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레스토랑 - 오지랖 엉뚱모녀의 굽신굽신 영업일기
변혜정.안백린 지음 / 파람북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누구든, 무엇을 하든 ‘친환경’을 생각해야하는 시대다. 대기업들은 이미 앞다투어 ESG경영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소규모 기업이나 영세업체들은 ESG는 고사하고, ‘친환경’도 어려운게 현실이다. 사업주 본인이 환경을 생각하고, 지구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사업장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그리 녹록치 않기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해낸 모녀가 있다. 이 모녀는 현재 서울에 위치한 비건 레스토랑 ‘천년식향’을 꾸려가는 오너이자, 이 에세이를 쓴 사람들이다. 여기서 조금 놀라운 건, 그들의 이력이다. 모녀 모두 소위 말하는,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자영업을 시작했다. 그것도 특정 소비자를 타겟으로 하는 ‘비건음식’을 만들고 ‘제로웨이스트’ 까지실천하는 고급 식당을 말이다.

누가봐도 어려운 길인데, 이 어려운 길을 뛰어들다니! 이 일을 강력하게 밀어부친건 다름아닌 딸 안백린 쉐프였다.

동물권 옹호자이자 비건을 하며 환경을 생각하는 딸 안백린. 딸이 못마땅에 언제나 잔소리를 했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있던 엄마 변혜정. 엄마는 딸이 하는 일을 못마땅했고, 딸은 엄마가 하는 말이 ‘입 발린 소리’라고 못마땅해했다. 딸은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엄마는 딸을 지지했다. 그렇게 고급 파인 다이닝 식당이자, ‘비건’식당이며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천년식향이 탄생한 것이다.

그냥 ‘장사’도 힘든데, 그들이 선택한 길은 일반적인 ‘장사’보다 더 힘든 자갈+가시밭길 콜라보! 그럼에도 그들은 그 힘든 길을 걸었다.

물론 그 순간의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자들에게 나의 말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었으며, 때로는 불편한 내 말은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또 대안 없이 비판적 주장만 한다는 비난도 많았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질문하고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지만, 정작 내가 실천하려고 하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참 많은 말들을, 쉽게도 했구나 싶다. 그러나 장사는 내가 ‘꼰대’라는 것을 매일 깨닫게 해준다. p 032


저자는 천년식향을 운영하면서 많은 반성을 했다. 별다른 의미없는 본인의 행동이, 어떤 식당 주인에게는 진상으로 다가서진 않았는지 말이다. 무엇보다 특권층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특권층에 속했고 아주 당연히 그에 대한 대우를 요구했던 사실에 대해서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싫어하는 건 남도 싫어한다는 모토를 가지며 살았다.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아는 누군가가 철저하게 내 기준에서 ‘진상’짓을 하려고 하면, 먼저 나서서 제지하고는 했다. 그런데 정작 이런 내 행동이야말고 그 사람에게 진상으로 보이진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저 모든 이에게 민폐가 아닌, 오로지 내가 그 행동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러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딸은 말했다. 52시간 노동법을 지키고 있지만, 그렇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자기는 문재인이 아니라 홍준표를 지지해야겠다고. 평소 인권과 차별에 감수성 있었던 딸은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사장이 살아야 직원도 산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알아야 한다며, 과연 식당에서 일해보고 정책을 만드는 것인지를 따지며, 나를 원망했다. 직장 내 괴롭힘부터 노동법까지 매일 훈수했던 나는 자영업자의 딸의 이야기를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p 040

지나고 나니 가장 안타까운 점은 본인이 한 공사비용은 지출 처리나 부가세 공제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딸이 몸으로 때운 비용들, 그리고 제로 웨이스트를 위한 황학동 중고물품 구매 등은 영수증 처리가 되지 않아 실비용조차 지출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 당시는 몰랐던 이 사실은 종합소득세를 신고할 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통장 잔고를 넘는 부가세가 폭탄처럼 날아와 거의 기절할 뻔 했다. 이런 일에 대비한다고 개업 초부터 세무사와 거래하고 있었으나, 알고보니 그들도 맞춤형으로 알아서 조언해주지는 않는다. p 048

52시간 노동법, 인건비, 세금문제…. 이 모두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자영업자들이 고스란히 겪고 있는, 언제까지고 해결해나가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들은 입바른 말을 한다. 현실적인 대안은 무시한채. 엄마 저자 역시 그런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딸 저자는 그런 지식인들을 원망하는 현실을 사는 자영업자였다. 실제 자영업자들 현실문제를 눈 앞에서 목도한 엄마저자는, 그저 침묵했다. 아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마저자의 침묵은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달은, 참회의 침묵이었다.

천년식향은 ‘가치를 판매하는 사업장’이 되고 싶었다.

현재 한국의 미식 문화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잠정적 결론이지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천년색향의 불편함을 소개하면서도

감히 손님들에게 그 불편함을 요청했으니

참 건방지고 불편한 가게다.

불편한 레스토랑 p 070

여기까지가 자영업을 시작하며 느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소회라면, 아래는 ‘천년식향’ 운영방향에 대한 소회다. 일반 적인 고급 다이닝이 아닌, 무려 ‘비건’ 음식에다가,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식당인 만큼 일반적인 식당과는 운영방향이 사뭇다르다. 여기선 음식을 소비하는 고객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환경 아니 지구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고객은 지구를 위해 어느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게 이 식당의 룰이다.

그동안 얼마나 불편하셨어요? 정말 힘드셨죠. 참 죄송합니다.

천년식향은 제로 웨이스트를 추구하여 일회용 물티슈도, 냅킨도 없습니다. 깨져도 괜찮은 돌그릇을 사용합니다. 앞접시는 부득이한 경우에 요청시 바꿔드립니다. 설거지 세제 또한 석유가 아닌 코코넛 베이스의 인체에 무해한 세제를 쓰며, 대부분의 음식 재료는 친환경 또는 못난이 채소입니다. 모든 음식을 맞춤형 수제로 만들기 위해 적은 손님만 모십니다. 외부 음식 반입이 되지 않습니다. 영업시간 전에는 직원복지를 위하여 출입이 불가합니다. 모든 성적 지향을 존중하며 화장실도 남녀 구분 없는 젠더 프리 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올라오기 힘드십니다.

식물성이지만 비건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음식의 시즈닝이 복합적이라 강하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비슷한 재료가 들어간 자극적인 메뉴 세 개 주문을 지양합니다. 빵, 밥, 피클이 메뉴에 없습니다. 내추럴 와인만 와인 리스트에 있습니다. (이하 생략)

불편한 레스토랑 p 070

간혹 TV에서 비건 음식을 본 적이 있다. 육류는 일절 없는게 확실한데, 분명 TV에서 나오는 음식 형태는 ‘스테이크’다. 육류가 아닌 채소로 육류의 질감과 맛을 표현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모르긴 몰라도 몇 배의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다.

딸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지점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주부 나이대 여성들이 가성비만 따지는 모습이었단다. 좋은 재료로 정성들여 요리를 해야 맛있다는 것도, 그것이 얼마나 수고스러운 일인지까지도 몸소 느끼고 있을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같은 주부로서 너무나 씁쓸한 이야기였다. p 040

심지어 천년식향은 유기농 채소를 사용한다. 유기농을 사용하면 금액대는 더 오른다. 요즘 아기를 키우면서, 유기농을 자주 사다보니 ‘유기농’이라는 단어만 붙어도 얼마나 비싸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도 가성비를 따지는 한국인. 참 슬프게도 아기가 먹는 것을 제외하면, 언제나 가성비 위주로 장을 보고 음식을 사먹는다.

조금 생각해보면, 유기농이 왜 비싼지는 답이 나온다. 시중에는 채소 포함 식물을 키우기 위한 여러 비료 및 농약들이 많이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약품들이 환경에 좋은지 생각해보면, 그 답은 NO 다. 농약을 생각해보자. 다년간 농약 살포는 토양을 오염시켰다. 뿐만아니라 꿀벌들을 사라지게 했다.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 생태계는 무너진다. 단순히 꿀벌만 사라지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농약’ 사용에 대한 단적인 예시다.

