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유럽과 미국의 마녀사냥꾼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고문하고 사형대로 보냈다.

그런데 마녀사냥이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무엇이 이러한 참사를 일으켰을까.

마녀의 역사 p 06



오늘 읽은 세계사 책은 『마녀의 역사』다. 제목만 본다면 진짜 마녀가 있어? 라고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진일보한 문명아래, 과학기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고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녀’라는 존재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책 『마녀의 역사』는 허구일까?


정답은 ‘아니오’다. 실제로 이 땅에는 ‘마녀’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말 ‘요술’을 부리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같은 동네에 살던 약초를 조금 잘 다루던 여성, 외지에서 이사온 여성, 집안에 불운이 꼈던 여성, 재산이 남들보다 조금 더 많았던 여성,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성 중 한명이었을 뿐이다. 


이런 여성들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어느 시간대에나 존재해왔다. 여성숭배가 일반적이었던 고대(석기시대)에는 이런 여성들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농경, 수렵, 채집 등 생존활동에 있어서 노동력이 곧 ‘힘’이었기에, 노동력을 생산하는 여성은 중요했고 그만큼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 한마디로 고대는 여성숭배(여신숭배)가 당연시되는 모계사회였다. 이는 동, 서양 막론하고 동일했다. 전 세계적으로 발굴된 나체 여인상이 이를 뒷바침해준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시대에 이르며, 사회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금속기가 제작되자 예전만큼 노동력이 필요 없어졌으며, 잉여 농산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잉여농산물이 늘어나고, 노동력이 남아돌게 되자 서로간의 땅따먹기가 시작되었다. 무거운 금속무기를 들고 싸우는 남성의 지위가 높아졌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숭배받던 여성들은 그 지위를 잃기 시작했다.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다신교를 믿던 시대에는 여성의 위치가 떨어졌을 지언정, 암흑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가 등장하며 또 한번 격변을 맞이한다. 정확히는 중세시대,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등장하면서다. 중세시대 수많은 여성들이 ‘마녀’로 지목되어, 사탄의 앞잡이라는 모함아래 죽어나갔다. 



유럽 각지에 개신교 교회가 설립되면서 마녀사냥이 본격적으로 벌어졌고, 덴마크와 스코틀랜드 등 수많은 왕실이 힘을 보탰다. 종교탄압으로 탄력을 받은 히스테리가 파도가 되어 밀려와 처형자가 급증했다. 여성들은 '질병, 죽 음, 재앙(자연재해, 그 외)을 일으켰다, '마을 외곽에 살고 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방인이다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우연히 장소와 타이밍이 좋지 않아 마녀라고 비난받았다. 고발 동기도 독단적이어서 마녀가 공동체에 재앙을 일으켰다고 정말로 믿었던 경우도 있는가하면 권력자의 사회 통제나 피고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노린 악의적인 사례도 있었다. p 10



마녀재판의 시대, 일정한 표적 패턴이 생겨났다. 사회의 변두리에서 생활하는 이성과 두세 번 결혼한 여성, 의료행위를 하는 여성이다. 풍작이고 가족이 건강한 때는 이러한 존재도 허용되나, 한겨울 혹한으로 작물이 시들거나 가족이 병으로 쓰러지는 상황은 인간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 마을 외곽에 사는 외부인이 의혹의 시선을 받았다. p 18



심문자는 여러 끔찍한 방법을 동원해 그럴싸한 자백을 이끌어냈다. 마녀 용의자에게서 자백을 이끌어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고문이다. 심문자는 우선 자백을 재촉하고 용의자가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고문을 암시했으며, 그래도 무죄를 주장한다면 용의자를 고문했다. 당연히 고문 방법은 끔찍했고, 용의자는 상처로 인해 매우 쇠약해졌다. (…고문방식은 너무 잔인해서 생략;;…) 고문에서 자백한 사람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마녀를 처형한다고 하면 화형이 떠오르겠지만 참수나 교수도 일반적이었다. '운 좋은' 희생자는 화형당하기 전에 교수 혹은 참수당해 신과 공동체 앞에서 죄를 속죄했다. 밤베르크 마녀재판의 불쌍한 희생자 요하네스 유니우스가 처형 전에 딸에게 몰래 써보낸 편지에 그가 맛본 끔찍한 고통이 상세히 적혀, 결백을 호소하고 있었다.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백하고 사형을 당했으나, 자백 자체가 허위였다. p 87



 


18세기 이성과 과학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오랜 ‘마녀사냥’에 종지부가 찍혔다. 영국 조지 2세는 ‘요술행위 금지령’을 반포하며, 자신이나 타인에게 마력이 있다고 말하거나, 마녀로 부르는 것을 위법으로 정했다. 한마디로 ‘마력, 마녀’라는 단어 언급 자체를 금지한 것이다. 그러자 주변 여러나라도 이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2백년간 이어진 마녀사냥의 종착점이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사람들만 7만 명 정도로 추정하지만, 공식적으로 기록에 남은 건 수는 1만 2천 건 정도라고 한다. 


