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군복의 역사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쓰지모토 요시후미 지음, 쓰지모토 레이코 그림,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한 권, 두 권 모으고 있는 세계사책이 있다. 시리즈물은 단연코 아니다. 다만 분류가 같다. 바로 ‘전쟁사’. 전쟁사 관련 책을 모으기 시작한 건, 아마도 임용한 교수님 책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의도한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전쟁사 관련 책들이 여러권 보이길래, 책장 한켠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그 모든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_T. 이쯤에서 돌이켜보면, 난 정말 책을 읽는 것 보다 모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게 확실한 것 같기도. 뭐 여튼, 오늘 포스팅하는 세계사책은 여러 권의 전쟁사 책 중 하나인 『전쟁과 군복의 역사』 라는 전쟁사 세계사책이다. 



이 책 『전쟁과 군복의 역사』는 제목에서도 보이듯 ‘전쟁’과, 전쟁과 당대 시대상에 따라 발전한 ‘군복’의 역사를 소개한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가 현재 입고있는 옷이나 군복은 모두 서양에서 출발한 의류이기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전쟁과 군복의 역사도 당연히 서양 즉, 유럽을 중심이다. 즉, 동양이나 아시아 전통 군복(?)이 왜 없는가에 대한 의문은 애초에 해당이 안된다는 것!




내 나름대로는 역사더쿠라 세계사에서 비중있는 전쟁들은 꽤 알고 있는 편이다. 여러 세계사책으로 읽기도 했고, 임용한 교수님의 《토크멘터리 전쟁사》 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전쟁사란, 어디까지나 ‘전쟁’에 대한 것이다. 전쟁에 따른 정치, 문화, 사회의 변동 이런 느낌이랄까? 오로지 그런 것들만 머리속에 넘처날 뿐, 군복의 역사는 진심 1도 관심이 없었다. 아! 굳이 굳이 군복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을 찾자면, ‘버버리 코트가 군복에서 시작되었다’와 ‘세일러복이 해군에서 시작되었다’ 이 정도 랄까. 하하하.



즉, 군복의 역사는 제대로 아는 것이 진짜 1도 없었기에, 이 세계사책 『전쟁과 군복의 역사』는 나에게 신문물(?) 이었다. 제일 놀라웠던건, 군복의 역사가 신사복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는 점이랄까. 넥타이부터 시작해서, 구두, 투피스(정장), 쓰리피스(정장) 등 각종 패션의 산물이 군복에서부터 시작한거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세계사 속 전쟁에 대해선 나보다도 엄청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우리 신랑조차도 이런 내용이 처음이었다고 한다면 정말 말 다한듯 싶다.



물론! 군복의 역사가 신사복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서, 고대 부터 그러했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또 당연히 NO 다. 고대야 뭐, 동양이고 서양이고 군복이라 말하기 민망할정도로 헐벗은(?) 옷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최초로 통일된 군복이 등장한게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하니, 와. 이건 놀랄 노짜다. 하긴, 생각해보면 입고 있는 옷이 다 다르면, 싸울 때 니편인지 내편인지 알 수 없을테니 군복을 통일하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중세시대의 군복은 전쟁에서 얼마나 실용적인지도 중요하지만, 비전쟁시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편리한가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왜그런고 하면, 당시의 기사들은 한마디로 ‘작위’를 받은 귀족이나 왕족이었다. 즉 ‘기사’ 이기 이전에 귀족, 왕족들이었기에,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활동할 수 있던 일상복이 당시의 군복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나 뭐라나. 뭐, 이때까지만해도 냉병기를 주로 사용하던 시대였으니 크게 문제가 없었겠지만, 전쟁에서 열병기가 주로 사용되면서는 귀족을 위한 군복도 당연히...빠이빠이!



또 신기했던 점이 ..... A국가와 B국가가 전쟁을 벌여서, A국가가 이겼다다고 치자! 그럼 이긴 A국가의 군인들이 입은 군복이 전 유럽적으로 유행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쯤되니 군복도 확실히 패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전쟁과 군복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는 책이다보니,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정말 책의 내용이 풍부하기도 풍부하지만,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게 있으니 바로 삽화다. 정말 수 많은 역사책을 읽어봤지만 이렇게 삽화가 많은 책은 처음인듯;; 그것도 올 컬러 삽화로 말이다. 아무래도 군복이다보니, 문자로만 풀어내면 ‘딱!’하고 떠오르지 않을 수 있어서 그런 것같다. 덕분에 문자로만 읽고, 흐리멍텅하게 머리로만 상상(?)하는 일 없이, 어떤 군복인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게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래는 책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다.



군복이란 무엇인가



제네바 조약 및 헤이그 육전 조약의 규정에 의하면 군복을 입은 자는 교전 상대국에 사로잡혀도 포로로서 보호를 받는다. 사복을 입은 자는 간첩,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처형될 가능성도 있다. 군복이란, 국가가 군율로 정한 복제로 법적인 근거하에 지급하는 피복이다. 조약상 ‘멀리서도 알 수 있는 명확환 휘장’을 부착해야 한다. 장교 등이 관급품이 아닌 개인적으로 주문해 구입하는 경우에도 그 국가의 제복에 준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p 010



제복학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군복의 규정을 조사하는 일이다. 각국에서 복장 규정을 정하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이다. 이후 몇 년부터 몇 년까지 그 군복이 이용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데 근거가 되는 명문 규정이 있는 경우는 그 규정을 최대한 찾아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 육군은 1661년 무렵, 영국 육군은 1706년에 처음 군율이 제정되었다. p 011



※군복의 아이템: 정모(관모), 견장, 넥타이, 훈장, 견식, 스트랩슈즈



넥타이가 군장 특유의 아이템이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실은 넥타이야말로 틀림없는 군복용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목에 감는 스카프형 장식의 원형은 고대 로마 군단의 병사가 목에 감았던 포칼레로 오늘날 신사복 역사의 정설로 정착했다. 당시 로마군의 투구는 목을 감싸듯 돌출된 형태로, 목덜미의 접촉이나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 감았을 것으로 보인다. p 021



훈장은 고대 로마 군단에서 탄생했다.​ 백인 대장급 장교가 팔레라 라는 금속제 원반을 가슴에 다는 관습이 1세기 때 이미 존재했다. 그 사람의 전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금의 종군휘장과 같다. 그러므로 훈장의 원조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십자군 시대인 12세기경부터 기독교 수도회의 기사단이 문장을 제정하게 되었다. 기사단은 십자군을 지지하는 군사적 단체로 각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장을 서코트나 방패에 그려넣었다. 이 문장이 기사단 유니폼의 시초로 ‘훈장’ 제도의 기원이다. p 025~026



마지막 아이템은 구두이다. 단순한 신사화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군에서 유래된 형식이다. 스트랩 슈즈 자체는 일찍이 5,000년 전 유럽의 추운 지방에서 등장했다. 하지만 기후가 온난한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샌들을 주로 신었으며 로마 군단의 병사들은 바닥에 징을 막은 군용 샌들 칼리가를 신었다. p 033




근대식 군복 이전의 역사


인류 최초의 군복은 언제 탄생했을까. 인류 최고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기,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에 이미 군대가 존재했으며 통일된 제복이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류는 문명의 개화 이래 군대를 조직하고 군복을 제정한 것이다. p 036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시민들은 각자 창과 방패, 투구와 갑옷 등을 마련해 중장 보병으로 군무에 종사했다. 각자 말을 사육해야하는 기병은 부유층이 종사하는 병종으로, 자격 심사도 엄격했다. 해군은 직접 군함을 건조한 거부가 선주가 되어 조직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일반 시민의 기부와 봉사로 국방이 성립했던 것인데 당시는 군무나 공직에 얼마나 기부를 했는지 혹은 사회 공헌을 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었던 사회였다. p 037



