 개혁의 칼을 동시에, 정조


조선 제 22대왕 정조. 우리나라에서 정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극 드라마/영화 주인공(또는 조연)으로도 자주 나왔던 왕이고, 학교 국사시간에서도 무조건(!) 배우는 왕이니까. 어떻게? 영조와 함께 탕평책을 실시하고,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일으켰으며, 지금의 수원을 핫하게(!) 만들어준 수원화성을 조성한 사람이니까.

TMI이긴 한데, 나에게 정조는 아직까지도 이서진인데ㅋㅋㅋㅋㅋㅋ 흐흐흐흐. 요즘 친구들에게 정조는 이준호라며! 아 물론 나도 그 드라마를 잘 보긴 했지만(개인적으로 덕화쌤의 영조 정말 와 진ㅉㅏ 와!!!), 그래도 나에게 정조는 이서진bb.

세손은 자신의 외척인 홍봉한-홍인한 형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의 외할아버지도 모두 노론 사람이었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손은 정순왕후를 자주 찾았고 정순왕후도 차기 국왕이 될 세손과 척을 질 필요가 없었기에 두 사람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홍봉한은 그런 세손을 어느정도 이해했으나 홍인한은 노골적으로 외가를 멀리하는 세손을 탐탁지 않아 했다. 혼자서는 세손을 막을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홍인한은 정후겸과 손을 잡았다. 정후겸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양아들이었다. p 115

정조는 홍인한의 형 홍봉한만은 지켜주었는데,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홍봉한마저 압박했다. 이에 대한 정조의 대응이 충격적이었다. 정조는 김귀주를 파직한 뒤 유배를 보내 버렸다. 김귀주는 평생 복귀하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이런 처분에 큰 배심감을 느꼈다. 정순왕후 쪽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지만 척신정치 청산을 원했던 정조에게는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김귀주 또한 외척 출신으로 척신정치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토사구팽이었다. p 116

1777년(정조 1년) 7월 28일 정조의 집무실이었던 경희궁 존현각에 자객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책을 읽느라 자지 않고 있던 정조는 다행히 지붕 뜯기는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국문결과 이들을 사주핸 배후는 홍상범으로, 바로 홍봉한-홍인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이 일로 정조는 홍봉한을 제외한 홍씨 집안 전체를 풍비박산 냈고,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었지만 은전군에게도 사약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778년 정조가 끝까지 지켜 주었던 외조부 홍봉한까지 눈을 감으면서 마침내 영조 대의 척신들이 모두 사라졌다. p 117

정조의 세손시절 일생이야 많이 알려져있고, 등극 이후의 일생도 잘 알려져있지만, 대중들이 잘 모르는 점이 있으니 바로 정조가 인력활용에 있어서 종종 사용한 ‘토사구팽’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뒤를 이어 까면 안되는 왕 중 하나인 정조다보니, 역사교육이건 대충매체건 정조의 안좋은 면은 왠만하면 부각을 시키지 않는 편이다. 무엇보다 정조가 잘한 업적들만 이야기해도 몇 시간은 훌쩍 지나가니, 굳이 안좋은 면을 부각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정조 업적: 규장각/초계문신제도,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수령권한 강화(및 암행어사 파견빈도 多), 수원화성 조성(인부들에게 임금 지급) 등등. 겁나 많음.

하지만 이 책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조금이긴 하지만 정조의 토사구팽 사례를 포함하여, 정조 후반대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신해박해), 문체반정, 세도정치 시발점까지도 이야기한다.

* 신해박해

1791년(정조 15년) 보수적인 유교적 가치를 지향하던 정조에게 시험대 같은 사건이 터졌다. 오늘날의 충남 금산 진산군에서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며 천주교식으로 신주를 불태워버렸다(진산사건). 진산사건은 조정에도 논의의 대상으로 보고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서양에서 전래된 학문, 즉 ‘서학’이라고 불렀다.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을 처형했고,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를 포함 관련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삭탈관직 되거나 유배령을 받았다. p 124

* 문체반정

정조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지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기 중국에서 대중문학이 크게 유행하고 조선으로까지 넘어왔는데 정조는 대중문학이 성리학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다며 패관잡기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신해박해 사건이 있고 1년 후였던 1792년(정도 16년) 정조는 당시 노론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패관문학의 풍조를 맹비난하고 고전의 문체를 부활시키라며 특명을 내린 ‘문체반정’을 일으켰다. p 125