자, 여기까지는 간추린, 정말 실존했던 마녀의 역사다. 아니 정확히는 ‘마녀’라는 이름뒤에 가려진 여성 수난사다. 놀랍게도 이 책 『마녀의 역사』는 마녀만 다루지 않았다. 마녀는 아니었으나, 비밀리에 활동했던, 교황의 인가를 얻었으나, 교황에게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한 ‘성전기사단(템플기사단)’ 이야기도 실려있다. 심지어 제법 비중있게 다룬다. 


성전기사단이라 하면 성배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중세 로맨스 소설 『파르치팔(Parz val),부터 댄 브라운의 『다빈처 코드』까지 역사상 성전기사단은 신비로운 성유물과 엮어서 등장했다. 창작물에서는 기독교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잔이나 심원하고 드라마틱한 비밀의 수호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흥미롭게도 기사단의 요람의 땅, 프랑스의 트루아는 초창기의 성배 이야기가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기사단과 성배의 관계는 기사단의 최전성기인 12세기부터 13세기에 성배 전설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단은 사회의 일부였으나 지금처럼 당시에도 수수께끼인 조직이었다. 신비로운 성배가 기사단과 엮인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p 43



성전기사단이 몰래 토리노의 수의를 숨겨 숭배하고 있다는 소문은 성배 전설보다 신빙성이 높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비치는 이 천을 처음 공개한 사람은 조프루아 드 사르니의 일족으로, 그가 몰레와 함께 화형당하며 수의와 성전기사단의 관계는 바로 소문의 대상이 되었다. 고발당한 단원 중 한 명인 아르노 사바티에도 입회식에서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긴 아마포'를 보았고, 그 가장자리에 세 번 입맞춤을 하고 받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기사단이 숭배하고 있다고 규탄당한 우상은 사실 토리노의 수의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수의는 1260년부터 1390년 사이의 물건이라고 한다. 이는 연대적으로 일치하며, 수의의 얼굴이 예수가 아닌 몰레의 얼굴이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p 44



이 세계사책은 『마녀의 역사』라는 제목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금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왜 그들이 ‘마녀’로 몰려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 ‘마녀사냥’으로 이득을 볼 수 있게 사회적 그물망을 촘촘히 쌓은 가해자들은 누구인지를 말이다. 특히나 ‘마녀’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특정한 종교의 역사도 같이 떠오른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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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생활백서 리뷰... 폐교 방문 전에 두 권 모두 포스팅하려고 했는데, 현실은 지박령님 버전만 리뷰하고 폐교로. 잠시 폐교생활백서 에세이가 아닌, 폐교 방문 리뷰를 하자면?



프로개님 블로그와 책에서만 보던 폐교와 파티원들을 실제로 보니, 신기하기 그지 없을 뿐이고

분명 폐교에 있는 식물들 중 일부가 우리집에도 있는데, 압도적인 크기 차이에 놀랄 뿐이고

분명 폐교에 있는 식물들 중 일부가 우리집에도 있는데, 압도적인 무늬 차이에 놀랄 뿐이고

분명 퀘스트 시작은 같이 했는데, 왜 우리집에만 얘가 없는가!!에 슬플 뿐이고

하지만 그 중에서도 와따는 환영 화환이 바나나라는 것!

심지어 운동장에도 바나나가 얼차렷. 심지어 바나나가 달려있다는 것!!


끝!



자 이제 에세이, 프로개의 폐교생활기로 돌아와서.....


​아내는 안식년 용돈으로 1,000만 원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방을 내어줄 테니 식물을 더 키워 실험해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크라우디펀딩 사이트에 프로젝트 계획을 올렸습니다. 4,900여 개의 식물을 다양한 환경에서 키워보고 기록하는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식물을 아파트에서 키울 수는 없었습니다. 부랴부랴 장소를 찾은 다음 짐을 쌌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그렇게 폐교로 떠났습니다. p 009


처음에는 시골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화물 수레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수레값에 트럭 배송비를 더하자 제법 큰 금액이 나왔습니다. 조금 더 보태면 전기로 움직이는 카트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보태면, 조금 더 보태면’으로 나아가다가 ‘차라리 트럭을 살까?’에서 정신을 차렸어요. 결국 그냥 만들기로 했습니다. p 030


통큰 아내, 지박령의 배려로 안식년과 용돈으로 시작된 식물 프로젝트는 판이 커져서, 결과적으로 5년 간 폐교 생활 확정!!!


그렇게 프로개는 폐교를 어엿한 건물로 만들어냈다. 사무실 겸 침실을 만들었고, 부엌을 만들었다. 온갖 연장을 가져다 둘 도구실에, 수레, 택배보관함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다 만들다 비닐하우스와 텃밭, 울타리까지 만들었으니. 이쯤되면 그는 식물 드루이드라는 호칭에 연금술사라는 호칭까지 더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연금술사의 바람인 금 생성은 못하겠지만.....^_T


시골로 간다고 했을 때 텃세를 걱정하는 분이 많았어요. 그런 게 없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낯선 마을의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건지도 모릅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면 되는 것 아닐까요? 내가 먼저 경계를 풀고 녹아들면 마을 사람들은 더 많은 것으로 돌려줍니다. 호의는 그렇게 호의로 돌아왔습니다. p 028




