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지음, 김동수.박수철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구입한 지 꽤 되었지만, 읽을 자신이 없어서 계속 방치하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이라는 제목에서 보이 듯, 이 책은 관동대지진 자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당시에 있었던 일본 관헌(내지는 일본국민)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된 조선인 학살사건, ‘조선인 관동대학살’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쉽게 읽기에는 그 주제가 너무 무거웠고, 읽지 않기에는...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닌 사실이며,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과거였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분명 나와 같은 한국 이름을 쓰고 있지만,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태어난 황국신민이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넘어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다. 저자가 태어난 1932년, 그 때는 지도상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진지 오래였으며, 아주 당연하게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문화를 먼저 접할 수 밖에 없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는 황국신민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태어난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역사를 전공한 이유 때문이다. 


저자가 처음부터 관동대지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아마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들이 으레 그렇듯 궁금했을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재일한국/조선인은 대체 누구인지 말이다. 그렇게 본인의 뿌리를 찾아가던 중 그에 눈에 띄었던 것이 바로 ‘관동대지진’ 그리고 ‘관동대학살’이었다.


1923년 9월 1일, 정오 무렵 도쿄/요코하마를 아우르는 관동지역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다. 바로 ‘관동대지진’ 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진이 워낙 자주 일어난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관동대지진은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하지만 여느 지진과 달리, 관동대지진은 대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지진이 일어났던 시간은 바로 정오, 바로 점심시간이었다. 많은 집에서 점심 밥을 짓기 위해 불을 사용하고 있던 그 시간이다. 대부분의 가옥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던 그 시간, 지진이 터지면서 바로 화재로 이어졌다. 거기다 당시 일본의 가옥들은 전부 목조였다(일본은 지진이 잦은 나라이다보니, 언제든 부서지기 쉽고, 다시 쉽게 지을 수 있는 목조 주택을 지었다). 목조 가옥은 활활 타오르는 땔감과도 같았다. 엎친데 덥친격으로 당시 저기압의 영향으로 남풍(or 동남풍)이 초속 10~15m 강풍으로 불어왔다. 이 강풍은 불씨를 널리 퍼트렸고, 결국 관동대화재로 이어졌다.


대지진에 대화재, 민심은 요동쳤다. 일본 공권력은 공중에 붕 떴다. 공권력이라 부르는 이들은 일련의 사태로 인해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 지 걱정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 것이 아니라, 공포에 빠진 국민들이 그 공포심을 공권력에 휘두를까 걱정한 것이다. 일본의 공권력은 지진 발생 직후, 그러니까 지진이 발생한 당일 저녁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관동지역 각지에 일본 경찰과 일본 군인들이 배치되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이유는 ‘폭동 조선인 진압’이라는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 이라고 잘못 믿어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 경찰서로 끌고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겨로가,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P 108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시민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P 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P 126


이 유언비어들이 관헌에서 먼저 나왔는지, 민간에서 먼저 퍼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사실은 일본 관헌은 이 유언비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경시청에서 이 유언비어를 부추겼다. 처음에는 이러한 소문을 믿지 않던 일본 관민 조차도, 경찰과 군이 ‘폭동 조선인 진압’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과, 각 파출소 별로 ‘조선인을 경계하라’는 벽보가 대대적으로 게시 된 것을 보며 하나 둘 믿기 시작했다. 대지진과 화재에 대한 일본 국민의 공포심은,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은 조선인에 대한 공격석으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과 일본 군은 이런 유언비어를 철썩 같이 믿고, 아니 이용하여 계엄령에 활용하였다.


일본 국회의원 인 육군소장 쓰노다 고레시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라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 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P 181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P 278


(1) 병졸 3명은 스사키 경찰서에서 호송업무 도움을 요청받고 특무조장 시마자키 기마케의 명령을 받아 순사 5명과 함꼐 스사키에서 폭행죄를 범한 조선인 약 30명을 동 경찰서에서 히비야 경시청에 ○○하기 위해 에이타이바시에 이르렀음. 교량이 불에 타버려 건너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도선을 준비중, 조선인 한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다른 17명도 갑자기 스미다가와에 뛰어들기에 순사들의 요청에 따라 실탄 17발을 강물을 향해 쏘았음. 강물로 뛰어들지 못하고 도망치려 한 자는 다수의 피난민과 경관에게 타살되었음.


(2) 병사들이 순찰 중 오시마초 마루하치바시 부근에서 자경단으로부터 수상한 조선인이 잠복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스나초 소학교 부근의 연립주택 마루 밑에서 조선인 6명을 찾아냈는데, 그 조선인들은 모두 폭탄 비슷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음. 그 가운데 한 명이 민중들에게 이를 던지고 부근 강물에 뛰어들매 그를 사살하고, 나머지 조선인 5명이 다시 민중이나 군대에게 폭탄을 던지려 함에 자위상 부득이 이들을 사격하여 사살한 것임.


