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 우리가 사랑이라 말하는 모든 것들 날마다 인문학 4
정지우 지음 / 포르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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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풀리지 않은 명제가 많다. 대체적으로 이과적인게 많지만, 문과적인 것에서 찾자면- 그건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사랑이란게 무엇이기에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이렇게 사랑에 대해 궁금해 하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지 않다. 무엇보다 사랑의 정의, 사랑의 형태, 사랑의 모습 등등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 자체가 사람마다 다르기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명확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무엇이기에 사람을 바꾸는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글을 써내려 갔다. 그 글은 책이 되었고, 그 책이 나에게 들어왔다. 제목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를 읽고 난 뒤, 한 줄 감상은 이렇다. 사랑에 대한 인문학책이라고 하기에는 1%부족하지만,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에세이라고 했을 때는 이 만한 책이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수많은 모습을 인문학적으로 써내려간 이 책을 읽고 있노라니, 나 역시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본디 사랑이란 내가 사랑하는 상대의 모습에 따라 남녀간의 사랑 뿐만아니라, 부모자식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연예인을 향한 사랑, 반려동/식물을 향한 사랑 등등 수많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형태는 이토록 다양하다. 그리고 나 또한 이토록 다양한 사랑을 해왔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랑을 하고 살았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을 했을, 하고 있을, 할 예정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건 어떨까?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보여준다. (…)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필요했던가!

-롤랑 바트르, 《사랑의 단상》 中


지금껏 많은 사람과 소개팅도 하고, 썸도 타며 만났지만 당신만큼 나에게 ‘특별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은 당신의 특별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욕망이 특별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특별함을 지키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 (…)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세상 모두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큰둥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든 아니든 상관없다. 나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연인에 대한 ‘나만의 지식’이 있다. p 029



우리는 사랑이 나와 당신만이 맺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나와 내 욕망이 맺는 관계이기도 하다. 나는 내 욕망을 사랑한다.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 특별한 욕망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특별한 욕망이 주는 삶의 활기, 인생에서 무언가에 몰입하는 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힘까지…. 우리에게는 삶을 생기로 가득 채우는 이 욕망이 필요하다. p 030




사랑이라는 욕망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단연코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역시도 사랑이라는 욕망 자체를 사랑했었다. 물론 당시 사랑의 대상, 그러니까 내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대상은 일종의 스타, 뮤지컬 배우다. 그 배우가 출연하는 뮤지컬을 보기 위해 피켓팅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피켓팅하는 그 시간의 쫄깃함까지 즐겼다. 주말에는 공연을 보러가니, 평일에는 으쌰으쌰하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배우가 출연하는 공연을 보기전 까지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두근거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보고 나온 뒤에는 허했다. 다음 공연 스케쥴이 잡힐 때까지 쭉 마음이 허했다. 그때는 그저 공연을 보지 못하는 거에 대한 공허함이라 생각했는데, 다시금 돌이켜보니 내가 사랑한건, 사랑이라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나의 언어로 바꾸자면, 나의 시간과 비용을 써가며 얻어낸 티켓과 공연을 보러가기전의 두근거림과 기다림. 그 두근거림과 기다림이 있었기에, 나는 디데이를 맞이하기 위한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었지않았나 싶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고. 지금의 내가 사랑하는 욕망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그저 아기 보는데 하루 24시간이 너무 후딱 지나가기에, 욕망을 사랑할 시간조차도 지금의 나에겐 사치인 느낌이랄까.



우리는 마술에 걸린 채 황홀해하며, 잠들지 않고 잠 속에 있으며, 잠들기 전의 어린애 같은 쾌감 속에 있다. (…) 시간, 법률, 금기 등. 아무것도 고갈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원해지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늘 엄마와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고민하다가 “안아주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내심 ‘많이 좋아하는 거’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아이의 말이 생경하게 들렸다. 아이에게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무언가인 모양이었다. 기분 좋고, 따스하고, 행복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구체적인 행위 그 자체, 즉 안아주는 행위가 곧 사랑인 것이다. p 047



완벽한 껴안음의 순간에,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그 따사로운 평온으로 완전하게 채워진다. 그 속에서는 다른 욕망의 작동이 정지하며, 그저 ‘괜찮은’ 상태가 된다. 욕망과 결핍이 인생을 계속 어딘가로 이끌고 간다면, 포옹과 충일은 우리를 여기에 머무르게 한다. 꼭 껴안고 있으면 불안에 떨며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쫓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서 바르트는 포옹이야말로 사랑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다. p 048



아이에게 언젠가 “왜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아?”라는 나의 볼멘소리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엄마가 더 많이 안아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꽤 반성했다. 아이에게 사랑이란, 아주 구체적인 감각이다. 어른들이 따지기 바쁜 능력이니 미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섬세하며 생생하게 존재하는 감각의 향연이다. 아이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안다. p 049




완벽한 껴안음의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 그 자체다. 나 역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건, 특히 안아주는 그 품이 따뜻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분명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남녀간의 사랑이든, 가족간의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그 어떤 사랑의 모습 중에서 거의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안아주는 것’일테니까. 