시골 사람들 인심 좋다고 하지만, 그만큼 텃세도 무섭다는 건 익히 들어와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에세이에서 본 프로개님 폐교 적응기도 그렇고, 내 외조부모가 살고 있는 시골을 봐도 그렇고, 시골 텃세란 각박한 도시에 살고 있던 도시민들의 편견이란 생각이 든다. 어릴 때 우리네 부모님, 조부모님이 그러셨듯, 이사오면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떡도 돌리고, 길가다가 마주치면 인사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도울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우리가 시골 사람들이라 말하는 그분들은, 그저 예전처럼 사람냄새 나는 삶을 살고자 했던게 아닐까. 옆집에 누가사는 지도 모르는, 이웃 얼굴도 모르는, 사람 냄새 사는 삶을 잊어버린 각박한 도시민들이 오히려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이 에세이 저자 프로개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냄새 나는 삶이 무엇인지를. 그래서 이사 떡을 돌리고, 이웃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물론 귀찮은 일이 없을거라면 그건 거짓말이다. 고령화된 시골에, 젊은 사람은 말 그대로 노동력이니까. 귀찮은 일을 대거 떠맡게 되는 건 당연지사다. 프로개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시골에 녹아들기를 선택했다. 그러자 저자에게 ‘시골 인심’이 배가 되어 돌아왔다. 


김장철에는 김장김치가 배달되고, 마을 앞으로 나온 영농지원금 명단에 자연스럽게 포함되고, 어느날 문앞에 사방신 먹이가 배달된다. 심지어 저자가 폐교 운동장 한켠에 텃밭을 만들기 위해 말그대로 삽질을 하고 있을 때, 마을 어르신이 트랙터를 몰고와서 한 큐에 땅을 갈아엎어주었던 것을 보면, 프로개는 아주 완벽하게 이 마을에 녹아들었것 같다. 오죽하면 폐교임대 기간이 끝나 이사를 간다하니, 주민들이 아쉬워할까!


장뇌삼 씨앗을 뿌리는 과정에서 모과나무 군락지를 발견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사신 어르신께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요. 이 학교에서 관리하던 모과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80년대쯤이었다고 하네요. p 068


이번에는 딸기밭을 발견했습니다. 이미 딸기가 무르익어 있었어요. 수확해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됩니다. p 070


목재에 꾸을 발라 벌들이 많은 곳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여왕벌을 유도했죠. 그런 다음 벌집 통을 만들었습니다. 어라? 벌이 정말로 벌집 통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p 078


작년에 쫓아냈던 박쥐가 돌아왔습니다. p 162


송이버섯은 다음 해에도 또 이듬해에도 보였습니다. 송이버섯을 많이 채취한 날에는 친구들에게 택배로 보내주기도 했어요. p 178


폐교에는 실험 중인 식물 외에 개인적인 취향으로 키우는 식물도 많습니다. 바나나, 파파야, 용과, 망고스틴, 페페론치노 등 말이죠. 대부분 열대성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그렇기에 겨울에도 따뜻하게 관리해주어야 합니다. 빈 교실 하나를 선택합니다. 온실을 만들려고 해요. p 142



폐교에 들어올 때만해도, 그 이유는 5천가지 식물 테스트를 위함이었을 텐데. 우리의 프로개는 수많은 자체 퀘스트를 발생시켰다. 일부 퀘스트는 블로그에서 많은 드루이드들과 같이하는 퀘스트이기도 했고, 또 어떤 퀘스트는 본인 스스로 만들어서, 깨부시는(?) 퀘스트이기도 했다. 그 퀘스트 주인공들 사진이 에세이에 실려있는데, 와아.


누가 알았을까. 안동 폐교 운동장에 바나나, 파파야가 심길거라고. 심지어 바나나, 파파야 열매가 맺혔고. 그 뿐이랴? 폐교 곳곳에 퀘스트 주인공인, 파종부터 시작한 망고스틴, 페페론치노, 파인애플 등이 우람한 크기로(?) 그 곳을 지키고 있을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 슬픈 TMI 보태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퀘스트 시작을 같이 했지만 강제로 중도 탈락했다는 뭐 그런 소소한 이야기?


그런데! 하늘도 이런 프로개 됨됨이를(?) 알아봤나보다. 프로개 자체 퀘스트 발동과 별개로, 어떻게는 처리를 해야만 하는 퀘스트를 던져주니 말이다. 예컨데 박쥐 발견! 이라던가, 말벌 발견! 이라던가. 모과, 산딸기, 송이 던전 발견 뭐 이런 거?



이렇게 5년 간의 폐교 생활이 끝나가고, 마무리만 남은 지금. 폐교 생활을 응원하며 지켜본 나도 이렇게 아쉬운데, 프로개 본인은 얼마나 헛헛할까. 그래도 폐교가 훗날 프로개의 숲을 위한 한걸음으로 기억될거라는 생각을 하면, 프로개도 지박령도 모든 파티원들도 아쉬운 마음은 접어두고 폐교와 웃으며 안녕할 수 있겠지!


안녕, 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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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준의 말하기 수업 - 말하기에 자신이 생기면 인생이 바뀝니다
한석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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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하면 읽게 되는 장르의 책이 있다. 글쓰기와 말하기에 대한 책이다. 작년에는 주로 글쓰기(어휘력, 문해력)에 대한 책을 읽었다. 이제 글쓰기에 대한 이론(?)은 어느 정도 정립이 되었으니, 올해는 말하기에 대한 책을 주로 읽어볼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말하기 책은 『한석준의 말하기 수업』이라는 책이다.



