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큐레이션 - 나를 위한 맞춤 제주 여행지 320
이솔.선장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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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장마 끝나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휴가 시즌이 온다. 

아직까지도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하는 여행책 『제주 여행 큐레이션』을 소개한다. 



물론 시중에 제주 여행책은 지겹도록 많이 나와있고, 나 역시도 꽤 많은 제주 여행책을 읽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



이 책  『제주 여행 큐레이션』은 여행책이라는 한계를 뚫고, 내 여행 지론인 “아는 만큼 보인다” 를 정말 그대로 실행해주는 여행책인 것이다.



제주여행, 아는 만큼 보인다!



제주도를 아무리 많이 놀라갔다 한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본다면 진정한 여행을 즐기지 못한다. 하다못해 제주도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제주의 돌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왜 조성되었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 돌담은 그저 흔한 돌담이 아니게 될 것이다. 왜? 옆에 있는 동행자에게 제주 돌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제주의 돌담은 흔한 돌담이 아닌, 또 하나의 여행 추억이 되어있을 테니까.



하지만 눈 앞에 있는 돌담을 보고 그저 돌로 쌓은 담으로만 본다면, 제주의 돌담은 추억이고 자시고 그저 돌담일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바로 이런 거다. 내가 생각치 못한 여행 추억을 많이 안겨주는 것. 단조로울수 있었던 여행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여주는 것! 그렇기에 아는 것은 중요하다.





▶ 제주 키워드 10선


​1. 화산섬: 제주는 하나의 거대한 화산섬?

2. 오름: 제주에만 있는 ‘오름’. 수십 만년의 세월을 품은 크고 작은 오름이 무려 368개나 된다고?

3. 곶자왈: 곶자왈이란 대체 무엇인가! 

4. 돌담(밭담): 흔히 만날 수 있는 제주의 돌담, 그 시작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5. 돌하르방: 제주 대표 상징물 돌하르방. 알고보니 남태평양 석상문화의 흔적?

6. 제주마: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게 아니야~

7. 잣성: 잣성이라고 들어는 봤는가? 넓디 넒은 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지어졌다는데?

8. 불턱: 불턱은 제주 해녀들이 애환이 스며든 장소라는 거!

9. 용천수: 제주도는 언제나 물이 부족했다!

10. 해녀: 제주하면 해녀! 



▶ 알아두면 쓸모 있는 제주 이야기 


1.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씨: 9월에는 제주로 태풍이 많이 지나가요!

2. 제주의 독특한 창세신화: 자네 설문대할망 이야기 아는가?

3. 제주의 역사: 자네 삼신인이라고 들어봤는가?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는 세 명의 신인데 ^^

4. 제주의 전통 음식: 몸국, 각재기국이라고 알간?

5. 외국어 같은 제주어: 제주의 언어는 11세기 이후 고려에서 들어온 중세 한국어의 특징이 많이 남아있다는데?!

6. 제주 전통가옥: 바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의 가옥은 독특한 형태!

7. 제주인만의 ‘괸당’ 문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봤다면 알고 있겠지?

8. ‘신구간’이라는 민간신앙: 제주에는 1만 8천의 신이 있다?!

9. 유네스코 3관왕, 제주 자연: 아유 이건 두 말하면 입아프지!

10. 제주4.3사건: 제주 전역에서 일어난 4.3사건. 절대 잊지 말아야 하고, 언젠가 ‘사건’이 아닌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 우리의 역사!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 여행책 『제주 여행 큐레이터』 를 읽어보자고요?!




여행책이니만큼 여행 지도는 기본으로 있다는 점!



이 책이 내 맘에 쏙 들었던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거다. 제주에서 ‘역사’를 찾을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것!!




많은 사람들은 제주도 하면 자연경관을 떠올리곤 한다. 물론 제주의 자연경관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빼어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제주도는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역사 박물관이다. 정말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까지 모든 역사를 담고있는, 아주 거대한 역사박물관인 것이다.


오죽하면 나도 제주여행을 할 때, 여행의 키워드를 ‘역사’로 잡고 다녔겠는가. 그만큼 제주도는 모든 시간대의 역사를 가득 품고 있다.




아참참. 제일 중요한 걸 놓쳤다. 이 책은 제주 여행을 총 4개의 파트로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4개의 파트도 세부적으로 구분하여 여행지를 정리하였다. 


PART 1 자연

PART 2 공간

PART 3 음식

PART 4 휴식 



​이 책에 실린 제주의 자연, 공간, 음식, 휴식 관련 정보는 어휴. 정말 널리 알리고 싶은데 이거 뭐 방법이 없네? 이 여행책 『제주 여행 큐레이터』를 읽어봐야 이런 내 맴을 알텐데...후후후.


난 그저 이 책을 들고 얼른 뿡뿡이와 제주도 여행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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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혁신 - 혁신을 원한다면 반역자가 되라
이주희 지음 / EBS BOOKS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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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책을 즐겨 읽는다. 아마 꽤 어렸을 때부터 역사책을 즐겨 읽었던 것 같다. 처음 역사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눈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역사책 속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했으니까.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있기 전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전에는 고려가 있었고, 이 땅에 많은 나라가 세워졌다가 사라진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보니 정말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역사를 테마로 하는 책은 거의 다 읽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한반도 역사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알게되었고, 유적지 답사도 즐겨하게 되고, 역사속에 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도 누군가 물어보면 즉답할 정도가 된 시점부터 역사책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역사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땅에서 일어난 ‘빛나거나 찬란한’ 역사를 좋아한다. 하지만, 역사가 삶의 ‘나침반’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찬란한 역사보다는 ‘치욕적이거나, 발칙하거나, 실패한’ 역사를 돌아봐야한다.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빛나거나 찬란했던 역사가 생길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 전에 있었던 ‘치욕적이거나 발칙하고, 실패한’ 역사가 밑거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실패라는 밑거름으로 인해 무언가가 변화되었고, 그 변화로 인해 우리가 아는 찬란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실패한 역사는 보지못하고, 찬란한 역사만 보고 그 속에서 안주하게 되면 그 끝은 다시 치욕적이고 실패한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오늘 포스팅하는 이 책 『강제혁신』은 역사의 실패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찬란한 역사를 되찾았던 사례와 되찾은 찬란한 역사에 안주하여 다시 실패하고만 역사를 조명한다. ‘화약혁명’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우리는 국사시간에 19세기는 ‘서세동점’의 시기라고 배운다. ‘서세동점’ 서쪽의 세력이 점점 동쪽으로 밀려와 동쪽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서구세력이 동아시아로 넘어와서, 그 세력권을 넓힌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19세기에 이르러 청나라는 영국에게 속된말로 쥐어터졌다. 일본은 미국에게,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에게 얻어맞았다. 어째서 19세기 동아시아는 서구세력에세 손 쓸 힘도 없이 밀려날 수 밖에 없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그 이유를 바로 ‘화약혁명’에서 찾는다.