명확한 국가의 군대로서 장비품을 지급한 증거가 남아 있는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끌었던 마케도니아군으로, 도검과 갑옷 등 통일적인 규격품을 양산해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을 지탱한 것은 국가의 군수 보급 시스템을 바탕으로 조직된 군대였던 것이다. p 039



(로마)기원전 107년 실시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거쳐 직업 군인으로 조직된 정규군의 군단제를 시행하면서 통일적인 군장을 지급했기 때문에 이것도 국가의 군복이라 할 수 있다. 제정 시대 병사들에게 지급된 로리타 세그멘타타라고 불리는 갑판은 고대 세계의 최첨단 장비였다. 또 로마 군단의 군장은 오늘날 텍타이의 기원이 된 포칼레와 종군 기장의 원형인 팔레라 등 놀라운 첨단성을 갖추고 있었다. p 040




갑옷의 진화가 남성의 복장 전반에 변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13세기까지 사슬갑옷이 주류였다가 14세기가 되면서 전신을 장갑판으로 감싸는 신형갑옷인 판금갑옷이 등장했다.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의 장궁이 사슬갑옷을 간단히 관통하자 방어력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백년 전쟁 초기에 큰 활욕을 보인 영국의 왕태자 에드워드는 ‘흑태자’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입었던 초기 판금 갑옷의 표면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p 041




전신에 밀착되듯 감싸는 신형 갑옷이 등장하면서 남성의상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로인해 남성의 다리가 드러났다. 중세 유럽의 신사라고 하면 흔히 타이즈 차림을 떠올리는데 그 배경에는 군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 갑옷 안에 입는 솜옷에서 유래한 더블릿이라는 풍성한 상의가 유행했다. (…) 이처럼 군장과 일반 신사복 사이에는 커다란 연관성이 있다. 당시의 지배 계층인 왕후가 귀족들이 기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상적인 복장이 갑옷으로 규정된 면이 있다. p 042




르네상스 시대부터 17세기 초, 국가의 군대가 봉건 기사단에서 근대적인 정규군으로 변천한는 동안 정장을 지배한 것은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용병대장의 뜻에 따라 일정 장비를 통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복장과 장비는 각자 마련했다. 단, 용병산업을 제도화한 스위스 용병은 특별한 경우인데, 저명한 종군 기록 작가 디볼드 실링의 『루체른 연대기』를 보면 적어도 각 지역 부대마다 색조나 양식을 통일한 제복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p 044



1477년 낭시 전투로 로렌공국을 공격한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 용담공 샤를은 로렌 공작 르네2세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에 의해 전사했으며 (…). 낭시 전투 이후 스위스 용병들은 전투로 찢어진 옷 안에 샤를의 본진에서 약탈한 화려한 옷감을 채워 넣고 개선했다고 전해진다. 그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천 조각이 눈길을 끌면서 전신에 슬래시를 넣는 기묘한 패션이 탄생해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200년 남짓 유럽의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p 045



30년 전쟁 - 스웨덴군과 ‘근대식 군복’의 등장


(스웨덴 왕)구스타프 아돌프는 초기의 징병제인 선택 징병제를 제정했다. 당초 피복 자재의 조달과 제조는 각 연대별로 이루어졌으며 징병되지 않은 시민들에게 피복비를 징수했다. 1620년 제정된 법령에 의하면, 병역의 의무가 있는 15세 이상의 남성은 지역 집회소에 10명 단위로 정렬하게 되어 있었다. 군 징병관이 그중 한 명을 선택했으며, 그를 위한 피복비와 징비품 비용은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9명이 내는 일률 징수금으로 충당하는 제도였다. p 049



스웨덴군은 덴마크식으로 군기의 색으로 구분한 4개의 연대가 있었다. 이들은 본국의 징병제에 의해 구성된 스웨덴인 연대가 아니라 외국인 지원병으로 구성된 직업 군인들의 보병 부대로, 스웨덴군 외정 부대의 실질적인 주력이었다. ‘황색 연대’는 국왕 직속 근위 연대로 왕궁 연대 또는 호위 연대라는 통칭도 있었다. 그 밖에 ‘청색연대’, ‘적색연대’, ‘녹색연대’가 존재했다. 이들 연대의 장교는 스코틀랜드인이 많았으며 영국에서 온 병사도 다수 존재했다. 황색, 청색과 같은 색명은 당초 군기의 색을 나타낸 것에 불과했지만 1625년을 경계로 군복의 색도 통일한 것으로 보인다. p 051



전쟁이 한창이던 1626년, 구스타브 아돌프는 메웨 전투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폴란드 기병 부대를 머스킷 총을 활용해 격퇴했다. 이듬해 8월 디르샤우 전투에서 경부를 피격당한 이후로는 갑옷을 입을 수 없게 되었다. (…) 국왕이 갑옷도 입지 않고 진두에 선 모습을 본 기병이나 보병들은 더더욱 무거운 갑옷을 꺼렸을 것이다. 당시의 화승총은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견고한 갑옷으로 어느 정도 방어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떄문이다. 이처럼 군복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총기의 보급과 갑옷의 퇴장이 있었다. ‘근대 군대의 아버지’라고 불린 구스타브 아돌프가 근대 군복의 창시자가 된 것도 필연적인 일이다. 갑옷의 폐지는 다양한 군복색의 통일과 채용으로 이어졌다. p 053



루이 14세의 전쟁 - 태양왕과 ‘페르시아풍’ 군복



루이 14세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외모에도 굉장히 신경을 썼다. 다만 신장은 160cm 정도로 17세기 당시 남성의 신장으로 볼때 작은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결코 장신은 아니었다. 본인도 그 점이 신경 쓰였는지 하이힐을 착용했다. 그가 신은 뒷굽을 빨간색으로 칠한 궁정용 하이힐은 금세 가신들 사이에 유행했다.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하이힐은 남성들이 맵시를 뽐내기 위해 신는 구두였다. (…) 또한 프릴과 레이스를 이용한 리본 장식을 가득 배치한 매우 여성적인 복장을 즐겼다. 그는 화려한 의상을 유행시켜 국내의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자 차양에 깃털을 가득 장식하거나 랭그라브 라고 하는 큐롯 스커트 형태의 반바지를 입고 발레 동작처럼 우아한 자태로 활보하는 모습은 중성적인 그의 미의식과 기호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p 066




당시는 남성 귀족이나 군인도 모두 장식을 달고 하이힐을 신었는데 솔직히 이런 차림은 전쟁에 적합하지 않았다.​ 리본이나 프릴 장식이 나부끼는 전쟁은 당시로서도 위화감이 컸다. 당시 프랑스군에도 제복이라고 부를만한 복장이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로 널리 알려진 왕실 근위 총사대의 제복이다. p 068




영화나 TV에 등장하는 다르타냥과 삼총사는 하나 같이 파란색 타바드를 입고 있다. 하지만 루이 13세나 리슐리외의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면 고증적으로 문제가 있다. (…) 실제 ‘파란색 타바드’가 채용된 것은 1657년으로 프롱드의 난이 종결된 이후 루이 14세가 치세하던 시대였다. 푸케를 체포할 당시의 다르타냥은 이 제복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1665년부터는 길이가 더 긴 캐속이라는 상의로 진화했다.1665년 이후 총사대의 캐속에는 루이 14세의 빨간색 태양 문장이 추가되었다. p 069



촌스럽다고 생각되던 긴 상의가 1660년대 이후에는 최신 패션으로 둔갑해 프랑스군에 널리 유행한다. 이 상의는 ‘페르시아풍’ 또는 ‘동양풍’이라고 불리었다. 상의만 보면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부근의 ‘동유럽풍’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페르시아풍 복장은 아비 안에 상의와 비슷한 길이의 소매가 긴 옷을 한 벌 더 입었다. 이것을 베스트라고 불렀다. 그 후, 베스트의 소매를 없애고 길이도 짧아졌는데 이것을 프랑스에서는 길러라고 불렀다. 즉, 상의와 베스트 조합으로 중세 더블릿 시대에 탄생한 ‘스리피스’가 유럽에서 부활한 것이다. 오늘날 스리피스 정장의 직접적인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p 0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왕조 오백년,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군주가 세 명 있다. 첫번째는 선조(임진왜란), 두번재는 인조(이괄의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마지막은 고종(아관파천). 셋 모두 조선의 혼군 중의 혼군이라 말할 수 있지만(내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왕들이라고 손꼽기도 하지만), 이 세 명의 왕 중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횟수에 대해 우위를 따지자면, 단연코 ‘인조’ 다. 도망간 횟수가 장장 세 번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도망의 고수 중의 최고수랄까.