《프리한 19》로 익히 보아온 한석준 아나운서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 옆에 오상진 아나운서, 전현무 아나운서가 있음에도 그가 하는 말은 이상하게 귀기울여 듣게 된다. 한창 TV를 볼 때는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알았다. 내가 한석준 아나운서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이유를. 그가 하는 말에는 품격이 있었다. 


다른 두 아나운서의 말에도 품격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석준 아나운서 말의 품격이 유독 돋보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청중의 입장에서 분석하자면, 그가 하는 말에는 항상 말을 듣는 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었다. 배려와 존중은 과하면 상대방이 만만하게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석준 아나운서가 하는 말 속의 배려와 존중은 과하지 않는 적정선을 지킬뿐더러, 그 안에는 자신을 지키는 자존감도 있었다. 



살다보면 ‘말’하나로 무너지고, ‘말’ 하나로 흥하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말’ 잘못해서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왕왕있다. 비단 남의 일이 아니다. 말로 인해 관계가 틀어지는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당장 내 기억속에도 그런 경험이 있다. 오랜 지기가 있었다. 나에게는 ‘친우’라 꼽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말에 나는 상처를 받았다. 서로를 알고 지낸 시기가 너무 오래되었고,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이였다. 뭐 이제와 돌아보면 나만 그런걸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난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그 말은 아닌 것 같다고 그 자리에서 정정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가벼운 사과말은 커녕 ‘무반응’. 


나는 성격상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아닌 사람은 칼같이 쳐낸다. 오랜 지기라 생각했던 사람의 말과 행동. 칼같이 쳐내기엔 나에겐 너무 소중한 친우였기에 그저 실수라고 생각하고, 그가 가벼운 사과라도 하길 바라며 조금은 기다렸더랬다. 깨톡창도 수십번 들여다보곤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연락은 없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 자기 필요에 의한 연락을 했다. 그 연락에는 내가 원하는 ‘말’은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만 이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나보다, 하고. 그렇게 나는 내 원칙처럼 그와 연락을 멈췄다. 


말을 잘해서 나타나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참고로 말을 ‘잘해서’라는 의미는 그 말을 함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와, 사용한 언어 그리고 말 하는 사람의 태도다.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춘 사람은 말 하나로 좋은 인연을 만든다.


나에게는 ‘지인’보다 가깝지만, ‘친우’라고 하기엔 1% 부족했던 그런 인연들이었다. 사회에서 만난 인연보다는 크지만, 그렇다고 마냥 크지는 않았던 그런 인연들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인연들이 내 속에서 크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루는 내가 이들과 이렇게 친했었나? 라고 돌이켜보던 날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들이 나에게 하는 ‘말’은 언제나 다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말을 하는데 있어서 타이밍을 알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조차 잊었던, 내 호의를 잊지 않은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말을 건네던게 쌓이고 쌓이다보니, 어느새 나에게 이들과의 관계는 꽤 커져있었다.

음..? TMI가 길었다. 엄청 길었다. 뭐, 결론은 이거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부메랑으로 돌아와 누군가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품격있는 말은 그 누구라도 말하는 사람에게 좋은 인연으로 다가온다.






 

 발음을 좋게하는 데는 자음 훈련보다 모음 훈련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음을 틀리게 발음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자음을 틀리게 발음했을 경우 어떤 자음을 틀리게 발음했는지 확실히 드러납니다. 반면, 모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음을 틀리게 말하면 사람들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발음이 부정확하네’라고 생각합니다. p 037

‘아’ 발음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말의 ‘아’를 정확히 발음하려면 입을 위아래, 좌우로 크게 벌려야 합니다. 거울을 보면서 ‘아~’ 하고 소리내보세요. 어떤가요? 얼마나 입을 크게 벌려야 하는지 느껴지나요? 영어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영어의 ‘A’ 발음을 생각해봅시다. ‘A’ 발음은 우리말의 ‘아’와 ‘어’의 중간쯤 됩니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 때문에 영미권 사람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 정확히 발음하기 어려워 합니다. 아예 소리 낼 줄 모르면 신경써서 배웠을 텐데, 소리 낼 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확한 발음을 배우기 어려운 겁니다. p 038


참고로 책 본문 뒤에는 단기간에 발음이 좋아지는 모음 훈련법이 있다.


