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우리의 역사에서 유독 저평가를 받는 인물 궁예를 비호하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비호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궁예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근거를 기준으로 (작가의 말에 의하면) 소설과 역사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정사로 꼽히는 삼국사기는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된 왕건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 고려에서 제작한 기록이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왕건을 띄위기 위해 궁예를 죽여야 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조선에서 집필한 고려사 역시도 비슷하다. 궁예는 이렇게 역사 속의 패자가 되어 지금까지혹독한 평가를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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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권리가 없었던 백성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모른 체로 살아왔고

비합리적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국가에 위험이 있었을 때 마다 제일 먼저 희생을 당했다.

지금 껏 아는 것이 없었고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던

그저 하라는 대로만 해왔던 힘 없는 백성이었기에..



반면 지금은 클릭 한 번으로 수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물론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져서 진위여부 판단이 필요한 경우도 많지만..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된다는 건 지금도 유효한 전제이다.

우리의 힘 없는 조상들은 못했던 기득권 세력에 대한 감시가 지금은 가능하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울 내의 풍부한 서적을 보유한 개인 소유의 도서관을 여럿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번 보는 것만도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 주인은 책을 빌려주지도 않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님에게 절대로 책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로서는 빌려주고 싶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왜 그 책을 그렇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인지

그러한 조선인의 관습을 설명하기 힘들다.

-선교사 호머 B 헐버트

만일 만 권의 책을 저쟁해놓고도 빌려주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햇볕을 쏘이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면

빌려주지 않는 것은 인(仁)하지 못함이요,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함이요,

햇빛을 쏘이지 않는 것은 부지런하지 못함이다.

사군자가 글을 읽자면 남에게 책을 빌려서도 읽는 법인데

책을 꽁꽁 묶어놓기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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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이야기는 정말 읽을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잘 안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하 ㅠㅠㅠ..

당시의 제일 나쁜 놈은 일본이 맞다. 이건 정말 반박불가한 것.

특히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사과를 받고 싶은게 내 심정..



하지만 그 전에 일본에 이렇게까지 짓밟히게 만든

나라 꼴을 이 지경으로 만든 그들은 대체 어딜 가서 뭘 하나..

조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 차례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전부 뻥뻥 차버리고, 결국 힘 없는 백성들만 죽어나가게 만든 그들은..

일본인의 만행으로 인해 그들도 민비처럼 면죄부를 받은것인가.

이때까지 군사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 벌써 반년이나 지났다. 때 마침 호남 세선이 수척이 경창에 짐을 풀었는데 그것으로 먼저 밀린 월급을 지급하라 명했다. 혜청 당상 민겸호 집안의 하인이 혜청 창고지기가 되어 지출을 담당했다. 그는 겨를 섞어서 미곡을 지급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는데 이것을 눈치 챈 사람들이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했다. 그러자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서 포도청에 가두고는 죽이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은 원통하고 분함을 참지 못해 칼을 뺴어서 땅을 치며 분노했다.

"굶어죽는 것이나 법에 따라 처형당하는 것이나 죽는 것은 똑같다. 마땅히 죽일 놈은 죽여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겠다"

관군과 일본장수 영복창 등이 동학군을 쫓아 공중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두황은 내포로 들어가 신창과 해미지역을 다니며 승리를 거두었다. (중략) 일본군은 동학군보다 먼저 공격을 하는데 군기가 엄하고 무기가 정교하며 명령을 내리면 잽싸게 전진하고 또 탄약 또한 풍부해 동학군들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두황 등은 연이어 승리를 했는데 남하한 관군과 일본군은 모두 합쳐 2천명이었다.

이때 민비는 벽에 걸린 옷 속에 피신했지만 일본인들이 끌어냈으며 소촌실이 살펴보자 민비는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민비를 칼로 내리치고 시신을 검은색 긴치마에 싸서 녹산 밑 숲 속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으며, 타다가 남은 몇 조각의 뼈는 바로 불을 지른 그 곳에 묻었다.

일본인이 은행권을 만들었다. (중략) 일본인은 또 지폐를 만들어 제일은행권이라 불렀으며, 청국상인으로 동순태라는 상호를 가진 자는 동순태상표를 발행하여 매양 한 조각의 지표로 앉아서 백화를 벌어들였다. (중략)

일본인들이 숭례문에서부터 한강까지 스스로 구역을 점령한 후 군용지라 하면서 푯말을 세워서 경계를 정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이 후부터 무엇을 하고자 할 땐 무조건 군용지라며 빼앗아 갔다.