서세동점으로부터 불과 3백여년 전만해도 ‘화약’ 사용에 있어서 서양이나 동양이나 비슷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아니, 오히려 동양이 더 앞질러 있었다. 처음 화약을 발명한 곳은 다름아닌 중국이었고, 화약무기를 처음 만든 곳도 중국이었으니까. 조금 더 들어가면 1405년 명나라 환관 정화의 대원정에서는 정화가 탄 배에 이미 화약무기인 대포가 14개나 있었다. 전국시대로 인해 난세였던 16세기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승총을 보유한 국가였으며, 임진/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여러 해전에서 화약무기인 화포를 주력무기로 사용했다.



이토록 동아시아에서도 화약 혁명이 활발하게 일어났었는데, 왜 불과 2~3백 년만에 화약 혁명이 사그라들게 되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물묻는다.




동아시아에서는 왜 화약혁명이 정체되었는가?

동양의 권력자들은 왜 화약혁명을 지속하지 않았는가?

- 강제혁신 p 166




1. 동아시아, 위기의식을 느끼다 : 화약혁명의 시작


<일본>


1943년, 때는 다이묘들끼리 치고받던 중이던 전국시대. 다네가시마에 중국인들이 탄 배가 표류했다. 그 배안에는 조총이 있었고, 포르투갈인도 있었다. 그렇게 일본에 처음으로 조총이 들어왔다. 일본 대장장이들은 조총을 분해하여 부속품을 본 뜨며, 복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총 생산의 시작이었다. 이 조총에 눈독을 들이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3인의 천하인’ 중 첫 타자 ‘오다 노부나가’다. 



당시 다이묘들은 본인들의 토지 안에 사는 농민들을 군인으로 동원했다. 물론 무상으로. 무엇보다 ‘농민=군인’ 이다보니 전쟁은 언제나 농한기에만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농번기에는 농사를 지어야 한 해 동안 먹을 식량을 비축해야하니까. 이건 당시의 상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달랐다. 그는 일반적인 다이묘들과 다르게(!) 월급을 주는 군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덕분에 농번기/농한기 가릴 것 없이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월급을 받는 군인들은 당연히 농사에서 자유로웠다. 결과적으로 오다와 싸우는 다이묘들은 이기든 지든 한 해 농사를 망쳤고, 그로 인한 보릿고개를 비롯한 여러 부작용이 극심했다. 행여나 오다와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야했던 것이다.



기존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오다는 매우 비겁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득권의 관점이다.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 오다에게 기득권의 상식은 쓰레기일 뿐이다. 오다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혹은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스스럼없이 자기것으로 만들었다. 조총도 그 중 하나다. 자신의 군대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다는 대규모 조총부대를 꾸려나갔다.



발사 속도가 느린 초창기 화승총에 약점을 보완하려면 대규모로 부대를 운용해야 효과가 있다. 그런 점에서 노부나가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일본도 본격적인 화약혁며으이 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대가 실력을 발휘할 기회는 난세이니만큼 곧 찾아왔다. 일본 동부 지역의 최대 세력이었던 다케다 가문과의 결전, 나가시노 전투다. p 181



노부나가는 일본에서는 볼 수 없던 대규모 조총 부대를 전투에 동원했다. 기록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최소한 3,000명 이상의 조총병이 집단으로 사격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투에서 패한 다케다 가문의 기록에도 이 부분은 분명히 언급되는데, 전투 이후 다케다 가문은 보병인 ‘아시가루’에게 장창이 아닌 조총을 훈련시키라는 지침을 잇달아 내리고 있다. (…) 일본의 다이묘들도 조총의 위력과 조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눈으로 확인하자, 조총 토입에 그야말로 사활을 걸게 되었다. 일본 열도에 ‘조총이냐 파멸이냐’라는 위기의식이 번지기 시작했다. p 185




 




<조선>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놀랍게도 기병이 전투의 주력이었다. 하지만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조선 전기에 조선이 제일 많이 싸웠던 적은, 북방의 유목민(당시에는 여진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의 기병은 그 위력이 상당했다. 1583년 여진족 ‘이탕개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신립이 500여의 기병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해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조선의 기병은 가히 고구려 철기병이 후예라 할 만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신립은 같은 방식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상대가 여진족이든 왜적이든 그동안 조선군이 항상 승리해오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과 함께 방어군을 이끌고 남하한 신립은 잘 알려진 대로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일본군과 대결한다. 조령에서 유리한 지형을 기반으로 일본군을 상대하지 않고, 탄금대라는 평야를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하지만 어쩌면 신립으로서는 너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건 전투에서 가장 잘하는 전투방식을 택했을 뿐이니까. 문제는 이번 적군은 지금까지 상대하던 여진족 군대나 노략질이 목적인 왜구들이 아니었다. 오랜 전란에 단련된 정규군인데다 화약 무기인 조총까지 갖춘 군대였다. p 189



신립과 조선군은 마치 나가시노 전투의 다케다군처럼 총격 앞에 장렬하게 전멸하고 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군이 이런 방식을 고수하다 패배한 것은 탄금대 전투만이 아니었다. 이 전투 이후에도 조선군은 임진강 전투에서, 또 혜정창 전투에서 기병 돌격을 거듭하다 결국 몰살당하고는 했다. 자기가 가장 잘하는 방식을 포기하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법이다. p 190





조선은 수차례 조총으로 인한 참혹한 패배를 거듭하고 나서야 비로소 전투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때마침 조선으로 귀화한 항왜들이 조총 제작 및 사용법을 전수해주며 이를 도왔다. 대표적인 항왜가 바로 모하당 김충선. 뭐, 임란 이후에 조선정부가 항왜를 어떻게 내쳤는지를 생각해보면 벌써부터 화딱지가 나긴 하지만,  항왜들이 미래를 알리 없으니 뭐. 여튼 그들 덕분에 조선군은 명실공히 화약군대로 다시 태어났다.