(3) 오시마초 부근 주민들이 조선인들에게 위해를 받고 있을 때 구원대로서 야중 1의 2, 이와나미 소위가 도착함. 때마침 기병 14의 3, 미우라 소위와 만나 함께 조선인을 포위하려고 할 때 군중과 경관 45명이 약 200명의 조선인 무리를 끌고 옴. 그 뒤처리를 논의 중, 기병 병졸 3명이 조선인 우두머리 3명을 총개머리로 구타하자 조선인들이 군중 및 경관들과 다툼을 일으킴. 군대는 이를 방지하려고 조선인을 전부 살해.

-- 이하중략


(1)에서는 조선인 ‘약 30’명이라고 하여 인원 파악을 애매하게 하는 속임수의 의도가 빤히 보인다. 또 뒤에서 살피겠지만 당시 조선인을 연행할 때 반드시 굴비 엮듯이 묶었기 때문에 도망갈 여지는 없었다. 가령 17명이 스미다가와에 뛰어들었다고 해도 병사 3명이 17발을 사격하여 도망자 17명을 사살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조사를 하지도 않고 ‘불령선인’이라 낙인 찍은 것도 이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불령선인이라면 죽여도 좋다는 전제가 읽힌다는 점이다.


‘불령선인’이란 일본 관헌이 즐겨 사용하는 상투어지만 도대체 어떠한 인물을 말하는 것ㅇ니가. 일본권력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나 형법상의 범죄자는 아니며, 그들에게 불쾌/증오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여도 될 리는 없다. 여기서 드러다는 것은 남의 나라에서 떠돌아다니는 나라 잃은 국민의 애처로운 인권이다. 문책당해야 마땅한 것은 함부로 구속하고 살해를 저지른 특무조장 시마자키 기마케 같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2)는 잙 읽어보면 갈 곳을 몰라 허둥대는 조선인을 모아놓고 괴롭히다가 살해하고서 그 핑계로 있지도 않은 폭탄소동을 만들어낸 것으로, 백(白)을 흑(黑)이라 한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관헌의 권력범죄임이 분명하다.


당시 고토 지구에서 가장 용명을 떨친 것은 근위사단의 기병 제1여단과 제1사단의 기병 제2여단, 야전중포병 제3여단이었는데, 나라시노와 고노다이의 연합작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바로 (3)의 내용이다.

-- 이하중략


(3) 에 참여한 14기병 엔도 사부로 :

“실제로 나와 같이 육군대학을 졸업한 이시모토 도라조는 나라시노 기병대에 있었고 나는 고노다이 연대에 있었지. 그 지진 때 그 녀석이 찾아온 거야. 그렇게 우수한,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게다가 군도까지 받은 사람이 말이야. 나보다 사관학교도 3년 빠르지. 그러한 인물이 ‘엔도군, 협공을 하려하니 자네도 협력해주게’ 라고 말하는 거야. 기병대만으로는 빠져나갈 염려가 있으니까 내 쪾에서 퇴로를 차단하고, 기병대가 고토 방변의 조선인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이었어. 어쨌든 죽이면 훈장이라도 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당치 않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였는데, ‘그러나 아무래도 분위기가 그래. 죽이지 않으면 주민들이 납득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어. 군대란게 그런 정도였지”

P 153 ~ 156 (각 군인의 명단, 장소 등 자세히 실려있으나 생략)


위 증언에 나오는 스미다가와, 즉 스미다 강변 일대는 도쿄를 가보았다면 한 번쯤은 산책을 하러 갔거나,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스미다 강변은 도쿄에서 제일 큰 불꽃축제가 펼쳐지는 장소다. 스미다강 상류에는 유명한 관광지인 아사쿠사를 비롯하여 스카이트리가 있고, 하구로 내려오면 몬자야키가 유명한 츠키시마가 있다. 도쿄시민들만 사랑하는 장소가 아니라, 관광객들도 한 번 이상은 꼭 발을 디뎠던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이 스미다강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 학살이 자행된 아주 무서운 장소였다. 스미다강을 조선인 시신들이 덮었고, 강변 둑 역시도 조선인 시신들이 쌓여있었다. 그랬던 곳이다. 우리가 여행가서, 스미다 강변을 구경하며 ‘아름답다’라고 감탄하는 그 장소가 말이다. 우리가 딛고 있던 그 땅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피를 흘리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해 버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스미다강을 찾는 관광객이 얼마나 되나. 가해 당사자인 일본 국민들이야 신경을 안쓴다치더라도, 피해 당사자인 한국 국민들은 어떤가?


나 역시 도쿄를 처음 갔을 때, 스미다강을 처음 들렀을 때는 그저 ‘멋지다’는 감탄 뿐이었다. 분명 관동대학살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 장소에 갔을 때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망각이란 무서운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해 다시 도쿄를 찾을 때는 부러 다시 이곳을 찾았다. 망각에 대한 미안함에, 다시 찾아왔다. 제대로 기억하기 위하여 찾아오니, 인근 조그마한 공원에 있는 조선인 대학살 추모비도 그제서야 보였다.