나는 인조에 대한 포스팅을 꽤 여러번 올렸다. 관련 역사책 서평, 인조와 관련된 유적지 답사, 인조와 관련된 인물에 대한 유적지 답사 등 말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인조를 조선 최고의 혼군으로 손꼽을 정도로 정말 싫어하지만,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인조에 대해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어떠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고로.. 그 연장선에서 최근 읽은 책이 「인조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이다. 병자호란을 떠나서 인조 대의 이야기는 명치 끝이 꽉 막히고, 고구마 오백만개는 먹은 만큼 답답해지지만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엄연히 우리의 역사이니. 그것도 아주 제대로 알아야하는 역사이니. 여러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나는 빛나는 역사도 중요하지만 어두운 역사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이 책은 ‘병자호란’이라는 줄기를 기준으로 인조라는 인물에 대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한다. 병자호란 전, 병자호란 중, 병자호란 후 이렇게 말이다. 오롯이 인조에 대한 설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까지 같이 포함해서. 그도 그럴 것이, 병자호란은 후금(청나라)과 조선이 치룬 전투이자 패배한 전투이다. 심지어 병자호란에 앞서, 똑같이 후금이 처들어온 정묘호란이 있었다. 또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약 30여년 전에는 일본과 7년간 싸워온(명나라도 참전한), 그 유명한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있었다. 즉, 병자호란을 설명하기 위해선 당시 한/중/일 정세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 아, 뭐 -.. 인조대에선 일본의 정세는 대충 임진왜란 정도만 알면 되긴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서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병자호란을 일으킨 주체가 청나라이므로 그 1차적 책임은 전쟁을 주도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돌려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앞뒤 정황을 살펴보면 인조를 정점으로 한 서인 정권에서 자초한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 간에는 병자호란 발발의 책임이 청 태종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책은 전란의 책임이 인조에게 있다는 관점하게 기술하고 있다. 전란 발발의 책임을 인조에게 물은 것은 왕권 국가에서는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로 여길 만큼 왕의 권한이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p 008



나 역시도 병자호란 발발의 전적인 책임은 인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서문부터 완전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게되었달까 뭐랄까.



저자의 말대로 조선은 왕권 국가였으며,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이었다. 즉 왕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강토와 백성이 평안하게 사느냐, 죽어나가느냐가 달려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조는 어떤 왕이었을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인조는 무려 세 번이나 강토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정묘호란, 병자호란 두번의 외침을 받았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병자호란의 끝을 모욕적인 ‘삼배고구두례’로 끝냈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자기 아들이자, 세자였던 소현세자를 비롯한 그의 일가를 죽음으로 몬 것일까? 



하.. 인조라는 인물이 참 다채로운 인물이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질문들이 생성된다. 



나야 이곳저곳 인조와 관련된 유적지를 다녀왔고, 인조/병자호란과 관련된 역사책을 꽤 많이 읽었기에 내 나름대로 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답을 찾이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 역사책 「인조 1636」을 추천하고 싶다. 인조를 향한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이만큼 최적인 역사책이 또 있을까?




이 포스팅에선 이 책의 ‘병자호란 전 인조’ 챕터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써보려 한다.



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이었을 적을 보자. 


일본과의 참혹한 7년 전쟁, 임진왜란 당시 재위했던 왕 선조. 그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인조와 관련된 인물만 이야기하자면 광해군과 정원군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다음 왕이 되었다. 정원군은 인조의 부친이다. 뭐, 임진왜란 이야기나, 광해군의 외교나, 정원군의 조선 최고의 싸이코패스였다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광해군 재위 말, 당시 능양군이었던 인조는 반정을 일으켰고 그렇게 광해군 다음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인조 반정은 인조의 공보다는, 엄연히 신하들의 공이 월등히 컸다. 공신들도 어마어마했다. 근데 공신들끼리도 알력다툼이 꽤나 있었는데, 결과론적으론 그로 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괄이 무서웠던 인조와 그 외 공신들은,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갔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이 때는 임진/정유재란이 끝난지 약 40여년도 채 흐르지 않았던 시기다. 오롯이 나라 재건에 힘써야 했던 시기다. 하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나라 재건은 개뿔, 권력 다툼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반면에 대륙에선 명나라가 쇠퇴하고, 누루하치의 후금이 세력을 확장하는 등 하루하루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조선이었기에, 만약을 위해서라도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를 펼쳐야했으나, 슬프게도 인조는 그럴 생각이 단 한개도 없었다. 무엇보다 인조는 전 왕이었던 광해군과 1부터 10까지 반대로 행동했으니 말이다(이건 작금의 정치와도 크게 다른게 없어서 더 없이 슬픈 모습). 



인조는 죽으나 사나 친명배금을 외쳤다. 그 결과 후금이 조선으로 쳐들어오니, 바로 정묘호란이다. 인조는 이 때, 강토와 백성을 버리고 두번째 도망을 간다.


적군이 의주를 함락하고 곧 안주에 이를 것이라는 치계가 조정에 당도한 것은 1월 17일 이었다. 치계를 접한 인조와 중신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 나라인 후금을 배척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정권이었다. (…) 인조는 도체찰사로 임명한 이원익과 좌의정 신흠을 포함해서 26명의 배정관을 하여금 세자를 따르게 하고, 이원익의 후임으로는 부체찰사로 임명했던 김류를 승진 임명했다. 세자에게 분조를 맡긴 인조는 종묘의 신주와 종실 가족들을 이끌고 강화도 몽진을 결정했다. p 104



노량나루에서 배를 탄 인조의 몽진 행렬은 양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통진에 도착한 인조는 김포에 조성된 자신의 생모 ‘연주부부인’이 잠들어 있는 육경원을 참배하느라고 이틀을 머문다. 인조의 생모는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626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 이때 인조는 한성부의 방민 1,200명을 뽑아 산역꾼으로 보내고, 여기에 더하여 도성 백성들 중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매 호당 1인씩 차출한 여사군(상여꾼)만도 4,700명에 달했다.(…) 인조는 자신의 생모가 왕후를 지내지도 않았을뿐더러 몽진 중임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행했다. 그 후 후금과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귀환길에 인조는 또다시 육경원 참배를 강행했다. p 105



정말 대단한 왕 나셨다. 백성을 두번이나 버리면서도, 도망중에 자신의 모친 무덤은 굳이 찾아가서 참배하는 왕이라니. 생각해보면, 그렇다. 제대로 된 명분 따위 없이 왕이 된 인조다. 나라 꼴이 처참하든 말든 그저 전 정권이 추진하던 일은 무조건 반대로만 하던 인조다. 그런 인조가 어떻게든 쥐꼬리만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충,효가 중요한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 인조가 그나마 내보일 만한건 다름아닌 ‘효’.