조선시대 충청도 속오군의 병적기록부를 보면 1600년대 충청도 병사 중 76.5퍼센트가 조총이 주특기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조총 무장비율이 높았다. 또 순조 초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지방군인 속오군을 제외하고 중앙군인 오군영의 조총만 따져도 4만 5,000자루에 탄환도 575만 개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심지어 조선군의 조총 실력은 곧 동아시아 최고 수준을 자랑하게 되었다. 원래 발사 무기인 화을 주력으로 사용하던 전통 덕분인지 도입 반세기만에 발사 속도나 정확도에서 주변국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명나라나 청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청할 경우 항상 조총병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조선군의 명중률이 명군이나 청군에 비해 몇 배나 높았기 때문이다. p 194




<중국>


전쟁의 위기 속에 화약을 받아들인 것은 중국도 동일했다. 때는 지는 해 명나라와 뜨는 해 후금의 40년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군을 보이는 족족 섬멸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고전했던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명나라 장수 원승환이 방어하던 영원성 전투다. 원승환은 화약무기인 홍이포라는 대포를 사용하여 누르하치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3일동안 누르하치가 직접 출전하여 싸웠지만, 영원성을 함락할 수 없었다. 결국 후금은 후퇴했고, 이후 누르하치는 사망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후금의 칸이 된 홍타이지는 명나라가 사용한 화약무기의 가치를 알았다. 하여 박해하던 한족(명나라 백성)들을 우대하며 화약기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약무기로 중무장하게 된 후금은, 훗날 조선으로 쳐들어오니 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2. 동아시아의 화약혁명, 길을 잃어버리다.


<일본>


오랜 전국시대가 끝나고, 최후의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평정했다. 이후 도쿠가와는 여러 제도를 반포했다. ‘무가제법도’와 ‘일국일령성’, ‘쇄국령’ 등. 목적은 다이묘에 대한 막부의 통제력을 높이고,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축소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이묘들의 하극상을 금한 것이다. 쇄국령도 같은 맥락이다. 해외 교류가 빈번하게 되면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사상은 기존 질서를 흔들고 이는 다시금 하극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화약무기도 금지되었다. 아무리 무서운 무사 계급이라도 농민이 총알 한 방만 쏘면 끝장나는, 이 역시 하극상이기 때문이다.


화약무기가 처음 일본에 들어왔을 때는 센고쿠시대라는 무한 경쟁의 시기였기에 무사들도 혐오감을 접고 적극적으로 조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조총은 당연히 금지해야 할 혐오스러운 물건이 되었다. 일본에서 조총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p 213



<중국>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한 후, 강희-옹정-건륭 연간 오랜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그들은 평화에 안주했다. 임진왜란 발발전의 조선 전기처럼.


청나라 조정은 일본의 막부처럼 공식적으로 화약 무기의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번의 난이 진압된 이후 이른바 강희, 옹정, 건륭 연간의 오랜 평화가 찾아오자 화약 무기의 필요성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간혹 청의 패권에 도전하는 유목민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청제국에 이들을 토벌하는 일은 황제의 영광을 보여주는 화려한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p 218



심지어 청나라는 앞선 명나라보다도 안보상의 위협이 적었다. 명나라는 그나마 북로남왜라고 해서 북방의 유목민족과 남방의 왜구가 항상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리장성 너머의 유목지대에서 출발한 청나라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지적한 대로 만리장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북방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마침 일본도 안정적인 에도 막부의 시대였던지라 왜구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한마디로 어떤 안보상의 위협도 없는 완벽한 평화가 100년 넘게 이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청나라의 지배계급이 유목 전사의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화약 무기에 매달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p 220




< 조선>


임진/정유재란 이후 연이어 정묘/병자호란이 터졌다. 큰 전쟁을 연이어 맞닥드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국방력은 더 후퇴한다. 그리고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사대하는데 모든 힘을 쏟는다. 화약혁명? 화약은 커녕 오로지 ‘주자학’만 부르짖으며, 여러 방면으로 조선의 발전은 멈춰버렸다. 그야말로 흑역사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3. 멈춰버린 동아시아의 화약혁명, 그리고 서세동점의 시작


모든 전쟁이 멈추고, 오랜기간 평화가 찾아오면서 동아시아의 화약혁명은 그렇게 멈췄다. 반면에 서양의 화약혁명은 지속해서 발전되어갔다. 서양은 여러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다보니 세력 넓히기를 비롯하여 왕위 다툼 등 전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양의 화약무기는 유례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화약 무기는 잊히거나 정체되어갔다. 당연히 홍이포나 조총의 뒤를 잇는 신무기 개발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 되었다. 신무기는커녕 가지고 있던 홍이포나 조총조차 창고에서 녹이 슬어갔다. 급기야 19세기 일본 근해에서의 침몰 사고로 일본 땅에 상륙한 미국 선원은 일본성에 실제 대포는 없고 대포를 그린 큰 걸개그림만이 걸려있는 것을 목격할 지경이었다. 생존경쟁이 사라지고, 위기의식이 사라지자 화약혁명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17세기 이후의 군사혁신이 동아시아에서 중단되고, 유럽에서 계속된 원인은 결국 위기의식의 차이다. 독약을 항상 목에 걸고 다녀야 할 정도로 절박한 위기 의식 속에 살아가는 자(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와 전쟁을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 정도로 여겨도 되는 자(청나라 건륭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생존경쟁의 치열한 정도가 결국 위기의식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유럽과 같이 비슷한 규모와 실력을 갖춘 국가들이 경쟁하는 곳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강제력이 존재했다. 이웃나라가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군사적 혁신을 거부하는 것은 곧바로 파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이 위기의식을 낳고 위기의식이 혁신을 강제한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청나라의 패권은 압도적이었고, 조선이나 일본도 자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오랜 평화를 누렸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권력의 이익에 반하는 혁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혁신이라는 수레바퀴는 생존경쟁과 위기의식이라는 강제력 없이는 앞으로 굴러갈 수 없기 때문이다. p 222