우리말은 영어와 달리 서술어가 가장 뒤에 나오기 때문에 말끝을 흐리면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오해의 소지를 낳을 뿐더러 자신감 없는 사람으로 비칠 우려도 있고요. 말끝을 흐리는 습관은 직장생활에서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업무를 분담하거나 보고할 때 말끝을 흐린다면 능력과 상관없이 신뢰감이 떨어질 테고, 그 결과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죠. p 062

“말을 끝까지 정확하게 하면 너무 공격적으로 보이던데….”
말끝을 분명히 해도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말투와 미소를 겸비한다면요. 말을 끝까지 분명하게 마치면 존재감이 확실해질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상당히 지적인 느낌을 줍니다. 지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을 만만하게 보는 건 어렵지요. 그러니 어디서든 내가 만만하게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면, 우선 내 말버릇이 어떤지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p 063

긴장해서 말이 빨라진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우선 스스로 말이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겠죠. 발음이 꼬이거나 숨이 차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현상 가운데 하나라도 나타난다면 ‘아, 내가 지금 말이 빠르구나’ 하고 판단하면 됩니다. 그 다음 해결책은 말의 고삐를 당기는 겁니다. 이때 고삐는 호흡입니다. 말이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심호흡을 하는 거죠. 한 박자 쉬는 것입니다. 충분히 쉬어도 1~2초 사이입니다. 이 정도는 청중이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호흡이라는 고삐를 당겨 긴장한 나 자신에게 진정할 여유를 주길 바랍니다. p 105


전해야 할 내용이 많아서 급한 마음이 말이 빨라질 때도 있습니다. 스피치의 목적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김없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럴 땐 차라리 내용을 줄이는 편이 낫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하는 거죠. p 106


긴장에서 말이 빨라지는건,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나는 긴장보다는 분노했을 때 말이 빨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왜 과거형인가, 지금은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됐기 때문이다.  


책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분노가 극심해졌을 때 나는 입을 닫는 연습을 했다. 그래야 입 끝에서 맴도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뱉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계속 연습했고, 지금은 꽤 개선되어서 예전처럼 분노했을 때 아무말을 내뱉은 일은 줄었다. 적어도 입 닫는 연습 이후, 지금까지 분노시 아무말 횟수는 0회인듯?


그날 마침 “힘내” 라는 말에 대해 각자 생각을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반응이 어땠을까요? 거의 모두 “힘내”라는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개중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사람도 있었지요. “힘내”라는 말 한마디로 힘이 날 것 같으면 왜 우울했겠느냐며, 그 당시에는 힘을 낼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p 125

우리말이 그렇습니다. 위로하는 말이 딱히 없습니다. 누군가의 부고를 듣거나 상갓집에 가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다른 말을 하자니 ‘결례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지요. 결국에는 ‘복사-붙여넣기’를 하듯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p 126

“힘내”라는 말을 포함해 이런 위로는 모두 ‘말하는 이’의 중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진심으로 헤아린 것이 아닌,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 결과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을 오히려 더 무력하게 만들고 말았죠. p 127

그렇다면 힘든 일을 겪은 이에게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까요? 정답은 없지만, 위로하기 전에 다음 두 가지는 반드시 고려하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언제든 힘들면 연락해. 내가 곁에 있어줄게”처럼 내가 네 곁에 함께한다는 걸 전하는 것입니다. 힘낼 힘조차 없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은 강요에 가깝습니다. 위로할 때는 영혼 없는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내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p 127


“거절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누구에게나 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거절당하는 기분을 알기에, 상대방과의 관계가 혹시 틀어질지 몰라서, 언젠가 반대로 거절당할까봐 등등의 이유로 우리는 쉽게 거절하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거절 자체를 인정머리 없는 행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거절에 어울리는 서술어도 부정적어감을 주는 ‘당하다’ 입니다. p 153

잠시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반드시’ 들어줘야 할 부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바로 ‘부탁을 받는 이’ 입니다. 사실 상대방에게는 ‘가급적’ 들어주었으면 하는 부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요청을 받는 입장에서 ‘반드시’ 들어줘야 할 부탁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아 바로 거절해도 괜찮은 이유입니다. 만약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 부탁이라면, 상대방은 내게 다시 부탁하거나 절실한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할 것입니다. 그때 다시 고민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거절해도 됩니다. 거절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p 155

사실 거절해야 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무리해서까지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어렵게 부탁을 했을까, 하면서요.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방의 감정을 책임질 필요가 있을까요? 미안해하지마세요. 거절은 나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경계선 입니다. p 156


‘말’은 힘이 있고 위험하며, 그럼에도 불과하고 내 생활에서 뗄레야 뗄 수 없다. 사람은 평생 말을 안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고로 우리는 말하기 연습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냥 말하기가 아닌, 말을 ‘잘’ 하기 위한 방법을. 

그런 사람들에게 한석준 아나운서가 쓴 말하기 수업 책인 『한석준의 말하기 수업』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이 책에는 한석준 아나운서가 아나운서 시절부터 지금까지 갈고 닦은, 꾸준히 지키는 말하기 원칙이 담겨있다. 그 뿐만인가? 말하기 방법을 어떤 식으로 고쳐야 하는지도 알려주는 그야말로 말하기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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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어를 곧잘 한다. 내 일본어 실력은 자격증으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JLPT N1은 기본이고, JPT 800점대가 나온다. 심지어 일본어 관광통역사 자격증까지 있다. 자랑하고 싶은게 있다면, 학원을 다닌 적 없고 오로지 일본어를 독학으로 했다는 것. 거기다 관련 전공자도 아닐 뿐더러, 지금 하고 있는 일이랑도 일절 상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 함정은 있다. 어려서부터 역사더쿠였기에 한문을 좋아했다. 그런 와중에 중학생 때부터(!!) 일본 만화와 성우에 미친듯이 빠져버렸다. 그렇게 남들이 말하는 이른바 슬기로운 더쿠생활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일본어를 익히게 되었달까? 더쿠생활의 끝을 달렸던 고등학생 때는 졸업하면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다는 꿈도 꿨다. 슬프게도 이 꿈은 그저 꿈에서 끝났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지, 나빴다고 해야할지. 나는 워킹 홀리데이는 커녕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에 성공했다. 그저 그런 회사에 취업했다면, 언제든지 때려치고 내 꿈을 쫓을 수 있었을텐데 이 역시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지. 내가 취업한 회사는 남들이 들으면 ‘오올!’ 하는 이른바 대기업이었다. 회사를 때려치고 꿈을 쫓기엔 아쉬울게 많을 정도로. 그렇게 난 평범하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덕질은 자연스레 안녕! 일본어는 취미생활이 아닌, 내 가치를 증명할 도구로 사용했다. 


