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지음, 김동수.박수철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구입한 지 꽤 되었지만, 읽을 자신이 없어서 계속 방치하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이라는 제목에서 보이 듯, 이 책은 관동대지진 자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당시에 있었던 일본 관헌(내지는 일본국민)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된 조선인 학살사건, ‘조선인 관동대학살’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쉽게 읽기에는 그 주제가 너무 무거웠고, 읽지 않기에는...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닌 사실이며,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과거였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분명 나와 같은 한국 이름을 쓰고 있지만,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태어난 황국신민이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넘어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다. 저자가 태어난 1932년, 그 때는 지도상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진지 오래였으며, 아주 당연하게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문화를 먼저 접할 수 밖에 없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는 황국신민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태어난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역사를 전공한 이유 때문이다. 


저자가 처음부터 관동대지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아마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들이 으레 그렇듯 궁금했을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재일한국/조선인은 대체 누구인지 말이다. 그렇게 본인의 뿌리를 찾아가던 중 그에 눈에 띄었던 것이 바로 ‘관동대지진’ 그리고 ‘관동대학살’이었다.


1923년 9월 1일, 정오 무렵 도쿄/요코하마를 아우르는 관동지역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다. 바로 ‘관동대지진’ 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진이 워낙 자주 일어난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관동대지진은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하지만 여느 지진과 달리, 관동대지진은 대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지진이 일어났던 시간은 바로 정오, 바로 점심시간이었다. 많은 집에서 점심 밥을 짓기 위해 불을 사용하고 있던 그 시간이다. 대부분의 가옥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던 그 시간, 지진이 터지면서 바로 화재로 이어졌다. 거기다 당시 일본의 가옥들은 전부 목조였다(일본은 지진이 잦은 나라이다보니, 언제든 부서지기 쉽고, 다시 쉽게 지을 수 있는 목조 주택을 지었다). 목조 가옥은 활활 타오르는 땔감과도 같았다. 엎친데 덥친격으로 당시 저기압의 영향으로 남풍(or 동남풍)이 초속 10~15m 강풍으로 불어왔다. 이 강풍은 불씨를 널리 퍼트렸고, 결국 관동대화재로 이어졌다.


대지진에 대화재, 민심은 요동쳤다. 일본 공권력은 공중에 붕 떴다. 공권력이라 부르는 이들은 일련의 사태로 인해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 지 걱정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 것이 아니라, 공포에 빠진 국민들이 그 공포심을 공권력에 휘두를까 걱정한 것이다. 일본의 공권력은 지진 발생 직후, 그러니까 지진이 발생한 당일 저녁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관동지역 각지에 일본 경찰과 일본 군인들이 배치되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이유는 ‘폭동 조선인 진압’이라는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 이라고 잘못 믿어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 경찰서로 끌고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겨로가,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P 108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시민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P 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P 126


이 유언비어들이 관헌에서 먼저 나왔는지, 민간에서 먼저 퍼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사실은 일본 관헌은 이 유언비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경시청에서 이 유언비어를 부추겼다. 처음에는 이러한 소문을 믿지 않던 일본 관민 조차도, 경찰과 군이 ‘폭동 조선인 진압’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과, 각 파출소 별로 ‘조선인을 경계하라’는 벽보가 대대적으로 게시 된 것을 보며 하나 둘 믿기 시작했다. 대지진과 화재에 대한 일본 국민의 공포심은,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은 조선인에 대한 공격석으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과 일본 군은 이런 유언비어를 철썩 같이 믿고, 아니 이용하여 계엄령에 활용하였다.


일본 국회의원 인 육군소장 쓰노다 고레시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라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 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P 181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P 278


(1) 병졸 3명은 스사키 경찰서에서 호송업무 도움을 요청받고 특무조장 시마자키 기마케의 명령을 받아 순사 5명과 함꼐 스사키에서 폭행죄를 범한 조선인 약 30명을 동 경찰서에서 히비야 경시청에 ○○하기 위해 에이타이바시에 이르렀음. 교량이 불에 타버려 건너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도선을 준비중, 조선인 한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다른 17명도 갑자기 스미다가와에 뛰어들기에 순사들의 요청에 따라 실탄 17발을 강물을 향해 쏘았음. 강물로 뛰어들지 못하고 도망치려 한 자는 다수의 피난민과 경관에게 타살되었음.


