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의 이야기는 정말 읽을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잘 안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하 ㅠㅠㅠ..

당시의 제일 나쁜 놈은 일본이 맞다. 이건 정말 반박불가한 것.

특히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사과를 받고 싶은게 내 심정..



하지만 그 전에 일본에 이렇게까지 짓밟히게 만든

나라 꼴을 이 지경으로 만든 그들은 대체 어딜 가서 뭘 하나..

조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 차례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전부 뻥뻥 차버리고, 결국 힘 없는 백성들만 죽어나가게 만든 그들은..

일본인의 만행으로 인해 그들도 민비처럼 면죄부를 받은것인가.

이때까지 군사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 벌써 반년이나 지났다. 때 마침 호남 세선이 수척이 경창에 짐을 풀었는데 그것으로 먼저 밀린 월급을 지급하라 명했다. 혜청 당상 민겸호 집안의 하인이 혜청 창고지기가 되어 지출을 담당했다. 그는 겨를 섞어서 미곡을 지급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는데 이것을 눈치 챈 사람들이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했다. 그러자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서 포도청에 가두고는 죽이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은 원통하고 분함을 참지 못해 칼을 뺴어서 땅을 치며 분노했다.

"굶어죽는 것이나 법에 따라 처형당하는 것이나 죽는 것은 똑같다. 마땅히 죽일 놈은 죽여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겠다"

관군과 일본장수 영복창 등이 동학군을 쫓아 공중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두황은 내포로 들어가 신창과 해미지역을 다니며 승리를 거두었다. (중략) 일본군은 동학군보다 먼저 공격을 하는데 군기가 엄하고 무기가 정교하며 명령을 내리면 잽싸게 전진하고 또 탄약 또한 풍부해 동학군들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두황 등은 연이어 승리를 했는데 남하한 관군과 일본군은 모두 합쳐 2천명이었다.

이때 민비는 벽에 걸린 옷 속에 피신했지만 일본인들이 끌어냈으며 소촌실이 살펴보자 민비는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민비를 칼로 내리치고 시신을 검은색 긴치마에 싸서 녹산 밑 숲 속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으며, 타다가 남은 몇 조각의 뼈는 바로 불을 지른 그 곳에 묻었다.

일본인이 은행권을 만들었다. (중략) 일본인은 또 지폐를 만들어 제일은행권이라 불렀으며, 청국상인으로 동순태라는 상호를 가진 자는 동순태상표를 발행하여 매양 한 조각의 지표로 앉아서 백화를 벌어들였다. (중략)

일본인들이 숭례문에서부터 한강까지 스스로 구역을 점령한 후 군용지라 하면서 푯말을 세워서 경계를 정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이 후부터 무엇을 하고자 할 땐 무조건 군용지라며 빼앗아 갔다.

21일 경신 밤에 일본인이 대궐을 침입하여 강제로 신조약을 성립시키고 참정해신 한규설을 면칙시켜 보냈다. 이등박문이 도착하자 서울 장안이 흉흉하여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고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백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항부대신 이완용, 농부대신 권중현 등은 암암리에 관망하며 막으라 하였고 옥은 몰래 서로 주무하였다. (중략) 고종은 끝내 날인하지 않았으며 한규설 또한 날인하지 않았다. 날인한 자는 오직 외부대신 이하 각구 대신들 뿐이었으며 (중략)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의 처 임씨는 임선준의 형인 대준의 딸이다. 이명구가 일본에 들어가 수년 간 유학하는 사이에 시아버지 이완용과 간통했다. 이명구가 돌아온 어느 날 내실에 들어갔다가 이완용이 며느리를 포옹하고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집과 나라가 모두 망했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라며 자살했다. 그 후 이완용은 며느리를 독차지하고 부끄러움 없이 첩 같이 여겼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