비건 음식도 그렇다. 비건은 그 속에서도 종류가 나뉘긴 하지만, 뭐 단순하게 육류를 안먹는 사람이라고 치자. 사람들이 먹는 육류는 보통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다. 소, 돼지, 닭 같은 가축들은 대규모 농장에서 키운다. 가축의 양이 많은 만큼 폐기물이나 분뇨가 어마무시하게 나온다. 그에 따른 탄소 배출도 어마무시하다. 뿐만 인가? 가축들을 먹이기 위한 사료를 공급하기 위해, 또 어딘가에서는 많은 양의 물을 끌어다쓰고 농약을 치며 곡식을 키운다.

지금까지 수많은 다큐를 보며 알게된 내용들이다. 어라? 이렇게보니 나도 환경 자체에는 꽤 관심은 많은 편인..것 같기는 하다. 다만 실천이 어려울 뿐.

천년식향의 또 다른 모토인 ‘제로웨이스트’. 이건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해볼수 있고, 어쩌면 누군가는 이미 실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실천하는 장소가 사업장이라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보통의 한국 소비자들은 깨진 접시에 내가 먹을 음식이 나오는 것을 반기지 않을 테니까. 왜? 돈을 낸 만큼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급 식당을 표방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근데 잘 생각해보면, 그 옛날 인류는 지구에 친절한 토기를 사용했다. 지금처럼 지구에 불친절한 플라스틱이나 여러 소재가 짬뽕된 그릇들이 아니라!

천년식향은 깨진 그릇도 사용한다. ‘제로 웨이스트’ 컨셉트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고, 실은 그릇값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가격이 있는 식기를 손님도 깨고 직원도 깬다. 그러나 손님들은 이 나간 그릇을 싫어한다.손 다칠 수 있어서 싫어하나 했는데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깨진 그릇에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이것은 손님이 나를 부르는 첫째 이유이기도 하다. p 090

최근데 시카고의 미슐랭 1스타 다이닝에 갔었다. 그곳의 식기들은 찌그러진 깡통에서부터 돌, 조개껍데기, 일회용 케첩까지 정말 다양했다. 가격도 비싼 미슐랭 3스타부터 가이드까지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떤 누구도 가게의 특별함, 기이함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즐긴다고 할까? 외국의 다이닝 경험이 물론 모범사례는 아니지만, 그 다양성만큼은 존중하고 싶다. p 092

해외 유명한 식당 중에는 제로웨이스트를 시행하는 곳들이 있다. 심지어 미슐랭 스타를 받은 고급 식당이다. 그 식당을 갔던 고객들은 이에 대해 클레임은 커녕,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국내에서 이런 모습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음. 향후 1백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그들과 다른 문화권인 이유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정말 깨끗하게 세척해서 재활용하는게 맞는지에 대한 신뢰도가 없기도 하고.

조금 씁쓸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는 그놈의 돈 때문에(!) 음식가지고도 장난하는 업자들이 워낙 많은 세상이다. 그렇다보니 버려지는 기물들을 깨끗하게 세척해서 재활용한다는 자체를, 그저 돈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돈 아끼려고 그러는거 같은데 세척은 제대로 하기나 할까? 라는 식으로 꼬아서 생각하게 된다. 분명 좋은 취지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게 다 이기적인 일부 업자들 때문에 생겨난 편견이라면 편견이랄까.

​​

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친환경 신기술, 비용 같은 그런 물질적인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마도 미래에는 우리가 기존에 생각했던 ‘아름다움’, ‘불편함’의 정의가 변해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기후위기 대책을 보니 너무 배울 것이 많았다. ‘추우면 겉옷을 입고, 냉방을 하면서 절대 문을 열어놓지 않는다’같은 기본적인 부분부터 실천하려는 자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p 076

이처럼 환경을 고려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순간 귀찮지만 결국 나, 그리고 내가 사는 지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을 믿고 현재의 문제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스스로 불편함을 선택하자! 어쩌면 환경을 생각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창과 방패처럼 각 개인이 직면한 모순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닐까. p 079

천년식향은 비건,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면서 여러 문제점을 마주했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그들의 가치관과 정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마주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들을 읽으면서 생각해봤다.

인간은 보다 편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바다를 메웠고,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았다. 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수많은 교통기관을 만들었다. 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수많은 가축을 키우기 시작했다. 보다 편리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일회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환경오염이 발생했다. 빙하가 녹고, 바다 수온이 오르고, 생태계가 파괴되었다.

인간이 ‘편리한 삶’을 추구하기 시작하자, 환경이 파괴되기 시작한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환경파괴로 인해 제일 큰 피해를 입게 될 대상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다른 동, 식물들도 많은 피해를 입겠지만 말이다. 문득 일전에 읽었던 김상욱 교수의 저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런식으로 환경이 파괴되면, 종국에는 인간의 대멸종을 불러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수차례 대멸종이 있었는데, 대멸종의 대상은 언제나 당시 지구상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현재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인간이다. 인간이 그저 ‘편리함’만을 위해 환경파괴를 지속하면, 그 부메랑은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부메랑은 반환점을 돌았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부메랑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방법 뿐이다.

천년식향은 부메랑의 속도를 늦추기 위한 최전선에 나와있는 것 뿐이다. 비건이나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여, 인간이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하는 걸로 지구 환경에 안정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쉬운 역사 첫걸음 - 인물열전 편
이영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통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책들은 대게 그들의 굵직한 업적(과오 포함)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업적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A~Z까지 설명한다. 거기에 더해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조미료처럼 들어간다. 빛나는 업적은 잘했다는 해석과 과오는 못했다는 해석이. 그래서 대다수는 역사적 인물의 굵직한 업적은 눈 감고도 술술 외울정도로 잘 알고 있다. 예컨데 이런식이다. ‘세종대왕=훈민정음/겨레의 스승!’, ‘정조=초계문신제, 장용영설치/ 조선의 르네상스!’ 같은.

그러다보니 이 책도 그런 류의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열었다. 그런데...웬걸?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역사책들은 한 인물에 대해 평면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함과 동시에, 인물에 대한 편향적인 해석도 최대한 지양했다. 문득 저자가 머릿말에 쓴 문장이 떠올랐다.

“나만의 해석을 내리고 또 타인과 그 해석을 공유해 보는 것도 좋은 역사공부가 될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있을 때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

이 역사책은 타인의 역사적 해석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역사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소양을 길러주기 위한 일종의 역사 지침서였다.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것도 맘에 들었지만,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이 책의 구성이다. 뭐랄까, 구성방식이 국사책스럽달까? 물론 요즘 국사책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왠지 국사책스러운 느낌이다. 내 개인적으로도 학창시절 국사책을 제일 좋아했어서 그런가, 괜시리 더 손이간다.


책 구성도 그렇고 내용도 읽기 쉽다보니, 청소년 역사책 추천도서로도 이만한 책이 없지않나 싶다. 우리 딸이 응애 애기만 아니었어도, 같이 읽는 건데. 아쉬울 따름!

보수의 방패와 개혁의 칼을 동시에, 정조


조선 제 22대왕 정조. 우리나라에서 정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극 드라마/영화 주인공(또는 조연)으로도 자주 나왔던 왕이고, 학교 국사시간에서도 무조건(!) 배우는 왕이니까. 어떻게? 영조와 함께 탕평책을 실시하고,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일으켰으며, 지금의 수원을 핫하게(!) 만들어준 수원화성을 조성한 사람이니까.

TMI이긴 한데, 나에게 정조는 아직까지도 이서진인데ㅋㅋㅋㅋㅋㅋ 흐흐흐흐. 요즘 친구들에게 정조는 이준호라며! 아 물론 나도 그 드라마를 잘 보긴 했지만(개인적으로 덕화쌤의 영조 정말 와 진ㅉㅏ 와!!!), 그래도 나에게 정조는 이서진bb.

