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와 천조의 중국사 - 하늘 아래 세상, 하늘이 내린 왕조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단죠 히로시 지음, 권용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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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중국사책을 읽었다. 요즘 서양사 관련 세계사책만 읽어서 그런가? 중국사책을 읽으니 너무나 익숙한 기분과 함께 분노가 치솟는 건 내가 동양사람이어서 그런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옆나라 중국은 양가적 감정을 들게 하는 나라다(일본과 비슷하달까?). 심지어 우리나라 고대 역사부터 현재사까지 중국은 필수 등장인물이다. 매 역사적 시기마다 중국이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면 참 좋겠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중국은 ‘양가적’ 감정을 들게하는 나라다. 즉, 부정적인 의미로도 엄청 자주 등장했다는 이야기!



‘동북공정’, ‘문화전쟁’, ‘일대일로’ 등 당장 떠오른 키워드만해도 그렇다. 이 키워드들은 중국이 현재 진행하는, 지들만 좋은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 키워드를 한데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바로 ‘중국몽’. 중국몽이란 중국이란 나라의 부강과 민족 진흥, 인민행복을 내세운 중국 공산당의 선전 문구다. 중국몽을 위시한 중국의 프로젝트는 시진핑 정권과 함께 시작되었다. 




-동북공정: 중국의 민족 진흥을 위한 중국사 연구▶ 대한민국의 고대역사(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는 중국에 속한 이민족들의 역사라고 하는 중


-문화전쟁: 중국의 우월한 문화를 뽐내기 위한 원조 경쟁▶ 김치도 지네꺼, 태권도도 지네꺼, 한복도 지네꺼라고 우기는 중(비슷한 상황으로 이탈리아의 피자도^^..)


-일대일로: 중국의 ‘새로운 실크로드 전략’▶ 현실은 대규모 자금을 동원하여, 세계 여러나라에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서 중국의 꼭두각시 만들기






중국의 해양 진출이 이제 와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 방향성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2005년 4월 ‘정화의 서양 진출’ 60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 정부는 7월 11일을 중국의 ‘항해일’로 결정했다. (…) 정화는 방문국에 도착하면 그 국가의 왕에게 많은 증여품을 하사하고, 이것과는 반대로 명으로의 입공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받은 아시아, 아프리카의 30여 개 국가들이 사절단을 파견하여 명과의 사이에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 (…) 무엇보다도 정화는 가는 곳마다 그 국가에 조공을 독촉하고 있었고, 결단코 대등한 국교를 맺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명과 해당 국가와의 사이에는 군신 관계를 설정했고, 이를 통해 안정된 국제 질서를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명의 요청을 거절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가에게는 무력을 사용해서 국왕을 교체하는 것조차 서슴치 않았다. p 012~013



대체 중국은 왜이럴까?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과거의 중국을 알아야 한다. 예컨데 명나라 때 ‘정화의 원정(대항해)’를 기억하는가? 서양의 신항로 개척보다 70여년 빠른, ‘최초’의 대항해로 세계사 시간에 필히 배우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 정화의 원정으로 시작된 건 무엇인지는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7차례 대항해를 하면서, 도착했던 모든 나라에(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대규모 선물을 주었다. 물론 공짜가 아니다. 선물을 준 댓가로 중국에 입공을 독촉했다. 입공을 하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해서 왕을 교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지들보다 약한 나라에 강제로 선물을 안기고, ‘나를 형님으로 모셔라’ 시전했다는 이야기.



이거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현재 시진핑 정권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 동남 아시아 일대에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서 막대한 건설공사를 하고, 그 댓가로 지들의 영향력을 챙겨먹고 있지 않은가! 아, 물론 요즘은 그로 인해 중국경제가 휘청해지는 엄청난 후폭풍을 맞는 것 같긴 하다만. 유럽권도 중국의 일대일로에 손절치는 분위기고.



뭐 여튼! 한마디로 지금 중국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21세기에 들어서 ‘유독’ 유별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와 과거, 중국에서 했던 모든 일들이 묘하게 겹쳐지는 이유! 그 이유를 바로 중국 역사 속에서 찾고자 하는게, 이 세계사책 「천하와 천조의 중국사」의 목적이다. 



현대 중국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통적 중화 제국의 행동 원리를 추적하고 탐구하여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를 ‘천하’와 ‘천조’라고 하는 키워드를 통해 역사적으로 동해해보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p 014



천조라는 것은 글자에서 읽히는 것과 같이 ‘천자의 조정’을 가리킨다.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였던 중국은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높이는 의미를 집어넣어 자국을 그렇게 불렀다. 이 단어 자체는 역사 용어인데, 아마도 기원 전후의 한나라 때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역대 왕조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 시대에 서구 열강의 침략이 활발해진 이후에도 청은 천조대국으로서의 긍지를 완강하게 계속 지켜나갔다. p 18



저자는 중국사를 연구하면서, 중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바로 ‘천자’, ‘천조’, ‘천하’다. 이 세 가지 키워드와 유교의 합치는, 역대 중국 황제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었다. 



천자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자, 천조는 천자의 조정을 말한다. 천조가 통치하는 공간이 천하다. 여기에 유교를 지들의 입맛대로 변형해서 합쳤다. 그렇게 탄생한 명제가 있으니, “중화제국 영역 확장은 천자의 덕이 높다는 증거”. 이러한 논리는 중국 대륙의 주인이 바뀌든 말든 상관없이 지속되었으며, 덩달아 중국 황제의 부도덕한/억압적인/폭력적인 정치도 정당화했다.



<지금의 중국을 규정하는 키워드: 중화제국, 한족>



일반적으로 중국, 중화(중하), 화하, 제화(제하) 혹은 단순히 화(하) 등으로 칭해지는 이러한 용어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하夏와 중국인데, 이들은 모두 서주 시대(기원전 11세기~기원전 8세기)부터 존재했다. 하라고 일컫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하왕조를 가리키는 것인데, 하의 다음 왕조인 은을 지나 주 시대가 되어서도 주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하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p 025



주는 동맹을 맺은 여러 국가와 동족의 여러 국가와의 사이에서 군사적 협력관계를 구축했는데, 이 여러 국가들 속에서 점차 강렬한 일체감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일체감은 자신들을 같은 부류로 보는 의식으로 승화되었고, 그것을 톡별한 용어로 표현했다. 이것이 제하, 제화, 화하 등의 용어였던 것이다. 이전에는 주의 직할지만을 하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춘추시대 이후가 되면 주와 동맹한 여러 국가들을 모두 하라고 부르게 되었다. (…) 하는 하 왕조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화는 ‘화려함’이라는 글자의 뜻이 바뀌어 문화가 우월하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여러 국가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음은 당연한 것이었고, 당시 주 및 주와 동맹한 여러 국가들은 중국의 중심부, 즉 문화적 선진 지역인 황화 중류와 상류유역에 위치했다. 이른바 중원 지역에 존재했던 것이다. p 026



본래 중원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고, 마땅히 중국의 중심부=문화적 선진 지역=중원=화(하)라고 하는 관념이 춘추시대 즈음에 생겨났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과 관련하여 그 땅의 주인만이 훗날에 ‘화하족’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중국 최초의 종족이 되었고, 그들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고 융합하면서 훗날의 한족으로 성장하고 발전해나갔던 것이었다. p 028



중화라고 하는 용어는 중국과 제화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 문화가 가장 발전한 지역을 의미한다. 후한 말기, 삼국시대의 중국에는 이민족인 오호가 대두하고 있기도 했고, 중국의 주변에는 이적의 세계가 넓게 자리하고 있어서 화와 이의 구분이 강력하게 의식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탄생한 것이 중화라고 하는 신조어로, 중국의 국토와 문화의 중심성이 그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p 033



<그리고 유교(유가사상)>



얼마 후 국내의 혼란도 수습하면서 왕조의 기반도 확립되었고 차차 유교는 정통 사상으로 인정되었다. 통설에서는 7대 황제인 (한)무제가 유학자 동중서의 의견을 채용하여 오경박사를 설치했던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유교의 국교화’이다. 다만 국교화의 시기에 대해서는 요즘에는 무제보다 약간 훗날의 일이라고 여겨지고 있고, 왕망의 시대라고 하거나 혹은 후한 시대가 되어서부터라는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고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 왕조에서 유교에 의한 지배의 정당화를 시도했고, 최종적으로 유교가 체제 교학으로서 중국 사회를 규정했다는 점이다. p 052



유가 사상에서는 지상의 주재자는 천자이고, 천자란 천명을 받아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통치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 천자는 어디까지나 하늘의 아들이고, 하늘 그 자체는 아니다. 즉 유일무이한 절대 권력자로서 지상의 하늘에 있는 황제와 유가 사상에서 말하는 하늘의 대리자는 본질적으로 입장이 다른 것이다. 황제와 천자를 어떻게 동일화, 일체화할 것인가? 유가가 황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p 054




대한민국은 많은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는다. 이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이 어퍼컷을 날리면 무방비하게 맞는다. 문제는 그게 매번 반복된다. 이쯤되면 무엇이 문제인지도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럼에도 예방을 못한다. 대체 왜그럴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뭐, 당장 국내 현실문제 이해도도 부족한 나라인지라, 옆나라에 대한 이해도를 말하는게 맞는건가? 싶기는 한데. 