서양보다 시작이 앞섰던 동양의 화약혁명. 하지만 위기의식이 사라지면서 혁명의 불씨도 사라졌다. 그렇게 2~300년이 흐른 후 우리가 배운 서세동점이 시작되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은 다름아닌 ‘위기의식’ 이다. 이는 비단 역사의 흐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잊지 말아야한다. ‘위기의식’을 갖고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앞으로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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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AK커뮤니케이션즈에서 출판된 서브컬쳐 라인의 세계사책 「세계의 악녀 이야기」를 읽었다. 내 성향상 동/서양을 막론하여 역사책을 자주 읽다보니, 이런식으로 악녀를 주제로 한 책이나 혹은 범죄자를 주제로 한 책 등 하나의 테마를 주제로 한 세계사책도 꽤 많이 읽은 편이다. 고로 이번에 읽은 「세계의 악녀 이야기」책도 그리 생소한 편은 아니었다. 실제로 내 책장에는 세계사적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여성들에 대한 책이나, 이번 책처럼 ‘악녀’를 테마로 한 책도 여러 권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이 책의 저자는 어떤 관점으로 ‘악녀’를 골랐고, 어떤 관점으로 책을 썼는가 궁금해서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간과했던 사실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가 일본인 남성이라는 것,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1964년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를 염두하고 읽었어야 했는데, 난 그러지 못했다. 이 두 사실을 간과하고 그저 이 책을 역사책으로 인지하고 읽었기에, 책에서 오는 위화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책을 읽다보면 집필방식은 차지하고서라도, 지금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내용도 너무 뚜렷하게 사실인냥 쓰여있고, 저자의 편향된 역사관이 너무 대놓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역사더쿠로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저자 시부사와가 생각했던 ‘악녀’의 의미는 ‘문고판 후기’의 내용이나 작품 속에서 간혹 나오는 내용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예컨데 시부사와는 악녀의 정의에 대해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도 ‘미모와 권력을 가지고 악의 극한 까지 간 여성, 혹은 애욕과 범죄로 스스로를 망가뜨린 여성’을 악녀로 이해하면 된다고, 어느정도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고 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본다면 작가도 ‘악녀’가 무엇인지, 명확한 기준을 세워두고 구체적인 선정 작업에 임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통상적인 선과 악의 개념에 바탕을 두었다기 보다는 강렬한 임팩트와 농밀함, 특이함이나 비극성 따위가 압도적일 경우 별점이 진하게 채워진 느낌이 든다. 



서점에 진열된 수많은 책들 중 고맙게도 이 책을 선택해주신 독자분들에게 각별한 인연을 느끼며, 역자로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첫째, 이 책의 제목은 『세계의 악녀 이야기』지만, 결코 권선징악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악녀의 최후가 이렇게 비참하니 부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고리타분한 훈계도 없으며, 선이 악을 이기는 구도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동서양의 실존 인물들의 삶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하고 밋밋한 역사서와는 결이 다른 작품이다. 초판이 나온 때가 1964년이었던 만큼, 최근에 이미 정정되었거나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거나 시시비비에 골몰하기 보다는, 역사적 테마를 다루는 ‘시부사와 스타일’을 만끽하는 편이 좀 더 생산적이라고 여겨진다. 시부사와는 매력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고 흥미 본위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유미주의적 관점에서 약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이다고 느껴졌다. p 221~223 (번역자 후기)



다 읽고 나서야 이 책이 1960년대에, 그것도 일본남성의 손에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뭐, 1960년대와 저자가 일본인 남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뭐. 이 책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저 미리 인지하지 못하고 읽었던 내 잘못일 뿐. 하다못해, 이 책의 제일 마지막에 실려있는 번역가 김수희님의 후기라도 먼저 읽어봤더라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한결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때마침!!! 이 책 뒷편에 실려 있는 번역가 김수희님의 번역 후기글이 내가 느낀 위화감이 무엇인지와, 이 책을 읽기 전에 염두해야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이 책의 중쇄부터는 번역자의 후기를 이 책의 앞 장에 실어주었으면 한다. 그럼 적어도 나처럼 이 책을 역사서로 인지하고 읽는 사람은 없을테니^_T.




뭐, 한마디로 이 책은 역사적인 관점으로 읽을 세계사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 ‘2차 창작물’ 또는 ‘설정집(자료집)’이라고 하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역사책이 아닌, ‘2차장작물’ 또는 ‘설정집(자료집)’으로써는 추천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 책을 2차 창작물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예컨데 이런 느낌이다. 역사서인 진수의 『삼국지』와 어디까지나 ‘소설’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같달까? 『삼국지연의』가 아무리 재미있다 한들, 그 누구도 『삼국지연의』를 역사서로는 보지 않으니까(아! 생각해보니 삼국지연의를 정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긴 있었구나^^). 거기다 이 책의 집필 방식도 역사책 보다는, 에세이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책 속에 짙게 깔린 저자(일본인) 특유의 심미관과 정신사적 관점까지 더해져서, 누가뭐래도 이 책은 역사서보다는 2차 창작물이라는 색채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중세시대 여성에 대한 2차 창작물을 집필함에 있어서도, 배경습득이나 캐릭터 모티브를 얻기 위한 설정집 또는 자료집으로 봐도 나쁘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을 역사서로 볼 때는 커다란 단점 중 하나였던, 저자의 ‘악녀’의 기준이 ‘2차 창작물 설정집(자료집)’으로 볼 때는 매우 큰 장점이 때문이다. 저자가 고른 악녀 기준은 명확한 선과 악이 아니라, 번역자의 말대로 ‘특이성’에 있다. 이 ‘특이성’이야 말로 2차 창작물의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가 악녀로 선택한 기준인 ‘특이성’을 기준으로 이 책에 실린 여성들의 면면을 보자면, 일부는 역사적으로 꽤 유명한 인물인데 반해(정치사적으로 보았을 때), 일부는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는 여성들도 있다.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세의 여성들을 주인공 또는 모티브 삼아 2차 창작물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요즘 유행하는 웹소설을 보면 ‘로맨스판타지’ 장르가 유행하니, 이런 장르와 엮으면 필력에 따라 대작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는, 이 책 속에는 나에게 초면인 여성들이 여럿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까지 역사서에서 만난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사’ 또는 ‘여성인권’에 있어서 어떠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여성들은 저자의 악녀 선정기준에는 아주 현저하게 못미치는(?) 인물들이 대다수였나보다. 그 덕분에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 이라던가, ‘프레디군트와 브룬힐트’ 같이 지극히 초면인 여성들을 이 책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저자가 이 책을 쓰는데 있어서, 정말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닌, 본인의 개인적인 이유로 ‘악녀’를 선정했던 것이 나에게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한마디로 개이득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역사적 사실여부는 따로 확인해봐야지. 하하.ㅏㅎ하ㅏ하하.하하.




