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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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군주가 세 명 있다. 첫번째는 선조(임진왜란), 두번재는 인조(이괄의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마지막은 고종(아관파천). 셋 모두 조선의 혼군 중의 혼군이라 말할 수 있지만(내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왕들이라고 손꼽기도 하지만), 이 세 명의 왕 중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횟수에 대해 우위를 따지자면, 단연코 ‘인조’ 다. 도망간 횟수가 장장 세 번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도망의 고수 중의 최고수랄까.




나는 인조에 대한 포스팅을 꽤 여러번 올렸다. 관련 역사책 서평, 인조와 관련된 유적지 답사, 인조와 관련된 인물에 대한 유적지 답사 등 말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인조를 조선 최고의 혼군으로 손꼽을 정도로 정말 싫어하지만,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인조에 대해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어떠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고로.. 그 연장선에서 최근 읽은 책이 「인조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이다. 병자호란을 떠나서 인조 대의 이야기는 명치 끝이 꽉 막히고, 고구마 오백만개는 먹은 만큼 답답해지지만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엄연히 우리의 역사이니. 그것도 아주 제대로 알아야하는 역사이니. 여러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나는 빛나는 역사도 중요하지만 어두운 역사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이 책은 ‘병자호란’이라는 줄기를 기준으로 인조라는 인물에 대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한다. 병자호란 전, 병자호란 중, 병자호란 후 이렇게 말이다. 오롯이 인조에 대한 설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까지 같이 포함해서. 그도 그럴 것이, 병자호란은 후금(청나라)과 조선이 치룬 전투이자 패배한 전투이다. 심지어 병자호란에 앞서, 똑같이 후금이 처들어온 정묘호란이 있었다. 또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약 30여년 전에는 일본과 7년간 싸워온(명나라도 참전한), 그 유명한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있었다. 즉, 병자호란을 설명하기 위해선 당시 한/중/일 정세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 아, 뭐 -.. 인조대에선 일본의 정세는 대충 임진왜란 정도만 알면 되긴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서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병자호란을 일으킨 주체가 청나라이므로 그 1차적 책임은 전쟁을 주도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돌려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앞뒤 정황을 살펴보면 인조를 정점으로 한 서인 정권에서 자초한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 간에는 병자호란 발발의 책임이 청 태종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책은 전란의 책임이 인조에게 있다는 관점하게 기술하고 있다. 전란 발발의 책임을 인조에게 물은 것은 왕권 국가에서는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로 여길 만큼 왕의 권한이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p 008



나 역시도 병자호란 발발의 전적인 책임은 인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서문부터 완전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게되었달까 뭐랄까.



저자의 말대로 조선은 왕권 국가였으며,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이었다. 즉 왕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강토와 백성이 평안하게 사느냐, 죽어나가느냐가 달려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조는 어떤 왕이었을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인조는 무려 세 번이나 강토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정묘호란, 병자호란 두번의 외침을 받았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병자호란의 끝을 모욕적인 ‘삼배고구두례’로 끝냈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자기 아들이자, 세자였던 소현세자를 비롯한 그의 일가를 죽음으로 몬 것일까? 



하.. 인조라는 인물이 참 다채로운 인물이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질문들이 생성된다. 



나야 이곳저곳 인조와 관련된 유적지를 다녀왔고, 인조/병자호란과 관련된 역사책을 꽤 많이 읽었기에 내 나름대로 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답을 찾이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 역사책 「인조 1636」을 추천하고 싶다. 인조를 향한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이만큼 최적인 역사책이 또 있을까?




이 포스팅에선 이 책의 ‘병자호란 전 인조’ 챕터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써보려 한다.



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이었을 적을 보자. 