여튼! 지금의 중국의 행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중국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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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최재형
최 올가 페트로브나.최 발렌틴 페트로비치 지음, 정헌 옮김 / 상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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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15일. 광복절이 제78주년을 맞았다. 날이 날이니만큼, 오늘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에 관한 책을 리뷰하려 한다.



러시아 독립운동계의 대부, 러시아 한인들의 페치카, 안중근 의사의 후원자. 모두 독립운동가 최재형 이름 뒤로 붙어다니는 수식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은 기억해도, 그 뒤에 있던 최재형은 잘 모른다. 이 책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사람들이 잘 모르던 최재형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최재형의 자녀들이 기록한 책이다. 



최올가: 독립운동가 최재형 딸

최발렌틴: 독립운동가 최재형 아들





이 책의 전반부는 최올가의 시선으로 본 최재형과 최올가 본인의 삶이 기록되어있고, 후반부는 최발렌틴의 시선으로 본 최재형과 본인의 삶이 기록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최올가는 본인 삶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였고, 최발렌틴은 아버지 최재형의 삶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따라서, 최재형의 삶을 조명함에 있어선, 최 발렌틴의 기록이 더욱 디테일하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한인 1세 최재형

러시아 한인들의 페치카 최재형

러시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안중근 후원자 최재형

그는 대체 누구일까?



페치카 최재형


러시아 한인 1세 최재형은 가난한 노비 최홍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가봐도 조선의 흙수저였던 그는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오고,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먹고 살기 바빴던 친부모와 달리, 러시아에서 만난 선장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최재형의 삶은 달라졌다.



(최올가) 무역선의 선장과 그의 아내는 수습 선원인 소년 최재형을 무척 예뻐하였다. 그 선장 부부는 소년에게 세례를 주고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도 지어주었다. 소년은 6년 동안 배에서 생활하였다. 선장이 더 이상 무역선을 무역선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선장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 친구에게 보냈다. 최재형은 러시아인들과 지내면서 러시아 말과 글을 익히게 되었다. 최재형은 단 하루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총명한 그는 책을 꾸준히 읽었고 점점 지식과 상식이 풍부해졌다. p 014



최재형의 대부, 대모가 되어준 러시아 선장 부부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조선에만 갖혀있던 과거와는 달랐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은 당연했고, 다른 한인들과는 달리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사업수완까지 있었던 최재형은 어느새 자수성가한 거부가 되었다. 


당시 최재형이 소유했던 쿤스트 앤드 알베르스 백화점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최재형이 얼마나 거부였는지를 보여준다.



러시아는 최재형을 인정하고 존경했다. 1894년에는 10월에는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초청까지 받았다. 혼자 잘먹고 잘살아도 누가 뭐라하지 않았을 그 시기에,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독립운동과 한인들을 지키기 위해 바쳤다.



(최발렌틴) 고향 사람들의 권리가 이처럼 정당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젊은 최재형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의 법적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공사장에서 일했던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통역사 최재형은 착하고, 정당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 도로를 건설하던 시기에 한인들은 최재형을 최페치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페치카는 난방을 위해 집 안에 철과 벽돌로 만든 땔감나무를 뜻하는 벽난로를 뜻한다. 대부분의 한인들에게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이름보다 최페치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p 165



(최올가) 도로 건설이 끝나고 통역사로서 일을 마친 후 최재형은 얀치헤의 읍장이 되었다. 읍장이 된 최재형 앞에는 해야할 일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마을이 생겼지만, 대부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최재형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공부도 시켜야했다. 그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 017



(최발렌틴) 최재형이 주도한 애국 계몽 운동에 이종호 등 많은 계몽 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최재형과 계몽 활동가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 청년협회를 조직하였고 한인 민족학교 건립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모은 자금으로 극동지역에 182개의 학교를 설립하여 260명의 교사들이 6,00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졸업시켰다. p 166



최재형은 계몽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의 문화 수준 향상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는 특히 학교와 교육에 큰 관심을 두었다. 마을마다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고, 노보키옙스크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6년제 상급 교육기관도 세웠다. 상급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민족의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p 169



최재형이 죽은지 100여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러시아 한인들에게 최재형은 아직도 ‘페치카’라고 불린다. 그 증거가 바로 우수리스크에 남아있는 최재형 고택이다. (러시아 한인)고려인들이 최재형 고택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 정부와 끊임없이 협상을 하고, 우리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지켜낸 고택이다. 현재는 최재형 고택이며,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관으로 운영중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1908년에 러시아에서 이위종의 주도로 항일 의병단체 ‘동의회’가 창설되었다. 동의회 창단 멤버는 최재형을 비롯하여 안중근, 이범윤, 엄인섭 등이다. 1910년에는 최재형 주도로 ‘권업회’가 창설되었다. 권업회는 대외적으로 러시아 정부의 공식승인을 받은 노동단체다. 실제로는 한인 무장 단체의 조직과 훈련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최올가) 한국의 애국자로서, 최재형은 점령자들인 일본과 싸웠다.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1906년, 항일 독립 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p 028



(최 발렌틴)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 창립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정관이 승인되었고, 지도부가 선정되었다. 최재형, 유인석, 이범윤, 김학만, 홍범도, 이상설, 이종호, 이남기, 김치보, 고상준 등 권업회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모두 적극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항일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이 합법적인 단체를 방패막이로 사용하였다. p 167


안중근: 하얼빈 의거

이위종: 헤이그 특사

엄인섭: 훗날 친일파로 변절(영화 ‘밀정’ 모티브)

유인석: 을미의병

이범윤: 간도관리사

이상설: 헤이그 특사

홍범도: 봉오동 전투







총알을 피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붉은피로 독립기를 크게쓰고

동심동력하여 성명을 동맹하기로

청천백일에 증명하노니 슬프다

동지 제군이여

-동의회 총장 최재형-

( 러시아 해조신문 발췌 )



(최 발렌틴) 연해주에서 의병이라는 첫 유격대는 1906년에 조직되었다. 의병을 조직하고 무장시키는 일에는 최재형, 이범윤, 이상설이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무장한 유격대원들은 주로 연해주의 한인 마을에서 훈련하였고, 한반도 이북 지역에 침략해 있던 일본 군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 1908년 6월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이 실시되었다. 최재형의 지휘 아래 있던 한인 의병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큰 타격을 주었고, 더 나아가 회령시 지역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 부대를 향해서도 기습공격을 감행한 후 연해주로 돌아왔다. p 171



1910년 7월 4일 러시아와 일본 간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에 따르면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강제합병을 러시아는 인정하고,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항일 운동을 사전에 방지하기로 한 것이다. (…) 이러한 상황 변화로 항일 의병 유격대의 일부는 해체되었고, 일부는 중국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p 172



그러나 일본은 이와 같은 결과에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해주에서의 항일 운동을 완전히 진압하려면 항일 운동의 지도자인 최재형부터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최재형이 대한제국의 일본 식민지화에 반대하여 항일 투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연해주 지방 행정부는 그의 추방을 반대했다. 무엇보다 최재형을 보호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우수리스크 철도관리국의 경찰국장 쉐르바코프가 연해주가 군정 총독 스베친 앞으로 보낸 편치였다. p 173



이후 최재형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도 역임한다. 



최재형과 안중근 하얼빈 의거


(최 올가) 우리가 있던 노보키옙스크에 ‘안인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던 안응칠(안중근)이 살았다. 그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고 벽에 세 명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연습을 했다. 어느 날, 나와 소냐 언니는 마당에서 놀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군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 노보옙스크에는 안중근의 아내 두 명과 아이들이 남았다. 그들은 우리 식구들과 친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왔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잘 대접하려고 애썼다. 어머니는 아이들 옷과 각종 물건들이 들어 있는 보자기를 가지고 와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골라 가져갈 수 있게 해주었다. p 028



(최 발렌틴) 나의 아버지 최재형이 이끄는 유격부대에는 안중근이라는 젊고 결단력 있는 소대장이 있었다. 1907년도에 블라디 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은 최재형과 이범윤 등 반일 유격부대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p 175



최재형과 이범윤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고 사격 훈련을 계획하였다. 훈련은 노보키옙스크에서 진행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죽음도, 고문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영웅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순국하였따. 한국에서 안중근의 미망인이 우리 집에 왔다. p 176



우리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그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의 딸과 아들의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의 집에서 주기적으로 사격연습을 하였다. 안의사가 체포되었을 직후에는 최재형의 부인이 안의사의 가족들을 돌봐주었고, 국제변호사를 선임하여 안중근 의사를 변호한 사람도 최재형이었다.