(2) 병사들이 순찰 중 오시마초 마루하치바시 부근에서 자경단으로부터 수상한 조선인이 잠복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스나초 소학교 부근의 연립주택 마루 밑에서 조선인 6명을 찾아냈는데, 그 조선인들은 모두 폭탄 비슷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음. 그 가운데 한 명이 민중들에게 이를 던지고 부근 강물에 뛰어들매 그를 사살하고, 나머지 조선인 5명이 다시 민중이나 군대에게 폭탄을 던지려 함에 자위상 부득이 이들을 사격하여 사살한 것임.


(3) 오시마초 부근 주민들이 조선인들에게 위해를 받고 있을 때 구원대로서 야중 1의 2, 이와나미 소위가 도착함. 때마침 기병 14의 3, 미우라 소위와 만나 함께 조선인을 포위하려고 할 때 군중과 경관 45명이 약 200명의 조선인 무리를 끌고 옴. 그 뒤처리를 논의 중, 기병 병졸 3명이 조선인 우두머리 3명을 총개머리로 구타하자 조선인들이 군중 및 경관들과 다툼을 일으킴. 군대는 이를 방지하려고 조선인을 전부 살해.

-- 이하중략


(1)에서는 조선인 ‘약 30’명이라고 하여 인원 파악을 애매하게 하는 속임수의 의도가 빤히 보인다. 또 뒤에서 살피겠지만 당시 조선인을 연행할 때 반드시 굴비 엮듯이 묶었기 때문에 도망갈 여지는 없었다. 가령 17명이 스미다가와에 뛰어들었다고 해도 병사 3명이 17발을 사격하여 도망자 17명을 사살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조사를 하지도 않고 ‘불령선인’이라 낙인 찍은 것도 이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불령선인이라면 죽여도 좋다는 전제가 읽힌다는 점이다.


‘불령선인’이란 일본 관헌이 즐겨 사용하는 상투어지만 도대체 어떠한 인물을 말하는 것ㅇ니가. 일본권력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나 형법상의 범죄자는 아니며, 그들에게 불쾌/증오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여도 될 리는 없다. 여기서 드러다는 것은 남의 나라에서 떠돌아다니는 나라 잃은 국민의 애처로운 인권이다. 문책당해야 마땅한 것은 함부로 구속하고 살해를 저지른 특무조장 시마자키 기마케 같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2)는 잙 읽어보면 갈 곳을 몰라 허둥대는 조선인을 모아놓고 괴롭히다가 살해하고서 그 핑계로 있지도 않은 폭탄소동을 만들어낸 것으로, 백(白)을 흑(黑)이라 한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관헌의 권력범죄임이 분명하다.


당시 고토 지구에서 가장 용명을 떨친 것은 근위사단의 기병 제1여단과 제1사단의 기병 제2여단, 야전중포병 제3여단이었는데, 나라시노와 고노다이의 연합작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바로 (3)의 내용이다.

-- 이하중략


(3) 에 참여한 14기병 엔도 사부로 :

“실제로 나와 같이 육군대학을 졸업한 이시모토 도라조는 나라시노 기병대에 있었고 나는 고노다이 연대에 있었지. 그 지진 때 그 녀석이 찾아온 거야. 그렇게 우수한,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게다가 군도까지 받은 사람이 말이야. 나보다 사관학교도 3년 빠르지. 그러한 인물이 ‘엔도군, 협공을 하려하니 자네도 협력해주게’ 라고 말하는 거야. 기병대만으로는 빠져나갈 염려가 있으니까 내 쪾에서 퇴로를 차단하고, 기병대가 고토 방변의 조선인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이었어. 어쨌든 죽이면 훈장이라도 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당치 않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였는데, ‘그러나 아무래도 분위기가 그래. 죽이지 않으면 주민들이 납득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어. 군대란게 그런 정도였지”

P 153 ~ 156 (각 군인의 명단, 장소 등 자세히 실려있으나 생략)


위 증언에 나오는 스미다가와, 즉 스미다 강변 일대는 도쿄를 가보았다면 한 번쯤은 산책을 하러 갔거나,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스미다 강변은 도쿄에서 제일 큰 불꽃축제가 펼쳐지는 장소다. 스미다강 상류에는 유명한 관광지인 아사쿠사를 비롯하여 스카이트리가 있고, 하구로 내려오면 몬자야키가 유명한 츠키시마가 있다. 도쿄시민들만 사랑하는 장소가 아니라, 관광객들도 한 번 이상은 꼭 발을 디뎠던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이 스미다강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 학살이 자행된 아주 무서운 장소였다. 스미다강을 조선인 시신들이 덮었고, 강변 둑 역시도 조선인 시신들이 쌓여있었다. 그랬던 곳이다. 우리가 여행가서, 스미다 강변을 구경하며 ‘아름답다’라고 감탄하는 그 장소가 말이다. 우리가 딛고 있던 그 땅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피를 흘리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해 버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스미다강을 찾는 관광객이 얼마나 되나. 가해 당사자인 일본 국민들이야 신경을 안쓴다치더라도, 피해 당사자인 한국 국민들은 어떤가?


