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유럽과 미국의 마녀사냥꾼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고문하고 사형대로 보냈다.

그런데 마녀사냥이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무엇이 이러한 참사를 일으켰을까.

마녀의 역사 p 06



오늘 읽은 세계사 책은 『마녀의 역사』다. 제목만 본다면 진짜 마녀가 있어? 라고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진일보한 문명아래, 과학기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고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녀’라는 존재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책 『마녀의 역사』는 허구일까?


정답은 ‘아니오’다. 실제로 이 땅에는 ‘마녀’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말 ‘요술’을 부리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같은 동네에 살던 약초를 조금 잘 다루던 여성, 외지에서 이사온 여성, 집안에 불운이 꼈던 여성, 재산이 남들보다 조금 더 많았던 여성,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성 중 한명이었을 뿐이다. 


이런 여성들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어느 시간대에나 존재해왔다. 여성숭배가 일반적이었던 고대(석기시대)에는 이런 여성들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농경, 수렵, 채집 등 생존활동에 있어서 노동력이 곧 ‘힘’이었기에, 노동력을 생산하는 여성은 중요했고 그만큼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 한마디로 고대는 여성숭배(여신숭배)가 당연시되는 모계사회였다. 이는 동, 서양 막론하고 동일했다. 전 세계적으로 발굴된 나체 여인상이 이를 뒷바침해준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시대에 이르며, 사회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금속기가 제작되자 예전만큼 노동력이 필요 없어졌으며, 잉여 농산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잉여농산물이 늘어나고, 노동력이 남아돌게 되자 서로간의 땅따먹기가 시작되었다. 무거운 금속무기를 들고 싸우는 남성의 지위가 높아졌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숭배받던 여성들은 그 지위를 잃기 시작했다.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다신교를 믿던 시대에는 여성의 위치가 떨어졌을 지언정, 암흑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가 등장하며 또 한번 격변을 맞이한다. 정확히는 중세시대,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등장하면서다. 중세시대 수많은 여성들이 ‘마녀’로 지목되어, 사탄의 앞잡이라는 모함아래 죽어나갔다. 



유럽 각지에 개신교 교회가 설립되면서 마녀사냥이 본격적으로 벌어졌고, 덴마크와 스코틀랜드 등 수많은 왕실이 힘을 보탰다. 종교탄압으로 탄력을 받은 히스테리가 파도가 되어 밀려와 처형자가 급증했다. 여성들은 '질병, 죽 음, 재앙(자연재해, 그 외)을 일으켰다, '마을 외곽에 살고 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방인이다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우연히 장소와 타이밍이 좋지 않아 마녀라고 비난받았다. 고발 동기도 독단적이어서 마녀가 공동체에 재앙을 일으켰다고 정말로 믿었던 경우도 있는가하면 권력자의 사회 통제나 피고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노린 악의적인 사례도 있었다. p 10



마녀재판의 시대, 일정한 표적 패턴이 생겨났다. 사회의 변두리에서 생활하는 이성과 두세 번 결혼한 여성, 의료행위를 하는 여성이다. 풍작이고 가족이 건강한 때는 이러한 존재도 허용되나, 한겨울 혹한으로 작물이 시들거나 가족이 병으로 쓰러지는 상황은 인간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 마을 외곽에 사는 외부인이 의혹의 시선을 받았다. p 18



심문자는 여러 끔찍한 방법을 동원해 그럴싸한 자백을 이끌어냈다. 마녀 용의자에게서 자백을 이끌어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고문이다. 심문자는 우선 자백을 재촉하고 용의자가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고문을 암시했으며, 그래도 무죄를 주장한다면 용의자를 고문했다. 당연히 고문 방법은 끔찍했고, 용의자는 상처로 인해 매우 쇠약해졌다. (…고문방식은 너무 잔인해서 생략;;…) 고문에서 자백한 사람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마녀를 처형한다고 하면 화형이 떠오르겠지만 참수나 교수도 일반적이었다. '운 좋은' 희생자는 화형당하기 전에 교수 혹은 참수당해 신과 공동체 앞에서 죄를 속죄했다. 밤베르크 마녀재판의 불쌍한 희생자 요하네스 유니우스가 처형 전에 딸에게 몰래 써보낸 편지에 그가 맛본 끔찍한 고통이 상세히 적혀, 결백을 호소하고 있었다.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백하고 사형을 당했으나, 자백 자체가 허위였다. p 87



 


18세기 이성과 과학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오랜 ‘마녀사냥’에 종지부가 찍혔다. 영국 조지 2세는 ‘요술행위 금지령’을 반포하며, 자신이나 타인에게 마력이 있다고 말하거나, 마녀로 부르는 것을 위법으로 정했다. 한마디로 ‘마력, 마녀’라는 단어 언급 자체를 금지한 것이다. 그러자 주변 여러나라도 이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2백년간 이어진 마녀사냥의 종착점이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사람들만 7만 명 정도로 추정하지만, 공식적으로 기록에 남은 건 수는 1만 2천 건 정도라고 한다. 


자, 여기까지는 간추린, 정말 실존했던 마녀의 역사다. 아니 정확히는 ‘마녀’라는 이름뒤에 가려진 여성 수난사다. 놀랍게도 이 책 『마녀의 역사』는 마녀만 다루지 않았다. 마녀는 아니었으나, 비밀리에 활동했던, 교황의 인가를 얻었으나, 교황에게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한 ‘성전기사단(템플기사단)’ 이야기도 실려있다. 심지어 제법 비중있게 다룬다. 


성전기사단이라 하면 성배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중세 로맨스 소설 『파르치팔(Parz val),부터 댄 브라운의 『다빈처 코드』까지 역사상 성전기사단은 신비로운 성유물과 엮어서 등장했다. 창작물에서는 기독교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잔이나 심원하고 드라마틱한 비밀의 수호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흥미롭게도 기사단의 요람의 땅, 프랑스의 트루아는 초창기의 성배 이야기가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기사단과 성배의 관계는 기사단의 최전성기인 12세기부터 13세기에 성배 전설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단은 사회의 일부였으나 지금처럼 당시에도 수수께끼인 조직이었다. 신비로운 성배가 기사단과 엮인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p 43



성전기사단이 몰래 토리노의 수의를 숨겨 숭배하고 있다는 소문은 성배 전설보다 신빙성이 높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비치는 이 천을 처음 공개한 사람은 조프루아 드 사르니의 일족으로, 그가 몰레와 함께 화형당하며 수의와 성전기사단의 관계는 바로 소문의 대상이 되었다. 고발당한 단원 중 한 명인 아르노 사바티에도 입회식에서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긴 아마포'를 보았고, 그 가장자리에 세 번 입맞춤을 하고 받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기사단이 숭배하고 있다고 규탄당한 우상은 사실 토리노의 수의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수의는 1260년부터 1390년 사이의 물건이라고 한다. 이는 연대적으로 일치하며, 수의의 얼굴이 예수가 아닌 몰레의 얼굴이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p 44



이 세계사책은 『마녀의 역사』라는 제목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금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왜 그들이 ‘마녀’로 몰려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 ‘마녀사냥’으로 이득을 볼 수 있게 사회적 그물망을 촘촘히 쌓은 가해자들은 누구인지를 말이다. 특히나 ‘마녀’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특정한 종교의 역사도 같이 떠오른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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