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택과목으로 세계사를 들었던 고등학생 때, 한창 세계사에 빠져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를 가르치던 세계사 선생님은 매 수업시간마다, 교과 진도에 맞춰서 본인이 답사여행을 다녀왔던 사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을 공부할 때는 로마 답사 사진을, 중세 유럽을 공부할 때는 유럽에 있는 중세 건축물 앞에서 찍은 사진등을 말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사 더쿠였던 나에게, 중세 유럽 건축물은 정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중세 한국 건축물에서 보기 힘든 뾰쪽뾰쪽한 첨탑이라니! 성당 안을 오색 빛으로 물들이는 스테인글라스라니! 정말 신세계였다. 



하늘 드높이 위로 솟은 높은 첨탑과 그 위에 있는 십자가. 누가봐도 수평보다는 수직성을 강조한 건축물. 그런 건축 양식을 ‘고딕 양식’이라고 배운 그때부터 나는 고딕 성당에 대한 로망이 생겼더랬다. 하지만 그저 로망일뿐! 난 지금도 고딕 성당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저 그런 머글이었다. 하지만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덕분에 적어도 고딕 성당 머글 신분은 벗어난 듯?!


이 책에 따르면 20세기 미술사학자인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역사를 물리적 시간의 불가분한 연속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고 단절된 시대들의 진행단계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단절된 시대가 연속되는게 역사이며, 이를 뒷받침해주는게 바로 시대의 통일성이다. 시대의 통일성은 역사에 포함된 예술, 문화, 철학, 종교, 정치 등 다양한 현상 등에서 찾아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해당 시대의 건축 양식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건축양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바로 떠오른 건 10세기 ~ 11세기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부활과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은 로마네스크 양식, 12세기 왕가의 지지를 받아 외곽에 있던 교회건물들이 도시안에 들어서며 덩달아 부유층에 지지를 받으며 교회 권한이 커지면서 유행한 고딕 양식, 14세기 교회권한이 줄어들고 흑사병 유행을 거치면서 유행한 르네상스 양식이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역사는 단절된 시대가 연속되는 진행과정이며, 각 시대마다 어떠한 분야든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게 맞구나 싶다.



‘로마네스크’가 ‘로마다운’이란 뜻이었다면, ‘고딕’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을 가리키는 ‘고트인의’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고딕이 고트족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고딕’과 ‘고트족’은 아무련 관련이 없습니다. ‘고딕’이라는 이름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이 양식을 두고 게르만족이 세련되지 못하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붙인 것인데, 계속 사용하면서 후대에 공식명칭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고딕 양식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상당 기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 008


초기 고딕 성당을 대표하는 상리스, 누와용 대성당을 거치며 고딕 성당은 본격적으로 수직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성당이 바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이르러 성당 규모도 웅장해지고, 앞서 지어진 초기 고딕 성당의 한계를 극복하며 구조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그 위용은 워낙 대단해서 당대 유명 작가였던 빅토르 위고도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주제로한 여행기와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옛 모습은 사라졌다. 뉴스에서 본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는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딕 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한 12세기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대중화되고, 그에 따라 신학의 영역에서 마리아론이 발전한 시기였습니다. 특히 구세사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관련된 마리아의 협력에 집중되었던 관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사건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많은 주교좌성당이 성모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정했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성모 마리아 성당, 곧 노트르담 대 성당이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입니다. 그래서 ‘노트르담 대성당’이라고 말하면 보통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말하는데, 앞에서 언급된 상리스 대성당과 누와용 대성당, 그리고 랑 대성당 모두 ‘노트르담 대성당’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p 067


『레 미제라블』(1861년)로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는 그보다 20년 전인 1831년에 『파리의 노트르담』을 출간했습니다. 위고는 스물 세살이 되던 해에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여자의 자격으로 샤를 10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 대관식은 여느 왕처럼 랭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평소 고딕건축에 관심이 많아떤 위고는 랭스 대성당의 모습에 매료되어 그 후 건축여행을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여행기를 집필하였는데, 그중 ‘프랑스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의 파괴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서 문화유산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특히 고딕 성당의 훼손에 대한 그의 우려는 『파리의 노트르담』에 잘 나타납니다. p 075