뭐, 여튼 그렇게 인조는 강토와 백성을 내던지고 두번째 도망을 갔다.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자기 몸 하나 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럼 인조 밑에 있던 신하들은 어땠을까?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곧죽어도 명나라에 사대하며 오랑캐랑은 강화하지 않겠다는 척화파와, 허울뿐인 명분은 버리고 강화하자는 주화파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정묘호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 인조가 탁상공론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도 백성들은 아주 참혹하게 유린되고 있었다.



최명길을 비롯한 몇몇 중신들은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강화를 반대하는 척화파들은 조선 땅을 침범하고 죄 없는 백성을 살해안 오랑캐들과 화해 운운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일이라고 열을 올렸다. 반면에 강화를 찬성하는 주화파 측에서는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백성들은 어육이 되고 있는 마당에 허울뿐인 명분만 내세울 거냐며 맞받아쳤다. p 107



“지금 이후로 조선과 후금국 중 누구라도 맹약을 어긴다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될 것”이라 낭독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술과 고기를 먹는 것으로써 대미를 장식했다. 1627년 3월 3일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협상을 맺은 내용은 ‘조약’이라는 말 대신 ‘약조’라는 문구를 사용하는데, 그해가 정묘년이므로 ‘정묘약조’라 부른다. 4개 조항으로 된 정묘약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한다.

둘째,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하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된다.

넷째,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 p 109



결국 조선은 후금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질 전쟁이었다. 아니, 전 정권이었던 광해군 처럼 외교에 조금이나마 신경을 썼다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후금은 생각보다 조선을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후금이 바라는건 조선과의 ‘형제국’, 그리고 ‘자신들과 명나라 싸움에 끼지 말것’ 이었으니까. 뭐, 이 외에도 후금이 요구한 건 자잘자잘하게 많긴 하지만 전쟁의 승자와 패자로 보았을 땐 그러한 요구는 어쩔수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정도면 과거 몽고가 고려를 대접한 것보다는 조금 낮지만, 그럼에도 꽤나 후한 대접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우리 조선은 200년 넘게 명을 부모지국으로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에는 재조지은까지 입었는데, 어떻게 부모의 나라를 치는데 협조하겠느냐”며 그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당시 인조가 저들의 요구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은 그의 용기라기보다는 평소에 지녔던 숭명사상이 그 척도였다. 그러나 숭명 사상의 척도를 떠나 그 무렵 조선의 재정 상태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최악이었다. 이런 저런 사정이 겹처 조선에서는 날이 갈수록 배금 사상만 높아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었다. p 120



즉위식에 참석한 패륵들과 대신들은 물론 만주인, 한인, 몽골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새 황제에게 삼궤고구두를 행하고 만세를 불렀으나, 유독 조선의 춘신사 나덕헌과 이확만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하늘 아래에는 오직 한 분의 황제, 즉 명의 숭정제만이 황제였을 뿐 그 외 다른 사람들이 황제를 칭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 여겼다. 나덕헌과 이확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청의 관료들은 격분했다. p 127



명은 망했다. 후금이 대륙의 주인이 되었고, 국호를 ‘청’으로 바꾸며 황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는 시종일관 숭명배금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동안 인조가 한 일 이라고는 자신의 생부 정원군을 추존왕으로, 생모 구씨를 추존왕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한번 언급하지만 정원군은 실록에도 언급될 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싸이코패스중의 싸이코패스다.



아니, 다 떠나서 싸이코패스일 지언정 자신의 부친이니 효를 다하기 위해 왕으로 추존했다고 치자. 하지만 친명배금은 왜? 이쯤되면 무능의 끝판왕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자기가 끌어내린 광해군과는 반대로 간다한들, 이미 명은 망했고, 대륙은 청나라의 손에 넘어갔다. 이쯤되면 명은 손절하고 청나라에 잘 보여야하는게 맞다. 더군다나 조선은 이미 정묘년에 청의 아우국이 되기로 약조하였던 전적이 있다. 그 약조만 잘 지켰어도, 중간을 갔을텐데 인조는 기어이 스스로 파국을 불러들였다.



인조는 3월 1일 팔도에 내린 ‘절화교서’를 통해 “오랑캐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조만간에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꼐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고 나라의 은해에 보답하라”고 하달했다. 인조는 교서를 발표하고 나서 엿새가 지난 3월 7일 평안감사에게 문제의 ‘절화교서’를 금위영 군사 편에 보냈으나, 어이없게도 그 교서는 도중에 후금 군사에게 탈취당하고 만다.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절화교서를 본 홍타이지는 그 즉시 여러 패륵과 대신들에게 절화교서를 보이고 이에 대한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이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패륵과 대신들 모두가 격앙된 어조로 “대군을 출정시켜 조선국을 멸하자!”고 했으나, 홍타이지는 “사신을 보내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데려오라 하여 그들이 응하면 그대로 덮어두겠으나, 만약 불응하면 그때 가서 조선 정벌을 논의하자“고 하며 한 호흡 늦춘다. p 135



인조 재위기는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이 채 안되어, 나라가 피폐했을 당시였다. 하지만 인조는 반정 이후 공신들의 책록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이괄의 난으로 인해 한번 백성을 버렸고, 끊임없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인해 정묘호란이 일어나 두번 백성을 버렸다. 그 와중에 인조가 한 일이라곤 전 정권인 광해군과의 반대로 반대로, 오직 반대로 가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부친과 모친의 추존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첫번째 왕비였던 인열왕후가 죽자, 그 장례식도 아주 호화롭게 치렀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청나라와 ‘절교’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여기까지가 병자호란 전 인조의 행보다. 이 이후의 인조의 행보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직장인 열전 - 조선의 위인들이 들려주는 직장 생존기
신동욱 지음 / 국민출판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전에 「어른의 한자력」 이라는 책의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려고 펼쳤는데, 문득 눈에 들어온 저자의 이름.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 싶었기에, 바로 내 책장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조선사 역사책이 꽂혀있는 책장 한켠에서. 그렇다. 나는 이미 이 저자가 쓴 역사책을 구입한적이 있었던 거다.  그 역사책은 바로 「조선 직장인 열전」. 물론 읽지는 못했었지만. 본디 책이란.. 사는 속도와 읽는 속도가 엇박자를 일으키니까^_T. 


뭐, 이유야 어찌돼었든! 이제서야 「조선 직장인 열전」을 읽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적 인물들은 나라의 녹을 받는 직장인(일종의 공무원) 이었다! 오, 놀라워라. 매일 그들의 공/과를 따지고,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만 보았지, 직장인으로서의 그들을 생각해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소오름. 그렇게 역사적 인물들을 ‘직장인’ 으로써 마주하는 순간, 왠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존경심은 저 멀리 날라가고 측은함이 저절로 샘솟았다. 그도 그럴것이, 현대의 직장인들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진짜!)모가지가 날라가지는 않지만, 조선의 직장인들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진짜!!) 모가지가 날라갔으니까. 뿐만이랴, 삼대가 멸문을 당하는 경우까지도 왕왕 있었다. 정말 조선시대의 직장인들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살얼음판을 걷는 직장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이야,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네. 만약 당시 CEO가 연산군이었으면? 오우. 정말 수백의 직장인 모가지가 날라가는 걸 눈 앞에서 보거나, 혹은 내 모가지가 날라가거나. 반대로 CEO가 세종이었다면? 거기다 만약 일잘러였다면? 퇴계 이황처럼 늙어 죽을 때까지 노동착취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내가 너무 뛰어난 인재였다면? 주변 동료들의 모함으로 아주 참혹한 정리해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주식회사 조선의 직장생활은 정말 모 아니면 도. 차라리 현대의 직장인이 백번 낫다. 



1n년간 직장에서 온갖 상황을 마주하며, 이제는 더 마주할 인간 유형(?)도 없고, 그 어떤 상황에 마주해도 당황하지 않을거라 자부한 나였건만, 그건 나의 오만이었고 오판이었다. 지금보다 더 험난했던 직장생활을 한 그들에게서, 다시 한번 배우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복직해야지!  



