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에게 일본은 용서할 수 없는 구적이었다. 일본의 침탈에 맞서 감연히 의병을 모아 선두에 나섰다가 결국 대마도로 압송되어서는 일본인이 제공하는 일본 양곡이 든 끼니를 취하는 것 조차 부끄러워했다. 꼿꼿한 선비의 기개는 비극의 시대에 어울리는 선열한 죽음을 택했다. 그는 죽어서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우니지마(대마도 북단의 섬)에는 조선혼령이 나타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든 조선 남자와 얼굴을 가린 채 우는 조선 여인이 나타난다.…(중략)…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은 이지하라의 산사에 모여 진무제를 올렸다. 혼령을 내쫓는 행사도 열었다. …(중략)… 말하자면 임진왜란 때 일본이 저지른 악행, 조선 양민을 살육하고 코와 귀를 베어 가던 악행을 일본인 자신들도 잊지 못했던 것이다.

이전직(이매계)는 두 번 절하고 조선 사절에게 아뢰옵니다. 제 아버지 (이)진영은 경상도 영산 사람입니다. 포로로 잡혀와서 쇄환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귀국의 희망이 좌절되었지만, 죽을 때 까지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중략)…

이제 다행스럽게도 여러분께서 이곳에 오셨으니 제 선조의 내력이나 그 언행을 아시는 것이 있다면 저의 이 심정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자 써주시되 …(중략)… 자는 무엇이고 호는 무엇인지를 적어주시면 선조의 흔적으로 알고 보존하겠습니다.

일본 열도를 들끓게 하는 격투기 붐은 바로 한국 핏줄의 싸움꾼들이 발휘한 투혼의 연장선에 있다.…(중략)…

주먹의 세계에는 민족의 우열도, 배타 감정도, 배우고 못 배운 차이도, 인격 자산과 배경 같은것도 통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에게서 일제 36년 지배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여러차례 그 질문을 받았다. 지당한 얘기이고 과연 질문대로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큰 것- 이기는 하나, 거기에만 얽매일 경우 젊은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맞는 말도 지나치면 후퇴가 시작된다. 새로운 국가는 전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덧붙였다.

"여러분이 36년을 말하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 - 14대 심수관

김달수는 고대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 결과 일본 책의 ‘귀화인‘이라는 단어를 ‘도래인‘으로 바꾸는 성과를 거두었다. 귀화란 일본을 문화/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놓고 한반도 사람이 머리 숙이고 들어갔다는 어조를 품고 있다. 도래인은 그것을 객관화하고 가치중립화한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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