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군복의 역사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쓰지모토 요시후미 지음, 쓰지모토 레이코 그림,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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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 권, 두 권 모으고 있는 세계사책이 있다. 시리즈물은 단연코 아니다. 다만 분류가 같다. 바로 ‘전쟁사’. 전쟁사 관련 책을 모으기 시작한 건, 아마도 임용한 교수님 책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의도한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전쟁사 관련 책들이 여러권 보이길래, 책장 한켠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그 모든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_T. 이쯤에서 돌이켜보면, 난 정말 책을 읽는 것 보다 모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게 확실한 것 같기도. 뭐 여튼, 오늘 포스팅하는 세계사책은 여러 권의 전쟁사 책 중 하나인 『전쟁과 군복의 역사』 라는 전쟁사 세계사책이다. 



이 책 『전쟁과 군복의 역사』는 제목에서도 보이듯 ‘전쟁’과, 전쟁과 당대 시대상에 따라 발전한 ‘군복’의 역사를 소개한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가 현재 입고있는 옷이나 군복은 모두 서양에서 출발한 의류이기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전쟁과 군복의 역사도 당연히 서양 즉, 유럽을 중심이다. 즉, 동양이나 아시아 전통 군복(?)이 왜 없는가에 대한 의문은 애초에 해당이 안된다는 것!




내 나름대로는 역사더쿠라 세계사에서 비중있는 전쟁들은 꽤 알고 있는 편이다. 여러 세계사책으로 읽기도 했고, 임용한 교수님의 《토크멘터리 전쟁사》 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전쟁사란, 어디까지나 ‘전쟁’에 대한 것이다. 전쟁에 따른 정치, 문화, 사회의 변동 이런 느낌이랄까? 오로지 그런 것들만 머리속에 넘처날 뿐, 군복의 역사는 진심 1도 관심이 없었다. 아! 굳이 굳이 군복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을 찾자면, ‘버버리 코트가 군복에서 시작되었다’와 ‘세일러복이 해군에서 시작되었다’ 이 정도 랄까. 하하하.



즉, 군복의 역사는 제대로 아는 것이 진짜 1도 없었기에, 이 세계사책 『전쟁과 군복의 역사』는 나에게 신문물(?) 이었다. 제일 놀라웠던건, 군복의 역사가 신사복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는 점이랄까. 넥타이부터 시작해서, 구두, 투피스(정장), 쓰리피스(정장) 등 각종 패션의 산물이 군복에서부터 시작한거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세계사 속 전쟁에 대해선 나보다도 엄청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우리 신랑조차도 이런 내용이 처음이었다고 한다면 정말 말 다한듯 싶다.



물론! 군복의 역사가 신사복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서, 고대 부터 그러했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또 당연히 NO 다. 고대야 뭐, 동양이고 서양이고 군복이라 말하기 민망할정도로 헐벗은(?) 옷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최초로 통일된 군복이 등장한게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하니, 와. 이건 놀랄 노짜다. 하긴, 생각해보면 입고 있는 옷이 다 다르면, 싸울 때 니편인지 내편인지 알 수 없을테니 군복을 통일하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중세시대의 군복은 전쟁에서 얼마나 실용적인지도 중요하지만, 비전쟁시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편리한가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왜그런고 하면, 당시의 기사들은 한마디로 ‘작위’를 받은 귀족이나 왕족이었다. 즉 ‘기사’ 이기 이전에 귀족, 왕족들이었기에,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활동할 수 있던 일상복이 당시의 군복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나 뭐라나. 뭐, 이때까지만해도 냉병기를 주로 사용하던 시대였으니 크게 문제가 없었겠지만, 전쟁에서 열병기가 주로 사용되면서는 귀족을 위한 군복도 당연히...빠이빠이!