나 역시 도쿄를 처음 갔을 때, 스미다강을 처음 들렀을 때는 그저 ‘멋지다’는 감탄 뿐이었다. 분명 관동대학살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 장소에 갔을 때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망각이란 무서운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해 다시 도쿄를 찾을 때는 부러 다시 이곳을 찾았다. 망각에 대한 미안함에, 다시 찾아왔다. 제대로 기억하기 위하여 찾아오니, 인근 조그마한 공원에 있는 조선인 대학살 추모비도 그제서야 보였다.


장작불 위로 4,5명의 남자들이 조선인의 손과 발을 큰 대(大)자로 움직이지못하도록 잡고서 태웠습니다. 불에 구워버린 것이지요. 불에 타자 피부가 다갈색이 되었습니다. 태워지고 있던 조선인은 비명을 질러댓지만 이미 힘없는 비명이었습니다. 그렇게 살해된 조선인이 차례차례에 개울에 던져졌습니다.


잡힌 조선인 24명을 13명 한 무리와 11명 한 무리로 하여 철사줄로 묶은 후 갈고리로 쳐죽여 바다에 던져넣어버렸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가 있어서 다시 갈고리로 머리를 찍었는데, 너무 깊이 찍은 나머지 갈고리 몇 개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또 그 외 3명의 조선인은 3호지에 있는 석탄 코크스 하치장에서 활활 타고 있는 석탄 코크스 불 속에 산채로 한꺼번에 던져넣어 태워 죽였다.


협객이라 자칭하는 쓰키지의 노름꾼 친구가 자경단의 대장이 되어 본격적인 자경단이 생겼다. 해안가나 강가에 조선인이 올라올 테니 살펴보라 해서 토모씨를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쓰키시마 고토바시 주변까지 조선인을 수색하러 가서 돌을 던지고는 만세 만세하며 죽이고 다녔다. 외진곳에는 조선인의 머리 없는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P 224 ~226 자경단의 살해방식 中 일본인 증언, 일본 신문 기사 발췌



하야시 히데오/자경단원

육군소장이 ‘자네들은 이것을 손에 들고 그 쪽을 경계하다가 조선인이면 닥치는 대로 베어버려!’ 라며 몇 자루의 단도와 일본도를 가리켰다.


에구치 기요시/작가

경찰서, 촌 사무소, 순사 파출소 등의 게시판에 현청 명의로 ‘불령선인!’ 봉기소식과 함께 ‘반항하는 자는 과감히 죽여도 지장없음!’ 이라는 게시가 온통 붙어 있었다.


기쿠치 요시로/정치가

‘모 방향에서 조선인이 습격할 우려가 있으니 남자들은 무장하고 여자들을 피난하시오. 조선인이면 죽여도 지장없소!’라고 알리고 다닌 자는 누구였을까?


성명 미상/자경단

나는 미타 경찰서장에게 물었다.‘9월 2일 밤, 귀하의 부하로부터 조선인 습격정보를 받고 주의하신 대롲 ㅏ경단을 조직했으며 (조선인을) 죽여도 지장이 없다고 귀하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구로코 우치간/운송점

아침에 가족과 다카시마야마로 피난하여 노숙했다. 그날 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넣었다며 조선인으로 보이면 모두 타살하라는 극단적인 전달이 있었다.


이시카와 슈이치/판사

세관에서 마음대로 물건을 가져와도 된다고 해서 사진기를 하나 가져오면 어떨까라고 했다. 또 조선인으로 보이면 바로 죽여도 좋다는 포고가 나왔다고 했다.


나가오카 구마오/부장판사

경찰부장에게서 조선인으로 보이면 살해해도 지장 없다는 통고문이 나왔다.


후지요시 다카시/고슈 특무함장

경찰과 경시총감의 뜻이므로 함꼐 조선인 또는 용의자를 구속, 수금하고 마침내 살해를 허락함에 이르렀다고 한다.


요코하마 미나미오타/자경단

요코하마 상업학교 비품 13식 총 70자루, 18년식 50자루, 레밍턴식 300자루, 합계 420자루를 전부 가지고 감.