추측이지만,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최재형이 구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에서 총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심지어 실명등록을 해야했다. 거기다 안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당시 기준으로 최신식 총인 브라우닝 권총이었다. 최재형은 러시아에서도 인정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권총을 구해다주었을 것이라는 게 추측이지만, 이 추측 외에는 안의사가 권총을 구할 방법이 없으므로, 이 내용은 정설이 되었다. 



최재형의 마지막 모습


1920년 일본군은 간도일대에서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우리가 배운 ‘간도참변’이다. 간도 일대에 살던 수많은 한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도륙되었고, 최재형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군이 잡아갔다. 이후 이 지역에 살던 한인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설상가상으로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졌다. 최재형 가족들도 그랬다. 그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고려인’ 이다.



1920년 4월 4일 저녁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 모두를 불러 “내가 떠나고 없으면 곧 일본인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을 모두 체포헤 때리고 내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할 거다. 나는 이미 늙었고 충분히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 말에 우리 모두가 울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무렵 아버지가 우리방 덧문을 열었다. 5분 정도 지났을 부렵 방문이 열리고 총을 든 일본군이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무슨 일인지 깨닫고 벌떡 일어나 옷도 입지 못하고 현관 계단으로 내달렸다. 그리로 나가보니 팔이 뒤로 묶인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1920년 4월 5일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p 046



늦은 밤, 불시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나는 집을 떠날 수 없다. 내가 떠나서 집에 없으면 일본군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며 고문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이 60이 되었다. 충분히 오래 살았고 죽어도 된다. 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밤새 내화가 이어지는 내내 어머니는 우셨고, 아이였던 우리들도 울었다. p 191



그날 200명이 넘는 한인이 체호되었다. 심문이 끝나고 저녁 무렵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 카피톤 니콜라예비치를 제외하고 나머지 한인들은 모두 풀려나왔다. 4월 참변, 그 비극의 시기에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러시아인들과 함께 일본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던 수많은 러시아 국적의 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들이 당시 체포한 사람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다고 한다. 최재형과 그의 동료들이 일본군에게 지독한 고문과 학대를 당하고 나서, 체포된 다음 날, 총살되었다고 한다. p 193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일제가 총살 후 그를 언덕배기에 묻어버리고, 그 장소를 함구했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지금도 우수리스크 소베스트카야 언덕 어딘가에 묻혀있다. 하지만 시신을 찾지못했다 한들! 유교의 나라 대한민국에선 문제가 없다. 대한민국은 가묘라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해방 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국립현충원에는 최재형의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실이 들어났다. 당시 최재형의 보훈 혜택을 받았던, 최재형 후손이라고 했던 그들은 ‘가짜’였다. 더 웃긴건 지금부터다. 논란이 두려웠던 국립현충원은 최재형의 가묘를 없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실을 진짜 최재형의 후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최재형은 죽어서조차, 그 영혼마저 안식을 찾지 못했다. 아니, 못했었다.



2023년 8월 14일, 바로 어제 국립현충원에 최재형 묘가 다시 설치되었다. 최재형 부인 최 엘레나와의 합장 묘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택에 법이 바뀌었고, 최재형은 부부 합장묘 방식으로 현충원에 다시 안장될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 슬픈 사실 하나는, 최재형의 부인 최 엘레나의 유해가 어디에 있었는가다. 최 엘레나의 유해는 키르기스스탄의 한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다. 관리의 흔적 하나 없이. 그녀는 최재형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그의 뒤에서 내조를 했고, 최재형 사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후에도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사람이다. 



(옮긴 이) 독립이 되고 난 후에,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에 남겨진 독립투사들의 자손들, 한반도에 남겨진 자손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면 깊은 한숨과 함께 가슴이 미어진다. 당시 조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끊임없는 헌신에 대하여, 정확한 사실에 입각하여 재조명함으로써 제대로 된 한민족의 역사관을 정립하여야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처자식의 안위는 뒤로한 채, 이역만리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을 우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살펴야할 의무가 있다. 조국을 위해서 싸우다 희생된 애국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존경하며 보살피지 않는 나라가 세계 역사를 주도한 예는 역사상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p 309




아직까지도 중앙아시아 곳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무덤이 버려져있다. 그나마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면 다행이다.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들도 많다.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이제는 나라가 그들을(또는 그들의 후손을) 보호하고 지켜줄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위에 짧게 언급했지만,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강제이주 된 한인들은 오로지 몸만 기차에 실렸다. 짐짝처럼 기차에 실린 고려인들. 기차에서 죽어나간 생명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고려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중앙아시아에 버려졌다. 그 어떤 물질적은 지원도 없었다. 그저 맨 몸으로 중앙아시아에 버려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다수 ‘고려인’들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라는 점이다.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그랬지만,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삶이 힘들었던 건 매한가지였다. 나라가 독립을 해도 그랬다. 



강제이주 1세대 고려인들에게 해방 후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의 나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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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08-18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을 <범도>를 읽다가 처음 알게된 분입니다. 일본군에 끌려가는 이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기족의 기억이 먹먹하게 하네요. 많은 독자기 만났으면 하는 책입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무라이의 넥타이
이정남 지음 / 북 야부사메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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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를 하면서 TV와 멀어진 나지만, 아기가 태어나기 전 까지만해도 TV를 넘나리 사랑했었다. 특히 교양/역사/시사/다큐 프로그램을 참 좋아해서, 채널 돌려가며 보곤했었다. 공중파야 프로그램 방영시간이 정해져있으니 언제든 보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케이블은 좀 타이밍이(?) 맞아야만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타이밍 재가면서 봤던 방송 중 하나가 바로 《사무라이 로망스》 라는 프로그램이다. 뭐,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사무라이 로망스》는 사실 유튜브 채널이었다며....ㅋㅋ

각설하고! 꽤나 즐겨 보았던 《사무라이 로망스》가 책으로 발간된다고 해서 당시에 바로 구입을 했었다. 책 제목은 『사무라이의 넥타이』. 어째서 제목이 ‘넥타이?’ 인가 싶었지만, 《사무라이 로망스》를 생각해보면 왠지 사무라이의 ‘넥타이’라는 제목이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뭔가 이해되는 느낌적인 느낌?! ...............그 후 출산과 육아라는 기나긴 터널을 지나, 책을 구입한지 1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읽은건 안 비밀^^!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일본 역사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 그럼 일본 어느 시대, 또는 어떤 구분에 의한 역사책인가!

일본 역사책 및 역사공부를 할라치면, 고대사는 겁나 길디 긴 신들 이름이 나오고, 막부시대는 또 통치하는 장군의 가문에 따라 계속 나뉘고, 심지어 전국시대까지 오면 이른바 ‘군웅할거’라 할 만한 온갖 장수들이 떼지어 나오니, 어떤 시대든 익숙하지 않은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인해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렇다고 수많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무시하기엔, 유력가문(?)의 이름들은 알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일본 역사를 이해하는데(정확히는 정치사) 매우 수월해진다. 결국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일본역사는 한국 역사와 겹쳐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정유재란)’, ‘메이지유신 이후(일제강점기)’ 정도랄까?

하지만! 이 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정말 1도 어렵지 않다. 진짜로 이 책 안에는 어려운 일본 역사는 1도 없다. 어려운 전국시대 장수들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간혹 내용에 따라 샘플로 몇몇 가문들이나 장수의 이름이 나오긴 함), 그렇다고 일본의 정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이 책은 대체 무슨 내용이 있는 역사책이냐!!!! 대체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거고, 대체 어떤 역사를 알려주려고 하는 거냐!!!!

자자자. 결론부터 말하면 역사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에도시대’의 사회상(생활상)을 이야기한다고 보면 된다. 당시의 사회상(?)이라고 하면 좀 거창한 표현인 것 같기도 한데, 여튼 에도시대를 살던 일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마디로 지배계급(정치권력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피지배계급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적은 일본 역사책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들의 삶과, 당시 사회의 풍속이 이 책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근데, 이게 진짜 생각보다 엄청 재미있다.



예컨데,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 중 일부를 보면 이렇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 까지 육식을 하지 않았다’ 라는 내용의 사실은 원래 이거다! 라던가, 지금도 유명한 일본의 ‘노포‘ 의 비하인드 같은! 주제만 봐도 궁금하기 그지 없는 내용들이지 않은까? 이렇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인식을 까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미로운데, 이 책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예컨데 ‘에도시대는 신분에 따라 똥값(?)이 차등으로 매겼다’라던가, 에도에 첫 발을 디진 촌놈 사무라이는 어떤 사고(?)를 치고 다녔는지라던가,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나오던 ‘도장깨기’의 본 모습은 이렇다! 같은! 정말로 이 책은 재미와 흥미와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잡은 일본 역사책이다.