어느새 직장생활 1n년차. 길다면 긴 기간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도 하고, 신혼도 즐겼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낳았다. 지금의 난 ‘육아-회사-육아-회사’ 무한 반복이다. 육아와 함께 내 시간이 사라져서 그런가? 요즘들어서 부쩍 잊고있던 꿈이 떠오른다. 내가 포기했던 수많은 선택 중 하나,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이 책은 두 번의 워킹홀리데이로 일본과 아일랜드에서 지내고, 워홀이 끝난 뒤에는 세계여행을 하며 여행을 업으로 삼은 저자의 기록이다. 과거의 내가 포기했던 삶이다. 지금의 내가 가끔씩 부러워 하는 삶이기도 하다. 


‘일본어도 안 되는데 일을 어떻게 구할까?’라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오자마자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구하러 다녔다. 전화로 일을 구할 만큼 일어도 안됐고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는데 사람을 구합니까?’라는 일본어만 외운 채 무작정 가게에 찾아갔다. 역시 외국인이 일어도 못하는데 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 일본에 올 때 ‘절대로 한국인들과 어울리지말자’, ‘한국 가게에서는 일하지 말자’ 라고 굳게 다짐하고 왔었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을 목적으로 왔기 때문에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한국인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결국 자신을 인정하고 동유모 사이트(한인 커뮤니티 카페)를 검색하며 ‘아카사카’라는 지역의 한국 가게에서 일하기로 했다. p 025


보통 언어는 3개월 단위로 계단처럼 오른다고 한다. 항상 도서관에 갈 때 또는 길을 걸을 때 한자 간판이 유독 많은 일본에서 언젠가 간판을 읽으리라 다짐했었는데 신기하게도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간판에 있는 글들이 읽히기 시작했다. 순간 누군가 나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았지만 내 눈과 머리로 간판을 읽고 있다는 걸 의식했을 때의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역시 언어는 꾸준히 하면 는다. p 030


며칠 동안 검색해서 일본 카페와 식당, Bar 등에서 면접을 봤다. 결과는 단, 한군데도 흔쾌히 OK 하는 곳이 없었다. 면접을 보니 일본어 실력이 일할 정도는 안 됐나 보다. 갑자기 일본어 실력에 자신감이 떨어지고 작아지기 시작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의 치욕을 또 한번 느꼈다. 너무 자만했던 걸까? 좌절했다. 그렇게 이틀을 술 먹으며 신세 한탄을 하고 있던 찰나, 에비스의 몬쟈 가게에서 연락이 왔다. 나를 채용한다는 합격 통보였다. p 049




내가 알고 있는 일본 워홀은 보통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다. 실제로 한창 더쿠생활을 하던 그 때, 내 주변에 있는 수많은 일본어 능력자들이 선택했던 길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 에세이를 읽고 꽤 놀랐다. 일본어를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 워홀을 선택한 저자였기에. 무모하다면 무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용기와 추진력에 박수를 치고 싶어졌다. 언어를 모른 상황에서 외국행을 택했다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언어를 습득하여 외국에서 생활하겠다는 의지를 담보로 한거니까.



실제로 저자는 3개월만에 일상회화가 가능할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늘었고, 두번째 직장은 온전한 일본 가게였다. 서비스를 중시하는 일본에서,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은, 정확히 자연스런 일본어 응대를 못하는 사람은 취업이 어렵다. 헌데 그 어려운 길을 해냈으니, 이 정도면 저자의 의지와 실행력은 정말 박수받을만 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생각이 많아졌다. 원하던 일본 가게에서 일도 하고 일본어도 늘고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내 마음속의 불안함은 남아 있다. 스물 네 살의 나이에 주변 친구들과 달리 학교도 휴학하고 일본에 왔는데, 이곳에서의 생활을 과연 잘하고 있는걸까?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모든 물음의 끝은 결국 내가 정하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도 생각이 많아진 만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p 071