P 206 ~ 211 자경단 살해지령 증언들 중 일부 발췌


간혹 관동대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일본에서 나올 때면, 일본 정부는 이런말을 한다. 일본 경찰과 군은 조선인을 ‘보호’하였을 뿐, 조선인을 학살한건 민간, 즉 자경단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 경찰과 일본 군이 조선인을 직접 죽이는 일이 많았으며, 때로는 자경단에게 조선인을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제일 중요한 사실은 자경단이 조선인을 죽이게 끔 여론을 조성하고 유도한 건 일본 정부다. 과연 일본 정부가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일본 정부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저자는 책에서 이리 말한다.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관동대학살의 피해국인 한국정부는 이 일에 대해 언급이 없고 무관심한건가?’. 그래서 한반도에서 황국신민으로 태어났던 그는, 그렇게 일본으로 넘어가 살던 그는, 왜 한국 정부가  관동대지진/관동대학살에 무관심한 지 알고자 이 사건에 대해 연구했고, 수 많은 자료를 모았으며, 이렇게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이 사건을 연구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작금의 한국사회를 보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은 정말 많았다. 하지만 일본인 성노예 문제, 강제징용 문제, 사할린 징용 등이 수면 위에 올라 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군사정권, 독재정권, 친일정권이 일본의 만행을 숨겼고 감췄고 침묵했다. 역대 정권 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이러한 일본의 만행을 언급할라치면 참 이상하게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짓밟혔다. 정권이 바뀐 지금에서야 이러한 문제 중 일부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이렇게 수면 위로 올라온 문제 중에 ‘조선인 관동대학살’은 없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이 문제에 무관심했다. 피해국인 우리가 무관심하니, 가해국 일본은 어떻겠나.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본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지정했다. 엄청난 자연재해였고, 수 많은 일본국민이 죽었으며, 당시 공권력은 일본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반면교사 삼고자 했다. 거기에 관동대지진 당시에 죽어간 일본 국민들에 대한 추도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이 안에는 그들이 참혹하게 죽인 조선인에 대한 미안함은 없다. 그들에게 조선인 대학살은,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을 진압했다는 아주 명확한 명분이 있기 때문이었으며, 당시 조선인들을 죽인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관동대지진은 일본에서 방재의날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2011년 3월 11일 또 한번 엄청난 대지진이 관동을 강타했다. 엄청난 쓰나미와 함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일으킨 동일본 대지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이 말하는 관동대지진은 1923년 조선인을 참혹하게 학살했던 그 일이 아닌, 2011년 검은 파도가 관동을 집어 삼킨, 원전사고가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이 되었다. 그 때와 같은 점은 지진+쓰나미+원전사고 콜라보로 많은 일본인이 죽었고, 그들은 또 공포심을 가졌으며, 그 공포심은 두려움이 되었다. 몇몇 일본 국민들은 이 두려움을 자이니치, 즉 재일교포에 대한 공격으로 바꾸었다. 2011년에도 자이니치, 즉 재일교포가 테러를 했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과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허나, 다른 점이 있다면, 적어도 2011년은 1923년 처럼 사실없는 유언비어가 퍼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 소문은 금새 사라졌다. 물론 우익 싸이트 쪽에서는 조금 더 돌았었지만(이후로도 화재, 강도사건만 나면 자이니치가 했다는 소문이 먼저 퍼졌다. 제일 가까운 예가 바로 오키나와 슈리성 전소사건).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후 큰 재난이 있을 때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을 옆나라, 우리를 향한 공격심으로 바꾸었다. 애초에 일본은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회였다. 큰 재난이 없을 경우에는 꼭 북조선, 즉 북한을 헤드라인으로 다루었다. 무슨 일이 있든, 없든 그랬다. 일본 국민들은 그런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게 정말 당연한 거였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김동수 님의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차별과 전횡의 실상을 알게 되고, 일본 정신사의 한 흐름을 짚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엎는 다행이라 하겠다’. P 023


일본의 정신사. 그렇다. 일본이 왜 무슨 일만 있어면 한반도를 붙잡고 늘어지는 지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은 원래 그런거 아니야?”라고 반응하고, 더 이상 알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무관심 내지는 망각으로 일관한다. 물론 장기적인 불매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조금은 과거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실제로 우리가 불매운동을 열씸히 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뒤로 물러설 마음이 없고, 일본 국민들은 이런 한국을 우습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나 역시 꾸준히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 안가고, 안사는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남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불매라면, 강요 받은 그 사람은 국적은 한국이지만 점점 더 일본에 가까워질 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선은 기억과 관심이다. 금방 끊길 관심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 말이다.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시민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 P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 P126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 P278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차별과 전횡의 실상을 알게 되고, 일본 정신사의 한 흐름을 짚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엎는 다행이라 하겠다’.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