물론 역사 하면 제일 중요하다고 치부되는건 정치사이긴 하다. 하지만 역사를 뒷받침하는 건 잔잔하게 살아온 피지배계급의 삶이니까. 그렇기에 난 이 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를 일본 역사책으로 강력 추천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이 분의 유튜브도 추...천...하고 ㅋㅋㅋㅋ

에도시대 분뇨 가치는 신분에 따라 다르게 매겨졌다?

100만 명의 인구가 밀집한 에도. 인구가 많은 만큼 분뇨의 양 역시 분명 많았을 것이다. 에도시대보다 이삼백년의 시간이 흐른 개화기 시절, 조선의 경성만 해도 길가에 오물이 넘쳐났고, 가는 길마다 오물의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보다도 과거인 에도였으니, 상황이 비슷하지 않았겠나? 싶었는데 왠걸? 에도의 분뇨처리 방법은 생각보다 친환경적이고(?) 과학적이었다.

근세 일본의 수도인 거대 도시 에도는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100만에 달하는 거대 인구가 먹고 배출하는 분뇨량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1인 당 연간 분뇨 배출량을  500kg정도로 가정하면 에도 전체에서 배출되는 분뇨량을 대략 연간 50만 톤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p 074

100만 명의 대도시 에도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 수급을 위해 에도 외곽지역은 농경지가 발달하게 됩니다. 에도에서 연간 50만 톤 정도씩 쏟아져 나오는 분뇨는 에도 외곽 지역 농경지에서 퇴비로 활용되었고 농경지에서 생산된 각종 곡물과 채소는 다시 에도로 공급되는 자원의 리사이클링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p 075

요즘 전 세계에서 대두되고 있는 친환경!!! 에도의 분뇨처리 과정이 바로 이 친환경에 걸맞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에도에서 나온 분뇨들을 모아서 외곽의 농경지로 보내고, 거기서 퇴비로 사용하고, 농경지에서 나온 생산물은 다시 에도로 들어와서 에도에 사는 일본인 입으로 냠냠냠. 

여기서 밑줄 쫙! 해야할 포인트가 있으니, 분뇨의 처리 가격이다. 현대인들은 분뇨, 그러니까 정화조를 깨끗히 해주는 대신 그에 대한 비용을 업체에 지불한다. 하지만 에도는 그 반대! 자신의 분뇨를 농민에게 파는(?) 개념이었다. 아무리 똥,오줌이라도 내가 만든거니(..) 내꺼니까, 내꺼 주는 대신 돈을 받는다고나 할까. 크흡.

다이묘 또는 사무라이들의 저택에서 일반 서민들의 공동주택에 이르기까지 분뇨통이 설치되어 있는 대부분의 장소는 에도 외곽 지역 농가와 직간접적으로 분뇨 처리권에 대한 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 에도에서는 정화조를 청소해주는 것이 아니라 농사에 필수적인 퇴비를 구입해가는 개념으로 분뇨 처리 과정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뇨 구입 비용을 돈으로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분뇨 구매 당사자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밭에서 생산되는 무 또는 가지 등의 농산물을 물물교환 형태로 지불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p 076

근데 또 그 분뇨 가격이 신분마다 차등으로 결정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부자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비싸고, 가난한 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저렴하고. 똥까지 등급을 매겨야하나 싶기도 하겠지만, 이게 은근 과학적인 분류란다. 부자집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기에, 분뇨가 퇴비로써도 제격인 반면, 가난한 집은 먹는게 거기서 거기니까. 슬프면서도 웃긴 이야기^_T.

다이묘 저택, 막부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 저택 또는 거상 집에서 나온 분뇨가 상급에 속해 있었고 일반 사무라이 저택 또는 서민 집에서 나온 분뇨가 중급, 빈민들이 많이 사는 공통주택 「나가야」에서 나온 분뇨가 하급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 신분과 경제력이 높을수록 분뇨 등급을 높게 쳐 준 품질 분류 방식은 과학적인 분석이라기보다는 농민들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정확한 해석이었습니다. 곡물과 채소 외에도 닭고기 어패류 등 높은 영양가를 가진 음식을 먹은 후 배출한 분변에는 질소가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퇴비로써 효율이 높았던 반면 곡물과 채식 위주의 음식 밖에 먹지 못했던 서민들의 분변은 영양소가 낮았기 때문에 퇴비로써의 가치 또한 낮게 책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p 077

일본은 1,200년간 육식 금지? 육식을 대하는 이중 태도

일본이 오랜기간 육식을 금지했다는 건 학교에서도 배웠던 내용이다.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의 ‘서양’을 표방하며 서양인 따라잡기를 위해 육식 섭취를 적극 권장했다나 뭐라나.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육고기를 못먹어서 그렇게 왜소한거라나 뭐라나. 그런데 왠걸? 이것도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이야기였다. 음 아니지, 전부 틀린 이야기라고 해야하나?

[모몬지야]는 에도시대 당시 에도 근교 농촌에서 농민들이 수렵 활동을 통해 사냥한 멧돼지 또는 사슴 등의 고기를 받아 에도 시내에서 고기를 판매하던 정육점을 지칭합니다. 육식을 기피하던 사회 풍조 때문에 고기 섭취를 「보약 먹는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 역시 에도시대 일본 사회의 「타테마에」와 「혼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p 122

일단 기본적으로 에도시대에는 정육점이 있었다.

일본 불교와 신도의 영향으로 인해 육고기 섭취를 기피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육고기를 섭취했다. 심지어 ‘보양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서기 675년 「테누 텐노」에 의해서 일본에서 처음으로 육식 금지령이 발령됩니다.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소와 말을 죽여 식용으로 사용하거나 판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시 엄벌에 처한다.’라는 표고령을 내렸고, 에도시대가 시작된 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역시 ‘소와 말을 죽이면 안되며 자연사한 소와 말이라고 할지라도 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살생 금지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바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정책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츠나요시는 1682년경 「쇼오루이 아와레미노 레이」라는 규정을 포고하는데 이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가엽게 여겨야 한다는 「살생 금지령」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규정에 의해서 개, 고양이, 새, 어패류, 곤충 등이 「살생 금지령」 범위 안에 포함되다보니 채소와 과일을 제외하고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p 125

1709년 1월 10일 5대 쇼군 츠나요시가 세상을 떠났고 츠나요시 사망 후 불과 열흘이 지난 1월 20일 약 30년 가까지 지속되어오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에 몰아 넣었던 살생금지령 「쇼오루이 아와레미노 레이」는 결국 해지됩니다. p 127

실제로는 다양한 야생 동물 고기가 에도 시내에 유통되고 있었으며,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소, 말 등의 가축보다는 사냥을 통해 획득한 야생 동물 고기 위주로 버젓이 고기가 팔리고 있었습니다. (…) 사슴고기는 「모미지(단풍)」이라고 불렀습니다. 화투를 보면 단풍나무에 사슴이 그려져 있는 패가 있는데, 사슴 고기를 「단풍」으로 부르게 된 것은 화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닭고기는 「카시와(떡갈나무)」라고 불렀는데, 떡갈나무 잎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홍색 또는 갈색으로 변색되면서 닭고기 색과 비슷해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고기는 「사쿠라(벚꽃)」이라는 은어를 사용했는데, 신선한 말고기 색깔이 벚꽃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탄(모란)」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되었던 멧돼지 고기는 모란 색깔과 비슷한 붉은 빛을 띄고 있었습니다. p 129 ~ 130

물론 일본의 역사 속에서 몇 번의 육식 금지령이 있긴 했으나, 최초의 육식 금지령은 당시에도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그 이후의 육식 금지령 때도 육식을 하면서 쉬쉬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만! 에도 막부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 때의 육식 금지령은 아주 살벌했기에, 한 번만 걸려도 거의 사형!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츠나요시 때만 아주 강력하게 육식금지령이 시행되다가, 츠나요시 사후 아주 스피드하게 사라진 법이 되었다.