일본과의 참혹한 7년 전쟁, 임진왜란 당시 재위했던 왕 선조. 그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인조와 관련된 인물만 이야기하자면 광해군과 정원군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다음 왕이 되었다. 정원군은 인조의 부친이다. 뭐, 임진왜란 이야기나, 광해군의 외교나, 정원군의 조선 최고의 싸이코패스였다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광해군 재위 말, 당시 능양군이었던 인조는 반정을 일으켰고 그렇게 광해군 다음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인조 반정은 인조의 공보다는, 엄연히 신하들의 공이 월등히 컸다. 공신들도 어마어마했다. 근데 공신들끼리도 알력다툼이 꽤나 있었는데, 결과론적으론 그로 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괄이 무서웠던 인조와 그 외 공신들은,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갔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이 때는 임진/정유재란이 끝난지 약 40여년도 채 흐르지 않았던 시기다. 오롯이 나라 재건에 힘써야 했던 시기다. 하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나라 재건은 개뿔, 권력 다툼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반면에 대륙에선 명나라가 쇠퇴하고, 누루하치의 후금이 세력을 확장하는 등 하루하루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조선이었기에, 만약을 위해서라도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를 펼쳐야했으나, 슬프게도 인조는 그럴 생각이 단 한개도 없었다. 무엇보다 인조는 전 왕이었던 광해군과 1부터 10까지 반대로 행동했으니 말이다(이건 작금의 정치와도 크게 다른게 없어서 더 없이 슬픈 모습). 



인조는 죽으나 사나 친명배금을 외쳤다. 그 결과 후금이 조선으로 쳐들어오니, 바로 정묘호란이다. 인조는 이 때, 강토와 백성을 버리고 두번째 도망을 간다.


적군이 의주를 함락하고 곧 안주에 이를 것이라는 치계가 조정에 당도한 것은 1월 17일 이었다. 치계를 접한 인조와 중신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 나라인 후금을 배척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정권이었다. (…) 인조는 도체찰사로 임명한 이원익과 좌의정 신흠을 포함해서 26명의 배정관을 하여금 세자를 따르게 하고, 이원익의 후임으로는 부체찰사로 임명했던 김류를 승진 임명했다. 세자에게 분조를 맡긴 인조는 종묘의 신주와 종실 가족들을 이끌고 강화도 몽진을 결정했다. p 104



노량나루에서 배를 탄 인조의 몽진 행렬은 양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통진에 도착한 인조는 김포에 조성된 자신의 생모 ‘연주부부인’이 잠들어 있는 육경원을 참배하느라고 이틀을 머문다. 인조의 생모는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626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 이때 인조는 한성부의 방민 1,200명을 뽑아 산역꾼으로 보내고, 여기에 더하여 도성 백성들 중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매 호당 1인씩 차출한 여사군(상여꾼)만도 4,700명에 달했다.(…) 인조는 자신의 생모가 왕후를 지내지도 않았을뿐더러 몽진 중임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행했다. 그 후 후금과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귀환길에 인조는 또다시 육경원 참배를 강행했다. p 105



정말 대단한 왕 나셨다. 백성을 두번이나 버리면서도, 도망중에 자신의 모친 무덤은 굳이 찾아가서 참배하는 왕이라니. 생각해보면, 그렇다. 제대로 된 명분 따위 없이 왕이 된 인조다. 나라 꼴이 처참하든 말든 그저 전 정권이 추진하던 일은 무조건 반대로만 하던 인조다. 그런 인조가 어떻게든 쥐꼬리만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충,효가 중요한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 인조가 그나마 내보일 만한건 다름아닌 ‘효’.



뭐, 여튼 그렇게 인조는 강토와 백성을 내던지고 두번째 도망을 갔다.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자기 몸 하나 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럼 인조 밑에 있던 신하들은 어땠을까?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곧죽어도 명나라에 사대하며 오랑캐랑은 강화하지 않겠다는 척화파와, 허울뿐인 명분은 버리고 강화하자는 주화파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정묘호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 인조가 탁상공론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도 백성들은 아주 참혹하게 유린되고 있었다.



최명길을 비롯한 몇몇 중신들은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강화를 반대하는 척화파들은 조선 땅을 침범하고 죄 없는 백성을 살해안 오랑캐들과 화해 운운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일이라고 열을 올렸다. 반면에 강화를 찬성하는 주화파 측에서는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백성들은 어육이 되고 있는 마당에 허울뿐인 명분만 내세울 거냐며 맞받아쳤다. p 107



“지금 이후로 조선과 후금국 중 누구라도 맹약을 어긴다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될 것”이라 낭독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술과 고기를 먹는 것으로써 대미를 장식했다. 1627년 3월 3일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협상을 맺은 내용은 ‘조약’이라는 말 대신 ‘약조’라는 문구를 사용하는데, 그해가 정묘년이므로 ‘정묘약조’라 부른다. 4개 조항으로 된 정묘약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한다.

둘째,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하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된다.