이 책에는 여러 직장인(?)을 소개한다. 정도전이나 황희, 김육, 이황 등 대체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을 법한 역사적 인물이자 직장인(ㅋㅋㅋ)들이며, 우리가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만한 점이 있는 직장인들이다. 반대로 홍국영이나 허균처럼 반면교사 삼을 비운의 직장인도 소개한다. 난 이 책에 실린 여러 직장인 중, 주식회사 조선의 최고의 직장인과 반면교사 삼아야할 직장인을 단 한 명씩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래와 같이 선택하고 싶다.




눈치를 잘 보는 것도 실력이다. 하륜

- 실력과 처세 능력을 동시에 갖추어 누구보다 조직 생활을 잘할 수 있는 인재라고 자부합니다


제 1,2차 왕자의 난부터 시작하여 태종의 치하 기간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그 어떤 인물도 남겨놓지 않았던 숙청의 피바람이 불던 시기다. 그런 엄혹한 시대 속에서도 하륜은 70세 일기로 천세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어떤 처세 비법이 있었기에 정리해고 한 번 당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p 097


하륜은 향리집안 출신으로 명망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하륜이 과거급제 했을 당시 그를 눈 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권문세족이자, 당대 권력가였던 이인임의 형, 이인복. 이인복은 그의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하륜을 결혼시킨다. 결과적으로 하륜은 이인임 가문과 사돈이 되었다. 그렇다고 하륜이 권문세족의 편으로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륜은 이색의 제자였기에, 당연히 또 다른 이색의 제자들인 신진사대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몽주와 정도전.



여말선초, 우리가 드라마로도 봐왔듯 공민왕/우왕/창왕에 이어 조선이 개국되고 이성계가 조선 초대왕이 되었다. 당대 권력가였던 이인임이 쫓겨나면서 하륜도 권력의 뒷편으로 밀려났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택에 그는 자신의 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성계가 쓰러졌을 당시 정몽주가 잠시 권력을 잡았을 때나, 이방원의 선죽교 사건(?)이 있었을 때나,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의 숙청의 칼날등에서 말이다. 



하지만 하륜은 똑똑히 보았다. 동문이었던 정도전이, 자신의 스승과 또 다른 동문들을 어떻게 숙청해나가는지를.


하륜이 정도전과 제대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표전문 사건’이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조선의 외교문서가 불손하다며 심각한 외교 갈등을 야기한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이 문제의 발단을 정도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그의 압송과 해명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 그럼에도 정도전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의적으로라도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는 커녕 전혀 관련도 없는 하륜을 사신으로 보내버리고 만다. 정도전을 제거할 기회로 본 하륜이 당사자인 정도전이 직접 가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에게 오히려 보복을 당한 셈이었지만 하륜은 명나라 황제를 훌륭히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하륜의 명성은 올라간 반면 정도전에 대한 비난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p 040



정도전이라는 못된 선배를 둔 하륜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처음에는 정도전에 맞서 투쟁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정도전으로부터 돌려 받은 건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견제였다. (…) 사실 견제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반증이다. 그 선배는 실력 있는 내가 자신을 앞서갈까 두려운 것이다. 일단 그것으로 위안을 얻자. 그리고 선배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자. 분명히 기회는 올 것이다. 마치 하륜이 새로운 상사 이방원을 만나게 된 것처럼 말이다. p 041



정도전과 맞서는 족족 실패한 하륜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다름아닌,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정도전이 그랬던 것 처럼. 그렇게 하륜은, 정도전이 걸었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방원과 손을 잡았고, 때를 기다렸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하륜이 이방원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이방원이 누구인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 그리고 고려 사수파로서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던 정몽주를 죽인 장본인이 아닌가. (…) 이방원을 군주로 모신다는 것은 변절의 끝판왕이라 불릴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손을 잡았다. 공동의 적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p 044



하륜은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신진사대부였음에도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후광으로 출셋길을 달렸다. 정몽주와 손을 자복 고려 사수파에 섰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곧 조선의 신하가 된다. 그리고 존경하는 선배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과 손을 잡는다. 정도전이 좀 더 포용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인물이었다면 아마 하륜은 정도전과도 손을 잡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배제해 버리는 정도전의 성격상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신 하륜은 이해관계가 일치한 이방원과 손을 잡았고, 마침내 임금 다음가는 실권자가 된다. p 045



여기까지만 봐도 하륜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선배이자 정적인 정도전이 그러했듯, 하륜도 기다렸고 성공했다. 하지만 하륜이 선택한 남자는 이방원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무한 지지했지만, 이방원은 달랐다. 이방원은 선죽교 사건과 왕자의 난에서도 보았듯, 잔혹한 군주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기에게(또는 후대의 왕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사람이라면 최측근은 물론, 처가, 사돈댁을 거의 몰살 시켰다. 하지만 그런 피바람 속에서도 하륜은 아주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하륜의 직장 생명력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가 태종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던 점도, 정치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신하였따는 점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사의 의중을 눈치껏 이해하면서도 절대 선을 넘지 않는 탁월한 처세 덕분이었다. p 048



하륜은 태종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한 신하였다. 태종은 “왕위를 넘길게”라고 말했지만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왕위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마” 였다. 하륜은 신하의 본분을 지킨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말의 진의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고 이숙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따. 이것이야말로 하륜이 서릿발 같은 태종의 치세에서도 오랫동안 평탄하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인 셈이다. p 051



상사가 업무에 대해 정확히 지시하고, 언제까지 끝내라는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함께 주면 실무자 입장에서는 정말 일하기 편하다. 그렇지만 상사의 스타일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상사가 “이거 좀 한번 알아봐요”라고 흘리듯 이야기했고 부하직원은 별것 아닌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뭉개버렸다고 하자.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상사가 그 건에 대해 다시 물어본다면 그 앞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상사가 아무리 대충 흘러가듯 이야기하더라도 일단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즉시 나의 주요 업무로 삼아야 한다. 결국 이것은 ‘직장인의 눈치 보기 능력’과 매우 관련이 높다. p 052




“인생은 하륜처럼” 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동안은 내 인생의 모티브가 “인생은 하륜처럼” 이기도 했고. 



따지고 보면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운, 킹메이커 정도전도 대단한 직장인이다. 심지어 정도전이 한 많은 것들이 조선 오백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년은 너무 뻣뻣했고, 성급했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정도전이 사라지는 순간, 정도전은 수많은 적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는 참혹한(?) 정리해고. 



하륜은 조선이라는 직장에서 정도전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정도전이 그랬듯이 ‘미리 준비하며, 때를 기다릴줄 아는’ 것을 배웠고, 그대로 실천했다. 뿐만 아니라, 전 직장인 고려에서 체득한 처세술을, 조선이라는 직장에서 십분 활용하여 곳곳에 아군을 만들었다. 거기다 까다로운 상사인 이방원의 언어의 참 뜻도 헤아릴 줄 알았다. 그 결과 하륜은 모든 직장인이 바라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과 정년퇴임을 얻었다. 




평판관리가 중요한 이유. 허균

스스로 몰락을 자초하다.


홍길동전은 허균이 쓴 고전소설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도 파격적이지만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과감하게 비판한 최초의 사회소설이었다는 점에서 허균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로 불릴 만하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엄친아였지만, 결국 역적죄로 사형당하고 만 허균. 무엇이 그를 지독한 불운으로 몰고 갔을까? p 106



홍길동의 저자 허균. 그는 조선 선조 때 문신인 허엽의 아들이자, 허난설헌(허초희)의 동생이다. 뿐만 아니라 아비를 비롯하여 형인 허성을 비롯하여 누이인 허난설헌까지 줄줄이, 그의 집안은 아비고 자식이고 문장가로써 이름을 날렸다. 이 말은 곧, 허균은 마음만 먹으면 나는 새도 훨훨 떨어뜨릴 수 있는 자리까지도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허균은 그러지 못했다. 외려 주식회사 조선에서 참혹하게 정리해고를 당했다(여기에서 말하는 정리해고는 말그대로 진짜 모가지 댕강^^). 그가 참혹하게 정리해고를 당한 이유야, 모두가 다 알듯 ‘역모죄’라는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심지어 허균과 같이 일하던 수많은 사람들도 누명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허균을 도와주지 않았다. 