또 신기했던 점이 ..... A국가와 B국가가 전쟁을 벌여서, A국가가 이겼다다고 치자! 그럼 이긴 A국가의 군인들이 입은 군복이 전 유럽적으로 유행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쯤되니 군복도 확실히 패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전쟁과 군복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는 책이다보니,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정말 책의 내용이 풍부하기도 풍부하지만,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게 있으니 바로 삽화다. 정말 수 많은 역사책을 읽어봤지만 이렇게 삽화가 많은 책은 처음인듯;; 그것도 올 컬러 삽화로 말이다. 아무래도 군복이다보니, 문자로만 풀어내면 ‘딱!’하고 떠오르지 않을 수 있어서 그런 것같다. 덕분에 문자로만 읽고, 흐리멍텅하게 머리로만 상상(?)하는 일 없이, 어떤 군복인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게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래는 책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다.



군복이란 무엇인가



제네바 조약 및 헤이그 육전 조약의 규정에 의하면 군복을 입은 자는 교전 상대국에 사로잡혀도 포로로서 보호를 받는다. 사복을 입은 자는 간첩,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처형될 가능성도 있다. 군복이란, 국가가 군율로 정한 복제로 법적인 근거하에 지급하는 피복이다. 조약상 ‘멀리서도 알 수 있는 명확환 휘장’을 부착해야 한다. 장교 등이 관급품이 아닌 개인적으로 주문해 구입하는 경우에도 그 국가의 제복에 준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p 010



제복학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군복의 규정을 조사하는 일이다. 각국에서 복장 규정을 정하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이다. 이후 몇 년부터 몇 년까지 그 군복이 이용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데 근거가 되는 명문 규정이 있는 경우는 그 규정을 최대한 찾아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 육군은 1661년 무렵, 영국 육군은 1706년에 처음 군율이 제정되었다. p 011



※군복의 아이템: 정모(관모), 견장, 넥타이, 훈장, 견식, 스트랩슈즈



넥타이가 군장 특유의 아이템이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실은 넥타이야말로 틀림없는 군복용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목에 감는 스카프형 장식의 원형은 고대 로마 군단의 병사가 목에 감았던 포칼레로 오늘날 신사복 역사의 정설로 정착했다. 당시 로마군의 투구는 목을 감싸듯 돌출된 형태로, 목덜미의 접촉이나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 감았을 것으로 보인다. p 021



훈장은 고대 로마 군단에서 탄생했다.​ 백인 대장급 장교가 팔레라 라는 금속제 원반을 가슴에 다는 관습이 1세기 때 이미 존재했다. 그 사람의 전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금의 종군휘장과 같다. 그러므로 훈장의 원조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십자군 시대인 12세기경부터 기독교 수도회의 기사단이 문장을 제정하게 되었다. 기사단은 십자군을 지지하는 군사적 단체로 각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장을 서코트나 방패에 그려넣었다. 이 문장이 기사단 유니폼의 시초로 ‘훈장’ 제도의 기원이다. p 025~026



마지막 아이템은 구두이다. 단순한 신사화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군에서 유래된 형식이다. 스트랩 슈즈 자체는 일찍이 5,000년 전 유럽의 추운 지방에서 등장했다. 하지만 기후가 온난한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샌들을 주로 신었으며 로마 군단의 병사들은 바닥에 징을 막은 군용 샌들 칼리가를 신었다. p 033




근대식 군복 이전의 역사


인류 최초의 군복은 언제 탄생했을까. 인류 최고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기,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에 이미 군대가 존재했으며 통일된 제복이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류는 문명의 개화 이래 군대를 조직하고 군복을 제정한 것이다. p 036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시민들은 각자 창과 방패, 투구와 갑옷 등을 마련해 중장 보병으로 군무에 종사했다. 각자 말을 사육해야하는 기병은 부유층이 종사하는 병종으로, 자격 심사도 엄격했다. 해군은 직접 군함을 건조한 거부가 선주가 되어 조직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일반 시민의 기부와 봉사로 국방이 성립했던 것인데 당시는 군무나 공직에 얼마나 기부를 했는지 혹은 사회 공헌을 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었던 사회였다. p 037



명확한 국가의 군대로서 장비품을 지급한 증거가 남아 있는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끌었던 마케도니아군으로, 도검과 갑옷 등 통일적인 규격품을 양산해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을 지탱한 것은 국가의 군수 보급 시스템을 바탕으로 조직된 군대였던 것이다. p 039