★이 책의 총평★


이 책은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2차 창작물을 쓰고자 하는 예비 작가님들에게 추천하는 세계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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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셀프 트래블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홍은선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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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코로나 시국이 끝나고, 자유로운 해외여행 시대가 돌아왔다!!!!!!!!!!!!!!!!!!!!!!!!!!!!!!!!!!!



과거의 나란 사람, 해마다 최소 2번은 일본여행을 다니고는 했다. 나에게 해외여행이란, 무조건 일본이었으니까. 여행을 갈 여유만 있으면 무조건 일본으로 향했다. 제일 큰 이유는 언어가 통하는 해외였고, 가까웠으며, 무엇보다 제주여행보다도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이 이유는 지금도 동일한데, 슬프게도 이제는 해외여행을 갈 여유가 없다^_T. 애기 보느라.....ㅎ....



혹자는 아기랑 같이 일본여행을 가면 되지 않느냐!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음. 육아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은바 최소 초등학교는 들어가야 공공예절도 지킬 줄 알고, 해외여행 간 것에 대한 기억도 좀 하고, 여기저기 기웃기웃거리며 견학도 되고 뭐 그런다며. 하하하. 고로 향후 10여년 간은 우리집에서 해외여행은 없을 거라는게 내 결정 ^^!



아ㅏ 물론 나홀로 또는 신랑 홀로 자유시간을 즐기기 위해 가는 일본 여행은 제외하도록할까? 우리도 육아에서 해방되서 쉴 틈은 필요하니까 흑흑.


TMI는 여기까지!!!!!






자유로운 일본여행 시대가 돌아왔으나, 자유롭지 못한 여행객이 된 나에게 일본여행책을 통한 대리만족은 한줄기 빛과 같다. 그리하여! 오늘 소개하는 책은 여행책 부문 스테디셀러 ! 셀프트레블 시리즈!! 「셀프트래블 나고야」. 특히나 코로나 시국 이후에 출간된 아주 따끈따끈한 신간이라는 점에서, 요즘 일본 나고야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에게 정말 추천하는 여행책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1년에 2~3차례 일본을 갔던 나지만, 내 성향이 약간 ‘한 곳만 판다!!!’ 여서 주로 관동(도쿄/가마쿠라/요코하마), 관서(교토/오사카/고베), 규슈(대마도/후쿠오카/오이타)에 한정되어 있었다. 갔던 곳 또 가면 재미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역만 같을 뿐 같은 장소를 간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무래도 내가 여행지를 고르는 데 있어서 제일 많이 고려하는게 ‘유적지’이다보니, 더욱 그렇다. 뭐, 그덕분에 이제 도쿄 인근과 교토 인근의 유적지는 거의 섭렵했다는 건 안비밀!



고로! 이제 내 일본여행 선택지에서 도쿄랑 교토가 빠져나갔기에, 바로 지금 그 곳들을 대체할 여행지를 선택할 시점이긴 했다. 그렇게 선택한 여행지가 바로 #나고야. 



나고야는 일본의 3대 도시로 꼽히지만 도쿄나 오사카에 비해 여행지로서의 매력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국토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때로는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한 베이스캠프 정도로만 취급받는다. 하지만 이는 나고야가 지닌 여러 장점 중 하나일 뿐이다. 특유의 향토 요리는 일본 내 각지에서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고 대도시답지 않은 한적함까지 엿볼 수 있는 곳. 조금만 발길을 뻗치면 새로운 즐거움과 만날 수 있는 나고야의 매력을 확인해보자. p 022



역사적으로 나고야는 전국시대 오다 가문과 에도시대 도쿠가와 가문과 오랜 인연이 있는 도시이다. 특히 나고야에는 도쿠가와 가문과 관련된 유적지가 꽤 많다. 나고야성이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난 성이라는 건 안 비밀. 물론 나고야성의 대부분이 근대에 복원된 것이긴 하지만. 여담이긴 하지만 나고야성이 오사카성, 구마모토 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나고야에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고성, 이누야마 성이 있다. 이누야마 성의 천수각은 무려 전국시대 당대의 것! 태평양 전쟁 당시 나고야 공습조차 피한 이누야마성의 천수각은 넘나 보고 싶은 것! 이 외에도 삼종신기 중 하나인 쿠사나기 검(!!!)을 보유하고 있다는 아쓰타 신궁도 나고야에 있다. 물론 그놈의 삼종신기는 일반인에게 1도 공개가 안되기에, 정말 진짜로 있긴 한건지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여튼 있다고 하니까ㅋㅋㅋ.



일본은 크게 4개의 섬과 그 외 작은 섬들로 구성돼 있는 열도다. 4개의 섬은 북쪽에서부터 훗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이며 나고야는 가장 크고 가장 인구가 많은 혼슈의 중부 지역에 위치한다. 국토의 중심에 있다 보니 일본의 주요 도시인 도쿄와 오사카 사이를 잇고, 주변 도시로의 이동에 있어서도 중심지 역할을 한다. 한국인 여행자에게 인지도나 인기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도쿄, 오사카와 함꼐 일본의 3대 도시로 꼽힌다. 일본에서는 네 번째, 중부 지역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다.