허균은 과거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등의 관직을 거쳐 30세 때 황해도 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양 기생을 데려와 같이 살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청탁을 일삼는다는 이유 등으로 1년도 되지 않아 파직된다. 또한 어머니가 별세했음에도 찾아가 보지 않고, 유교 예법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기는 커녕 상중에도 고기를 먹어 세간의 비난을 샀다. 당시에는 이단으로 여겨지던 불교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의 평판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되었다. p 107



또 광해군 2년 때에는 허균이 시험관으로 참여한 과거 시험에서 일어난 부정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과거 합격자의 상당수가 시험관의 자제, 조카사위, 동생, 사돈들이었는데 이 중에 허균의 조카와 조카사위도 끼여 있었다. 조카는 정처 없이 떠도는 승려였고 조카사위는 이미 불합격 판정을 받았음에도 기어이 다시 합격자 명단에 끼워 넣었다. p 107



무엇보다 허균은 스스로 많은 적을 만들었다. 자신보다 상관이던 심희수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망신 주어 그의 원한을 샀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는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자처했고, 결국 역모자로 몰렸을 때 누구도 그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p 108



기자헌은 원래 허균과 정치적 동지였고, 그 아들 기준격은 허균의 제자였으나 허균의 공격으로 아버지가 유배를 가자 격노한 기준격은 허균이 평소 역모를 꾸몄다는 탄핵을 한다. 거기에 허균과 가까이 지냈던 곽영도 그를 격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고, 언론기관인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허균의 평한이 얼마나 최악에 도달했는지 짐작이 된다. p 110



나라의 녹을 받기 시작한 허균은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조금 다른 생활을 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본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신경을 쓸법도 한데, 허균은 달랐다. 이미지 메이킹은 커녕, 자기 자신의 부정적인 평판을 무한 생산했다. 심지어 몸소 나서서 적군을 대량 생산하기까지! 자기의 상사를 공격하는 건 기본이고, 자기 동료와 동료의 부친까지도 공격했다. 본인 스스로 아군까지 내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 더해, 간신 중의 간신인 이이첨의 손을 잡기까지 했다. 



이이첨과 손을 잡은 후에 허균은 반대 세력 제거에 앞장섰다. 본인 스스로 아군도 잘라낸 허균이다보니, 반대세력 제거에 앞장 설만도 하다. 이후 허균에게 역모죄 누명이 쓰여졌다. 손을 잡았던 이이첨 마저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까지 허균에게 언지며, 허균을 손절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 그 누구도 허균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쯤되면 비교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조선 초, 청백리로 이름난 맹사성이다. 맹사성도 정치적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동료들이 앞다투어, 맹사성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자칫 잘못하면 본인들까지 연루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맹사성은 그 정도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었다. 내미는 발길 족족 적을 만들어내는 허균과는 달리.



평판이란 조직 내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의 문제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사실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평가가 내려질 때는 업무 성과와 더불어 평판이 함께 반영된다. 내 노력에 대한 보상, 즉 월급과도 직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평판 관리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나의 직장 생활 수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평판이다. p 111



무엇보다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중요하다. 부하 직원이라고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은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물론 부하 직원뿐만 아니라 상사나 동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다. 협력업체나 거래처 직원에게도 주의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말자. p 113



만약 허균이 삐딱선을 타지않고 맹사성 처럼, 동료들을 존중할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허균의 인생은 적어도, ‘누명’을 써서 참혹하게 정리해고 당한채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직장은 정글이다. 절대로 자기 혼자 살아남지 못한다. 좋든 싫든 웃어야하고, 토악질나는 사내정치도 어느정도 견뎌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한다면, 그 자리에서 날카롭게 받아치기 보다는 유연하게 흘러 넘기는 법도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비판을 한다면, 귀담아 듣고, 비판받은 행동에 대해 고치는 자세도 중요하다. 



이제 평생 직장이라는 말은 옛말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에서 필요한 모습은 과거나 현재나 달라지지 않았다. 평생을 다닐 직장이든, 2~3년만 다닐 직장이든, 직장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에는 적을 만들지 말고, 누구나가 존중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퇴사를 하는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사람’ 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본인 역시도 동료들을 존중해주는 것은 기본이다. 두번째가 바로 성과. 성과에 따라 보상이 귀결되는 사회이니, 이 만큼 중요한게 또 있을까. 뭐... 동료들의 존중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일잘러에, 평판도 엄청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긴 하다.



인생을 하륜 처럼 살 것인지, 허균 처럼 살 것인지, 선택은 당신의 몫!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 우리가 사랑이라 말하는 모든 것들 날마다 인문학 4
정지우 지음 / 포르체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는 풀리지 않은 명제가 많다. 대체적으로 이과적인게 많지만, 문과적인 것에서 찾자면- 그건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사랑이란게 무엇이기에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이렇게 사랑에 대해 궁금해 하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지 않다. 무엇보다 사랑의 정의, 사랑의 형태, 사랑의 모습 등등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 자체가 사람마다 다르기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명확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무엇이기에 사람을 바꾸는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글을 써내려 갔다. 그 글은 책이 되었고, 그 책이 나에게 들어왔다. 제목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를 읽고 난 뒤, 한 줄 감상은 이렇다. 사랑에 대한 인문학책이라고 하기에는 1%부족하지만,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에세이라고 했을 때는 이 만한 책이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수많은 모습을 인문학적으로 써내려간 이 책을 읽고 있노라니, 나 역시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본디 사랑이란 내가 사랑하는 상대의 모습에 따라 남녀간의 사랑 뿐만아니라, 부모자식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연예인을 향한 사랑, 반려동/식물을 향한 사랑 등등 수많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형태는 이토록 다양하다. 그리고 나 또한 이토록 다양한 사랑을 해왔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랑을 하고 살았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을 했을, 하고 있을, 할 예정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건 어떨까?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보여준다. (…)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필요했던가!

-롤랑 바트르, 《사랑의 단상》 中


지금껏 많은 사람과 소개팅도 하고, 썸도 타며 만났지만 당신만큼 나에게 ‘특별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은 당신의 특별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욕망이 특별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특별함을 지키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 (…)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세상 모두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큰둥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든 아니든 상관없다. 나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연인에 대한 ‘나만의 지식’이 있다. p 029



우리는 사랑이 나와 당신만이 맺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나와 내 욕망이 맺는 관계이기도 하다. 나는 내 욕망을 사랑한다.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 특별한 욕망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특별한 욕망이 주는 삶의 활기, 인생에서 무언가에 몰입하는 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힘까지…. 우리에게는 삶을 생기로 가득 채우는 이 욕망이 필요하다. p 030




사랑이라는 욕망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단연코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역시도 사랑이라는 욕망 자체를 사랑했었다. 물론 당시 사랑의 대상, 그러니까 내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대상은 일종의 스타, 뮤지컬 배우다. 그 배우가 출연하는 뮤지컬을 보기 위해 피켓팅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피켓팅하는 그 시간의 쫄깃함까지 즐겼다. 주말에는 공연을 보러가니, 평일에는 으쌰으쌰하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배우가 출연하는 공연을 보기전 까지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두근거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보고 나온 뒤에는 허했다. 다음 공연 스케쥴이 잡힐 때까지 쭉 마음이 허했다. 그때는 그저 공연을 보지 못하는 거에 대한 공허함이라 생각했는데, 다시금 돌이켜보니 내가 사랑한건, 사랑이라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나의 언어로 바꾸자면, 나의 시간과 비용을 써가며 얻어낸 티켓과 공연을 보러가기전의 두근거림과 기다림. 그 두근거림과 기다림이 있었기에, 나는 디데이를 맞이하기 위한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었지않았나 싶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고. 지금의 내가 사랑하는 욕망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그저 아기 보는데 하루 24시간이 너무 후딱 지나가기에, 욕망을 사랑할 시간조차도 지금의 나에겐 사치인 느낌이랄까.