장작불 위로 4,5명의 남자들이 조선인의 손과 발을 큰 대(大)자로 움직이지못하도록 잡고서 태웠습니다. 불에 구워버린 것이지요. 불에 타자 피부가 다갈색이 되었습니다. 태워지고 있던 조선인은 비명을 질러댓지만 이미 힘없는 비명이었습니다. 그렇게 살해된 조선인이 차례차례에 개울에 던져졌습니다.


잡힌 조선인 24명을 13명 한 무리와 11명 한 무리로 하여 철사줄로 묶은 후 갈고리로 쳐죽여 바다에 던져넣어버렸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가 있어서 다시 갈고리로 머리를 찍었는데, 너무 깊이 찍은 나머지 갈고리 몇 개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또 그 외 3명의 조선인은 3호지에 있는 석탄 코크스 하치장에서 활활 타고 있는 석탄 코크스 불 속에 산채로 한꺼번에 던져넣어 태워 죽였다.


협객이라 자칭하는 쓰키지의 노름꾼 친구가 자경단의 대장이 되어 본격적인 자경단이 생겼다. 해안가나 강가에 조선인이 올라올 테니 살펴보라 해서 토모씨를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쓰키시마 고토바시 주변까지 조선인을 수색하러 가서 돌을 던지고는 만세 만세하며 죽이고 다녔다. 외진곳에는 조선인의 머리 없는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P 224 ~226 자경단의 살해방식 中 일본인 증언, 일본 신문 기사 발췌



하야시 히데오/자경단원

육군소장이 ‘자네들은 이것을 손에 들고 그 쪽을 경계하다가 조선인이면 닥치는 대로 베어버려!’ 라며 몇 자루의 단도와 일본도를 가리켰다.


에구치 기요시/작가

경찰서, 촌 사무소, 순사 파출소 등의 게시판에 현청 명의로 ‘불령선인!’ 봉기소식과 함께 ‘반항하는 자는 과감히 죽여도 지장없음!’ 이라는 게시가 온통 붙어 있었다.


기쿠치 요시로/정치가

‘모 방향에서 조선인이 습격할 우려가 있으니 남자들은 무장하고 여자들을 피난하시오. 조선인이면 죽여도 지장없소!’라고 알리고 다닌 자는 누구였을까?


성명 미상/자경단

나는 미타 경찰서장에게 물었다.‘9월 2일 밤, 귀하의 부하로부터 조선인 습격정보를 받고 주의하신 대롲 ㅏ경단을 조직했으며 (조선인을) 죽여도 지장이 없다고 귀하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구로코 우치간/운송점

아침에 가족과 다카시마야마로 피난하여 노숙했다. 그날 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넣었다며 조선인으로 보이면 모두 타살하라는 극단적인 전달이 있었다.


이시카와 슈이치/판사

세관에서 마음대로 물건을 가져와도 된다고 해서 사진기를 하나 가져오면 어떨까라고 했다. 또 조선인으로 보이면 바로 죽여도 좋다는 포고가 나왔다고 했다.


나가오카 구마오/부장판사

경찰부장에게서 조선인으로 보이면 살해해도 지장 없다는 통고문이 나왔다.


후지요시 다카시/고슈 특무함장

경찰과 경시총감의 뜻이므로 함꼐 조선인 또는 용의자를 구속, 수금하고 마침내 살해를 허락함에 이르렀다고 한다.


요코하마 미나미오타/자경단

요코하마 상업학교 비품 13식 총 70자루, 18년식 50자루, 레밍턴식 300자루, 합계 420자루를 전부 가지고 감.