21일 경신 밤에 일본인이 대궐을 침입하여 강제로 신조약을 성립시키고 참정해신 한규설을 면칙시켜 보냈다. 이등박문이 도착하자 서울 장안이 흉흉하여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고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백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항부대신 이완용, 농부대신 권중현 등은 암암리에 관망하며 막으라 하였고 옥은 몰래 서로 주무하였다. (중략) 고종은 끝내 날인하지 않았으며 한규설 또한 날인하지 않았다. 날인한 자는 오직 외부대신 이하 각구 대신들 뿐이었으며 (중략)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의 처 임씨는 임선준의 형인 대준의 딸이다. 이명구가 일본에 들어가 수년 간 유학하는 사이에 시아버지 이완용과 간통했다. 이명구가 돌아온 어느 날 내실에 들어갔다가 이완용이 며느리를 포옹하고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집과 나라가 모두 망했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라며 자살했다. 그 후 이완용은 며느리를 독차지하고 부끄러움 없이 첩 같이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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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일본의 기록들이 100% 허위도 아니지만 100% 진실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랄까, 완전 거짓을 진실처럼 만들었다기 보다는 5%의 진실에다 95%의 과장을 보태는 느낌이랄까?

95%의 과장 속에는 우리는 하늘의 자손이며 겁나 위대하다를 장황하게 포장한 느낌이다.

그 내용속에서 5%의 진실을 찾아내는 건 오로지 읽는 사람의 몫이랄까...

이 책은 (혹은 이 책의 저자 홍성화님은) 그 5%의 진실을 찾게 도와주는 안내자 같았다.

그리고 5%의 진실 속에 담겨있는 것이 바로 고대 도래인의 이야기 이다.



일본에선 최고의 천황으로 손꼽히는 진구(정한론의 근거를 제공한 사람이기도 한..)

한일고대사를 알려면 필수불가결하게 나오는 사람이다.

하여 이 책에서도 끊임없이 그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단 저자는 그녀의 기록을 통하여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고자한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진실은? 삼한을 정복했다는 일본 황후 진구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산강 유역에 있는 고대 일본식 무덤은 누구의 것일까? 일제강점기 일본에 왕인을 칭송하는 비석이 세워진 이유는? 한일간의 끊임없는 역사논쟁을 돌아본『한일고대사유적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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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에게 일본은 용서할 수 없는 구적이었다. 일본의 침탈에 맞서 감연히 의병을 모아 선두에 나섰다가 결국 대마도로 압송되어서는 일본인이 제공하는 일본 양곡이 든 끼니를 취하는 것 조차 부끄러워했다. 꼿꼿한 선비의 기개는 비극의 시대에 어울리는 선열한 죽음을 택했다. 그는 죽어서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우니지마(대마도 북단의 섬)에는 조선혼령이 나타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든 조선 남자와 얼굴을 가린 채 우는 조선 여인이 나타난다.…(중략)…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은 이지하라의 산사에 모여 진무제를 올렸다. 혼령을 내쫓는 행사도 열었다. …(중략)… 말하자면 임진왜란 때 일본이 저지른 악행, 조선 양민을 살육하고 코와 귀를 베어 가던 악행을 일본인 자신들도 잊지 못했던 것이다.

이전직(이매계)는 두 번 절하고 조선 사절에게 아뢰옵니다. 제 아버지 (이)진영은 경상도 영산 사람입니다. 포로로 잡혀와서 쇄환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귀국의 희망이 좌절되었지만, 죽을 때 까지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중략)…

이제 다행스럽게도 여러분께서 이곳에 오셨으니 제 선조의 내력이나 그 언행을 아시는 것이 있다면 저의 이 심정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자 써주시되 …(중략)… 자는 무엇이고 호는 무엇인지를 적어주시면 선조의 흔적으로 알고 보존하겠습니다.

일본 열도를 들끓게 하는 격투기 붐은 바로 한국 핏줄의 싸움꾼들이 발휘한 투혼의 연장선에 있다.…(중략)…

주먹의 세계에는 민족의 우열도, 배타 감정도, 배우고 못 배운 차이도, 인격 자산과 배경 같은것도 통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에게서 일제 36년 지배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여러차례 그 질문을 받았다. 지당한 얘기이고 과연 질문대로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큰 것- 이기는 하나, 거기에만 얽매일 경우 젊은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맞는 말도 지나치면 후퇴가 시작된다. 새로운 국가는 전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덧붙였다.

"여러분이 36년을 말하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 - 14대 심수관

김달수는 고대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 결과 일본 책의 ‘귀화인‘이라는 단어를 ‘도래인‘으로 바꾸는 성과를 거두었다. 귀화란 일본을 문화/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놓고 한반도 사람이 머리 숙이고 들어갔다는 어조를 품고 있다. 도래인은 그것을 객관화하고 가치중립화한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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