물론 그 때도 불교와 신도의 영향 아래 육식기피 분위기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대놓고 먹는 것을 기피하는 것이고. 뒤로는 왕왕 먹었다며. 하지만 대놓고 육고기 이름을 부르긴 뭐하니까, 은어로 부르면서 말이다. 진짜 사슴고기를 단풍이라고 부르는 것에 빵 터졌네.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육식 금지문화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근거를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육식 금지가 최초로 발령된 서기 675년부터 공식적으로 육식 금지가 폐지된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년의 기간동안 일본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가 육식을 한 경우 당사자들을 엄벌에 처했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두 내용에 대한 명확한 시대적, 문화적 구분이 없다보니 『1,200여 년의 육식 금지 기간 동안 육식을 하다가 적발될 경우 엄벌에 처해졌다.』라는 형태의 사실 관계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p 127

확실히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배울 때는 저자의 말 처럼 ‘일본에 대한 당위성과 명분’을 기본적인 틀로 잡고 배우다보니, 그 속에 어떤 삶이 있는지, 정말 우리가 배운 일본이 제대로 배운게 맞는지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위 ‘일본인은 오랫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처럼. 거기다 일본 역사를 알거나 공부함에 있어서, 위와 같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틀로 인해 제대로 된 공부가 어려운 것도 있고.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잠시 뒤로하고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근세 일본을 살았던 소시민들 삶이나, 우리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고, 우리가 알고 있던 일본인의 이미지는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일어난 ‘왜곡’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일본 역사책으로 강력 추천. 다시금 말하지만 역사를 뒷받침하는건 우리 같은 소시민의 소소한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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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OUT 유럽예술문화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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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책 『TAKEOUT 유럽예술문화』는 조금 독특한 책이다. 물론 내 기준에서, 좋은 의미로다가 하는 말이다. 


왜? 이런 류의 인문역사예술이 복합적인 책은 처음 읽어보거든!! 새롭고 짜릿해!!!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역사가 가미된 여러 종류의 책들을 많이 읽어봤다. 예전엔 ‘거시사’를 주로 읽었다면, 한 5년 전 부터는 ‘미시사’도 즐겨 읽게 되었다. ‘미시사’ 를 자주 읽다보니, 의도치않게 미술의 역사라던가 의학의 역사, 여성 인권의 역사 등 예술과 문화같은 세부적인 분야에 대한 내용도 꽤나 많이 알게 되었다. 다만 이런 내용들을 어떠한 한 책에서 읽은 게 아니라, 이 책에서 읽고, 저 책에서 읽고, 요 책에서 읽는 등 정말 수 많은 책을 읽으며 알게된 예술문화 지식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책 『TAKEOUT 유럽예술문화』는 내가 수 많은 책들에서 조금씩 알게된 내용들을 한 권에 아주 가득가득 담아내었다. 음악, 미술, 문학, 건축 등 ‘예술’이라고 칭하는 모든 분야들을 갈고리로 아주 작은 것 까지 긁어모은 것마냥 전부! 이렇게 보면 모든 예술작품을 총 망라한 문화 인문학책 같다. 헌데 이 책이 정말 신기한 게, 어려운 기존의 인문학책과는 달리 쉽다. 정말 매우 쉽다. 읽는 대로 쏙쏙 뇌에 박히는 기분? 그래서 그런가? 저자는 이 책을 ‘인문교양에세이’라고 칭했다. 



예술에 대해선 1도 몰라서 예술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싶은데, 기존의 예술문화 책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왜? 라파엘전파?


주류 회화 사조를 이끈 대륙의 프랑스에서 19세기 중반 사실주의가 성행할 시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라파엘전파라는 일단의 화가들이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라파엘로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르네상스의 대가들 중 라파엘로를 호출하여 전면에 내세웠을까요? p 103



그런데 같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인이라도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에 비해 라파엘로는 좀 처지는 감이 있습니다. 3인방에서 더 좁게 들어가 르네상스의 쌍벽이라 하면 그를 제외한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를 가리키기도 하니 말입니다. (…) 라파엘로의 경우는 후대의 평가도 그렇지만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공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걸출한 역량을 보였기에 그렇게 평가되는 것도 있으리라 보여집니다. 그런데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피렌체를 중심으로 공유했던 이들 3인의 생전엔 라파엘로의 대중적인 인기가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말입니다. p 107



사실 그들은 라파엘로 한 사람만을 호출해 예술의 시계를 그 이전으로 돌리자는 형제회를 조직했지만 실상은 라파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3대 거장은 물론 위에서 열거한 모든 르네상스 화가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새로운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중세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 구현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이유는 중세의 예술이 그 대상이 인간이든 자연이든 그것들을 가장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p 108



생각해보면 그렇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2인을 이야기하라고 그러면 아주 자연스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라파엘로도 분명하게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인건 맞다. 근데... 이상하리만치 르네상스 ‘대표주자’ 라는 키워드로 당대의 화가들을 떠올리자면, 유독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만 떠오른달까? 아마도..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않을까 싶다.



하지만 19세기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21세기를 사는 나와 달랐나보다. 그들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미켈란젤로나 다빈치가 아닌, ‘라파엘로’를 선택했으니까. 왜? 놀랍게도 르네상스 당대에는 라파엘로가 대중적으로 제일 인기가 많았다며...!



당대에 제일 인기많고 유명했던 ‘라파엘로’의 이름을 빌려서, 주목을 받으려고 했다는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인건가 싶음!




 



그런데 왜 그들의 사조를 라파엘전파라 불렀을까요? 정확한 저의 의문은 미켈란젤로도 있고 다빈치도 있는데 왜 하필 그중에서 라파엘로만을 콕 집어서 그렇게 희생양의 간판으로 내세웠냐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전파, 다빈치전파 등 이런식으로 그들을 호출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라파엘로의 의문의 1패입니다. 더구나 라파엘로 그는 그들 중 막내로 태어났고 그들과는 달리 37세에 죽음으로써 가장 먼저 죽은 애처로운 천재였는데 말입니다. (…) 지금부터는 저의 추측입니다. 일단 저는 라파엘로의 외모를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초상화입니다. 그의 외모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와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서구 역사상의 예술가라면 머릿속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근엄한 얼굴에 긴 수염등으로 아우라가 및나는 그런 얼굴….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얼굴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얼굴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혼으로 살다 노총각인 37세이 죽었으니 그 전 모습일텐데 아무리 그렇다해도 너무나도 매끄럽고 핸섬한 외모입니다. 마치 요즘 시대 우리나라 아이돌 뺨치는 외모입니다. p 118~119



1520년 37세의 라파엘로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은 바티칸에서 거행되었는데 당시 교황인 레오 10세는 신께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천사를 지상에 잠깐 내려보냈다가 데려가셨다고 할 정도로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라파엘로였습니다. p 121





저자의 주관적인 추측이기도 하지만, 왠지 내가 봐도.............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초상화를 나열해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라파엘로를 선택할 것 같다. 라파엘로의 아이돌 버금가는 외모만으로도 확실히 대중적인 인기를 확 끌것같은 느낌? 그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다빈치랑 미켈란젤로의 초상은 뭐랄까 너무 근엄해서, 섣불리 다가가기가 어려운 포스가 있으니까. 더군다나 그 두 사람의 초상화는 사실주의 보다는 왠지 거룩하고, 성스러운 종교화에 어울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하지만 라파엘로 초상화는 거룩하거나 성스러운건 일단 둘째치고, 잘생겼........ㅋㅋㅋㅋ 흠흠. 무엇보다 다른 미사여구 없이 오롯이 얼굴만 보이는게 그나마 사실주의와 어울리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뭐, 예술은 주관적인거니까?!



니체와 19세기 유럽의 여성


“남자의 행복은 Ich will, 여자의 행복은 Er will”

“남자의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고, 여자의 행복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페르시아의 현자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가 남녀의 행복에 대해 독일어로 한 말입니다. (…) 이 때 남자의 행복은 별 이견이 없지만 여자의 행복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여자의 경우 배우자인 그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는 것만이 행복이라면, 그 안에 여자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행복은 없다는 것과 같기에 그렇습니다. 그녀의 그가 행복해야 나인 그녀도 행ㅂ고하고, 그가 불행하면 그녀인 나도 불행하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마치 유교가 지배하던 우리 이조시대 여인의 삼종지도를 연상하게 하는 니체의 글입니다. 그럼 결혼하지 않았거나 남친이 없는 여자의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니체의 말대로라면 무조건 불행해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p 173~175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엔 여성이라면 읽기 힘든 심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여자는 남자의 장난감이며, 마음의 깊이가 얕고, 잘 변하며, 여자에 있어서 남자의 목적은 임신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자는 여자를 찾아갈 때 채찍이나 회초리를 잊지 말라며 이것은 진리라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19세기 만의 진리겠지요. p 175



니체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워낙 유명한 책이라 그 제목은 알고 있었으나, 솔직히 읽어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내용도 몰랐다. 그런데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니체의 가치관을 들여다보게 되었다는게 함정이다.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요약이 아닌, 책을 쓴 19세기의 지성인 니체의 가치관 말이다.