세손은 자신의 외척인 홍봉한-홍인한 형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의 외할아버지도 모두 노론 사람이었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손은 정순왕후를 자주 찾았고 정순왕후도 차기 국왕이 될 세손과 척을 질 필요가 없었기에 두 사람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홍봉한은 그런 세손을 어느정도 이해했으나 홍인한은 노골적으로 외가를 멀리하는 세손을 탐탁지 않아 했다. 혼자서는 세손을 막을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홍인한은 정후겸과 손을 잡았다. 정후겸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양아들이었다. p 115

정조는 홍인한의 형 홍봉한만은 지켜주었는데,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홍봉한마저 압박했다. 이에 대한 정조의 대응이 충격적이었다. 정조는 김귀주를 파직한 뒤 유배를 보내 버렸다. 김귀주는 평생 복귀하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이런 처분에 큰 배심감을 느꼈다. 정순왕후 쪽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지만 척신정치 청산을 원했던 정조에게는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김귀주 또한 외척 출신으로 척신정치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토사구팽이었다. p 116

1777년(정조 1년) 7월 28일 정조의 집무실이었던 경희궁 존현각에 자객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책을 읽느라 자지 않고 있던 정조는 다행히 지붕 뜯기는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국문결과 이들을 사주핸 배후는 홍상범으로, 바로 홍봉한-홍인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이 일로 정조는 홍봉한을 제외한 홍씨 집안 전체를 풍비박산 냈고,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었지만 은전군에게도 사약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778년 정조가 끝까지 지켜 주었던 외조부 홍봉한까지 눈을 감으면서 마침내 영조 대의 척신들이 모두 사라졌다. p 117

정조의 세손시절 일생이야 많이 알려져있고, 등극 이후의 일생도 잘 알려져있지만, 대중들이 잘 모르는 점이 있으니 바로 정조가 인력활용에 있어서 종종 사용한 ‘토사구팽’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뒤를 이어 까면 안되는 왕 중 하나인 정조다보니, 역사교육이건 대충매체건 정조의 안좋은 면은 왠만하면 부각을 시키지 않는 편이다. 무엇보다 정조가 잘한 업적들만 이야기해도 몇 시간은 훌쩍 지나가니, 굳이 안좋은 면을 부각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정조 업적: 규장각/초계문신제도,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수령권한 강화(및 암행어사 파견빈도 多), 수원화성 조성(인부들에게 임금 지급) 등등. 겁나 많음.

하지만 이 책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조금이긴 하지만 정조의 토사구팽 사례를 포함하여, 정조 후반대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신해박해), 문체반정, 세도정치 시발점까지도 이야기한다.

* 신해박해

1791년(정조 15년) 보수적인 유교적 가치를 지향하던 정조에게 시험대 같은 사건이 터졌다. 오늘날의 충남 금산 진산군에서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며 천주교식으로 신주를 불태워버렸다(진산사건). 진산사건은 조정에도 논의의 대상으로 보고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서양에서 전래된 학문, 즉 ‘서학’이라고 불렀다.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을 처형했고,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를 포함 관련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삭탈관직 되거나 유배령을 받았다. p 124

* 문체반정

정조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지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기 중국에서 대중문학이 크게 유행하고 조선으로까지 넘어왔는데 정조는 대중문학이 성리학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다며 패관잡기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신해박해 사건이 있고 1년 후였던 1792년(정도 16년) 정조는 당시 노론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패관문학의 풍조를 맹비난하고 고전의 문체를 부활시키라며 특명을 내린 ‘문체반정’을 일으켰다. p 125

* 세도정치의 길을 엶

정조는 본인이 없어도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들을 보필할 정치적 동반자를 키우기로 한다. 자신의 정책에 따르는 시파이면서 충분히 아들을 보필할 수 있는 명문가 출신의 인물을 물색한 결과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을 선택했다. 김조순은 정조의 사돈이자 곧 왕이 될 세자의 장인어른이 되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척결한 외척을 자기 손으로 다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해에 정조는 사망했다. 11살의 어린 아들이 외조부인 김조순의 보호 속에 23대 왕 순조로 즉위했다. p 131

물론 이 책이 정조가 시행한 신해박해, 문체반정과 손수 없었던 외척등용 등 어두운 업적을 자세하게 서술한 건 아니다. 예컨데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사상통제 및 학문이 억압되었고, 실학자들이 청에서 배워온 개혁안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웠다거나 이런 내용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정조의 과오도 설명한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내리고 싶다.

동양 평화를 위해 ‘이것’ 해야 한다, 안중근

누군가 당신에게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가 누구인가요? 하고 물어본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떠올리는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안중근’이다. 익히 알려진 그의 행적은 이렇다. 하얼빈에서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동양평화론’을 주장하였으며,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수많은 글을 남겼다는 것. 여기서 조금 더 보태면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이 예정된 아들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 정도가 있겠다. 이러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행적은 공교육에서도 아주 당연하게 배우고, 여러 대중매체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이 책에서도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행적이 실려있다.

여기까지라면 이 책 역시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이야기하는 수 많은 역사책(또는 교과서)와 다를바 없었을 거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책은 거기에 더해 잘 알려지지 않은 안중근의 이야기 및 안중근의 가족 이야기를 포함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바라보려한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특히 안중근 사후 남은 가족이야기들을 읽어보면 말이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에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

북풍은 차가워도 내 피는 끓는구나

강개한 뜻으로 한번 가면 기필코

쥐새끼 같은 도적을 죽이고 말리라

우리 동포여, 우리들이 힘들인 임무를 잊지 마소서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안중근 <장부가>

독립운동 당시 안중근 의사 행적은 워낙 잘 알려져있고, 유명하기도 하니 생략하고. 안중근 의사 사후 남겨진 가족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안중근의 가족들은 모친과 형제, 아내와 아들 딸로 나뉠 수 있다.

* 안중근 모친 조 마리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두 아들 안정근과 안공근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조마리아 여사도 거처를 상하이로 옮겼고 이곳에서 김구의 모친이었던 곽낙원 여사와도 침하게 지냈다.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여러가지 이유로 무너지고 있을 때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조마리아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의 임원이 되어 물질적 후원을 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인 1927년 위암으로 별세하셨다.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 여사의 장례를 치러 주었지만 상하기 교민회 쪽 사람들의 실수로 묘소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현재는 묘소를 찾을 수가 없다. p 147

* 안중근 여동생 안성려

(안중근의)첫째 여동생 안성녀는 오빠의 죽음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구체적인 기록 없이 증언으로만 전해질 뿐인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편과 함께 독립군에게 피복을 제공해주었고, 남편 사후엔 만주로 넘어가 문서 정리 및 자금 조달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어 묘소도 부산에 있다. p 147

* 안중근 남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안중근의 남동생들인 안정근과 안공근은 안중근의 사형집행 후 둘다 러시아군으로 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했다. 첫째 동생 안정근은 김구와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의원이기도 했다. 그는 상하이와 북간도를 오가며 독립전쟁을 격려하고 주도했으며 형 안중근이 존경했던 안창호를 따르기도 했다. (…) 해방 후에도 몸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다가 1949년 상해에서 영면했다. 현재 그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 p 148

둘째 남동생 안공근의 초반 독립운동은 형 안정근과 비슷했따. 한때 김구의 참모라고도 불렸지만 후반기에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에 김구는 안공근을 멀리했다. 무엇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와중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보호해주고 있었지만 상하이 여의치 못하자 안공근에게 안중근의 가족을 부탁했는데, 안공근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으면서 김구와 더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했을 때였던 1939년 안공근은 실종되었고 아직까지도 죽음의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p 148

안중근의 모친과 동생들도 독립운동을 했다. 특히 안정근은 안창호를, 안공근은 김구를 따랐다. 그들의 결말은 아니나 다를까,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비슷하다. 다만 둘째 남동생 안공근의 행보는 조금 미심쩍다. 특히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의혹과 안중근의 아내와 자녀를 챙기지 못한 일들이. 아래에서 서술하겠으나, 안공근이 안중근의 아내와 자려를 챙기지 못한 일은 엄청난 후폭풍으로 돌아온다.