P 206 ~ 211 자경단 살해지령 증언들 중 일부 발췌


간혹 관동대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일본에서 나올 때면, 일본 정부는 이런말을 한다. 일본 경찰과 군은 조선인을 ‘보호’하였을 뿐, 조선인을 학살한건 민간, 즉 자경단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 경찰과 일본 군이 조선인을 직접 죽이는 일이 많았으며, 때로는 자경단에게 조선인을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제일 중요한 사실은 자경단이 조선인을 죽이게 끔 여론을 조성하고 유도한 건 일본 정부다. 과연 일본 정부가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일본 정부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저자는 책에서 이리 말한다.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관동대학살의 피해국인 한국정부는 이 일에 대해 언급이 없고 무관심한건가?’. 그래서 한반도에서 황국신민으로 태어났던 그는, 그렇게 일본으로 넘어가 살던 그는, 왜 한국 정부가  관동대지진/관동대학살에 무관심한 지 알고자 이 사건에 대해 연구했고, 수 많은 자료를 모았으며, 이렇게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이 사건을 연구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작금의 한국사회를 보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은 정말 많았다. 하지만 일본인 성노예 문제, 강제징용 문제, 사할린 징용 등이 수면 위에 올라 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군사정권, 독재정권, 친일정권이 일본의 만행을 숨겼고 감췄고 침묵했다. 역대 정권 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이러한 일본의 만행을 언급할라치면 참 이상하게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짓밟혔다. 정권이 바뀐 지금에서야 이러한 문제 중 일부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이렇게 수면 위로 올라온 문제 중에 ‘조선인 관동대학살’은 없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이 문제에 무관심했다. 피해국인 우리가 무관심하니, 가해국 일본은 어떻겠나.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본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지정했다. 엄청난 자연재해였고, 수 많은 일본국민이 죽었으며, 당시 공권력은 일본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반면교사 삼고자 했다. 거기에 관동대지진 당시에 죽어간 일본 국민들에 대한 추도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이 안에는 그들이 참혹하게 죽인 조선인에 대한 미안함은 없다. 그들에게 조선인 대학살은,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을 진압했다는 아주 명확한 명분이 있기 때문이었으며, 당시 조선인들을 죽인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관동대지진은 일본에서 방재의날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2011년 3월 11일 또 한번 엄청난 대지진이 관동을 강타했다. 엄청난 쓰나미와 함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일으킨 동일본 대지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이 말하는 관동대지진은 1923년 조선인을 참혹하게 학살했던 그 일이 아닌, 2011년 검은 파도가 관동을 집어 삼킨, 원전사고가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이 되었다. 그 때와 같은 점은 지진+쓰나미+원전사고 콜라보로 많은 일본인이 죽었고, 그들은 또 공포심을 가졌으며, 그 공포심은 두려움이 되었다. 몇몇 일본 국민들은 이 두려움을 자이니치, 즉 재일교포에 대한 공격으로 바꾸었다. 2011년에도 자이니치, 즉 재일교포가 테러를 했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과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허나, 다른 점이 있다면, 적어도 2011년은 1923년 처럼 사실없는 유언비어가 퍼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 소문은 금새 사라졌다. 물론 우익 싸이트 쪽에서는 조금 더 돌았었지만(이후로도 화재, 강도사건만 나면 자이니치가 했다는 소문이 먼저 퍼졌다. 제일 가까운 예가 바로 오키나와 슈리성 전소사건).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후 큰 재난이 있을 때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을 옆나라, 우리를 향한 공격심으로 바꾸었다. 애초에 일본은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회였다. 큰 재난이 없을 경우에는 꼭 북조선, 즉 북한을 헤드라인으로 다루었다. 무슨 일이 있든, 없든 그랬다. 일본 국민들은 그런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게 정말 당연한 거였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김동수 님의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차별과 전횡의 실상을 알게 되고, 일본 정신사의 한 흐름을 짚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엎는 다행이라 하겠다’. P 023


일본의 정신사. 그렇다. 일본이 왜 무슨 일만 있어면 한반도를 붙잡고 늘어지는 지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은 원래 그런거 아니야?”라고 반응하고, 더 이상 알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무관심 내지는 망각으로 일관한다. 물론 장기적인 불매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조금은 과거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실제로 우리가 불매운동을 열씸히 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뒤로 물러설 마음이 없고, 일본 국민들은 이런 한국을 우습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나 역시 꾸준히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 안가고, 안사는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남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불매라면, 강요 받은 그 사람은 국적은 한국이지만 점점 더 일본에 가까워질 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선은 기억과 관심이다. 금방 끊길 관심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 말이다.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시민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 P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 P126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 P278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차별과 전횡의 실상을 알게 되고, 일본 정신사의 한 흐름을 짚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엎는 다행이라 하겠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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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회사 북클립으로 읽은 책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매번 이 책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다른 책을 선택하는 바람에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tvN 「알쓸신잡」으로 그의 말 한마디와 행동이 참으로 멋졌기에, 이 사람이 쓰는 글은 확실히 다를거라 생각했다. 다만, 내가 읽는 소설들은 대게 장르소설이 많다보니, 김영하님의 소설은 아직까지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랄까. 독서 편식을 고치고 있는 중이라지만, 아직까지 완벽하게 고치지 못했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김영하 작가의 작품은 「여행의 이유」같은 산문 정도 였다.


이 책의 내용은 총 9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첫번째 챕터는 김영하 작가의 중국 여행 실패기. 읽을 당시에는 굳이 왜 실패기를 적는걸까? 아니 애초에 여행준비 당시 비자발급에 대한 생각은 못했을까?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더랬다. 근데 이게 참 멋 없는, 오로지 내 잣대로만 평가한 무서운 편견이었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P 018