저는 지금 이 책의 뒤편에 있는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를 쓰면서 구상한 내용을 이렇게 연동해서 쓰고 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그렇게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에게 저항하며 힘들게 살았는데 정작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반대편 남자들의 생각이 궁금해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지성남이기에 충분히 대표성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 가장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말이 굳어진 글을 통해 보면 그의 여성관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결과는 위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보시다시피 거기에 답이 원히 나와 있습니다. p 176



물론 니체는 뛰어난 천재이고 난해한 철학자이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그의 여성에 대한 서술 중 범부인 제가 이해 못하는 많은 비유와 상징이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은 평생의 연인인 루 살로메에게 차이자마자 채 한 달도 안 걸려 쓰인 책으로 알려졌듯이 여성에 대한 그의 적대적인 반감이 배가 되어 표출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녀에게 절절맸음에도 괜히 센 척하려고 그의 작품에선 여성을 그렇게 비하하며 표현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p 177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니체의 가치고나은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 심각하게 찌질하고, 편협적이라는게 참으로 경악스럽다. 더 슬픈건 당대 최고의 지성인의 가치관이 이정도이니, 그 시절의 평범한 남성들은 어땠을지라는 것. 중세유럽의 여성은 인권은 바닥이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 일컫는 사람의 눈으로 보니 더욱 와 닿는다.



이렇게 여성이 차별받았던 19세기 였음에도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여성들은 그 자체로 매우 위대하다 할 것입니다. 사고와 연구를 통해 결과물을 산출하는 학문적이고 지적인 영역은 여성들에게 막혀있던 때였으니까요. 그래도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낸 그녀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그녀들의 온전한 이름으로 표현된 예술과 문학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21세기인 오늘날까지 니체가 살아있다면 그는 여자의 행복을 무엇이라고 정의할까요? 또 짜라투스트라에게 떠밀려나요? p 179



그럼에도 당대의 여성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내려고 발버둥을 쳤으니, 그 내용이 바로 아래의 내용이다!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


이름 없는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그렇습니다. 물질과 인간을 혁명한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끝난 19세기에 들어서도 그 안에 여자는 없었습니다. 정확히 여성은 그녀의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일련의 여성들이 그간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금단의 영역인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p 381



중세 유럽은 여성들의 인권이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동양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뭐.. 여튼지간에! 국가의 근간을 뒤흔든 자유와 평등, 박애를 주장한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지난 뒤에도 여성의 인권은 역시나 바닥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여성들이 작곡을 했다는게 넘나 놀라운 이야기! 그동안 내가 읽었던 역사책에는 음악 관련 이야기는 많지 않았던터라, 정말 새롭고 놀라운 내용이었다.



혹시 이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 그들은 한 형제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소설을 쓴 유명 작가들입니다. 그 3형제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1847년 같은 해에 그 작품들을 출간하였습니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가 바로 그 작품들입니다. 어 …. 그 작품들의 작가가 남자? 그렇습니다. 영국에서 초판 출간 시 그 작가들은 남자였습니다. 남자 필명을 사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앤 브론테 이 세 자매는 왜 남자 이름으로 책을 내었을까요? p 382



맏언니 샬롯 브론테는 자매들이 쓴 시를 모아 당대의 유명 작가에게 보내 평가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돌아온 응답은 “문학은 여자의 일이 아니며, 여자는 작가가 되고파도 될 수 없는 일”이라는 황당한 평가였습니다. 작품의 질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성을 평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고육지책으로 필명을 남자로 바꾸는 도발을 감행하며 이후 각자의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p 383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등이 구체제라 불린 기존의 사회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전면 변화시켜 19세기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만들어지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혼란은 당연하였습니다. 남녀 문제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남성은 기득권을 상징하며, 여성은 남성에 맞서는 도전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을 해도, 근대화가 되어도 그 안에 여성들은 없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여성들은 지식인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응접실에 앉아 바느질을 해야 했다.” 이 말은 해리엇 마티노라는 19세기 영국의 여성 작가이자 사회학자가 당시 유럽 지식인 여성의 현주소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여왕이었는데 말입니다. p 385



놀랄 ‘노’짜는 책을 읽는 내 지속되었다. 고전문학 중의 고전문학이라 일컫는 고전문학 탑티어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가 초판 발간 당시에는 오우!! 남자 이름으로 책이 출간되었다니!!! 지금의 시선으로 본다면야 이해할 수 없을 노릇이지만, 당시의 여성 인권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간다. 대부분의 직업을 금지당한 여성들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절대 이룰 수 없는 직업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를 비웃 듯, 남자의 이름을 써서 책을 출간한 브론테 자매를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브론테 자매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지만, 그러지 못한 여성 작가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녀들이 쓴 명작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손님이 찾아오면 여성들은 지식인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응접실에 앉아 바느질을 해야 했다.”



지구에 인류가 살기 시작할 당시에는 분명 모계사회였다. 이건 역사적으로도 명확한 사실. 그러다 잉여재산이 생겨나고, 계급이 생겨나면서 모계사회에서 점차 부계사회로 이동하였다. 문제는 이 이후다. 부계사회로 변화된 건 이해하겠는데, 어찌하여 여성의 인권이 나락으로 떨어져야했던걸까? 마음에 안들면 여성을 언제든지 마녀사냥으로 죽일 만큼, 여성의 인권이 나락으로 떨어져야만 했던 이유가 있던걸까? 참으로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다.  



프랑스 혁명의 성공엔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혁명 세력은 권력을 잡자마자 그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참여한 여성 중 올랭프 드 구주가 가장 크게 분개하여 여성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녀가 싸워야 할 적이 베르사유 왕궁의 왕족와 귀족에서 혁명 정부의 남자들로 바뀐 것입니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했던 권리는 여성의 정치 참여가 가능한 참정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1793년 단두대에 올라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p 385



그런데 이런 19세기 였음에도 음악은 좀 달랐나봅니다. 남성의 전유물인 정치와 지적 요소가 투입되는 문학과는 다르게 여성의 영역으로 본 것입니다. 집에 손님이 왔을 때 남성들의 눈에 긴 드레스를 입고 응접실 소파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여식의 모습과 피아노의자에 앉아 연주를 하는 모습은 동일하게 간주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업 연주까지는 여전히 힘든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누나도 성인이 되어서는 음악교사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여성은 거기까지였습니다. p 389



하지만 남성들이 아무리 견고하게 방해해도 이렇게 음악적인 재능과 흥미로 분출되는 창작 욕구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녀들은 문학계의 여성들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녀들이 작곡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파니 멘델스존은 초기에 동생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그녀의 곡들을 발표했습니다. 클라라 슈만은 남편인 로버트 슈만과 공동 명의로 작품을 발표해 어느 작품이 그녀의 작품인지 알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녀들의 별난 노력까지 더해졌기에 오늘날 우리는 19세기 여성 작곡가들의 명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여성들이 작곡한 악보들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버려졌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지금도 잠자고 있을 것입니다. p 391



그럼에도 다행인건 여성의 인권이 억압되는 부조리함을 인지하고, 그 부조리함을 이겨내고자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들은 부조리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을 쳐왔다. 누군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세상 밖에 내놓기 위해 남성 가족의 명의를 빌리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여성의 인권을 위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21세기를 사는 나를 비롯한 여성들은, 그녀들이 살던 부조리한 사회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 여러모로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유럽의 예술문화의 뒷 이야기가 내 머리속으로 콕콕콕 들어박히는 것이, 이 책.... 확실히 물건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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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 답사 일지 - 배움을 찾아 떠난 국문학자의 여행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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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다 알듯, 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한다. 조금 더 세분화한다면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여행보다는, 어떠한 ‘장소’에서 의미를 찾은 여행을 좋아한다. 이른바 답사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그런가, 언제나 내 여행 속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장소들이 많았다. 아니, 대부분이 그런 여행지였다. 




답사를 위한 여행은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여행과는 사뭇 다르다. 여행을 가기 전에 그 장소에 대한 배경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비로소 그 장소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그런 배경지식을 위해 여러 책들의 도움을 받았다. 오늘 리뷰하는 『나의 문학 답사 일지』라는 책 역시 답사 여행에 매우 도움이 되는 책이라 단언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서울대 교수이자 국문학자인 정병설 교수다보니, 이 책의 메인은 기본적으로 문학을 기반으로 한 국내 답사 여행책이다. 하지만 그 문학이라는 것이 쓰일 당시의 정세나 사회적 배경이 녹아들어가있고, 당시에 있었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도 버무려있으니, 이보다 더한 인문학책이 또 어디있을까? 국내 여행책으로도, 인문학책으로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 답사 여행책은 총 9곳의 국내 답사지를 소개한다(물론 중간중간에 해외 답사지도 있긴 하다). 