* 안중근 아내 김아려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 여사는 남편의 의거 후 일제의 지난한 취조와 심문을 받았으며 남편 사후에는 헤이룽장성 무링에 숨어 살다가 시댁이 임시정부 활동을 위해 상하이로 갔다는 소식에 그곳으로 갔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안중근의 둘째 동생 안공근이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의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아서 김구와 멀어졌을 때, 그 가족이 바로 김아려 여사와 그녀의 아들들이었다. 이 때문에 김아려 여사는 일본군에게 잡혀가 협박과 감시에 시달려야만 했다. (…)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 여사도 두 자식의 박문사 참배로 인해 위신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중국 상하이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중 두 남매의 귀국 직전인 1946년 사망했다. 김아려 여사의 무덤도 소재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p 148~149

* 안중근 큰 아들 안문생

안중근과 김아려 여사 슬하에는 2남 1녀의 자식이 있었다. 장남 안문생은 아버지 사형 이후 가족이 다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가 얼마 안 있어 1911년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누군가 건네준 과자를 먹고 즉사했으며 그의 나이 겨우 7살이었다. p 148

* 안중근 둘째 아들 안준생과 딸 안현생

안중근의 딸 안현생은 아버지의 의거 후 명동성당에 숨어 살다가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족들과 합류한 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독립운동가 황일청과 혼인했다. (…) 1939년 식민지 조선의 7대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가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을 강제로 귀국시켰다. 그리고 서울 남산에 있던 박문사로 데리고 갔다. 안준생을 협박하여 아버지 대신 사죄하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참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년 후에는 누나 안현생과 남편 황일청도 강제로 귀국하여 역시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참배했다. 안준생과 안현생의 이토 히로부미 참배는 대서특필되었고 김구를 포함해 수많은 조선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배신자라며 두 사람을 맹비난했다. 친일파 낙인이 찍혀버린 안현생의 남편 황일청도 독립운동가들에게 살해됐다. 안준생과 안현생 남매도 독립운동가들의 표적이 되어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숨어 살아야만 헀다. 안준생은 1951년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누나 안현생은 그나마 천주교회의 도움으로 교편을 잡으며 생활하던 중 1959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p 149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아내와 자녀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보호아래 있었다. 하지만 최재형 역시 일본에 의해 죽었고, 최재형 가족들 역시 누군가를 온전히 챙길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실제로 최재형 사후 최재형 가족들 역시 힘들게 살았으니). 뿐만 아니라 당시 어렸던 큰아들 안문생이 독살을 당한 사실도 거처를 옮기는데 힘을 보탰을 것이다. 그렇게 안중근 아내 김아려 여사는 자식들을 대리고 상하이로 넘어갔다. 당시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고, 임시정부 안에는 시댁식구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자신과 어린 자식들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임정 및 안중근의 시댁식구(안중근 둘째 동생 안공근)들은 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든.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박문사를 참배할 수 밖에 없었던 안준생과 안현생. 그런 그들을 맹비난하고, 심지어 친일파라 낙인하며 죽이려 했던 독립운동가들. 나는 당시 독립운동과들과 달리 안준생과 안현생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들을 친일파로 낙인하고, 죽이려 했던(실제로 죽였던) 독립운동가들은 잘못이 없는가 되묻고 싶다. 물론 그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단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안중근의 자녀를 친일파라고 비난하고 죽일 자격이 있는가? 적어도 난 그들에게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안중근의 자녀들을 보호할 책무를 저버린건 다름아닌 당대의 독립운동가였으니.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당시 환경은 살벌하고 엄혹했다. 다시금 말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안중근의 가족들을 보호하지 못한 제일 큰 원인은 다름아닌 안중근의 남동생 안공근이었다. 그래서 김구가 안공근을 멀리했었고.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안공근이 안중근의 자녀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로인해 안공근을 멀리했다면! 김구를 포함하여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나서서 직접 안중근 자녀들을 보호했다면 어땠을까. 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거룩한 희생이라고 찬양하며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키워내면서, 정작 남겨진 안중근 자녀들은 등한시했을까. 아쉬운 대목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역사는 평면적으로 보고 해석하면 안된다. 뿐만아니라 누군가의 해석을 답습해서도 안된다. 역사란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해석하고자 해야, 제대로 된 역사공부라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과정이 있어야 역사공부로 인해, 내 삶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대화는 밤새도록 끝이 없지 - 두 젊은 창작가의 삶과 예술적 영감에 관하여
허휘수.서솔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사는 21세기. 내 우편함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봉투 형식의 우편들이 다수 꽂혀있다. 하지만 그 우편 속에 오롯이 나를 향한 사적인 글, 예컨데 ‘편지’는 이미 사라졌다. 대체로 ㅇㅇ은행, ㅇㅇ카드, ㅇㅇ공단 등에서 보낸, 아주 대놓고 공적인 서류들이 우편봉투에 고이 담겨있을 뿐이다. 나를 향한 ‘편지’를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잘 생각해보면, 난 편지를 자주 쓰던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멀리 이사 간 친한 언니에게 편지를 쓰고,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내면 시차는 있었지만, 언제나 그들에게 ‘편지’가 왔다. 그 편지들은 지금도 친정 서랍 한켠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지금은? 편지는 무슨! 흔한 깨톡 한 줄도 보내기 귀찮다. 지금 내 모토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어제까지만해도 그랬던 나다. 

에세이 『우리 대화는 밤새도록 끝이 없지』를 읽었다. 문득 그때가 그리워졌다. 편지를 주고 받던 순수해던 그 시절이. 그들에게 편지를 쓰며, 편지 받을 그들을 생각하던 내 모습이. 편지쓰기를 즐겨하던 과거의 나는 어디가고, 왜 감성따윈 쌈싸먹은 세상 무감각한 어른여자가 되어있는지! 



이 에세이는 책이기 이전에, 저자 허휘수X서솔의 ‘대화’다. 그리고 그들의 ‘편지’다. 물론 난 이들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유명한 유튜버이자, 예술가라지만, 난 유튜브도 안보고 예술과도 거리가 엄청 먼- 사람이기에. 그럼에도 이들의 대화는 나에게 자그마한 울림을 주었다. 왜? 누군가와 끊임없는 ‘대화’라는게 보통 그렇지않나.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친근감이 느껴지고, 동질감이 느껴지고 막 그런거. 이들이 쓴 에세이가 나한테 딱 그랬다.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내 생각이 어디서부터 생겨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지, 궁금함에 고통스럽던 밤이 있었다. ‘어린이’에서 ‘학생’으로 넘어갈 무렵, 호기심은 내 생각의 근원이었다. 그 시절 나는 생각의 꼬리를 찾기 위해 한쪽으로 빙글빙글 몸을 돌려 일부러 어지러움을 느끼곤 했다. 어지러움을 못 이기고 이불에 풀썩 주저앉으면 이내 생각은 멈추고 몽롱한 상태만이 의식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생각의 방황, 이것이 나의 사춘기였다. p 047, 서솔

처음은 한 번뿐이기에 고귀하고, 다시없을 순간이라서 기념한다. 처음의 기준이 뭔데? 기준을 세우는 것은 만족스러운 처음을 만들려는 시도다. 처음은 그냥 처음이다. 정의와 기준은 개인적이다. 과도한 의미부여는 사이비를 낳는다. 그럴듯한 처음이란 건 없다. 처음은 처음이다. p 048, 허휘수

어렸을 적 ‘처음’이라는 단어에 매달렸던 적이 있었다. 아마 저자 휘수처럼 딱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시기였으리라. 무엇보다 당시에는 ‘편지’쓰기를즐겨하던 감성많은 소녀였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 사춘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감성’많은 시절도 짧았다. ‘처음’에 의미부여를 하던 시절은 짧게 지나갔고, 그저 처음이고 나발이고. 복잡한 생각들을 놔버렸다. 그저 단순히 살자!

보통 갑작스런 변화는 어떠한 사건에서 기인한다. 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 사건이 잘 떠오르진 않는다. 확실한건 그 때부터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거라 확신이 들면, 빠르게 머리속에서 지워나갔다. 사람도 포함해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처음’이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할 만큼 감성이 있지는 않은듯! 

뭐 요즘은 육아를 하면서 감성이 조금 필요하지 않나 싶긴 하다. 누군가는 아기가 처음 하는 모든 행동을 저장하고 기록하는데, 나는 뭐. “했네? 대단해!” 이 정도니까. 아기의 ‘처음’은 의미를 부여하고, 기록해줘야하나 싶기도 하고. 요즘은 그렇다.


이름이 두 개인 사람

나는 예술가인가 아닌가? 나는 창작가인가 아닌가?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과 모양새에 따라 무엇으로 반드시 분류된다. 태어난 날에 따라 신생아에서 어린이로 바뀌며 교복을 입는 순간 학생이 된 뒤 직업에 따라 적당히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바뀐다. 마땅이 취업해야 하는 나이대가 될 때 사람은 세 가지의 이름으로 다시 분류된다. 취업 준비생, ㅇㅇ사원, 그리고 백수. 그것도 아니면 구직 포기자 등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 나를 설명하고 집어넣는 단어가 있다. 현재를 살아간다는 건 반드시 무엇인가로 분류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서솔이라는 표본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무엇일까? p 080, 서솔

내 이름은 뭘까? 좋은 세상 덕에 엔잡러.