우리는 마술에 걸린 채 황홀해하며, 잠들지 않고 잠 속에 있으며, 잠들기 전의 어린애 같은 쾌감 속에 있다. (…) 시간, 법률, 금기 등. 아무것도 고갈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원해지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늘 엄마와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고민하다가 “안아주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내심 ‘많이 좋아하는 거’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아이의 말이 생경하게 들렸다. 아이에게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무언가인 모양이었다. 기분 좋고, 따스하고, 행복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구체적인 행위 그 자체, 즉 안아주는 행위가 곧 사랑인 것이다. p 047



완벽한 껴안음의 순간에,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그 따사로운 평온으로 완전하게 채워진다. 그 속에서는 다른 욕망의 작동이 정지하며, 그저 ‘괜찮은’ 상태가 된다. 욕망과 결핍이 인생을 계속 어딘가로 이끌고 간다면, 포옹과 충일은 우리를 여기에 머무르게 한다. 꼭 껴안고 있으면 불안에 떨며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쫓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서 바르트는 포옹이야말로 사랑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다. p 048



아이에게 언젠가 “왜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아?”라는 나의 볼멘소리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엄마가 더 많이 안아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꽤 반성했다. 아이에게 사랑이란, 아주 구체적인 감각이다. 어른들이 따지기 바쁜 능력이니 미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섬세하며 생생하게 존재하는 감각의 향연이다. 아이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안다. p 049




완벽한 껴안음의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 그 자체다. 나 역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건, 특히 안아주는 그 품이 따뜻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분명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남녀간의 사랑이든, 가족간의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그 어떤 사랑의 모습 중에서 거의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안아주는 것’일테니까. 



나와 신랑은 육아로 인해 하루하루가 너무 고되다. 말못하는 아기와 실랑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다가도, 아기를 안고 있으면 1분전까지도 힘들었던 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기를 안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힘들었었나?’ 싶을정도로 말이다. 힘들 때는 내가 아기를 사랑하고 있는게 맞을까 싶다가도, 아기를 안는 순간 ‘아, 나는 우리 아기를 정말 사랑하는구나’하고 확신한다. 육퇴 후에 나에게 고생했다며 안아주는 신랑 품도 그렇다. 정말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잠시잠깐 안는 것으로도 나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안아주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그토록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우리의 삶을 온통 뒤집어 놓은 그들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의미한 존재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안드레 애치먼, 《알리바이》 中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눈 앞에 있다. 그는 온통 내 삶을 뒤집어 놓았다. (…) 그렇게 격렬한 감정들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한때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기묘하다. 예를 들어 학교나 직장 등 한 공간에서 그 사람을 오랫동안 보아온 경우라면 더욱 그럴 법하다. 지난 몇 달간, 혹은 지난 몇 년간 나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였던 그가 나와 ‘연인관계’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p 081



어제까지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당신이 오늘부터 나와 연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일어난다. 일단 ‘연인이라면 해야하는 것’의 목록이 각자의 가슴에 주어진다. (…) 즉, 연인 관계로 진입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서로에게 의무를 가진 존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내게 그런 의무가 없다. 오직 당신만이 그런 의무가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당신만이 내게 그만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된다. p 081~082



그렇기에 사랑을 대할 때는, 오로지 감정만 떠올리기보다 앞서 말한 ‘계약상 의무 준수’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사랑의 핵심이 감정일 지는 모르지만, 그 감정을 지탱하는 형식 또한 빼놓고 사랑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떤 형식에 진입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 된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때론 의미와 형식, 그리고 의무를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딱딱한 것들’ 또한 사랑의 일부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사랑에 딱딱한 태도가 필요하다. p 083




신랑과 가끔 ‘라떼’를 이야기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라떼란,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바로 그 시기다.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약 이십여년간의 시간. 그 시간동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의미가 없던, 그야말로 ‘타인’이었다. 어쩌면 그 이십여년간 어딘가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철저하게 타인이었다. 그렇게 타인으로 살다가,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연애가 끝나고, 결혼을 하였고, 지금은 이쁜 아기를 키우고 있다. 이것만큼 놀라운 일이 또 어디있을까? 생면부지의 생판 남인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연인이 된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아닌,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났을 가능성도 있었을텐데, 그럼에도 우리가 만난 것. 난 지금도 이 모든게 놀랍고 신기하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는 이 책에서 말하는 소위 ‘계약상 의무 준수’에 대해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서로에게 연락을 하고, 혹시라도 연락이 힘든 상황이 올 경우 그전에 어떠한 상황인지 미리 이야기를 하는 등,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다. 그 덕분에 연애기간, 결혼, 그리고 현재까지 1n년간 큰 싸움(?)없이 아주 잘 살고 있다. 뭐, 아이가 학교를 가기 시작하면 또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나와 신랑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변하지 않을 듯 싶다.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진만을 마시지는 말라. (…)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칼릴 지브란, 《예언자》 中


결혼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전의 어떤 연애보다 타인과 더 깊이 사생활을 모두 공유한다는 점일 것이다. 사회마다 결혼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양가 부모님등 가족들의 사정까지 서로 깊이 알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 간다는 걸 의미한다. 연애 때와는 다른 밀착감이 생기고, 서로가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되어간다. p 105



결혼에 위기가 찾아온다면,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서로 결합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나면 사랑의 위기가 시작된다. 너무 오래 지내면서 모든 걸 다 알게 되어 서로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이 사라지고, 더는 새롭게 할 이야기나 재미가 없어 질리는 것이 사랑과 결혼의 역설일지도 모른다. 그런 결혼에 대해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라고 말이다. p 106



상대가 자기만의 내면을 가진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유념하면 지루했던 일상도 조금은 달라진다. 나는 자기만의 감각과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한 존재와 함께 걷고 있다. 그러면 그의 기분이나 마음이 궁금해진다. 그에게 지금 이 산책의 기분은 어떠하냐고. 오늘은 어떤 마음이냐고 묻게 된다. 그 대답에서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되고, 또 그와 비슷하거나 다른 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것만으로도 ‘당연한’ 존재가 될 뻔했던 내 곁의 사람은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 서게 된다. 나와 당신은 함께 있지만 동시에 거리를 가진, 고유한 존재로 실재한다. p 107




신랑과 난, 연애시절의 환상과 호기심은 당연히 사라진지 오래지만, 상대방을 향한 감정은 연애시절보다 결혼한 지금 더 커졌다면 커졌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연애기간까지 합치면, 내 나이의 ⅓ 정도나 되는 다소 긴(?) 기간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서로를 향한 존중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지켜주고, 함께하는 시간은 함께하는 것. 



연애할 때도 그랬지만, 결혼한 지금도 모든 일을 둘이서 다 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디 오랜 시간을 타인으로 살아온 우리다. 하루 24시간 붙어서 생활한다면, 어떻게든 탈이 날 수 밖에 없다. 잠시 잠깐이라도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하다못해 서로가 직장에 있는 시간이라도.