넷째,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 p 109



결국 조선은 후금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질 전쟁이었다. 아니, 전 정권이었던 광해군 처럼 외교에 조금이나마 신경을 썼다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후금은 생각보다 조선을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후금이 바라는건 조선과의 ‘형제국’, 그리고 ‘자신들과 명나라 싸움에 끼지 말것’ 이었으니까. 뭐, 이 외에도 후금이 요구한 건 자잘자잘하게 많긴 하지만 전쟁의 승자와 패자로 보았을 땐 그러한 요구는 어쩔수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정도면 과거 몽고가 고려를 대접한 것보다는 조금 낮지만, 그럼에도 꽤나 후한 대접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우리 조선은 200년 넘게 명을 부모지국으로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에는 재조지은까지 입었는데, 어떻게 부모의 나라를 치는데 협조하겠느냐”며 그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당시 인조가 저들의 요구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은 그의 용기라기보다는 평소에 지녔던 숭명사상이 그 척도였다. 그러나 숭명 사상의 척도를 떠나 그 무렵 조선의 재정 상태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최악이었다. 이런 저런 사정이 겹처 조선에서는 날이 갈수록 배금 사상만 높아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었다. p 120



즉위식에 참석한 패륵들과 대신들은 물론 만주인, 한인, 몽골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새 황제에게 삼궤고구두를 행하고 만세를 불렀으나, 유독 조선의 춘신사 나덕헌과 이확만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하늘 아래에는 오직 한 분의 황제, 즉 명의 숭정제만이 황제였을 뿐 그 외 다른 사람들이 황제를 칭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 여겼다. 나덕헌과 이확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청의 관료들은 격분했다. p 127



명은 망했다. 후금이 대륙의 주인이 되었고, 국호를 ‘청’으로 바꾸며 황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는 시종일관 숭명배금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동안 인조가 한 일 이라고는 자신의 생부 정원군을 추존왕으로, 생모 구씨를 추존왕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한번 언급하지만 정원군은 실록에도 언급될 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싸이코패스중의 싸이코패스다.



아니, 다 떠나서 싸이코패스일 지언정 자신의 부친이니 효를 다하기 위해 왕으로 추존했다고 치자. 하지만 친명배금은 왜? 이쯤되면 무능의 끝판왕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자기가 끌어내린 광해군과는 반대로 간다한들, 이미 명은 망했고, 대륙은 청나라의 손에 넘어갔다. 이쯤되면 명은 손절하고 청나라에 잘 보여야하는게 맞다. 더군다나 조선은 이미 정묘년에 청의 아우국이 되기로 약조하였던 전적이 있다. 그 약조만 잘 지켰어도, 중간을 갔을텐데 인조는 기어이 스스로 파국을 불러들였다.



인조는 3월 1일 팔도에 내린 ‘절화교서’를 통해 “오랑캐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조만간에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꼐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고 나라의 은해에 보답하라”고 하달했다. 인조는 교서를 발표하고 나서 엿새가 지난 3월 7일 평안감사에게 문제의 ‘절화교서’를 금위영 군사 편에 보냈으나, 어이없게도 그 교서는 도중에 후금 군사에게 탈취당하고 만다.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절화교서를 본 홍타이지는 그 즉시 여러 패륵과 대신들에게 절화교서를 보이고 이에 대한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이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패륵과 대신들 모두가 격앙된 어조로 “대군을 출정시켜 조선국을 멸하자!”고 했으나, 홍타이지는 “사신을 보내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데려오라 하여 그들이 응하면 그대로 덮어두겠으나, 만약 불응하면 그때 가서 조선 정벌을 논의하자“고 하며 한 호흡 늦춘다. p 135



인조 재위기는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이 채 안되어, 나라가 피폐했을 당시였다. 하지만 인조는 반정 이후 공신들의 책록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이괄의 난으로 인해 한번 백성을 버렸고, 끊임없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인해 정묘호란이 일어나 두번 백성을 버렸다. 그 와중에 인조가 한 일이라곤 전 정권인 광해군과의 반대로 반대로, 오직 반대로 가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부친과 모친의 추존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첫번째 왕비였던 인열왕후가 죽자, 그 장례식도 아주 호화롭게 치렀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청나라와 ‘절교’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여기까지가 병자호란 전 인조의 행보다. 이 이후의 인조의 행보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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