나고야는 지역 경제의 발전이 뛰어난 도시로도 유명하다. 도요타 자동차를 비롯한 여러 기업들이 나고야를 본거지로 하는 덕이다. 이로 인해 현지에서는 부자 도시라는 인식도 있고, 자동차 산업이 중심이 되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울산광역시와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도 일본 무역 흑자의 70%를 벌어들인 적이 있을 만큼 ‘큰돈’을 모으는 지역이다. 그에 비하면 관광 도시로선 아직 ‘동전 한 닢’ 수준이지만 독특한 식문화와 교통 인프라 등으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다. p 024



내가 알고 있는 나고야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전국시대까지. 근데 알고보니 나고야는 근/현대 시간 속에서 굵직한 산업역사를 쓰고 있던 도시였다. 



도요타의 시작이 나고야였다니. 거기다 일본 대표 도자기 브랜드인 노리타케도 나고야! 정말 놀랄 노짜다. 거기다 지금은 부럽지 않지만, 몇 년 전에 봤으면 분명 부러웠을 레고랜드도 있고. 




거기다 나고야메시?! 나고야메시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밥이 맛있다니!! 왜 난 몰랐을까^_T. 이런 단어가 만들어졌을 정도면 진짜 엄청 맛있다는 건데. 하. 미식 여행은 오사카가 아니라, 나고야로 가는게 맞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시작했다. 아, 나고야. 꼭 가고만다 내가!!



우리 뿡뿡이...친정 부모님께 맡기구, 신랑이랑 함 가봐?!....................흐..ㅋㅋㅋㅋㅋ 불가능하겠지만^^....




 



1. 나고야역 주변: 일본 중부 여행의 중심지. 나고야 근교로 향하는 열차 및 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백화점과 쇼핑몰 등이 모여있다.


2. 사카에: 나고야 제 1의 번화가. 나고야의 랜드마크인 중부전력 미라이타워와 오아시스21이 있고, 여러 맛집이 밀집해있다.


3. 오스: 오감만족 상점가. 서브컬쳐의 성지!


4. 나고야성 주변: 나고야의 역사적 유산. 나고야성과 도쿠가와 정원 등 역사적 명소가 즐비하다.


5. 나고야 남부: 가족 여행 인기 코스. 수족관, 유원지, 전망대 등 가족 여행지가 많다.


6. 도코나메: 옛 정취를 품은 도자기 마을. 8세기 후반부터 도자기 생산을 해온 곳으로, 오래된 가마와 굴뚝 등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7. 이누야마: 고성과 성하마을의 풍경.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이누야마 성이 이곳에 있다.


8. 구와나: 현지인들의 나들이 장소. 이곳에 있는 나가시마 리조트는 일본 각지에서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다.




나고야 여행 일정을 잡을 땐 위와 같아 8개의 구역으로 나눠서 일정을 계획하면, 보다 합리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내가 눈독 들이고 있는 지역은 사카에, 나고야성 주변, 나고야 남부 세 곳!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누야마도 포함하면 좋고. 




위 나고야 지도를 보면서 눈대중으로 대충 3박 4일 여행일정을 계획한다고 치면 첫 날은 나고야역 주변과 사카에, 둘째 날은 나고야 성 주변, 셋째 날은 이누야먀(개인)or나고야 남부(가족), 넷째 날은 대충 카페 들렀다가 공항으로 슝! 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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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New 다이제스트 100 시리즈 4
김은식 지음 / 가람기획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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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국현대사 책을 읽었다. 뭐 따지고 보면 현대사에서 중요한 일부 사건들을 다루는 책들은 종종 읽긴 했지만, 이렇게 시간대별로 진행되는 현대사를 통으로 다루는 건 오랜만이다. 무엇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내 가치관과 이토록 부합하는 현대사책을 읽은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역사책 집필자(또는 교육자)은 전문가 여부를 떠나서 우선 보수나 진보,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역사책을 집필하는 사람이 보수나 진보,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한 사건에 대한 ‘공, 과’를 이야기 함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공’만 다루거나, 반대로 ‘과’만 다루면서 본인과 같은 성향의 사람들에게 유리한 내용만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불리한 내용은 생략하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그리고 역사책 집필자(또는 교육자)는 기본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판적 시각이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겉으로 들어난 역사적 사건만 보고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그 사건의 이면에 있는 시대적 상황이라던가, 그로 인해 희생해야했던 사람들, 혹은 의도적으로 숨겨진 사건들을 직시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수많은 역사책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일부 역사책은 내 가치관과 100% 어긋나는 역사책들도 있었다. 예컨대 유사사학자라던가, 이념 또는 사상에 치우쳐서 한 쪽만 바라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특히 한국현대사 부분은 더 심각하다.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는 유독 이념/사상 갈등으로 인하여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문제는 이념/사상 갈등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놈의 진보와 보수 진영을 나눠서, 옳든 싫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는 한국현대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렇게 역사책에 대한 내 생각을 길게 써내린 이유는 단 하나다. 이 역사책 『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100』 에 실려있는 모든 내용은 진보나 보수 어느 한 쪽에 치우쳐있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성향을 가지고 있던 대통령이건, 보수성향을 가지고 있던 대통령이건, 잘한건 잘했고 못한건 못한거라고 아주 따끔하게 이야기 한다. 




다만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업적을 보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 12대 대통령 전두환까지 억압과 폭력, 반칙과 독재가 대다수인지라, 솔직히 책 읽는 내내 고구마 오백만개 먹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폭력적인 독재를 하는 동안에 잘한 것도 분명히 있었다. 독재자인 그들이 국민을 생각해서 잘했다기 보다는, 본인들이 이득을 위해서, 또는 미국(또는 전 세계)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이유야 어쨌든 국민에게는 이득으로 돌아온 업적도 있다는 점은 눈 여겨볼만 하다.



반대로 오롯이 국민들이 직접 뽑은 13대 대통령 노태우부터 19대 대통령 박근혜까지 재임기간에도 고구마 오백만게 먹은 듯한 행태가 계속해서 나온건 역사의 모순이라면 모순일까. 아니면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에 그렇게 되는 것일까. 뭐 여튼 그들에게도 ‘공’과 ‘과’가 모두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역시 그들이 의도한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는, 한국사에 대한 체계를 잡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도 너무나 추천하고 싶다. 