인생을 살면서 온전히 ‘여행’만 한 적은 없었다. 여행이란 것은 짧게 다녀올 때 휴식의 개념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스태미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여행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매일 보는 풍경들과 만나는 낯선 사람들은 일상이 되었고 그게 내 삶 속의 일부분이 되었다. 아름다움, 즐거움, 멋진, 무서움 온갖 단어의 의미를 정한 기준은 무엇일까? 무언가의 ‘기준’을 정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일반화된 논리이지 정답은 아니라는 것. 결국은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번 여행을 통해 ‘돈’과 ‘시간’으로 살 수 없는 ‘꿈’을 찾았다. p 098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던 1년. 2014년 3월 6일 ~ 2015년 3월 6일. 많은 사람을 만났고 추억을 쌓았다. 내 인생에 있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스물네 살의 일본 워킹홀리데이 생활. 아마 이번 워킹홀리데이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쳇바퀴 돌듯 바쁜 일상을 살 것이다. 그렇지만 꿈은 더 커졌다. 내 꿈을 위해 달려가 보려 한다. 10년 후 미래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p 116



잠깐의 여행이 아닌, 모든 것을 다 내려두고 장기간 세계여행을 간다고 하면, 누군가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거냐며 걱정이라는 이름의 오지랖을 부린다. 물론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걱정하는 그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으니, 바로 세계여행을 선택한 당사자다. 그들 역시 앞날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여행을 택했다는 건,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겠다는 의지다. 뭐, 간혹 욜로★만 외치는 머리가 살짝 백지인 소수도 있긴 하지만.


보통은 저자처럼 넓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을 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그리고, 또 그려낼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도 모든것을 뒤로하고, 세계로 떠나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박수를 쳐주고 싶다. 지금은 누군가의 걱정을 한 몸에 받을 그 선택이, 훗날 자신들을 걱정해주었던 사람들보다 여러 면에서 더 멋진 어른이 될 시작점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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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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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목으로 세계사를 들었던 고등학생 때, 한창 세계사에 빠져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를 가르치던 세계사 선생님은 매 수업시간마다, 교과 진도에 맞춰서 본인이 답사여행을 다녀왔던 사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을 공부할 때는 로마 답사 사진을, 중세 유럽을 공부할 때는 유럽에 있는 중세 건축물 앞에서 찍은 사진등을 말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사 더쿠였던 나에게, 중세 유럽 건축물은 정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중세 한국 건축물에서 보기 힘든 뾰쪽뾰쪽한 첨탑이라니! 성당 안을 오색 빛으로 물들이는 스테인글라스라니! 정말 신세계였다. 



하늘 드높이 위로 솟은 높은 첨탑과 그 위에 있는 십자가. 누가봐도 수평보다는 수직성을 강조한 건축물. 그런 건축 양식을 ‘고딕 양식’이라고 배운 그때부터 나는 고딕 성당에 대한 로망이 생겼더랬다. 하지만 그저 로망일뿐! 난 지금도 고딕 성당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저 그런 머글이었다. 하지만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덕분에 적어도 고딕 성당 머글 신분은 벗어난 듯?!


이 책에 따르면 20세기 미술사학자인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역사를 물리적 시간의 불가분한 연속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고 단절된 시대들의 진행단계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단절된 시대가 연속되는게 역사이며, 이를 뒷받침해주는게 바로 시대의 통일성이다. 시대의 통일성은 역사에 포함된 예술, 문화, 철학, 종교, 정치 등 다양한 현상 등에서 찾아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해당 시대의 건축 양식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건축양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바로 떠오른 건 10세기 ~ 11세기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부활과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은 로마네스크 양식, 12세기 왕가의 지지를 받아 외곽에 있던 교회건물들이 도시안에 들어서며 덩달아 부유층에 지지를 받으며 교회 권한이 커지면서 유행한 고딕 양식, 14세기 교회권한이 줄어들고 흑사병 유행을 거치면서 유행한 르네상스 양식이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역사는 단절된 시대가 연속되는 진행과정이며, 각 시대마다 어떠한 분야든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게 맞구나 싶다.



‘로마네스크’가 ‘로마다운’이란 뜻이었다면, ‘고딕’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을 가리키는 ‘고트인의’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고딕이 고트족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고딕’과 ‘고트족’은 아무련 관련이 없습니다. ‘고딕’이라는 이름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이 양식을 두고 게르만족이 세련되지 못하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붙인 것인데, 계속 사용하면서 후대에 공식명칭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고딕 양식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상당 기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 008


초기 고딕 성당을 대표하는 상리스, 누와용 대성당을 거치며 고딕 성당은 본격적으로 수직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성당이 바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이르러 성당 규모도 웅장해지고, 앞서 지어진 초기 고딕 성당의 한계를 극복하며 구조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그 위용은 워낙 대단해서 당대 유명 작가였던 빅토르 위고도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주제로한 여행기와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옛 모습은 사라졌다. 뉴스에서 본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는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딕 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한 12세기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대중화되고, 그에 따라 신학의 영역에서 마리아론이 발전한 시기였습니다. 특히 구세사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관련된 마리아의 협력에 집중되었던 관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사건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많은 주교좌성당이 성모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정했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성모 마리아 성당, 곧 노트르담 대 성당이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입니다. 그래서 ‘노트르담 대성당’이라고 말하면 보통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말하는데, 앞에서 언급된 상리스 대성당과 누와용 대성당, 그리고 랑 대성당 모두 ‘노트르담 대성당’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p 067