* 세도정치의 길을 엶

정조는 본인이 없어도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들을 보필할 정치적 동반자를 키우기로 한다. 자신의 정책에 따르는 시파이면서 충분히 아들을 보필할 수 있는 명문가 출신의 인물을 물색한 결과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을 선택했다. 김조순은 정조의 사돈이자 곧 왕이 될 세자의 장인어른이 되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척결한 외척을 자기 손으로 다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해에 정조는 사망했다. 11살의 어린 아들이 외조부인 김조순의 보호 속에 23대 왕 순조로 즉위했다. p 131

물론 이 책이 정조가 시행한 신해박해, 문체반정과 손수 없었던 외척등용 등 어두운 업적을 자세하게 서술한 건 아니다. 예컨데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사상통제 및 학문이 억압되었고, 실학자들이 청에서 배워온 개혁안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웠다거나 이런 내용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정조의 과오도 설명한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내리고 싶다.

동양 평화를 위해 ‘이것’ 해야 한다, 안중근

누군가 당신에게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가 누구인가요? 하고 물어본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떠올리는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안중근’이다. 익히 알려진 그의 행적은 이렇다. 하얼빈에서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동양평화론’을 주장하였으며,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수많은 글을 남겼다는 것. 여기서 조금 더 보태면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이 예정된 아들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 정도가 있겠다. 이러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행적은 공교육에서도 아주 당연하게 배우고, 여러 대중매체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이 책에서도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행적이 실려있다.

여기까지라면 이 책 역시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이야기하는 수 많은 역사책(또는 교과서)와 다를바 없었을 거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책은 거기에 더해 잘 알려지지 않은 안중근의 이야기 및 안중근의 가족 이야기를 포함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바라보려한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특히 안중근 사후 남은 가족이야기들을 읽어보면 말이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에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

북풍은 차가워도 내 피는 끓는구나

강개한 뜻으로 한번 가면 기필코

쥐새끼 같은 도적을 죽이고 말리라

우리 동포여, 우리들이 힘들인 임무를 잊지 마소서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안중근 <장부가>

독립운동 당시 안중근 의사 행적은 워낙 잘 알려져있고, 유명하기도 하니 생략하고. 안중근 의사 사후 남겨진 가족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안중근의 가족들은 모친과 형제, 아내와 아들 딸로 나뉠 수 있다.

* 안중근 모친 조 마리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두 아들 안정근과 안공근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조마리아 여사도 거처를 상하이로 옮겼고 이곳에서 김구의 모친이었던 곽낙원 여사와도 침하게 지냈다.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여러가지 이유로 무너지고 있을 때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조마리아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의 임원이 되어 물질적 후원을 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인 1927년 위암으로 별세하셨다.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 여사의 장례를 치러 주었지만 상하기 교민회 쪽 사람들의 실수로 묘소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현재는 묘소를 찾을 수가 없다. p 147

* 안중근 여동생 안성려

(안중근의)첫째 여동생 안성녀는 오빠의 죽음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구체적인 기록 없이 증언으로만 전해질 뿐인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편과 함께 독립군에게 피복을 제공해주었고, 남편 사후엔 만주로 넘어가 문서 정리 및 자금 조달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어 묘소도 부산에 있다. p 147

* 안중근 남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안중근의 남동생들인 안정근과 안공근은 안중근의 사형집행 후 둘다 러시아군으로 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했다. 첫째 동생 안정근은 김구와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의원이기도 했다. 그는 상하이와 북간도를 오가며 독립전쟁을 격려하고 주도했으며 형 안중근이 존경했던 안창호를 따르기도 했다. (…) 해방 후에도 몸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다가 1949년 상해에서 영면했다. 현재 그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 p 148

둘째 남동생 안공근의 초반 독립운동은 형 안정근과 비슷했따. 한때 김구의 참모라고도 불렸지만 후반기에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에 김구는 안공근을 멀리했다. 무엇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와중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보호해주고 있었지만 상하이 여의치 못하자 안공근에게 안중근의 가족을 부탁했는데, 안공근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으면서 김구와 더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했을 때였던 1939년 안공근은 실종되었고 아직까지도 죽음의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p 148

안중근의 모친과 동생들도 독립운동을 했다. 특히 안정근은 안창호를, 안공근은 김구를 따랐다. 그들의 결말은 아니나 다를까,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비슷하다. 다만 둘째 남동생 안공근의 행보는 조금 미심쩍다. 특히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의혹과 안중근의 아내와 자녀를 챙기지 못한 일들이. 아래에서 서술하겠으나, 안공근이 안중근의 아내와 자려를 챙기지 못한 일은 엄청난 후폭풍으로 돌아온다.