그게 아니었으면 그냥 이곳저곳 떠도는 보부상.

돈 되는건 일단 떼어다 파는 도매상.

나도 팔고 춤도 팔고 영상도 팔고 글도 파는 잡상인.

예술가이고 싶었는데, 열심히 살 수록 예술과 멀어지는 듯 하다.

어쩐지 떠나온 육지도 안 보이고,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의 선장. p 080, 허휘수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과 모양새에 따라 무엇으로 반드시 분류된다.’ 저자 서솔의 말이다. 정말 십분 공감한다. 지난 3n년 간을 살아오면서, 내 이름은 두 개 이상이었다. 지금 날 부르는 이름은? 등본에 씌여진 내 이름과 뿡뿡이엄마, 피로님, 그리고 회사를 다니는 ㅇㅇ매니저. 이름이 몇개야? 여기서 진정한 나를 부르는 이름은 뭐지? 조금 슬픈 사실은, 앞으로도 난 사는 동안 내 진정한 이름을 찾지 못할 것 같달까. 정확하게 말하면 앞으로도 등본에 씌여진 내 이름은 계속 불릴 일이 없을 것 같달까. 애기 엄마의 비애인가....



가끔은 나도 이 에세이를 쓴 허휘수x서솔 님처럼 하루종일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는데! 친구와 대화를 할 여유? 아니 그전에 속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 아닌가. 과거에는 이런 친구가 바로 내 옆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고. 수다삼매경을 하고 싶은 또 다른 친구22는 바다 건너 저편에 살아서, 일 년에 한 번 만나기가 어렵고. 나보다 날 더 생각해준 또 다른 친구333는 서로 일하는 환경이 달라서 만나는 시간 잡기가 어렵고. 하, 인생 3n년을 살았는데 역시 삶은 녹록치 않구나. 

그래도 나에겐 평생지기가 있으니까! 오늘은 빠른 육퇴(!)를 하고 내 평생을 함께할 신랑이랑 신나게 수다를 떨어볼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수 2023-09-06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3n살이시니까 신랑이랑 수다 좋지요~~~

전 5n이라 그런가 남편이랑 수다가 안돼요. 신랑이 아니라서 그럴지도요..
신랑님이랑 정다운 수다 넘치는 좋은 밤 되시길~~~
 
발밑의 세계사 - 페르시아전쟁부터 프랑스혁명까지,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지리의 순간들
이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도하진 않았는데, 요즘 세계사책을 자주 읽는다. 그것도 통사 위주로! 내가 주로 읽는 책이 역사책이긴 하지만, 대체로 한국사 위주였는데. 이거참. 이러다 세계사책 편식하게 되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하하하하..하하하. TMI 각설하고!



요근래 읽은 세계사책마다 주제(또는 지향점)가 달라서 그런지, 같은 장르여도 읽을 때마다 새로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역사책 『발밑의 세계사』도 그렇다. 통사이긴 하지만 서술하는 관점이 ‘지리(또는 지정학)’ 기준이다. 아직까지 세계사는 ‘정치사’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 나라서 그런가, 진부한 표현이지만 역시나 나와 다른 관점은 새롭다. 역사는 어떠한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그 재미가 배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이 역사책 『발밑의 세계사』는 초보자용 입문서는 아니다. 그렇기에 세계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다. 세계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일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사를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컨데 중/고등학교에서 세계사 수업을 받았고, 어느정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르다. 한마디로 세계사 초급교육(?)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다면, 이 책만큼 세계 역사를 정리하는데 수월한 역사책은 또 없다.




『발밑의 세계사』는 시대순으로 동양과 서양이 골고루 배치하여 서술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다. 동양과 서양이 따로 국밥이 아니라는 점. 한마디로 동, 서양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이 알고보면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라, 지리(또는 지정학)적인 맥락으로 보면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부분에서 유독 마음에 들었던 챕터가 있었으니 바로 동, 서로마 제국의 분열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다.



1n년 전 학교 정규 교과시간에도 배웠던 내용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라고는 ‘훈족의 남하로 인해 어쩌고저쩌고~’ 정도가 끝이다. 동, 서 로마가 왜 분열했는지는 아예 기억도 안나고. 아무래도 학교 교과과정 목적 자체가 ‘시험 고득점’ 이기에, 방대한 세계사 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여력도 안될 뿐더러, 굳이 시험에 안나오는 내용을 가르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내 머리속에는 동, 서로마의 분열과 ‘훈족이 왜 이동했는지’ 가 연결되지 않고, 연결되지 않으니 머리속에서 그려지지 않아서, 아무리 세계사책을 봐도 머리속에 남지가 않았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공백으로 남았던 동, 서로마 분열과 서로마 제국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 덕분에 제대로! 정립되었다. 심지어 이 챕터는 두 세번 정독했다. 이제서야 한 켠에 남아있던 역사공백이 채워진 느낌이랄까?




그래서..ㅋㅋㅋㅋㅋ 내 역사공백을 채워준 그 챕터 내용을 아래에 옮겨왔다.




동, 서로마 제국의 분열의 숨겨진 이유? 기후변화! (그리고 훈족의 탄생)


3세기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로마. 영토가 넓다는 것은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넓은 영토를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로마는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동로마, 서로마로 분할 통치를 시작했다. 시작은 동방은 황제, 서방은 부황제였다. 무엇이든 새로운 제도는 부침이 따르는 법. 어찌저찌 동, 서로마 분할 통치가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3세기 들어 로마는 곳곳에서 발생한 피지배 민족의 반란과 국경을 혼란하게 한 이민족의 침입, 군대의 황제 폐립 등으로 휘청거렸다. 아예 이 시기를 정의하는 ‘3세기의 위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258년 제국의 동방은 황제가, 서방은 부황제가 다스리는 체제가 도입되었다. 너무 거대해진 제국을 황제 일인이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에는 제국 서방의 부황제가 황제로 승격되며 황제 두 명이 다스리는 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았다. 293년부터는 두 명의 황제를 두 명의 부황제가 보좌하는 4제 통치가 시작되며 3세기의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 p 108



때마침 중앙아시아에 살던 훈족이 선진하고, 이에 밀린 게르만족이 파도처럼 밀려들자, 로마의 지배하에 안정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유럽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남하로 군사력을 대거 소진한 로마는 결국 395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쪼개졌다. 특히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을 정규군으로 흡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100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476년 멸망했다. p 109 



동, 서로마 분할통치가 자리잡힌 게 무색하게, 1세기 만에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게르만족 침입에 의해서. 이후로 유럽 일대는 우리가 사는 21세기, 현재까지 통일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게르만족은 갑자기 왜! 서로마를 침입한걸까? 그 이유는 예상외로 우리가 다 알고 있다.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던 훈족이 게르만족이 살던 지역까지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영토를 빼앗긴 게르만족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서로마 제국 밖에 없었다.





질문을 바꿔보자.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훈족은 왜! 게르만족 영토를 침범했을까? 놀랍게도 그 배후에는 훈족의 전신인 흉노족과, 몽골 일대까지 휩쓸었던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를 알아야만 한다. 



우선 훈족의 전신인 흉노족은 누구인가. 고대부터 중국 왕조를 수시로 침략했던 유목/기마민족이다. 중국 최초 통일국가 진나라는 흉노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심지어 한나라는 흉노족과 2백여년간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한 무제가 흉노정벌에 성공하면서, 흉노족은 터전을 버리고 중앙아시아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로 몽골 일대가 척박해져 목축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한나라 무제마저 대규모로 공격해오니, 이를 버티지 못하고 살기 좋은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기후변화는 고대에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흉노족이 고향을 떠나고 수 세기가 흐른 뒤에는 로마가 기후변화로 고난을 겪었다. 고향을 떠나 유라시아를 유량하며 독기를 품을 대로 품은 훈족과 거대하지만 이미 무력해진 로마가 만나 큰 파도를 일르켰다. 유럽의 분열은 바로 이 동서양 충돌의 결과였다. p 109



흉노족은 도망치듯 서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앙아시아 북부와 캅카스 일대에서 살아가던 여러 민족 집단과 통혼했다. 그 결과 흉노족의 외모는 금발벽안, 적발녹안 등으로 묘사될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 그렇게 여러 세대가 지나자 흉노족의 후예, 또는 흉노족과 관계를 맺은 중앙아시아의 민족 집단들을 통틀어 훈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p 113



기백년간 중국 왕조를 유린했던 흉노족이 갑자기 한나라에 정벌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기후변화다. 흉노가 살던 몽골 일대는 유목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100년 무렵부터 급격하게 한랭기후가 시작되며, 생계가 어려워졌는데 타이밍 좋게 한무제가 흉노정벌을 단행한 것이다. 특히나 당시 한나라는 몽골일대와 달리, 온난한 기후로 국력까지 높아진 상태였다.