생각해보니 너무 맞는 말이더라. A부터 Z까지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여행이 진행되었다면, 글쎄. 그 여행은 완성도는 높았을 지언정 재미는 없었을 거다. 내가 다니는 여행도 그렇다. 여행을 가기 전 완벽하게 계획을 짠다고 짜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각치 못한 상황들이 나를 즐겁게 하고, 때로는 화나게 했다. 그런 상황은 유독 다른 여행보다 유독 머리속에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잊지 못할 추억을 또 하나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 여행 준비를 하며 비자 준비를 생각치 못했던 그의 행동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 날 첫 해외 여행지였던 중국에서의 경험이 썩 좋지 않았다는 기억이 남아 있었기에, 잠재의식 속에서 조금이라도 중국을 가지 않으려는 빌미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그리고 나는 저자의 이 말에 십분 공감했다. 아무리 오래전 기억이라도 나를 아프게 하거나, 힘들게 한 기억은 내가 모르는 기억 저 편에 자리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흐른 만큼 당시의 일을 기억해내는 건 어렵겠지만, 그 때 느낀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그래도 남아있기에, 무의식중에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게 나를 조정한다고나 할까?참 신기한 일이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라는 질문은 작가라면 한번쯤 받아보는 것이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억이 나는 거의 없다. 영감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나 나의 모국어로, 주로 집에 누워 있을 때 찾아왔다. (중략) 지금까지 낸 스무 권이 넘는 책들 중에서 단 두권만이 모국어의 영토 밖에서 쓰였다. 심지어 여행기도 집으로 돌아와 썼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P 080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평화를 느낀다’는 이 말이 내 가슴에 콕 박혔다. 내가 여행을 떠나고 싶은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니까. 그래서 해외를 간다면 최대한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한국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는다. 국내에서도 동일하다. 사람들이 잘 들리지 않는 장소만을 찾아다닌다. 어쩌면 나는 내가 선택한 그 장소에서, 타인과 관계되고 싶지 않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회사로 대표되는 내 일상은, 여러사람과의 관계로 정말 피곤하고 힘든 일 투성이니까. 물론 간혹 좋은 일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차라리 아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게, 서로 관계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그런가, 저자가 스물 다섯에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자신이 ‘노바디’, 즉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던 경험을 이야기 한 부분은 유독 더 와닿기도 했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노바디’는 내가 원하는 ‘노바디’와는 조금 다르다. 이 책에서는 여행지에서 타인의 인정을 어떤 식으로 받고 싶은지, 본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내가 원하는 건 일상에서 일어나길 바라는 일이니까. 하, 물론 일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 문제가 많아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까지 하는 것 보니.........나도 정말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긴 했나보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P 109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P 110


보통 누군가가 왜 여행을 떠나냐고 물어보면 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그 곳에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역사를 품고 있는지 내 두 발로 직접 딛고, 그 광경을 보고 싶어서 여행을 간다고’. 하지만 이건 그저 허울 좋은 말에 불과했다. 실상은 그게 아닌데, 뭐라 표현해야 할 지 몰랐기에 저런 식으로 대답을 하며, 포장을 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내가 왜 여행을 떠나려 하는지에 대한 답을, 비로소 찾았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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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친구와 있어도 불편할까? - 누구에게나 대인불안이 있다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 조경자 옮김 / 상상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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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에 대한 심리학 도서는 몇 번 읽어보았는데, 이렇게 현대사회 - 대중을 대상으로 한 심리학 도서는 처음이라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다. 물론 책의 주제도 한 몫 했고 말이다. 주제는 책 제목에서부터 뚜렷히 나타난다.




현대사회를 살면서 ‘인간관계’에 고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왜 친구와 있어도 불편할까?』 라는 제목에서 ‘친구’라고 지칭했지만, 친구에 한정하지 않는다. 살면서 나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즉, 이 책은 살아가면서 절대 피해갈 수 없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타인을 많이 의식하는 유형은 쉬는 시간처럼 사람들이 모여 정해지지 않은 주제로 수다를 떠는 상황에 약하다. 얼굴을 아는 정도의 사람들과 우연히 방향이 같아 전철을 타는 등의 상황은 특히나 부담스럽다 P 033


사람들은 장소에 따라 어울리는 ‘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모범생 같은 행동을 할지, 쾌할한 모습을 연출할 지는 그 장소의 분위기나 평소의 대인관계를 바탕으로 판단한다. P 039


메세지를 보고도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거나, 서먹서먹해질지도 모른다며 걱정한다. 다른 친구들은 답을 했는데 나만 답을 하지 않거나 하면 그룹에서 빠지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다는 오해를 사지 않을 지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도 친구들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하는 데 신경을 쓰게 된다. P 056