위고는 대성당의 양식을 평가하기를 순수 로마네스크 양식도 아니고 순수 고딕 양식도 아니며, 과도기적 양식의 성당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기둥은 로마네스크로 세워졌지만, 반원 아치 대신 포이티드 아치가 얹히면서 그 양식이 전체를 지배했는데 그 뾰족하기로 치면 후대의 포인티드 아치만 못하였다고 비평합니다. 이를 육중한 로마네스크식 원기둥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고 합니다. 위고의 관찰은 매우 예리한데 그래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전성기 고딕 성당에 속하지 못하고 초기 고딕의 완성 단계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p 078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장엄하고 숭고한 건축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답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손 쳐도,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카룰로스 대제)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 오귀스트에 대한 경의를 저버린 채 인간들이 존경할 만한 기념물에 가한 무수한 훼손의 흔적 앞에서 한숨을 참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에서 유명한 성당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유명하지만, 실상 성당의 권위(?)가 있는건 랭스 대성당이다. 프랑스 역대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던 성당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랭스 대성당은 초기 고딕의 수직성과 수평적 비례를 중시한 고전 고딕을 융합시킨 건물로 전성기 고딩양식의 대표 건축물이다.



5세기 초에 세워진 랭스 대성당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곧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에페소 공의회(431년)의 영향을 받아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었습니다. 이후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가 496년에 이곳에서 아리우스파에서 개종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세례를 받았는데, 그의 세례는 유럽의 나라들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도를 국가 체계의 기틀로 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오랫동안 명성을 이어왔습니다. p 124


성당의 수직화는 구조적 경량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플라잉 버트레스의 밴딩 모멘트를 해결하지 못해 육중한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졌는데, 랭스는 부르즈 대성당의 보강 방식을 받아들여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벼우면서도 강하게 만들었고, 버트레스의 단면도 줄였습니다. 플라잉 버트레스 기능이 강해졌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트리포리움의 높이가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성당의 벽체도 얇아졌고 창문의 크기도 넓어지면서 경량화를 배가시켰습니다. p 128


고딕 성당은 생드니 대성당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그리고 샤르트르 대성당을 거치면서 고딕주의의 절정인 랭스 대성당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는 누와용 대성당, 랑 대성당 그리고 부르주 대성당의 고전주의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함께 걸음’ 덕분에 웅장하고 찬란한 고딕 성당이 지금도 우리 앞에 서 있지 않습니까? p 130


동방박사 유골함이 봉헌되어있는 쾰른 대성당은 독일에 있다. 그 자리에 처음 성당이 세워졌던 시기는 비교적 오래전인 4세기 였지만, 여러 개중축을 거치다가 13세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소실된 그 자리에 새로 성당을 지으니, 그게 바로 지금의 쾰른 대성당이다. 그저 멋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라고 하기엔, 쾰른 대성당에 지금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지는 과정이 꽤나 흥미롭다.


당대 독일 도시 쾰른은 로마네스크 전통이 깊었던 지역주의가 눈에 띄는 도시였다. 반면 인근에 있는 프랑스는 고딕 양식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영국은 쾰른처럼 지역주의도 있었지만 프랑스처럼 보편주의도 있어서, 이 두개가 적절히 공존했지만 쾰른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쾰른 성당은 순례성당으로 이름났고, 해마다 순례객이 늘어나자 성당 확장을 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유럽의 권력을 나눠가졌던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세 곳의 눈치를 쾰른 대성당은 어떤 방식으로 성당을 확장해야하는지 고민했다. 쾰른에 만연한 지역주의를 따라가자면 신성로마제국 처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야했지만, 이미 신성로마제국의 위상은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게 될 경우, 독일에 있는 다른 성당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미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고딕 성당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쾰른은 고딕양식을 받아들였다. 그냥 고딕 양식이 아닌, 기존의 고딕 양식을 뛰어넘은 새로운 고딕양식을. 그렇게 탄생한게 지금의 쾰른 대성당이다.


쾰른 대성당에는 116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서 봉헌된 동방 박사의 유골함이 있습니다. 이 성 유물은 황제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얻은 것으로 밀라노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후 대성당은 유골함을 금으로 다시 제작하여 1225년에 완성하고 그로부터 유럽 전역에서 이 유골함을 보기 위해서 쾰른 대성당을 순례했습니다. 그렇게 쾰른 대성당이 순례 성당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서부터 성당은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p 208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으로 건축 양식이 변화하던 시기의 당대 신학과 철학의 연관성을 찾아가는 건축사적 세계사책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고딕 성당, 전성기 고딕 성당, 후기 고딕 성당을 비롯하여 유럽 국가별 유명한 고딕 성당들을 사진자료와 함께 건축학적으로, 세계사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여기서 시야를 조금 더 넓히고 싶다면, 저자의 전작인 ‘로마네스크 양식’에 관한 책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