지금도 인터넷 곳곳에는 이념/사상에 사로잡혀 온갖 근거없는 소문과 끊임없는 날조로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이들의 사탕발림에 현혹되어, 우리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기 전에, 이 책으로 하여금 제대로 된 현대사를 알려주었으면 한다.



아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그리고 과거의 일임에도 현재까지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미군정


해방을 맞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당연히 정부를 구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도가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여운형에게 행정권 인수를 제안했고 여운형이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조선총독부가 정권을 인계할 대상으로 여운형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여운형은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난립하며 격렬하게 갈등하고 있던 당시의 이념적 흐름 속에서도 좌익과 우익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와 협업했던 실용적인 중도파로서 뛰어난 소통능력과 중재능력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p 016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까지 약 20여일간, 조선총독부에게 직접 행정권을 이양 받아서 한반도의 행정과 치안등을 도맡아서 관리하며 그 어떤 공백이나 혼란을 피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이었다는 사실을 난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왜? 내가 학교에서 한국근현대사를 배울 땐 이런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 때 배웠던 내용은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왔고, 미군정은 해외에 있던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했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우리나라 독립에 대해 대비하고 있었다’ 이 정도였다. 



놀랍게도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있었고, 일본이 빠져나가고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20여일간 충분히 국가 체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여 건준위에게 이양되었던 행정권을 미군정이 가지고 왔다. 자기들이 남한을 관리하겠다며. 



하지만 우리가 모두 다 아는 사실은 미군정 치하의 남한 사람들에겐 일제강점기와 다름 없는 지옥이었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요직을 차지하던 친일파들은, 미군정에서도 요직을 차지했고, 공출도 지속되었으니까. 그 여파로 곳곳에서 여러 항쟁이 일어났고, 제주4.3도 일련의 과정에서 일어난 항쟁이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경제문제에 대한 무능력이었다. 전쟁 말기 일본이 마구잡이로 발행한 막대한 통화량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심화된 상황에서 기업들을 움직이던 일본인 경영자와 기술자들이 귀환하고, 일본제국의 전체 영역으로 이어져있던 원료공급망과 소비망이 38도선 이남 지역으로 축소되어버리면서 산업 전반이 마히상태에 이른 것이 해방 직후의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하지만 미군정은 기업들을 재가동하거나 수요와 공급이 모두 급격히 축소된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p 019



물론 군정 당국도 좀더 나은 행정적 성과를 거두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한국인들과 소통을 위한 시도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들’을 찾아서 자문을 구하고 역할을 맡기는 쉬운 방식이었고, 친일적인 지식인들의 입장에 기울어진 관점과 인식을 가지게 되는 문제로 연결되었다. 식민통치 기간에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모두 친일파였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들이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대해 덜 비판적이고 대중의 문노와 요구에 대해서는 덜 민감했던 것이 당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미군 인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각 지역의 치안유지를 위해 일본 순사 출신들을 그대로 채용해 경찰로 활용한 것은 그런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가장 큰 대중의 반감을 산 요인이 되기도 했다. p 020



제대로 통치를 하지 못할거였으면, 다시 건준위에게 행정권을 넘겼으면 좋았을것을. 미군정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남한을 통치하면 좋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기에, 그 욕심으로 인한 피해는 남한의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합의 내용이 국내로 전해진 것은 회의가 끝난 다음 날인 12월 27일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내용은 사실과 미묘하게 달랐는데,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소련이 반대하고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몇 년 간 꾸준히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도 미국이고 신탁통치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보도된 셈이기도 했다. 또한 신탁통치가 이미 실시되고 있던 군정통치보다 억압적이거나 더 지속적인 것이라고 볼 이유도 없었고, 그것이 독립과 대비되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한다고 전해진 이상 ‘즉시 독립’에 찬성하고, ‘신탁통치’에반대하는 것이 대충의 일반적인 정서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동시에 ‘소련 반대’로까지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p 023



며칠 뒤인 1946년 1월 2일에 회의의 결과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접한 좌익 계열이 ‘모스크바 3상 회의 지지’로 돌아서자 상황이 급변했다. 미군정의 눈치를 보면서 입장표명에 소극적이던 이승만이 오히려 ‘반탁’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좌익과의 대립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김구와 이승만이 한 목소리를 외친 ‘반탁’은 대중을 격동시켰고, 분노한 군중은 ‘3상회의 결정 지지’를 표명한 정치인들에게 테러 공격을 가하거나 그런 논조를 보인 언론사 건물을 파괴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분위기에서 자초지종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했고, ‘반탁’을 외쳐야만 애국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p 024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또 다른 사실 하나 더, 바로 ‘모스크바 3상 회의’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해 당연히 배웠고, 미국이 독립을 이야기했으며 그에 따라 우익진영은 반탁을 주장했다는 것도 당연히 배웠다. 그런데 그건 결과만 배운 것이었을뿐, 알맹이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실제로 신탁통치를 오랫동안 주장한 건 미국이었다는 것과,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한 내용이 한반도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신탁통치라고 해서 일제강점기마냥 폭력적인것도 아니었다는 것. 내가 배웠던 학교 근현대사 교육에선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던 것이다. 



다시금 느낀다. 역사를 교육하는 사람이나 교육받는 사람은 항상 역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야만 크나큰 역사적 사건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드러난다는 것을.



이승만 정권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노덕술 등 경찰 실력자들의 힘이 필요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다섯 차례에 걸쳐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고, 이승만 일파에 의해 동원된 군중들은 ‘빨갱이 반민특위를 해체하라’고 연일 데모를 벌였다. 그리고 이에 힘을 얻은 경찰은 마침내 1949년 6월 6일 서울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80명의 무장한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해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 미군정이 치안 유지를 위해 건국준비위원회의 보안대를 해산하고 대신 일본 경찰조직에서 일해온 한국인들을 다시 기용한 이래 경찰은 식민지기 순사로서 활동했던 이들이 완전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반민특위는 직접적인 위협이었으며, 대통령의 뜻을 확인한 순간부터 과감하게 실력행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p 039