학창시절 내 모습을 사찰한 줄 알았다. 읽으면서도 ‘헐, 내 이야기!’ 라며 계속 깜짝깜짝 놀랐으니까. 난 언제나 매년 새학기가 되면 새 친구를 만드는 그 시간이 너무 싫었다. 학교에서 사용한 모든 에너지 중 8할을, 친구 만들기에 사용했고, 친구들에게 내 모습이 ‘좋은 친구’로 각인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뿐만인가, 친구들 사이에서 그룹이 만들어지면, 그 그룹에서 내쳐지지 않기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질없는 시간이었는데, 그 때는 친구들 사이에서 내 존재를 각인시키고, 좋은 친구로 남아있는 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였다(지금 돌아봐도 그때 소비한 내 시간은 참 부질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스스로 그룹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혼자 하는 학생들이 많다. 아싸라고 불리는 그들 말이다. 이미 사회생활 한 가운데 들어있던 나는, 아싸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때 놀랐고, 꽤 부러웠다. 그리고 덩달아 혼술, 혼밥, 혼영 문화가 자리잡았다. 내 에너지를 쏟으면서까지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그들로 인해 뭐든 혼자 하는 문화가 조성된거다. 부럽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내가 1n년 전 부단히 노력했던 그 ‘인간관계’가, 이제는 선택이 된것이다. 관계를 맺어도 되지만, 나를 힘들게 하면서까지 굳이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나? 라는 가치관이 만들어진거다.




특히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대면 상황과 달리 SNS는 내 모습이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친구의 글을 읽고 의견이 좀 달라도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많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자랑하는 사진을 보고 ‘왠 자랑질이야!’라고 성질을 내면서도 ‘좋아요’를 누른다. 쇼핑할 때마다 사진을 일일이 올리는 친구,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외출하면 그 풍경을 찍어 올리는 친구의 사진을 보면서도 ‘자기의 일상을 하나하나 다른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있나?’라며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좋아요’를 누른다. (중략)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신의 포스팅에 모두가 ‘좋아요’를 누르거나, 호의적인 댓글을 달아주면 굉장히 기분이 좋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올린 사진을 보며 자신처럼 ‘이런 사진을 왜 올렸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이처럼 생각하면 SNS는 상대의 속마음을 매우 읽기 어려운 커뮤니케이션이다. P 076



정말 그렇다. 난 내 블로그 공감수와 댓글수가 늘어나면 분명 기분이 좋다. 확실히 좋다. 그런데 가끔은 궁금하다. 내 포스팅을 좋아해주시는 이 분들이, 정말 진짜로 좋아서 ‘좋아요’를 누른건지. 아니면 진짜 속 마음은 그 반대인데, 이웃이라는 이유로 ‘좋아요’를 누르는 건지.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어쩌면 진짜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근데 또.. 이런 부분을 신경쓰다보면 한도 끝도 없고 그러니, 생각을 안하려 하긴 하는데. 참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려고 세상을 사는게 아니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아’라거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라는 등 타인의 평가만을 걱정하는 삶이란 참으로 쓸모없다. 미움받는 것을 걱정하는 대신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는 말은 실제로 큰 도움이 된다. P 094 



‘인간관계’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을 고민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온라인상에서 어떻게 하면 남들 눈에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일지 고민한다. 내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아닌, ‘남들 눈’에 보이는 좋은 사람 말이다. 물론 나 역시도 그렇고 말이다. 이런 생각이 워낙 당연한 거였기에, 이게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 스스로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제는 조금 벗어나보려 한다. 타인이 보는 내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내가 눈치를 보는 사람이 타인이 아닌, 오롯이 내가 되기를 바라며 올 한해를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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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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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단으로써 읽은 책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이 책은 지금까지 읽어온 책과 그 느낌이 많이 다르다. 보통 책을 받으면 제목과, 띠지나 표지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며 대충 어떤 장르인지 추측을 한다. 헌데 이 책은 일반적인 에세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설도 아니며, 자기계발서는 더더욱 아니다. 대체 이 책의 장르는 무엇인가 갸웃 거리다가, 책을 쓴 작가를 보았다. 이 책의 작가는 제목에 쓰여있듯, 우리나라 문학의 거목이라 일컬어지는 박완서님이다. 저자는 문학의 대가 박완서 님인데, 장르는 추즉하기가 애매한 그 무언가라고 해야할까. 물론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생각이 달라진다.


내 개인적으로, 이 책의 장르는 ‘박완서’라는 한 사람의 일대기를 짧은 글에 담은 ‘수필’이라고 감히 말하려 한다. 


이 책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 이 책의 저자인 ‘박완서’님에 대한 정보를 옮기려 한다. 보통은 작가에 대한 정보를 쓰지 않는 편이지만 말이다. 이번 만큼은 예외다. 박완서 작가님은 한국문학의 대가로 불렸던 분이었다. 그녀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부터 일반 문학까지 정말 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아마 문학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살면서 그녀의 작품을 하나 정도는 읽어보지 않았을까 싶다.