중앙아시아 일대로 터전을 옮긴 흉노. 흉노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있던 여러 종족들과 혈연을 맺었다. 이들이 우리가 말하는 ‘훈족’이다. 훈족은 그렇게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는 또다시 찾아왔다. 훈족이 살던 4세기 중앙아시아로. 



4세기다 되어 중앙아시아의 기후는 또다시 급변했다. 강력한 엘니뇨-남방진동으로 338년부터 377년까지 중앙아시아는 사상 최악의 가뭄을 겪었다. 남동태평양과 서태평양 사이의 기압은 서로 역상관관계로, 마치 시소처럼 한쪽이 높아지면 다른 한쪽은 낮아진다. 이를 남방진동이라고 한다. 엘니뇨는 남아메리카의 페루와 에콰도르에 면한 열대 해상 수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엘니뇨가 발생하면 남동태평양의 기압이 낮아지므로, 남방진동에 따라 서태평양의 기압은 높아진다. 경우에 따라 서태평양 너머 인도양까지 영향받기도 한다. 그러면 중앙아시아에 가뭄이 들 수 있다. p p114



훈족은 살기 좋은 땅을 찾기위해 계속 서진했고, 그렇게 그들은 게르만족이 살던 영토를 차지했다. 당시 게르만족은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에, 국가적 대처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영역을 잃은 게르만족도 역시나 서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곳이 바로 서로마 제국이었다. 그것도 전성기가 끝나고, 대내외적으로도 혼란했던 서로마 제국. 그렇게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 




결과적으로 아시아 일대의 기후변화가 로마의 운명, 아니 유럽 일대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특히 3세기 급격한 한랭화는 유럽 일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유럽은 엎친데 덮친격으로 수차례 화산폭발까지 발생하였다. 기본값인 한랭기후에 화산재까지 덮여서 로마 국력은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퇴했다. 내부 권력다툼은 덤이다. 그런 상황에서 게르만족이 쳐들어왔으니, 서로마제국이 이를 방어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서로마 제국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서로마 제국이라는 주인이 사라진 빈 땅에 여러 게르만계 국가가 생겨났으니, 이는 사실상 오늘날 유럽 지도의 근간이 된다.




놀랍지아니한가. 그저 학교에서 배웠던 동, 서로마 제국의 분열과 서로마 제국 멸망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있을 줄은. 정말 이런 맛에 내가 역사책을 읽는다. 물음표로 남겨뒀던 역사 공백이 이 책 덕분에 하나, 둘 채울 수 있었다.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이 역사책은 지리, 지정학적 관점으로 서술된 세계사책이다. 따라서 ‘정치사’에 대한 설명은 빈약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에서 세계사 기본교육을 받았다면, 이 책만큼 세계사를 정리하는 데 효과적인 책은 또 없다고 자부한다. 정말 세계사 역사책으로 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New 다이제스트 100 시리즈 5
정토웅 지음 / 가람기획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읽는 전쟁사 책이다. 세계 전쟁사는 이전에도 책을 수차례 읽어본 적이 있고, 무엇보다 임용한 교수님의 《토크멘터리 전쟁사》 열혈 시청자(!!) 였던 나인지라 전쟁사는 내게 익숙한 분야다. 다만, 여기에 함정이 있으니! 언제봐도 동양 전쟁사는 이해가 잘되고, ‘아?’ 하면 ‘맞아맞아!’ 하고 바로 넘어가는 반면 서양 전쟁사는 매번 처음 보는 기분이랄까T_T. 하. 이건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런건가? 그냥 영어로 이루어진 전쟁 이름이 싫은건가. 후....




정작 아이러니한 사실은 동, 서양 전쟁사를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내용이 풍부하고 자세한건 서양 전쟁사라는 점이다. 예컨데 고대 전쟁사를 보자. ‘트로이 전쟁’, ‘마라톤 전쟁’, ‘살라미스 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 우리에게도 꽤나 유명한 전쟁들이고, 지금도 많은 정보가 아주 디테일하게 남아있는 전쟁이다. 무엇보다 이 전쟁들은 ‘서양’에서 일어난 전쟁들이다. 



반면 우리 고대사 속 전쟁은 어떤가? 이 땅에서 여러 나라가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쟁 또는 전투가 빈번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국가(연맹국가)시절의 기록은 없다고 봐야하고, 그나마 나오는 기록이라고는 삼국시대 기록인데, 이 기록들마저도 ‘A국가가 B국가로 쳐들어갔다’, 내지는 ‘~점령했다’ 혹은 아예 기록 없을 무. 



우리는 세계전쟁사가 대부분 서양 위주로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고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는 데 반해, 동양자료는 빈약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양 자료는 전쟁기록은 많지만 ‘싸움이 있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웠는가에 대하여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 한계다. 더구나 동양문화는 서양문화와 달리 각 나라와의 활발한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각국의 전쟁사는 자국 아닌 다른 국가 사람들의 관심까지 크게 끌지 못했다. 그 결과 충분한 실증과 토론을 거치지 못한 동양 전쟁사는 별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p 038



기원전 4세기 인물인 알렉산드로스 동방원정에서 몇 명의 군인을 동원했고, 어떤 전법을 이용했고, 어떤 루트로 진격을 했는지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과는 확연하게 비교가 된다.



어라? 그래서 그런가? 내가 서양전쟁사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동양 전쟁사와는 달리 전쟁사적으로 너무 디테일한 정보가 많아서?! 아 왠지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하ㅏ하ㅏ...





사담이 길었다..


본격적으로 이 세계사책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100」을 소개해보자면, 이 책은 동/서양을 아울러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또는 전투)를 100개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목차도 어디까지나 동,서양을 합친 시대순! 







목차에서 서양 전쟁(또는 전투가)이 많은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던 정보의 불균형 때문이랄까?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듯. 참고로 이 책에는 부록형식(?)으로 세계 전쟁사 연표가 실려있으니, 전쟁사를 한 눈에 보기에도 좋을 듯. 





아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알게 된 사실이라던가, 디테일한 전쟁정보가 신기하다던가, 동/서양 전쟁 기록이 눈에 띄게 비교가 되어 체크해둔 부분을 옮긴 내용이다.


서양


아마존 전설(BC16~12세기)


그리스 신화와 전설 가운데는 아마조노마키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그리스어는 여전사들로 구성된 아마존 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그리스 남자들로 구성된 전사들과 침략한 아마존 족 간에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싸움 잘하는 아마존 족의 침략을 남자전사들이 나서서 격퇴시킴으로써 그리스를 지켰다는 내용을 주레로 삼고 있다. 말하자면 성 대결적인 전투에서 남자들이 승리하고 남자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그 후 그리스 역사는 남자들이 주역을 담당하여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마존 족의 존재와, 아마조노마키는 역사적 사실이었을까? p 011



1950년대에 우크라이나 남부지방에서는 사르마트 족 전사들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 그 무덤들의 약 20%가 여전사들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젊은 여자 두개골과 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활과 화살, 화살통, 단검, 갑옷 등이 나오고, 두개골이 크게 상처받은 형태나 뼛속에 박혀 있는 청동제 화살촉 등이 발견된 것은 사르마트 족 가운데 여자전사들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아마존 전설에서 여전사들이 활동한 지역 중 하나로 이미 알려진 곳이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사르마트 족은 그리스의 젊은 청년들과 아마존 족의 일시적 결혼에 의해 생긴 후손들이었다. p 012



아마존 전설은 문자기록이 없던 선사시대에 사람들은 모계중심 사회를 구성하고 여존남비의 사상이 지배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또 그 당시 전쟁에서는 여자들이 두드러진 확약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p 014


아마존 전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딱 ‘전설’일 뿐이었다. 헌데 아마존 여전사 이야기가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 심지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까지 있다니!!!!!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책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그 내용은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다름아닌 전 세계 고대 역사에서 발견되는 여성숭배, 이른바 여성숭배에 대한 ‘문화의 보편성’.



