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천보산을 갔었다. 집에서 멀기도 멀거니와, 이름도 생소한 천보산을 갔던 이유는 단 하나다. 제일 험난했던 시기에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비참한 일생을 지낸 한 여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여인의 이름은 이애숙. 생소하다면 생소한 그 이름. 하지만 그녀의 봉호를 들으면 ‘아!’ 하고 알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조선 왕 효종에게 받은 봉호는 바로 의순공주 이다.
의순공주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에서 여러차례 포스팅을 했다. 아마 잊을만 하면 포스팅을 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의순공주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 서평을 시작으로, 오롯이 의순공주와 환향녀에 대한 포스팅, 족두리묘 답사 포스팅, 그리고 의순공주와 당대 상황이 쓰여진 역사책 서평이 있었다. 내가 이토록 의순공주에 대한 포스팅을 끊임없이 한 이유는 단 하나다.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이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의순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의 흑역사다. 사람에 따라서는 알고 싶지 않은 역사이고, 왜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마음에 안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순공주의 이야기는 못난 리더와 못난 남자들의 환장의 콜라보로 이뤄진 이야기기 때문이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지만, 슬프게도 역사적 사실인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도 떡하니 기록되어있는 이야기다.
의순공주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살았던 조선 중기 (인조 ~ 효종) 대의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한다.
※빠르게 훑어보는 인조 ~ 효종까지.
콤플렉스로 중무장된 한 사람이 반정으로 왕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선조이고, 아버지는 선조의 아들 정원군(조선왕실 최초의 싸이코패스)이다. 할아버지 선조와 아비인 정원군. 그 핏줄을 이어받아 왕이 된 그는 바로 능양군, 인조다.
삼촌 광해군을 몰아내고, 1623년에 왕위에 오른 인조는 즉위 직후 광해군의 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때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전쟁이 막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라는 점이다. 당시 광해군은 그 유명한 중립외교로 명나라와 금나라(청나라) 사이에서 완벽한 줄타기를 하며,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조선 땅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광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망해가는 명나라를 선택했다. 그렇게 조선의 안전이 다시 한번 송두리째 흔들린다.
1627년 금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정묘호란). 이후 인조는 금나라와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 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인조는 다시 금나라의 뒷통수를 쳤다. 이에 빡친 금나라는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1636년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병자호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원래는 강화도로 가려하였으나, 강화도로 가기 전에 청군에 길막당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하다 결국 삼전도(현재 잠실 부근)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며,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굴욕을 맛 보았고, 조선의 왕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청나라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했지만, 소현세자가 요절한다. 결국 동생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바로 효종이다.
북벌정책으로 유명한 효종이다. 하지만 실상은 북벌다운 북벌은 한 적이 없는 효종이다. 명분이 없는 왕위였기에, 아비를 위하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북벌이었던 것이다. 뭐, 여기까진 그렇다치고. 다시 의순공주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청나라는 효종에게 조선 왕실의 딸을 공녀를 요청한다. 하지만 효종과 종친들은 자신의 딸들을 오랑캐에게 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공녀를 안보낼 수도 없는 일, 결국 종친의 한 사람이었던 금림군 이개윤이 본인의 딸을 공녀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금림군은 효종의 10촌으로, 종친이라고는 해도 거의 남이나 다를 바 없었던, 성씨만 조선 이씨였던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힘없는 종친이 자의반, 타의반 총대를 맨것이다.
(금림군의 딸)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을 걱정하며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자기 딸 대신 오랑캐 나라로 간다는 금림군의 딸 이애숙을, 효종은 자신의 양녀로 삼았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있는 의순공주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효종의 양녀로 청나라로 간 의순공주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당시 청나라 권력가였던 예친왕 도르곤의 부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부부사이도 좋았던 듯 보인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해했다. 그 사실은 의정부 천보산에 위치한 족두리묘와 정주당놀이로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과 정축하성으로 인해 울분에 차 있는 뭇 백성들 사이에 '왕실에서 공주까지 오랑캐에게 바쳤다' 라는 원성이 들끓었지. 조정에서는 몇 달 동안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임금께서 자신의 딸을 빼돌리고 종친의 자녀인 너를 대신 보낸 일 까지 소문이 나서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형편이 됐단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바로 이 족두리 묘였어. 네가 연경에서 오라비들을 통해 돌려보낸 족두리를 갖고 이야기를 지어낸거야.
의순공주는 끝내 국경을 넘지 않았다. 국경으로 가던 중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가 없었다면서 평안도 정주 강에 몸을 던졌고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족두리만 물에 떠 올랐다는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멀쩡히 살아있는 의순공주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뭐, 의순공주가 청나라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겠지만 슬프게도, 이후 의순공주에게는 비극이 연달아 일어난다. 힘든 기간을 버티며, 우여곡절 끝에 겨우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를 공주로 봉했던 조선왕실조차도 말이다. 하기사, 조선에서는 이미 죽어서 무덤까지 만든 사람인데, 살아서 돌아왔으니 반가울리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순공주는 조선의 무능을, 자신들의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비단 의순공주 뿐만이 아니다. 조선에는 의순공주를 포함하여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들은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인한 피해자였다. 그렇기에 조선은 그녀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정축하성의 국치*로 전쟁이 끝난 뒤 청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석방 교섭이 있었던 기묘년 이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여인들만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 실절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내쳐지고 시집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어쩌다가 도성으로 들어간 여인들도 다른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별당이나 뒷방에서 유폐되다시피 홀로 쓸쓸히 지내야 했다. 대들보에 명주실을 내려 목을 걸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찌른 여인들이 부지기수 였다. 집 안에 있는 샘에 거꾸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집안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여인들은 깊은 강을 찾아 몸을 던졌다. 대게는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속환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을 저질렀으니, 이혼을 하도록 해달라는 상소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환향한 지 한 해 만에 그렇게 한이 맺힌 채 죽어간 여성이 대략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고 했다.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정축하성의 국치: 삼전도의 굴욕
숱한 여자들이 청으로 끌려갔다가 매우 적은 숫자로 돌아왔다. 환향녀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이들을 환향녀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괄시했다. 그녀들을 괄시한 명분은 뚜렷했다. 조선의 여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오랑캐에게 복수는 하지 못할 망정, 끌려갔을 때 죽지도 않고 살아서 돌아왔으니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힘없는 여인들에게 쏟아낸 것이,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이었다. 자기들이 무능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로 인한 피해를 조선의 여성들이 입었음에도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은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다.
의순공주는 그저 비극적인 삶을 산 여인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죽지 못해 살았던 수많은 환향녀들을 대변한다. 그녀의 삶은 무능하고 치졸했던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 조선의 남자들을 고발한다.
과거에는 의순공주 비극적인 삶 같은 조선의 흑역사를 볼 때마다 ‘만약’ 이란 생각을 했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럼에도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이제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아니라, ‘앞으로’를 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훗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생각 말이다.
의순공주가 살았던 당시 조선을 보면, 임진/정유재란이 일어난지 오래 안지나서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번 대규모의 외침이 있었으므로, 이후 방비 및 외교에 대해 ‘제대로’ 생각했더라면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들은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 뿐인가? 약 이백여년 뒤 여러차례 외침이 있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다. ‘앞으로’를 생각하지 않아서, 흑역사가 계속 반복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저런 외침에 있겠냐고 말하는 삶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끊이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음. 확실한 건 ‘앞으로’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21세기에도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겨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