박완서 (1931 ~ 2011)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미망』 『휘청거리는 오후』 『목마른 계절』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고, 소설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기나긴 하루』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한 길 사람 속』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2006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1년 12월 타계한 후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박완서님의 따님인 호원숙 님은 어머니의 작품들을 보며, 정확히는 그 작품들에 실린 어머니의 서문과 후기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 책의 서문을 모아 이런 책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김윤식 선생님의 서문집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중략) 놀랍게도 서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기도 하고 불끈 용기가 솟기도 하고 눈물이 어리기도 합니다. 타인을 생각하고 전체 속에서 자신을 낮추는 가식이 아닌 겸양, 진실과 책임과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반성이 밑받침이 된 오만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P 4~6, 들어가는 글 中



그렇기에 이 책이 만들어졌다. 오로지 박완서, 그녀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박완서 작가의 타계 9주기을 맞이하여, 한국문학의 대가인 그녀가, 그녀 식으로 독자들과 특별한 끝인사를 할 수 있도록 이 책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목차도 조금 특별하다. 박완서 작가가 발표한 수 많은 작품의 제목들이 들어있다. 한 작품에 여러 판본이 있을 경우에는, 각 판본의 서문과 후기를 별도의 페이지에 실었다. 예를 들어 그녀의 데뷔작인 『나목』은 3개의 판본이 나왔기에, 3개의 서문이 실려있는 식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지만, 서문집이라니 별거 있겠어?’라는 생각이었다. 왠걸, 별거가 많았다. 정말 많았다. 보통 한 작품의 ‘서문’이라 하면 그 작품을 소개하거나, 작품을 이해를 돕기 위한 정보전달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박완서님의 서문은 그렇지 않았다. 음... 뭐라고 말해야할까? 물론 작품의 이해를 돕기위한 정보도 분명 있었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서문에는 ‘박완서’라는 사람이 있었다. 


책을 다시 꾸밀 때마다 좀 손을 보려고 다시 읽어보게 된다. 지금의 안목으로 눈에 거슬리는 표현의 과장이나 치졸이 자주 눈에 띄어서 고치려면 어쩐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못 고치고 만다. 유치함조차 그것을 썼을 당시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의 나타남 같아서 소중한 생각이 들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처녀작을 느즈막이 사십 세에 썼지만 이십 세 미만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섰다고 기억된다. 그래 그런지 그것을 썼을 당시가 암만해도 사십 세 같이 않고 아득하고 풋풋한 젊은 날 같다. P 22 『나목』 재출간


혼자 사는 여자는 다만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하기만 한 것일까? 아내가 남편 외의 외간 남자에게 한눈 판 건 두말할 여지도 없이 부도덕하고, 이구동성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반면, 남편이 아내 외의 여자를 장난삼아 범한 것에는 그도록 관대하고 떳떳하다고까지 부추기는게 과연 미풍양속일까? P 67 『서 있는 여자』


이 이야기를 꾸민 나의 첫 번째 소망도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마음이 되어 아이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복동이 또래의 막내 손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중략) 이 이야기를 꾸민 내 욕심도 재미 말고 또 하나 있는데 그건 아이들이 자기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남의 생명의 가치도 존중할 줄 아는 편견 없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감사하며 신나게 사는 것입니다. P 162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나는 이 서문에서 인간 ‘박완서’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훔쳐보았다. 자기의 첫 작품을 너무나 소중히 생각하여, 그 작품을 썼던 과거의 자신까지도 소중히 하는 한 사람, 미풍양속이라는 미명하에 폭력을 눈감는 사회를 고발하고자 했던 한 사람, 이 땅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편견없이 살아가길 바라는 한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인간 ‘박완서’였다.


곧 6.25가 났다. 오빠와 숙부님이 비명에 죽고, 고향 땅은 북쪽 땅이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죽었으되 전사도 폭사도 아닌, 사상의 대립이 초래한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특구성에 희생된 고통스럽고 값 없는 그들의 죽음은 그 후 오랫동안 나에게 악몽으로 남아있다. P 38 『창밖은 봄』


6.25 때의 체험은 하도 여러 번 욹궈먹어서 6.25 때 내가 어떻게 지냈나는 많이 알려진 셈이다. 그러나 1.4 후퇴 후 텅 빈 서울에 남아서 겪은 일은 유일하게 이 작품에서만 울궈먹었다. 실은 이 경우 울궈먹었단 말도 합당치가 않다. 내가 울궈먹었다는 말을 쓸 때는 체험에다 적당히 소설적인 허구를 가미한 경우인데 이 소설 중에서도 그 시기(이 소설은 1950년 6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의 얘기를 월별로 엮어놓았다)는 의식적으로 허구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사실 묘사만 했다.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 내가 과연 그 일을 꿈이 아닌 생시로 겪은 걸까 문득문득 의심스러워질 적이 있다. 이 거대한 도시가 하룻밤 새 텅 비고 인기척의 완전한 진공상태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대는 상상할 수 있는가. P 46 『목마른 계절』 재출간


여기 모인 글들은 내 개인의 흔적인 동시에 내가 작가로서 통과해온 70년대, 80년대, 90년대가 짙게 묻어나 있는 글들이다.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다가도 우리가 살아낸 시대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득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무의미한 현실도 좋은 추억이 있으면 의미 있는 것이 되고, 나쁜 기억도 무력한 현재를 고양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P 142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이 서문들은 인간 ‘박완서’가, 작가 ‘박완서’가 되기 전에 겪었던 그 사건들이, 훗날 작가 ‘박완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 가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준다. 분명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겠지만, 이 역시 작가 박완서가 직접 겪었던 이야기이기에 생각보다 강하게 와닿기도 한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이 서문집이, ‘박완서’라는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기 내지는 수필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 뒷편에 실린 작품 화보는 작가 박완서의 역사 뿐만 아니라, 각 출판사의 역사도 담겨있다. 물론 이 책을 출간한 〈작가정신〉도 포함해서! 