나와 신랑은 육아로 인해 하루하루가 너무 고되다. 말못하는 아기와 실랑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다가도, 아기를 안고 있으면 1분전까지도 힘들었던 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기를 안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힘들었었나?’ 싶을정도로 말이다. 힘들 때는 내가 아기를 사랑하고 있는게 맞을까 싶다가도, 아기를 안는 순간 ‘아, 나는 우리 아기를 정말 사랑하는구나’하고 확신한다. 육퇴 후에 나에게 고생했다며 안아주는 신랑 품도 그렇다. 정말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잠시잠깐 안는 것으로도 나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안아주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그토록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우리의 삶을 온통 뒤집어 놓은 그들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의미한 존재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안드레 애치먼, 《알리바이》 中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눈 앞에 있다. 그는 온통 내 삶을 뒤집어 놓았다. (…) 그렇게 격렬한 감정들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한때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기묘하다. 예를 들어 학교나 직장 등 한 공간에서 그 사람을 오랫동안 보아온 경우라면 더욱 그럴 법하다. 지난 몇 달간, 혹은 지난 몇 년간 나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였던 그가 나와 ‘연인관계’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p 081



어제까지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당신이 오늘부터 나와 연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일어난다. 일단 ‘연인이라면 해야하는 것’의 목록이 각자의 가슴에 주어진다. (…) 즉, 연인 관계로 진입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서로에게 의무를 가진 존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내게 그런 의무가 없다. 오직 당신만이 그런 의무가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당신만이 내게 그만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된다. p 081~082



그렇기에 사랑을 대할 때는, 오로지 감정만 떠올리기보다 앞서 말한 ‘계약상 의무 준수’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사랑의 핵심이 감정일 지는 모르지만, 그 감정을 지탱하는 형식 또한 빼놓고 사랑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떤 형식에 진입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 된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때론 의미와 형식, 그리고 의무를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딱딱한 것들’ 또한 사랑의 일부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사랑에 딱딱한 태도가 필요하다. p 083




신랑과 가끔 ‘라떼’를 이야기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라떼란,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바로 그 시기다.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약 이십여년간의 시간. 그 시간동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의미가 없던, 그야말로 ‘타인’이었다. 어쩌면 그 이십여년간 어딘가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철저하게 타인이었다. 그렇게 타인으로 살다가,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연애가 끝나고, 결혼을 하였고, 지금은 이쁜 아기를 키우고 있다. 이것만큼 놀라운 일이 또 어디있을까? 생면부지의 생판 남인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연인이 된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아닌,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났을 가능성도 있었을텐데, 그럼에도 우리가 만난 것. 난 지금도 이 모든게 놀랍고 신기하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는 이 책에서 말하는 소위 ‘계약상 의무 준수’에 대해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서로에게 연락을 하고, 혹시라도 연락이 힘든 상황이 올 경우 그전에 어떠한 상황인지 미리 이야기를 하는 등,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다. 그 덕분에 연애기간, 결혼, 그리고 현재까지 1n년간 큰 싸움(?)없이 아주 잘 살고 있다. 뭐, 아이가 학교를 가기 시작하면 또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나와 신랑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변하지 않을 듯 싶다.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진만을 마시지는 말라. (…)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칼릴 지브란, 《예언자》 中


결혼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전의 어떤 연애보다 타인과 더 깊이 사생활을 모두 공유한다는 점일 것이다. 사회마다 결혼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양가 부모님등 가족들의 사정까지 서로 깊이 알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 간다는 걸 의미한다. 연애 때와는 다른 밀착감이 생기고, 서로가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되어간다. p 105



결혼에 위기가 찾아온다면,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서로 결합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나면 사랑의 위기가 시작된다. 너무 오래 지내면서 모든 걸 다 알게 되어 서로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이 사라지고, 더는 새롭게 할 이야기나 재미가 없어 질리는 것이 사랑과 결혼의 역설일지도 모른다. 그런 결혼에 대해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라고 말이다. p 106



상대가 자기만의 내면을 가진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유념하면 지루했던 일상도 조금은 달라진다. 나는 자기만의 감각과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한 존재와 함께 걷고 있다. 그러면 그의 기분이나 마음이 궁금해진다. 그에게 지금 이 산책의 기분은 어떠하냐고. 오늘은 어떤 마음이냐고 묻게 된다. 그 대답에서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되고, 또 그와 비슷하거나 다른 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것만으로도 ‘당연한’ 존재가 될 뻔했던 내 곁의 사람은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 서게 된다. 나와 당신은 함께 있지만 동시에 거리를 가진, 고유한 존재로 실재한다. p 107




신랑과 난, 연애시절의 환상과 호기심은 당연히 사라진지 오래지만, 상대방을 향한 감정은 연애시절보다 결혼한 지금 더 커졌다면 커졌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연애기간까지 합치면, 내 나이의 ⅓ 정도나 되는 다소 긴(?) 기간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서로를 향한 존중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지켜주고, 함께하는 시간은 함께하는 것. 



연애할 때도 그랬지만, 결혼한 지금도 모든 일을 둘이서 다 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디 오랜 시간을 타인으로 살아온 우리다. 하루 24시간 붙어서 생활한다면, 어떻게든 탈이 날 수 밖에 없다. 잠시 잠깐이라도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하다못해 서로가 직장에 있는 시간이라도.



물론 지금의 나는...육아휴직 중인지라 혼자 있는 시간이 흔치 않다. 혼자 있고 싶으나, 내 앞에는 뽈뽈거리며 기어다니는 아기가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다행인건, 우리 신랑이 주말에는 아기를 전담케어하며, 나에게 조금이라도 혼자있는 시간을 주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신랑의 이러한 사랑과 배려가 내 원동력이 되어, 나의 온 힘을 우리 아기에게 쏟아붓고 있다. 물론, 신랑에게도 나누어줄 힘을 조금은 남겨놔야하는데, 온 종일 아기를 보다보니....아직까지 그건 좀 무리인듯^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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