1. 남원, 소설의 고향

2. 군산, 강과 바다의 만남

3. 옛 서울 나들이

4. 궁궐산책

5. 천주교 순교자를 찾아서, 전주에서 나가사키까지

6. 노근리 평화공원의 장미

7. 동학 기행, 인간이 하늘인 세상

8. 안동 답답이들의 고을

9.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하동과 광양




의도하진 않았는데, 내가 답사를 다녔던 지역과 겹치는 곳이 꽤 있었다. 첫 번째 지역인 남원부터 말이다. 남원, 군산, 서울 (궁궐 포함), 전주 등등. 안 가본 곳을 꼽는게 더 빠를듯한?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이 몇 년 만 더 빨리 출간되었다면 좋았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건, 역사유적지 등에 기반한 답사를 해왔던 터라, 문학을 기반으로한 답사여행이 정말 새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분명 내가 답사를 갔었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장소로 느껴졌다. 그것도 첫 챕터인 남원 편에서부터.



남원은 한국소설의 고향 같은 곳이다. 소설사에서 한국 최초의 소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실린 가장 흥미로운 단편이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남원이고, 한국고전문학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춘향전』 역시 그렇다. 최초와 최고의 소설이 모두 남원을 배경으로 한다. 이 밖에 최근 고등학교에서 많이 읽히는 「최척전」의 주 배경 역시 남원이다. 대표적인 고전소설이 모두 남원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p 027



황산대첩비를 바라보고 오른쪽에 전설적인 판소리 명창 송흥록과 박초월의 생가가 있다. 동편제 판소리의 길을 연 송흥록은 귀곡성으로 유명한데 그가 비전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이 우연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수많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영혼이 떠도는 산 아래 시냇가 마을에서 음혼과 함께 살아왔으니 그에겐 귀신 울음소리가 낯설지 않았으리라. p 033



내가 남원을 갔을 땐 임진-정유재란에 초점을 맞췄고, 문학적인 부분에서는 『춘향전』의 배경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남원은 문학하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지역이었다니! 그저 설화로만 알고 있었던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남원이라는 것도, 「만복사저포기」가 쓰인 배경이 고려말 무인 이성계와 이지란이 앞장 섰던 황산대첩이었다는 것도, 황산대첩에서 만복사저포기를 지나 그 연속 선상에 귀곡성으로 유명한 명창이 태어난 비전마을이 남원에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가 남원에 갔을 땐 오롯이 임진-정유재란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만 하나에만 초점을 맞췄었는데, 시야를 문학적으로 넓히니 새로운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것이다. 이제와 말하지만 황산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지역이 현재 남원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이제서야 인지했다. 그니까 난..남원을 오롯이 임진-정유재란 딱 하나의 사건으로만 바라봤던 것이다.




남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정유재란 때의 남원성 함락이다. 1597년 8월 16일 오만 육천 명의 일본 주력군을 상대한 사천 명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총공세에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성민 육천 명과 함께 몰살되고 말았다. 지금 남아있는 ‘만인의총’은 칠천 명 조선인과 삼천 명 중국인의 합묘다. (…) 후대인은 전몰한 사람들을 기려 충렬사라는 사당을 지었고 그들의 무덤을 의총으로 높였지만 그런 방식이 피해자들을 진정 영광스럽게 만들었는지 의문이다. 그들의 죽음을 진정 인간적으로 대접하려는 뜻이 읽히지 않고 처참한 죽음을 국가주의의 충성관 아래에 두려는 뜻이 보이기 때문이다. p 036



「최척전」은 전쟁의 참상을 다루지만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충성이나 애국심을 말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최척은 의병으로 나서나 이는 자의가 아니었고 모병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다. 최척은 또한 정유재란 때 남원의 군민들과 함꼐 남원성에 들어가 싸우다 죽으려 하지 않고 피란을 갔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옥영을 끌고 간 일본인 돈우는 조선인을 적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상하게 돌봐주었고, 여유문과 주우는 낯선 나라의 이방인 최척을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잘 도와주었다. (…) 이처럼 「최척전」은 전쟁을 유발한 권력자의 명분을 따라 적대하고 공격하기보다 인간적 우호에 따라 서로 돕고 연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p 042



요즘 한국전쟁 관련 책을 읽고, 국가에서 강요아닌 강요로 세뇌시킨 ’호국전쟁’ 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게 비단 한국전쟁에 국한된 것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남원 답사 당시 보고 왔던 ‘만인의총’. 남원에서는 호국과 애국의 대명사인 만인의총이 진정, 당시에 죽어간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이 맞는지도 다시끔 생각해보게되었다. 특히나 조선시대 문헌 까지만해도 ‘만인의총’이라는 단어가 확인되지 았는다고 하니, 더더욱.



우리나라는 전쟁이라는 단어에 유독 충성, 호국, 애국의 개념을 세뇌시킨 편이다. 그러다보니 전쟁이라는 단어 안에는 숨어있는 또 다른 개념인 민간인들의 피해나 학살, 국가의 잘못 등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낮은 편이랄까? 그래서 어떤 피해자들의 죽음은 충성과 애국으로 포장되어 대내외적 선전용으로 전락하고, 또 어떤 피해자들의 죽음은 비난을 받는다. 만인의총은 대체적으로 전자에 해당되는 느낌이랄까.



흥미롭게도 판소리 중 『춘향전』만 배경이 한곳으로 고정되어 있다. 『흥부전』이나 『심청전』 등 여타 판소리 작품들은 이본에 따라 공간 배경이 여러곳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 『춘향전』만큼은 작품 배경이 남원 외 다른 지역인 이본이 없다. 실제 어떤 모델이 되는 특정한 사건이 남원에서 일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남원이 아니고서는 작품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살리기 어려워서 그런것 아닐까 싶다. p 048



남원에서는 춘향 사당을 만들고 춘향 영정을 그리며 춘향제라는 축제를 열었따. 또 춘향의 성을 성씨라고 밝힌 이본에 따라 성씨 성을 가진 부사를 아버지로 찾아주기도 했다. 춘향의 성이 보이지 않는 이본도 있고 안씨나 김씨로 나오는 이본도 있는데 굳이 성씨를 고집하여 남원부사 성안의를 춘향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선정비를 찾아 광한루 경내에 세운 것이다. 심지어 광한루 구역을 벗어나 지리산 구룡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춘향의 무덤까지 조성해두었다. 1962년 남원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 ‘성옥녀지묘’라는 지석을 발견하자, 이를 춘향의 묏자리로 간주하고 ‘성춘향지묘’라는 이름을 붙이고 봉분을 씌웠다. p 049



남원의 대표적인 관광지 광한루는 『춘향전』을 빼면 섭하다. 나 역시 『춘향전』을 생각하고 광한루에 갔던거기도 하고. 가서 느낀건 남원이 관광자원으로써 춘향이를 잘 살렸구나 싶었다. 다만, 남원이 춘향이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왜곡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예컨데 문학작품 속 주인공을 실존인물로 되살린 점이라던가, 뚜렷한 증거 없이 실존인물을 춘향이의 부모로 둔갑시키고, 역시나 뚜렷한 연구도 없이 춘향이의 묏자리를 만든것도.



이는 비단 남원만의 일은 아니다. 어떤 지자체든 역사적 인물에 대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건 최대한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왜곡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러 지역에서 역사 왜곡을 마주한 적도 있고. 과연 관광자원 개발에 따른 역사왜곡 허용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번엔 노근리 평화공원에 대한 이야기다. ‘노근리’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라 알고는 있었는데, 그곳이 충청북도 영동에 이위치한 곳이라고는 이번에 이 문학답사 여행책을 읽으며 처음알았다. 수없이 국내여행을 다니면서 충청도 지역도 거의 다 보고 왔음에도, 영동 만큼은 볼게 없다는 생각에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도시이기에 스스로에게 무안했달까.



잘 생각해보면 노근리 학살사건은 내가 학교다닐 당시에는 배우지 못했던 이야기다. 노근리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일어났던 ‘미군범죄’로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민간인 학살사건이지만, 적어도 내 학창시절에는 배우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그럼 어떻게 알게되었느냐? 훗날 성인이 되어서 관객이 몇 없던 영화 『작은연못』을 보면서 알게된 내용이었다. 당시 받은 충격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내가 배웠던 한국전쟁은 ‘호국전쟁’이었고 미군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쳐 싸워준 동맹국이었으니까.