* 안중근 아내 김아려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 여사는 남편의 의거 후 일제의 지난한 취조와 심문을 받았으며 남편 사후에는 헤이룽장성 무링에 숨어 살다가 시댁이 임시정부 활동을 위해 상하이로 갔다는 소식에 그곳으로 갔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안중근의 둘째 동생 안공근이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의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아서 김구와 멀어졌을 때, 그 가족이 바로 김아려 여사와 그녀의 아들들이었다. 이 때문에 김아려 여사는 일본군에게 잡혀가 협박과 감시에 시달려야만 했다. (…)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 여사도 두 자식의 박문사 참배로 인해 위신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중국 상하이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중 두 남매의 귀국 직전인 1946년 사망했다. 김아려 여사의 무덤도 소재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p 148~149

* 안중근 큰 아들 안문생

안중근과 김아려 여사 슬하에는 2남 1녀의 자식이 있었다. 장남 안문생은 아버지 사형 이후 가족이 다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가 얼마 안 있어 1911년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누군가 건네준 과자를 먹고 즉사했으며 그의 나이 겨우 7살이었다. p 148

* 안중근 둘째 아들 안준생과 딸 안현생

안중근의 딸 안현생은 아버지의 의거 후 명동성당에 숨어 살다가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족들과 합류한 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독립운동가 황일청과 혼인했다. (…) 1939년 식민지 조선의 7대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가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을 강제로 귀국시켰다. 그리고 서울 남산에 있던 박문사로 데리고 갔다. 안준생을 협박하여 아버지 대신 사죄하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참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년 후에는 누나 안현생과 남편 황일청도 강제로 귀국하여 역시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참배했다. 안준생과 안현생의 이토 히로부미 참배는 대서특필되었고 김구를 포함해 수많은 조선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배신자라며 두 사람을 맹비난했다. 친일파 낙인이 찍혀버린 안현생의 남편 황일청도 독립운동가들에게 살해됐다. 안준생과 안현생 남매도 독립운동가들의 표적이 되어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숨어 살아야만 헀다. 안준생은 1951년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누나 안현생은 그나마 천주교회의 도움으로 교편을 잡으며 생활하던 중 1959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p 149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아내와 자녀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보호아래 있었다. 하지만 최재형 역시 일본에 의해 죽었고, 최재형 가족들 역시 누군가를 온전히 챙길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실제로 최재형 사후 최재형 가족들 역시 힘들게 살았으니). 뿐만 아니라 당시 어렸던 큰아들 안문생이 독살을 당한 사실도 거처를 옮기는데 힘을 보탰을 것이다. 그렇게 안중근 아내 김아려 여사는 자식들을 대리고 상하이로 넘어갔다. 당시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고, 임시정부 안에는 시댁식구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자신과 어린 자식들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임정 및 안중근의 시댁식구(안중근 둘째 동생 안공근)들은 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든.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박문사를 참배할 수 밖에 없었던 안준생과 안현생. 그런 그들을 맹비난하고, 심지어 친일파라 낙인하며 죽이려 했던 독립운동가들. 나는 당시 독립운동과들과 달리 안준생과 안현생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들을 친일파로 낙인하고, 죽이려 했던(실제로 죽였던) 독립운동가들은 잘못이 없는가 되묻고 싶다. 물론 그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단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안중근의 자녀를 친일파라고 비난하고 죽일 자격이 있는가? 적어도 난 그들에게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안중근의 자녀들을 보호할 책무를 저버린건 다름아닌 당대의 독립운동가였으니.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당시 환경은 살벌하고 엄혹했다. 다시금 말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안중근의 가족들을 보호하지 못한 제일 큰 원인은 다름아닌 안중근의 남동생 안공근이었다. 그래서 김구가 안공근을 멀리했었고.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안공근이 안중근의 자녀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로인해 안공근을 멀리했다면! 김구를 포함하여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나서서 직접 안중근 자녀들을 보호했다면 어땠을까. 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거룩한 희생이라고 찬양하며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키워내면서, 정작 남겨진 안중근 자녀들은 등한시했을까. 아쉬운 대목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역사는 평면적으로 보고 해석하면 안된다. 뿐만아니라 누군가의 해석을 답습해서도 안된다. 역사란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해석하고자 해야, 제대로 된 역사공부라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과정이 있어야 역사공부로 인해, 내 삶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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