『레 미제라블』(1861년)로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는 그보다 20년 전인 1831년에 『파리의 노트르담』을 출간했습니다. 위고는 스물 세살이 되던 해에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여자의 자격으로 샤를 10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 대관식은 여느 왕처럼 랭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평소 고딕건축에 관심이 많아떤 위고는 랭스 대성당의 모습에 매료되어 그 후 건축여행을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여행기를 집필하였는데, 그중 ‘프랑스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의 파괴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서 문화유산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특히 고딕 성당의 훼손에 대한 그의 우려는 『파리의 노트르담』에 잘 나타납니다. p 075


위고는 대성당의 양식을 평가하기를 순수 로마네스크 양식도 아니고 순수 고딕 양식도 아니며, 과도기적 양식의 성당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기둥은 로마네스크로 세워졌지만, 반원 아치 대신 포이티드 아치가 얹히면서 그 양식이 전체를 지배했는데 그 뾰족하기로 치면 후대의 포인티드 아치만 못하였다고 비평합니다. 이를 육중한 로마네스크식 원기둥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고 합니다. 위고의 관찰은 매우 예리한데 그래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전성기 고딕 성당에 속하지 못하고 초기 고딕의 완성 단계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p 078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장엄하고 숭고한 건축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답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손 쳐도,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카룰로스 대제)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 오귀스트에 대한 경의를 저버린 채 인간들이 존경할 만한 기념물에 가한 무수한 훼손의 흔적 앞에서 한숨을 참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에서 유명한 성당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유명하지만, 실상 성당의 권위(?)가 있는건 랭스 대성당이다. 프랑스 역대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던 성당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랭스 대성당은 초기 고딕의 수직성과 수평적 비례를 중시한 고전 고딕을 융합시킨 건물로 전성기 고딩양식의 대표 건축물이다.



5세기 초에 세워진 랭스 대성당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곧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에페소 공의회(431년)의 영향을 받아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었습니다. 이후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가 496년에 이곳에서 아리우스파에서 개종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세례를 받았는데, 그의 세례는 유럽의 나라들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도를 국가 체계의 기틀로 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오랫동안 명성을 이어왔습니다. p 124


성당의 수직화는 구조적 경량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플라잉 버트레스의 밴딩 모멘트를 해결하지 못해 육중한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졌는데, 랭스는 부르즈 대성당의 보강 방식을 받아들여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벼우면서도 강하게 만들었고, 버트레스의 단면도 줄였습니다. 플라잉 버트레스 기능이 강해졌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트리포리움의 높이가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성당의 벽체도 얇아졌고 창문의 크기도 넓어지면서 경량화를 배가시켰습니다. p 128


고딕 성당은 생드니 대성당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그리고 샤르트르 대성당을 거치면서 고딕주의의 절정인 랭스 대성당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는 누와용 대성당, 랑 대성당 그리고 부르주 대성당의 고전주의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함께 걸음’ 덕분에 웅장하고 찬란한 고딕 성당이 지금도 우리 앞에 서 있지 않습니까? p 130


동방박사 유골함이 봉헌되어있는 쾰른 대성당은 독일에 있다. 그 자리에 처음 성당이 세워졌던 시기는 비교적 오래전인 4세기 였지만, 여러 개중축을 거치다가 13세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소실된 그 자리에 새로 성당을 지으니, 그게 바로 지금의 쾰른 대성당이다. 그저 멋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라고 하기엔, 쾰른 대성당에 지금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지는 과정이 꽤나 흥미롭다.


당대 독일 도시 쾰른은 로마네스크 전통이 깊었던 지역주의가 눈에 띄는 도시였다. 반면 인근에 있는 프랑스는 고딕 양식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영국은 쾰른처럼 지역주의도 있었지만 프랑스처럼 보편주의도 있어서, 이 두개가 적절히 공존했지만 쾰른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쾰른 성당은 순례성당으로 이름났고, 해마다 순례객이 늘어나자 성당 확장을 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유럽의 권력을 나눠가졌던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세 곳의 눈치를 쾰른 대성당은 어떤 방식으로 성당을 확장해야하는지 고민했다. 쾰른에 만연한 지역주의를 따라가자면 신성로마제국 처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야했지만, 이미 신성로마제국의 위상은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게 될 경우, 독일에 있는 다른 성당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미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고딕 성당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쾰른은 고딕양식을 받아들였다. 그냥 고딕 양식이 아닌, 기존의 고딕 양식을 뛰어넘은 새로운 고딕양식을. 그렇게 탄생한게 지금의 쾰른 대성당이다.


쾰른 대성당에는 116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서 봉헌된 동방 박사의 유골함이 있습니다. 이 성 유물은 황제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얻은 것으로 밀라노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후 대성당은 유골함을 금으로 다시 제작하여 1225년에 완성하고 그로부터 유럽 전역에서 이 유골함을 보기 위해서 쾰른 대성당을 순례했습니다. 그렇게 쾰른 대성당이 순례 성당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서부터 성당은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p 208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으로 건축 양식이 변화하던 시기의 당대 신학과 철학의 연관성을 찾아가는 건축사적 세계사책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고딕 성당, 전성기 고딕 성당, 후기 고딕 성당을 비롯하여 유럽 국가별 유명한 고딕 성당들을 사진자료와 함께 건축학적으로, 세계사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여기서 시야를 조금 더 넓히고 싶다면, 저자의 전작인 ‘로마네스크 양식’에 관한 책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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