그런 한국전쟁 안에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수없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해 많은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뭐, 조선사도 다름없긴 하지만). 뭐, 그래도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학교에서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가르치고, 여러 TV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이런 부분에 대해 방송하기도 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물론 사람들이 자주 안보는 교양/다큐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그해 초 부모님 댁에 갔다가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6.25전쟁 경험담이었다. (…) 외할머니는 그날 산청에서 진주로 피란 짐을 싣고 트럭을 타고 오시다가 진주 부근에서 길이 막혀 짐을 트럭기사에게 맡기고 차에서 내려 걸어오셨다. 그때 멀리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더니 산에 흰 빛이 가득 찼다. 흰옷 입은 민간인들이 사살당해 시신이 널린 모습이 멀리서 그리 보였단다. 외할머니는 집으로 오자마자 외할아버지의 소재를 물었고 집에 계신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구한 이야기의 전후를 조합해 추리해보니 외할아버지가 진주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희생자가 될 뻔했구나 싶었다. p 184



전쟁 직전에 좌우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좌익 혐의점이 있는 요주의 인물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에 가입시켜놓고 관리했는데, 전쟁이 발발해 전황이 불리해지자 위험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듯 이들을 ‘멸절’시키려고 했다. ‘사상검사’ 오제도가 국민보도 연맹 조직의 실무를 맡았는데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농부들에게 비료 등을 나누어주며 가입을 권유해 회원 수를 늘렸다고 한다. 이렇게 가입한 인원이 수십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당초 의도한 좌익 인사만이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학살한 것이다. p 184



6.25전쟁 시기 우리 고향에서 일어난 학살은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그치지 않았다. 전쟁 초기 국군이 후퇴할 때 대전 등지에서 교도소 수감자 천 명 이상을 대규모로 학살한 일이 있고, 1951년 1.4후퇴 때 전쟁에 동원한 보충대 천여명을 굶겨 죽이고 얼어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건도 있었다. 1950년 당시 16세로 고향 함양에 계셨던 아버지는 간간이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으로 올라간 작은할아버지 뒷수발을 드셨다고 하니, 함양, 산청, 거창의 학살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자세히 말씀하시기보다는 학살로 인해 제삿날이 한날인 동네가 있다는 정도로만 언급하셨다. p 185



그래도 즉시 거창 출신의 용감한 국회의원 신중목의 폭로로 외부에 알려저 국회에서 직접 조사까지 했다. 그런데 그 깊은 골짜기로 들어오는 조사단을 국군이 빨치산으로 위장해 총질을 했다. 국회의 조사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할 정도로 학살 집단의 소행은 대담했다. 이런 사실까지 밝혀지며 해외 언론에서도 주목하자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는데 결국 처벌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조직적으로 전국에서 살인 범죄를 진행한 이승만 정권의 만행 중 일부였으니 그들이 스스로를 처벌할 리 없었다. p 188



저자는 노근리 평화공원 답사를 이야기하면서, 본인의 부모님이 겪으셨던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도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것이 저자의 부친은 함양, 모친은 산청이 고향. 즉 한국전쟁 당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역이었다. 이른바 거창·함양·산청 양민학살이라고 불린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은 정부가 일부 국민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가입시키면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해방이후 한반도는 미국이 점령한 남한과 소련이 점령한 북한으로 나뉘어 극심한 사상대립이 있었고, 그 결과는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후 남한에서는 좌익사상을 가진 국민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가입시켰는데, 흔히 말하는 나랏님들의 실적을 부풀리기 위하여 좌익사상이 뭔지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들까지도 대거 가입시켰다. 물론 어디까지나 농민들의 ‘자발’적인 가입이긴 했다. 나랏님들이 이 단체에 가입하고 이름만 올리면 쌀도 주고 비료도 준다고 하는데, 가입안 할 농민들이 어디있겠나? 그 결과 어떤 마을은 마을 구성원 통채로 국민보도연맹원이 되기도 하고 뭐 그런 상황이었다.



이후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승만 정부는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는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을 지시한다. 혹시나 그들이 북한군에 협조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진짜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들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사상은 1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들이었다는 점이다. 



정말로 아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정말 좌익사상을 가진 인물이라면, 당대에 책을 꽤나 읽은 엘리트라는 것인데 그들이 바보천치가 아닌이상에야 스스로를 옭아맬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을까? 스스로 북으로 올라갔거나(당시만해도 교류가 쉬웠으니), 아니면 스스로를 숨기고 살았겠지. 이 말은 즉,  대다수의 국민보도연맹원은 사상은 1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들이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함정 하나. 한반도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안된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온리 농업국가였으니, 당시의 농민이란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이승만 정부는 국민보도연맹 학살을 시작으로, 이제는 보도연맹을 떠나서 마을 단위, 읍 단위, 면 단위로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한다. 혹시나 북한군이 들어왔을때, 그들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하면서 말이다. 심지어는 국군들이 북한군 또는 빨치산으로 위장까지하면서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정작 이 나라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자신이 자택에서 사용하던 집기류까지 싸그리 들고 남쪽으로 피난을 갔으면서 말이다.



사건 발생 10년 후 4.19혁명으로 비로소 유족회가 결성되어 진상 규명에 나섰으나 5.16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 회장을 형장에 보내버렸다. 학살 가담자들이 경찰에 군대에 권력 요로에 있는 상황이었다. 학살 피해자와 유족은 다시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들은 빨갱이가 아닌 빨갱이가 되어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도 하지 못했으니 피해 사실을 가슴 깊숙한 곳에 박아놓고 다시는 꺼내지 못했다. p 190



1950년 7월 남쪽으로 가던 피란민들을 후퇴하던 미군들이 기관총으로 사격해 이삼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란민 가운데 민간인으로 가장한 북한 병력이 있다는 그릇된 정보를 믿고 그랬다지만, 아이들을 포함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학살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묻는 일이 적지 않다. 그 출발은 대게 제주 4.3사건에서 찾는다. 미국이 지휘하고 한국이 실행한 이 사건은 뒤에 이어질 수많은 학살의 전조였다. 다만 노근리 사건을 공부하면서 부러웠던 부분은, 가해 미군 중에 자신의 행동을 참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백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단 한명도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p 194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국전쟁이 끝나고, 학살의 생존자와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빨갱이로 몰리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왜? 학살의 가해자들은 권력자들이었으니까. 그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일본 경찰 요직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일본이 패망했으나, 미국이 그들을 다시 요직에 앉치고 권력을 주었다. 무엇보다 학살의 가해자이자 최고 책임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었다. 



4.19혁명으로 인해 이승만이 쫓겨나다시피 국내를 떠나며, 다시 진상규명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들은 또 다시 빨갱이로 몰리고, 또 다시 침묵을 강요당했다. 5.16쿠테타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를 필두로 남한에선 꽤나 오랫동안 군부독재가 이어졌고, 그들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렇게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던 가해자들은 호국선열이 되어 현충원에 묻히거나, 그들의 무덤이 성지가 되는 등 이 땅, 대한민국에서 충성과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에 학살된 희생자들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다.



국민을 지켜야할 나라의 수장이 지시하고, 국민을 지켜야할 국군과 경찰들이 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은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잊혀졌던 민간인 학살사건이 ‘문학’을 방패삼아, 사람들의 기억속에 하나, 둘 자리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은 함양, 산청, 거창 사건의 참혹함을 되새기며 ‘차라리 개를 배우자’라는 칼럼을 썼다. 그는 “팔순이 넘은 노인들을 비롯해서 주로 부녀자, 어린애, 젖먹이들까지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서 한꺼번에 사오백 명 내지 칠팔백 명씩 피란이다 시국강연이다 해서 몰고 나와 총화와 휘발유로써 쏘아 죽이고 태워 죽였던 것이다. 동족이라 믿었기에 ‘설마’ 하고 끌려나왔으나 어느 이민족도 일찍이 그렇게는 안했던 무차별 사살을 했을 때 그들은 조국을 무어라 부르며 쓰려졌을까?” 라고 말하면서 당시 참혹한 현장의 에피소드 하나를 전했다. p 192



지금까지 학살 만행과 참상을 알리는 데 문학이 큰 역할을 했다. 제주 4.3사건은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이나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와 같은 소설로 알려졌다. 194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경상북도 문경의 한 골짜기 마을에 국군이 들이닥쳐 어린이 9명, 여성 44명을 포함해 온 마을 사람 86명을 학살한 문경 사건은 남상순의 『흰 뱀을 찾아서』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거창 학살은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에 그려져 있으며, 피카소가 그림으로 남겼던 황해도 신천의 크고 작은 학살은 황석영의 『손님』으로 되살아났다. p 197



살아오면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그 중에서 문학작품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으면 정말 손 꼽을 정도로 내가 읽은 문학잠품은 적다. 왜 그렇게 문학은 잘 안 읽냐고 물어본다면, 개인적 취향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문학작품은 나에겐 꽤나 ‘모호하게’ 다가오는 글이었기에 그랬다. 그래서.... 문학이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잊고 있었다. 문학의 힘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바다 건너 섬에 갇혀있던 제주4.3 사건을 육지로 끌어올려 대중이 알 수 있게 한 것도 문학이었고, 한국전쟁 당시에 있었던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알린 것도 문학이었다. 문학은 침묵의 바다에 가라앉았던 비극을 물 위로 끌어올렸고, 그 비극이 비단 피해자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문학 덕분에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게 되었고, 생존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침묵하지 않고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토록 큰 힘을 가진 것이 문학인데, 나는 왜 문학을 등한시 했을까. 지금까지 수없이 문학작품을 읽을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것이 후회가 된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다룬 문학작품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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