(로마)기원전 107년 실시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거쳐 직업 군인으로 조직된 정규군의 군단제를 시행하면서 통일적인 군장을 지급했기 때문에 이것도 국가의 군복이라 할 수 있다. 제정 시대 병사들에게 지급된 로리타 세그멘타타라고 불리는 갑판은 고대 세계의 최첨단 장비였다. 또 로마 군단의 군장은 오늘날 텍타이의 기원이 된 포칼레와 종군 기장의 원형인 팔레라 등 놀라운 첨단성을 갖추고 있었다. p 040




갑옷의 진화가 남성의 복장 전반에 변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13세기까지 사슬갑옷이 주류였다가 14세기가 되면서 전신을 장갑판으로 감싸는 신형갑옷인 판금갑옷이 등장했다.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의 장궁이 사슬갑옷을 간단히 관통하자 방어력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백년 전쟁 초기에 큰 활욕을 보인 영국의 왕태자 에드워드는 ‘흑태자’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입었던 초기 판금 갑옷의 표면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p 041




전신에 밀착되듯 감싸는 신형 갑옷이 등장하면서 남성의상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로인해 남성의 다리가 드러났다. 중세 유럽의 신사라고 하면 흔히 타이즈 차림을 떠올리는데 그 배경에는 군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 갑옷 안에 입는 솜옷에서 유래한 더블릿이라는 풍성한 상의가 유행했다. (…) 이처럼 군장과 일반 신사복 사이에는 커다란 연관성이 있다. 당시의 지배 계층인 왕후가 귀족들이 기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상적인 복장이 갑옷으로 규정된 면이 있다. p 042




르네상스 시대부터 17세기 초, 국가의 군대가 봉건 기사단에서 근대적인 정규군으로 변천한는 동안 정장을 지배한 것은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용병대장의 뜻에 따라 일정 장비를 통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복장과 장비는 각자 마련했다. 단, 용병산업을 제도화한 스위스 용병은 특별한 경우인데, 저명한 종군 기록 작가 디볼드 실링의 『루체른 연대기』를 보면 적어도 각 지역 부대마다 색조나 양식을 통일한 제복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p 044



1477년 낭시 전투로 로렌공국을 공격한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 용담공 샤를은 로렌 공작 르네2세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에 의해 전사했으며 (…). 낭시 전투 이후 스위스 용병들은 전투로 찢어진 옷 안에 샤를의 본진에서 약탈한 화려한 옷감을 채워 넣고 개선했다고 전해진다. 그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천 조각이 눈길을 끌면서 전신에 슬래시를 넣는 기묘한 패션이 탄생해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200년 남짓 유럽의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p 045



30년 전쟁 - 스웨덴군과 ‘근대식 군복’의 등장


(스웨덴 왕)구스타프 아돌프는 초기의 징병제인 선택 징병제를 제정했다. 당초 피복 자재의 조달과 제조는 각 연대별로 이루어졌으며 징병되지 않은 시민들에게 피복비를 징수했다. 1620년 제정된 법령에 의하면, 병역의 의무가 있는 15세 이상의 남성은 지역 집회소에 10명 단위로 정렬하게 되어 있었다. 군 징병관이 그중 한 명을 선택했으며, 그를 위한 피복비와 징비품 비용은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9명이 내는 일률 징수금으로 충당하는 제도였다. p 049



스웨덴군은 덴마크식으로 군기의 색으로 구분한 4개의 연대가 있었다. 이들은 본국의 징병제에 의해 구성된 스웨덴인 연대가 아니라 외국인 지원병으로 구성된 직업 군인들의 보병 부대로, 스웨덴군 외정 부대의 실질적인 주력이었다. ‘황색 연대’는 국왕 직속 근위 연대로 왕궁 연대 또는 호위 연대라는 통칭도 있었다. 그 밖에 ‘청색연대’, ‘적색연대’, ‘녹색연대’가 존재했다. 이들 연대의 장교는 스코틀랜드인이 많았으며 영국에서 온 병사도 다수 존재했다. 황색, 청색과 같은 색명은 당초 군기의 색을 나타낸 것에 불과했지만 1625년을 경계로 군복의 색도 통일한 것으로 보인다. p 051