동, 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역사(문명)에서 발견되는게 바로 나체 여신상이다. 수렵, 채집을 하는 석기시대는 모계사회 및 여성숭배가 일반적이었다. 여성은 수렵과 채집을 위한 노동력을 생산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문화가 발달하고 잉여재산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노동력이 남아돌았고, 이른바 부족들 간의 땅따먹기가 시작된다. 당연히 무기를 휘두르는 강한 힘을 가진 남자들이 권력을 쥘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이게 딱 아마존 여전사들 이야기와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한마디로 ’아마존 전설(아마존 여자전사)’ 이야기는 당대 그리스 사회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거기에 더해서 부계사회에 대한 정당성도 한 스푼 추가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과 페르시아 정복(BC 4세기)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이룬 업적은 하나의 전설과 같다. 특히 전쟁사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과 업적은 실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군들도 약점을 보이게 마련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군사 분야에 있어서 그야말로 오나벽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의 단순한 계승자 차원을 넘어서 전략 전술에서 페르시아/그리스/마케도니아 세계의 어떤 선구자보다 앞서는 개념과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p 050



왕으로 취암한 2년 후인 기원전 33년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최고의 군대인 보병 32,000명과 기병 5,100명을 거느리고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 알렉산드로스는 단지 180척의 군함밖에 없는 데 비해 페르시아 함대는 400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1차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4년이 소요되었다. p 051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싸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싸움, 기원전 332년 티로스 싸움에서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비록 숫자는 많지만 여러 면에서 뒤떨어져 있던 페르시아 군대를 모두 물리치고 승리했다. 페르시아 군의 가장 큰 약점은 기병과 보병 간 협조체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반면 마케도니아 군은 필리포스가 개발한, 보병과 기병의 협동을 기초로 하는 ‘망치와 모루’ 전법에 숙달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 군은 먼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페르시아 기병을 공격하고, 그 다음에는 기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보병을 공격함으로써 적을 조직적으로 격파했다. p 052


카르타고 군대와 한니발(BC 3세기)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완전한 역전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걸출한 명창 한니발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니발은 도저히 통합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카르타고 군의 이질적 요소들을 오히려 한데 모아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하고,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자기를 따르게 하는 비범한 통솔력을 가졌으며, 적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하는 혜안을 소유한 군사적 천재였다. p 061



이후 로마는 전장에서 한니발을 피하고, 그 대신 로마 지도자 파비우스의 주장에 따라 지연전을 전개하여 한니발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후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용되는 지연전 위주의 전략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불렀다. p 062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 로마에서는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테렌티우스 바로 두 통령이 선출됨으로써 파비우스 전략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공격적이고 자존심 강한 로마인들이 그런 소극적인 전략에 만족할 리 없었다. (…) 다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한니발로서는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p 063



칸나에의 섬멸전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한니발의 창의력과 주도면밀한 양익포위전술, 그리고 탁월한 통솔력 및 추진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한니발과 같은 명장이 나온 것은 바로와 같은 우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전쟁사에서 승리는 패배한 측의 과오와 우둔함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p 066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은 워낙 유명하지만, 굳이 내용을 옮긴 이유는 이들이 활약한 시기와 그들이 남긴 기록때문이다. 이들이 할약한 시기는 기원 전 3~4세. 우리나라로 치면 고구려, 동예, 옥저, 삼한 등 초기 연맹 국가가 있었던 시기다. 기록이 없어도 이상하지 않을 까마득한 옛날인데, 놀랍게도 이들의 전쟁(전투)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다. 몇 명의 군사가 참전했고 어떤 전법을 사용했고, 어떻게 적을 격파했는지 등 빠짐없이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반면 당대 한반도에 있었던 연맹국가 기록들은...음. 국사를 배웠다면 알 것이다. 이렇게 세세한 전투기록은 1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 비교되는거 아닌가..ㅜㅜ



제정로마시대의 군대(BC 27년~)


기원전 27년 카이사르의 조카 손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제1시민’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사실상 그는 황제의 지위를 누리고 제정로마 시대의 테이프를 끊었다. (…) 그는 공화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약 60개의 로마 군단을 28개로 줄이는 개편작업을 벌였다. 과거 장군들이 제멋대로 임시 군대를 모집하는, 비경제적이면서 정치적으로도 위험했던 관행을 중단시켰다. 어떠한 군인도 자신이 아닌 다른 장군에게 충성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직업적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자신이 직접 관장하는 국가재정으로 군인들에게 보수를 지급했다. p 077



아우구스투스 후계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큰 전쟁 없이 국경지역을 성공적으로 방호했다. 제13대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더 이상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기존의 경계선을 영구적으로 요새화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로마군은 대대적인 장성을 쌓고 완전히 요새수비에만 의존하는 군대로 변했다. 이제 군대는 전사들의 전통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경찰처럼 변질되었으며, 활발한 이동보다는 주로 한 곳에 주둔하고, 군사적 업무보다는 엉뚱한 데 관심을 쏟아 점차 무기력해져갔다. p 078




심지어 기원전 1세기 인물인 옥타비아누스는 국방 및 군사제도를 개혁했는데, 이 모습이 현재 군인들 모습과도 흡사해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역사 속 군사제도를 생각해보면 하하.하ㅏㅎ.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길을 잘 닦았다고 해서, 그게 대대손손 이어졌느냐! 그건 또 아니다. 후세들이 평화로운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균열이 시작되는 건 당연지사!



동양


춘추전국시대의 전쟁(BC 770~)


춘추시대 전쟁방법은 거의 같은 시대의 서양에서 유행하던 방법과 유사했다. 주로 제후나 장수들이 전투용 마차를 타고 들판에서 싸웠으며, 전차 1량에 30인의 보병이 붙었지만 그들의 역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로서, 제한된 구리 생산량 때문에 장수들만 장검을 휴대하고 싸웠다. 이때 전투는 일반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끝나고, 결과에 따라 제후국들 간의 합병이 잇따랐다. 전국시대에 7강국(진/초/연/제/한/위/조) 간 전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p 039



철이 생산되었을 때 초기에는 주로 농기구로 이용했으나 차츰 무기로 사용했다. 보병들은 철로 만든 장창과 방패를 휴대하고 철제 화살촉을 이용했다. (…) 동서양은 문화수준에 큰 차이가 나는 만큼 전법에서도 차이가 컸다. 서양에서 주 공격무기는 창이었으나 동양에서는 활이었다. p 040



《손자》의 저자는 춘추시대 제나라 태생의 손무였다. 오나라 제후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밑에서 유명한 장수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나라 사람이었던 손무가 오나라로 국적을 옮기게 된 데는 제나라 정치가 극도로 어지럽고 정변이 자주 발생하자 오나라에 망명을 간 것이라 한다. (…) 그 결과 약소국 오나라는 일약 강국으로 등장하고, 초나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인접국인 제/진/월나라 등에 대해 위협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p 044



동양 전쟁사의 시작! 치열하게 땅따먹기가 진행되었던 춘추전국시대(중국). 정말 많은 전쟁과 전투들이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 기록은 위 알렉산드로스, 한니발과 비교했을 때 정보가 너무 빈약하다. 뭐 어쩌겠는가. 전쟁 기록에 대한 중요도가 서양보다 낮았던 동양을 탓할 뿐. 씁쓸하구만.