물론 지금의 나는...육아휴직 중인지라 혼자 있는 시간이 흔치 않다. 혼자 있고 싶으나, 내 앞에는 뽈뽈거리며 기어다니는 아기가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다행인건, 우리 신랑이 주말에는 아기를 전담케어하며, 나에게 조금이라도 혼자있는 시간을 주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신랑의 이러한 사랑과 배려가 내 원동력이 되어, 나의 온 힘을 우리 아기에게 쏟아붓고 있다. 물론, 신랑에게도 나누어줄 힘을 조금은 남겨놔야하는데, 온 종일 아기를 보다보니....아직까지 그건 좀 무리인듯^_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년 6월,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천보산을 갔었다. 집에서 멀기도 멀거니와, 이름도 생소한 천보산을 갔던 이유는 단 하나다. 제일 험난했던 시기에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비참한 일생을 지낸 한 여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여인의 이름은 이애숙. 생소하다면 생소한 그 이름. 하지만 그녀의 봉호를 들으면 ‘아!’ 하고 알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조선 왕 효종에게 받은 봉호는 바로 의순공주 이다.



의순공주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에서 여러차례 포스팅을 했다. 아마 잊을만 하면 포스팅을 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의순공주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 서평을 시작으로, 오롯이 의순공주와 환향녀에 대한 포스팅, 족두리묘 답사 포스팅, 그리고 의순공주와 당대 상황이 쓰여진 역사책 서평이 있었다. 내가 이토록 의순공주에 대한 포스팅을 끊임없이 한 이유는 단 하나다.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이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의순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의 흑역사다. 사람에 따라서는 알고 싶지 않은 역사이고, 왜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마음에 안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순공주의 이야기는 못난 리더와 못난 남자들의 환장의 콜라보로 이뤄진 이야기기 때문이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지만, 슬프게도 역사적 사실인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도 떡하니 기록되어있는 이야기다.



의순공주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살았던 조선 중기 (인조 ~ 효종) 대의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한다.


※빠르게 훑어보는 인조 ~ 효종까지.


콤플렉스로 중무장된 한 사람이 반정으로 왕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선조이고, 아버지는 선조의 아들 정원군(조선왕실 최초의 싸이코패스)이다. 할아버지 선조와 아비인 정원군. 그 핏줄을 이어받아 왕이 된 그는 바로 능양군, 인조다.


삼촌 광해군을 몰아내고, 1623년에 왕위에 오른 인조는 즉위 직후 광해군의 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때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전쟁이 막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라는 점이다. 당시 광해군은 그 유명한 중립외교로 명나라와 금나라(청나라) 사이에서 완벽한 줄타기를 하며,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조선 땅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광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망해가는 명나라를 선택했다. 그렇게 조선의 안전이 다시 한번 송두리째 흔들린다.


1627년 금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정묘호란). 이후 인조는 금나라와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 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인조는 다시 금나라의 뒷통수를 쳤다. 이에 빡친 금나라는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1636년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병자호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원래는 강화도로 가려하였으나, 강화도로 가기 전에 청군에 길막당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하다 결국 삼전도(현재 잠실 부근)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며,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굴욕을 맛 보았고, 조선의 왕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청나라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했지만, 소현세자가 요절한다. 결국 동생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바로 효종이다. 





북벌정책으로 유명한 효종이다. 하지만 실상은 북벌다운 북벌은 한 적이 없는 효종이다. 명분이 없는 왕위였기에, 아비를 위하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북벌이었던 것이다. 뭐, 여기까진 그렇다치고. 다시 의순공주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청나라는 효종에게 조선 왕실의 딸을 공녀를 요청한다. 하지만 효종과 종친들은 자신의 딸들을 오랑캐에게 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공녀를 안보낼 수도 없는 일, 결국 종친의 한 사람이었던 금림군 이개윤이 본인의 딸을 공녀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금림군은 효종의 10촌으로, 종친이라고는 해도 거의 남이나 다를 바 없었던, 성씨만 조선 이씨였던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힘없는 종친이 자의반, 타의반 총대를 맨것이다.



(금림군의 딸)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을 걱정하며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자기 딸 대신 오랑캐 나라로 간다는 금림군의 딸 이애숙을, 효종은 자신의 양녀로 삼았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있는 의순공주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효종의 양녀로 청나라로 간 의순공주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당시 청나라 권력가였던 예친왕 도르곤의 부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부부사이도 좋았던 듯 보인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해했다. 그 사실은 의정부 천보산에 위치한 족두리묘와 정주당놀이로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과 정축하성으로 인해 울분에 차 있는 뭇 백성들 사이에 '왕실에서 공주까지 오랑캐에게 바쳤다' 라는 원성이 들끓었지. 조정에서는 몇 달 동안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임금께서 자신의 딸을 빼돌리고 종친의 자녀인 너를 대신 보낸 일 까지 소문이 나서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형편이 됐단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바로 이 족두리 묘였어. 네가 연경에서 오라비들을 통해 돌려보낸 족두리를 갖고 이야기를 지어낸거야. 


의순공주는 끝내 국경을 넘지 않았다. 국경으로 가던 중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가 없었다면서 평안도 정주 강에 몸을 던졌고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족두리만 물에 떠 올랐다는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멀쩡히 살아있는 의순공주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뭐, 의순공주가 청나라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겠지만 슬프게도, 이후 의순공주에게는 비극이 연달아 일어난다. 힘든 기간을 버티며, 우여곡절 끝에 겨우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를 공주로 봉했던 조선왕실조차도 말이다. 하기사, 조선에서는 이미 죽어서 무덤까지 만든 사람인데, 살아서 돌아왔으니 반가울리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순공주는 조선의 무능을, 자신들의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비단 의순공주 뿐만이 아니다. 조선에는 의순공주를 포함하여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들은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인한 피해자였다. 그렇기에 조선은 그녀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정축하성의 국치*로 전쟁이 끝난 뒤 청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석방 교섭이 있었던 기묘년 이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여인들만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 실절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내쳐지고 시집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어쩌다가 도성으로 들어간 여인들도 다른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별당이나 뒷방에서 유폐되다시피 홀로 쓸쓸히 지내야 했다. 대들보에 명주실을 내려 목을 걸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찌른 여인들이 부지기수 였다. 집 안에 있는 샘에 거꾸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집안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여인들은 깊은 강을 찾아 몸을 던졌다. 대게는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속환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을 저질렀으니, 이혼을 하도록 해달라는 상소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환향한 지 한 해 만에 그렇게 한이 맺힌 채 죽어간 여성이 대략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고 했다.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정축하성의 국치: 삼전도의 굴욕


숱한 여자들이 청으로 끌려갔다가 매우 적은 숫자로 돌아왔다. 환향녀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이들을 환향녀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괄시했다. 그녀들을 괄시한 명분은 뚜렷했다. 조선의 여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오랑캐에게 복수는 하지 못할 망정, 끌려갔을 때 죽지도 않고 살아서 돌아왔으니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힘없는 여인들에게 쏟아낸 것이,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이었다. 자기들이 무능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로 인한 피해를 조선의 여성들이 입었음에도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은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다. 



의순공주는 그저 비극적인 삶을 산 여인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죽지 못해 살았던 수많은 환향녀들을 대변한다. 그녀의 삶은 무능하고 치졸했던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 조선의 남자들을 고발한다. 




과거에는 의순공주 비극적인 삶 같은 조선의 흑역사를 볼 때마다 ‘만약’ 이란 생각을 했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럼에도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이제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아니라, ‘앞으로’를 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훗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생각 말이다.



의순공주가 살았던 당시 조선을 보면, 임진/정유재란이 일어난지 오래 안지나서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번 대규모의 외침이 있었으므로, 이후 방비 및 외교에 대해 ‘제대로’ 생각했더라면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들은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 뿐인가? 약 이백여년 뒤 여러차례 외침이 있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다. ‘앞으로’를 생각하지 않아서, 흑역사가 계속 반복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저런 외침에 있겠냐고 말하는 삶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끊이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음. 확실한 건 ‘앞으로’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21세기에도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겨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