전쟁이 한창이던 1626년, 구스타브 아돌프는 메웨 전투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폴란드 기병 부대를 머스킷 총을 활용해 격퇴했다. 이듬해 8월 디르샤우 전투에서 경부를 피격당한 이후로는 갑옷을 입을 수 없게 되었다. (…) 국왕이 갑옷도 입지 않고 진두에 선 모습을 본 기병이나 보병들은 더더욱 무거운 갑옷을 꺼렸을 것이다. 당시의 화승총은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견고한 갑옷으로 어느 정도 방어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떄문이다. 이처럼 군복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총기의 보급과 갑옷의 퇴장이 있었다. ‘근대 군대의 아버지’라고 불린 구스타브 아돌프가 근대 군복의 창시자가 된 것도 필연적인 일이다. 갑옷의 폐지는 다양한 군복색의 통일과 채용으로 이어졌다. p 053



루이 14세의 전쟁 - 태양왕과 ‘페르시아풍’ 군복



루이 14세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외모에도 굉장히 신경을 썼다. 다만 신장은 160cm 정도로 17세기 당시 남성의 신장으로 볼때 작은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결코 장신은 아니었다. 본인도 그 점이 신경 쓰였는지 하이힐을 착용했다. 그가 신은 뒷굽을 빨간색으로 칠한 궁정용 하이힐은 금세 가신들 사이에 유행했다.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하이힐은 남성들이 맵시를 뽐내기 위해 신는 구두였다. (…) 또한 프릴과 레이스를 이용한 리본 장식을 가득 배치한 매우 여성적인 복장을 즐겼다. 그는 화려한 의상을 유행시켜 국내의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자 차양에 깃털을 가득 장식하거나 랭그라브 라고 하는 큐롯 스커트 형태의 반바지를 입고 발레 동작처럼 우아한 자태로 활보하는 모습은 중성적인 그의 미의식과 기호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p 066




당시는 남성 귀족이나 군인도 모두 장식을 달고 하이힐을 신었는데 솔직히 이런 차림은 전쟁에 적합하지 않았다.​ 리본이나 프릴 장식이 나부끼는 전쟁은 당시로서도 위화감이 컸다. 당시 프랑스군에도 제복이라고 부를만한 복장이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로 널리 알려진 왕실 근위 총사대의 제복이다. p 068




영화나 TV에 등장하는 다르타냥과 삼총사는 하나 같이 파란색 타바드를 입고 있다. 하지만 루이 13세나 리슐리외의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면 고증적으로 문제가 있다. (…) 실제 ‘파란색 타바드’가 채용된 것은 1657년으로 프롱드의 난이 종결된 이후 루이 14세가 치세하던 시대였다. 푸케를 체포할 당시의 다르타냥은 이 제복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1665년부터는 길이가 더 긴 캐속이라는 상의로 진화했다.1665년 이후 총사대의 캐속에는 루이 14세의 빨간색 태양 문장이 추가되었다. p 069



촌스럽다고 생각되던 긴 상의가 1660년대 이후에는 최신 패션으로 둔갑해 프랑스군에 널리 유행한다. 이 상의는 ‘페르시아풍’ 또는 ‘동양풍’이라고 불리었다. 상의만 보면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부근의 ‘동유럽풍’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페르시아풍 복장은 아비 안에 상의와 비슷한 길이의 소매가 긴 옷을 한 벌 더 입었다. 이것을 베스트라고 불렀다. 그 후, 베스트의 소매를 없애고 길이도 짧아졌는데 이것을 프랑스에서는 길러라고 불렀다. 즉, 상의와 베스트 조합으로 중세 더블릿 시대에 탄생한 ‘스리피스’가 유럽에서 부활한 것이다. 오늘날 스리피스 정장의 직접적인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p 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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