진시황제와 만리장성(BC 214년)


현재의 만리장성은 17세기 초 명나라 때에 쌓은 성이며, 이는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 시황제가 쌓은 만리장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축성을 하는 데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진시황제 때의 만리장성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진나라 시대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에서는 자국의 영토를 지키고 적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을 따라 성벽을 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p 067



시황제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옜 장성을 보수, 연결시키고 새 장성을 쌓아서 대장성을 만들었는데, 그 장대함으로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이 성의 실제 길이는 서쪽 감숙지방으로 부터 동쪽 요동지방까지 2,400km에 달했다.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만리장성의 총 길이는 5,000km다. 이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나라 때로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p 068



이건 조금 놀랐다(아마존 전설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의 만리장성이 진시황제 때 만리장성이 아닌, 명나라 때 축성된 장성이라니!! 뭐 중국 입장으로 볼 때, 관광명소 홍보에 있어서, 중세인 명나라보다는 고대인 진나라가 훨씬 홍보효과가 있을테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초 전쟁, 유방과 항우의 대결(BC 206년)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은 기원전 206년 부터 거의 4년에 걸쳐 전쟁을 했다. 전쟁터에서 유방은 자주 패했으나, 진나라 수도였던 함양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달아나오기만 하면 또다시 군대를 일으키곤 했다. 그것은 마치 전국시대 진나라가 본거지를 전략적 요충인 함양에 두고 부대를 잘 운용했던 것과 같다. 주, 진, 한, 당 등 중국 역대의 대왕조가 모두 함양에 도읍을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p 071



유방의 장수 한신은 북방 제국들을 차례로 공략하며 한나라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갔다. 한신은 북방지역을 공략할 때 상식에 벗어나는 이른바 ‘배수진’의 방법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대승을 거둔 바 있는데, 이후 ‘배수진’의 아이디어는 전투상황에 따라 자주 사용되어왔다. p 071



항우에게도 한신 만한 장수로 범증이란 자가 있었지만, 항우가 그를 의심하는 바람에 초나라를 떠나버림으로써 그들의 관계는 유방, 한신의 관계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p 072


적벽대전(AD 208년)


유럽이 하나의 대제국을 형성하고 로마의 통치를 받던 시절, 중국은 천하 통일과 군웅할거가 반복되는 가운데 잦은 왕조 교체를 보이고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중국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유럽에 비하면 너무 조잡하고 트깋 군대의 특성과 전술의 발달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우며, 다만 유명한 장군들의 무용과 지략에 관한 이야기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p 081



동란시절 군웅들이 즐비하게 나타나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두각을 나타낸 자들은 조조, 유비, 손권 등이었다. 중원의 패자가 된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이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부로 진격했다. 이에 유비는 그가 삼고지례를 다하여 맞아들인 제갈공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며 손권과 손을 잡고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게 되었다. (…) 적의 약점을 간파한 연합군은 화공작전을 쓰기로 했다. 화공을 하려면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조조의 군대는 밀집부대를 이루고 있고 바람이 동남풍이 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p 082



연합군은 조조의 남방 재패의 야심을 분쇄했으며, 이 싸움을 계기로 조조의 세력은 위축되고 유비와 손권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결국 3자는 천하를 삼분하여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가 문자 그대로 솥발처럼 정립하는 삼국시대를 열었으며, 다시 그들끼리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다가 280년 위나라의 사마염에 의해 진나라로 통일을 이루었다. p 083



전체적으로 중국(동양) 전쟁사는 전략, 전술보다는 덕장이냐, 용장이냐, 맹장이냐 등 ‘인물’에 중심을 두고 기록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초, 한나라 전쟁을 두고 소설 「초한지(초한연의)」가 탄생했고, 삼국시대를 두고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가 탄생했다. 어디까지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유명 소설 탄생이다(오래도록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얼마나 인물에 중점을 두었는지는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를 보면 알 수 있다. 왜? 소설 「삼국지」 주인공은 다름아닌 유비. 심지어 삼국지 속 전쟁 장면을 보면, 전쟁이 메인이 아니라 전쟁을 지휘하는 등장인물들이 메인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소설 「삼국지」에서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매력적으로 만든 캐릭터들은 작중에서 대부분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이야기. 실제 역사 속 삼국지 최후의 승자는 갑툭튀(!) 사마염이다. 유비나 조조나 죽써서 개준거지, 뭐.



고구려/수나라 전쟁, 살수대첩 (AD 612년)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서부터 흥기하여 한반도뿐만 아니라 북으로 오늘날 중국 땅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쳐나감으로써 자연히 중국과 국경을 이룬 요하 주위 지역에서 전투가 자주 발생했다. 고조선 이후 삼국시대 고구려는 한민족의 대를 이어 강국으로 등장하고, 북방지역의 유목민인 선비족을 몰아내면서 국경지역을 안정시켰다. (…) 그러나 581년 중국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한나라 이래 최대 제국을 건설하고 동방의 강대국 고구려 땅을 넘보게 되었다. p 097



적이 압록강을 건어오기 직전에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은 항복을 가장하고 적진을 방문했다.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을지문덕을 보내고 난 후에야 우중문과 우문술은 고구려의 항복을 의심하게 되었고, 게다가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하며 지휘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을지문덕은 추격해오는 우문술의 군대를 더욱 지치게 하기 위해 접전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패주, 살수 이남으로 깊숙이 유인했다. p 099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소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이제 그만두기 바라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제의를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제 평양성 공략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닫고 총 퇴각을 결심했다. 우문술 부대가 철수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을지문덕 국은 습격을 시작했다. 적 병력이 살수에서 약 절반쯤 도하했을 때 고구려군은 후위부대를 엄습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수나라 군대는 일시에 무너지고 일부 도주병들은 일주일 동안에 압록강까지 약 180km를 내달렸다. 30만 명의 별동대 가운데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온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원정군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거점방어식 청야입보와 같은 훌륭한 전법을 일찍이 개발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수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동북아 강대국의 자리를 확고히 지켰다. p 100



그래도 동양 전쟁사인데, 우리나라 역사가 빠지면 섭하다. 책 읽으면서도 점점 섭섭해질 무렵(!) 우리나라 전쟁사가 첫 등장했으니, 바로 중국과 한판붙어서 대승을 거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심지어 병력 수와 전법까지 있다. 하 감개무량해T_T.



고구려/당나라 전쟁, 안시성 전투(AD 645년)


당 태종은 수 양제와 마찬가지로 평양성 점령을 최종 목표로, 육군은 요동반도를 통과하고 수군은 바다를 건너는 수륙 양면작전 전개를 계획했다. 그러나 양제가 범한 과오를 분석하고 대병력보다는 소수의 정예부대 위주로 육군 6만, 수군 4만 등 총 10만 명의 원정군을 편성했다. p 102



6월 안시성을 공략할 무렵 고구려는 고연수, 고혜진 두 장수가 후방에서부터 15만 구원부대를 이끌고 왔지만 야지에서 격파되고 말았다. 태종은 항복한 고연수를 안시성 아래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성내 고구려군은 성주를 중심으로 굳게 단합하고 결사적 항전을 벌였다. (…) 당 태종은 안시성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기 시작하고, 공성장비로 매일 6~7회씩 공격을 퍼부었다. 고구려군은 적의 토산 건설에 대해 성벽을 더 높이 쌓고, 파괴던 성벽을 보수하면서 적의 성내 진입을 막는 한편, 야간에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적을 기습했다. p 103



당나라 군은 60여 일만에 연 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토산 일부가 무너지며 성벽을 엎친 사고가 발생하자 이 기회를 이용, 고구려군은 도리어 토산을 점령하고 그것을 수비진지로 만들어버렸다. (…) 당 태종이 훌륭한 전략가로서 수 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력헀지만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결과에 이르고 만 것은 고구려의 청야입보 전술과 고구려인의 결사적인 저항을 극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접한 성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지는 판에 안시성을 끝까지 사수한 성주의 용기와 공로는 당나라의 계획을 무력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성주의 이름은 우리나라 정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야사를 통해 양만춘으로 전해지고 있다. p 104



중국을 상대로 두번째 대승을 거둔 안시성 전투. 우리나라에서는 조인성 주연인 영화도 개봉했더랬다. 여기서 함정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시성 전투에는 ‘허’와 ‘실’이 있다. 다름아닌 안시성 전투의 주역, 성주 ‘양만춘’에 대한 것.



실제로 안시성 전투가 기록된 중국 정사와 우리나라 정사 「삼국사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없다. 그렇다면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인가? 안시성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기록이 최초로 쓰여진 건, 안시성 전투 이후 약 1백년이 지난 명나라 때 쓰여진 「당서연의(1553년)」라는 소설이다. 이 영향으로 조선 중, 후기 문신들의 기록에서는 안시성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동양 전쟁사는 서양 전쟁사 대비 기록이 부실하다. 고대는 더더욱. 그래도 중세를 지나갈 쯤엔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디테일이 붙기 시작한다. 점점더 읽을만하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대다수의 전쟁사책이 서양 전쟁사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면, 이 책은 사료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남아있는 동양 전쟁사를 최대한 비중있게 다뤘다. 전쟁사 초기 입문서로도 더할나위 없는 세계사책이니만큼, 강력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