내가 읽은 박완서님의 작품은 몇 권 안되지만, 이 서문집을 읽으면서 느꼈다. 박완서님 작품은 하나 하나가 버릴게 없고 허투루 읽을 게 없다는 것을. 고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박완서님 전집을 구매하여 완독에 도전하는 것을 내 독서 목표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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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미야가와 사토시 지음, 장민주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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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출판 서포터즈로써 받은 두번째 책은, 예상외로 만화 에세이였다. 책을 보내주신 박대리님은 ‘만화’라서 조금 걱정하신 것 같지만, 내 독서 스킬은 코흘리개 꼬꼬마 시절 만화책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완전 노 프라블럼! 오히려 완전 땡큐였다. 이래뵈도 학창시절에 코 묻은 돈을 모으고 모아서, 만화책만 2천여권 이상을 사 모았던 나였으니까(물론 지금은 아주 극히 일부만 가지고 있..)!.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책 표지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라는 제목만 보고 ‘으음, 역시 일본스럽군!’ 했다. 보통 이런 식의 제목을 가진 일본 만화는, 오해를 많이 받기도 한다. 일본만화가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제목을 1차원적으로 해석해서, 그 내용을 추측하고 거부감을 갖은 체로 멀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겉만 보고 생각한 것이기에, 절대 그래서는 안될 일이다. 오히려 이런 제목을 가진 책들은 대체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어마무시한 대작이기 때문이다.


난 이 책을 읽고, 정확히 10페이지에 들어서면서 부터 눈이 시큼시큼 해졌고, 14페이지에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 울면서 봤다. 눈물에 책이 젖을까 조마조마하면서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고, 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내 눈물샘은 고장이라도 난 듯 멈추지 않는다. 분명 슬플거라고 생각했기에, 최대한 무감각하게 봐야지! 싶었는데 결국 무너졌고 펑펑 울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부모와 이별하는 날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내 경우엔 서른세 살때였습니다.

우리 엄마만큼은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그날이 올 때 까지도 굳게 믿었지만…

엄마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P 012




“아직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를 지우지 못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벌써 1년이 지는데도

꽤 오래전에 해지한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를

아직도 지우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이면 참 자주 전화하셨었는데 ….

이제는 압니다.

한밤중에 계속 전화벨이 울리는 것도

늦게까지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도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그런 엄마의 번호이기에

나는 평생 지우지 못할 것 같습니다. P 017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엄마와 내가 이 병실에서 계속 기다려온 것,

그것은 …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경험이었습니다. P 082




“지뢰 같은 추억”

내가 자란 이 동네에는

여기저기에 지뢰처럼 추억이 묻혀있는데,

그건 가까운 마트도 예외는 아니라서

그 지뢰는 가차 없이 나를 덮쳐왔습니다.

앞으로 다시 찾아오는 일이 있을까요. P 109




“1주기”

엄마의 1주기는 남겨진 사람들이

제각기 1년이라는 ‘세월의 약’의 효과를

확인하는 자리 같았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1주기는

엄마가 추억이 되기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P 136



만화책을 보면 으레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고, ‘나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하지만 이 책만큼은 정말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제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면 되도록이면 늦게, 정말 아주 더디게 오기를’ 이라고 바랄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나에게 이런 상황은, 아직 온전히 엄마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나는 정말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나는 그저 큰 사고 없이 잘 살아가는게 효도라고 생각하는 못난 딸이다. 그저 내 할 몫을 다하고, 엄마 아빠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게 효도라고 생각했다. 20대 중후반 언저리에 급 결혼한다고 부모님께 이야기 했었다. 거의 통보나 다름 없었다. 거기다 내 결혼에 대해 일체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내 돈으로만 진행할 거라고 통보했다. 난 내일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는 것이 당연히 효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걸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나는 변하지 않았다. 애교넘치는 성격도 못되었고, 낯간지러운 말도 잘 못하는 성격이라 엄마에게,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아직까지도 말하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내 모습은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그냥... 앞으로도 지금처럼 좋은 곳을 갈 때 엄마, 아빠와 같이 가고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고, 이런 일상을 조금 더 많이, 그리고 같이 보내야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부모와 이별하는 날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내 경우엔 서른세 살때였습니다.

우리 엄마만큼은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그날이 올 때 까지도 굳게 믿었지만…

엄마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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