이승만이 마지막으로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국군 특무대와 경찰의 힘이었다. 전쟁은 군과 경찰의 힘을 키우는 배경이 됐고, 이승만은 그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는 데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승만은 원외 세력인 자유당 조직과 정치깡패들까지 동원해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데모와 소요사태를 벌였고, 지리산 빨치산이 임시 수도 부산까지 잠임했다는 거짓 정보를 근거로 부산과 경남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개헌투표가 이로어지기로 되어있던 1952년 5월 26일 주로 이승만에 반대하던 국회의원 50여 명이 타고 있던 통근버스를 통째로 헌병대로 연행한 다음 그 중 10명에게 ‘국제공산당 관련자’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시켜버리는 폭거를 저질렸다. (부산정치파동) p 055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 터지자 전국의 형무소에 수용되어있던 정치범들과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관리하던 좌익 활동 전력자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북한의 편에 설 것을 우려워했기 때문이지만, 그 강도가 강해지고 범위가 넓어지면서 학살행위는 단순한 보복이거나 분풀이, 혹은 정권의 실정 은폐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능함과 비겁함과 잔혹함에 대해 이승만과 그 정부는 단 한 번도 반성을 하거나 사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전쟁과 그로 인해 고착회된 분단체제를 핑계 삼아 자신에게 도전하는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워 핍박하는 일을 반복했다. 심지어 그의 정부에서 장관으로 함께 일했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서 죽이고 진보당을 해산해버린 1956년의 일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승만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갔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p 053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별다른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늘 민심 이반이라는 현실에 마주하면서도 전쟁과 냉전, 그리고 그것을 활용한 반공주의와 친일경찰과 정치깡패와 부패한 정치인들을 활용하는 노회한 용인술과 그들을 통한 과감한 폭력의 활용을 통해 정권을 연장해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매 순간 숨죽이고 굴복하며 그의 폭거를 용인하는 것처럼 보였던 국민의 불만은 차근차근 누적되어왔고, 그것이 폭발한 시점이 바로 1960년 4월 19일이었던 것이다. p 077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권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하, 고구마 오백만개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이승만이 저지른 수많은 불법과 반칙,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불법과 반칙, 폭력과 살인은 계속되었다. 권력 강화를 위해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조봉암을 죽이고 진보당을 해산시켰으며, 한국전쟁 전후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럼에도 그가 오랜기간 독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고난 ‘운’과 ‘타이밍’.



그가 이룬 제일 큰 업적,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제일 큰 업적은 바로 ‘빨갱이/간첩’이 아닐까?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죄다 ‘빨갱이’, ‘간첩’으로 몰아붙여서 죽이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선 군/경찰 요직의 힘이 필요했는데, 그곳엔 친일매국노 출신의 군/경찰 간부들이 즐비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그들과 결탁하면서 친일매국노들을 우익, 친미로 묶어서 흔히 말하는 ‘내 편’으로 만들었다. 자기를 비롯하여, 친일매국노 출신인 내 편을 건드리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빨갱이’가 되어버린 것. 반민특위 해체가 바로 이같은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이로인해 끝끝내 우리는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우리는 친일청산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흔히들 ‘보수당’이라고 일컫는 지금의 정치가들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을 향해 ‘빨갱이’라고 지적질한다. 이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만들어낸 아주 뿌리 깊은 전통이다(놀랍게도 보수당에는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이 있음^^). 이거보다 더 큰 이승만의 업적이 있을까? 




 


 



과거지만 현재를 관통하는 한국현대사


이 책을 읽다보면, 분명 지금으로부터 길게는 60년 짧게는 2~30년 전에 일어난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는 것들이 꽤 있다. 아니, 생각보다 많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친일청산’의 요구가 빈번이 ‘반공’이라는 프레임에 막히게 되는, 숱하게 반복되어온 한국사의 도돌이표가 시작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친일파들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은 좌절되었지만, 그 이후 여러가지 방식으로 되풀이된 상징적 저벌과 심판과 역사적 평가의 시도조차 늘 ‘용공세력의 음해’라거나 ‘반공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는 시대착오적 명분론’ 등의 궤변에 가로막히곤 했다. 그것은 물론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는 현재진행형의 상황이기도 하다. p 040


위에서도 언급했던, 반민특위 실패로 인한 친일파 청산 실패와 빨갱이 공격. 흔히 말하는 북풍의 시작. 지금이야 조금은 북풍의 영향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북풍을 부르짖는 자칭 보수들이 무수히 많다.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당시 한국과 일본, 미국 정부는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은 경제개발자금을 얻었고 일본은 한국 시장 개척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미국은 냉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동아시아 안보 거점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전히 식민통치의 기억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떤 당대의 한국인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특히 징용과 징병, 종군위안부 등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었던 이들과 유족들은 애매하게 마무리된 청구권 협상으로 인해 일본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사과와 보상을 받을 길을 잃었다. 독도를 비롯한 영토와 영해, 그리고 어업권 관련 분쟁의 씨앗을 남긴것도 문제였다. p 108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 ‘철거’란 가장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폭력적인 사회적 압력으로 인식되며 여러 영화와 드라마, 만화 등을 통해 재현되기도 한다. 그런 역사의 출발점에 와우아파트와 광주대단지사건이라는 대안이 최악의 방식으로 실패한 역사와, 그 이후 손을 놓다시피한 정부의 무책임이 있다. 또한 광주대단지사건은 조직되지 못한 분노가 사회적인 악영향을 가져온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책의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폭력적이고 졸속한 면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저항을 전개함으로써 그것을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나은 정책으로의 전환이 아닌 ‘무대책’으로의 전환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p 133



8.3사채동결조치의 효과는 경제성장률이 1972년 7.2%에서 73년 14.8%로 늘어남으로써 나타났다. 하지만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 기업들의 빚을 탕감해준 그 조치의 정당성에 대한 이견은 묵살되면서 서민들은 무력감을 다시 한 번 곱씹었고, 기업인들은 ‘벌여놓으면 언젠가 정부가 해결해준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많은 대기업들이 그 시점을 계기로 자리를 잡았으며, 한국 고도산업화의 주요 병폐로 꼽히는 대부분의 문제점들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 역시 그 무렵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설계하고 주도한 산업화와 경제성장 과정에서 여러가지 공과 과를 찾을 수 있겠지만, 8.3조치는 그것이 의도되고 작동되고 누군가의 희생을 가용해돈 과정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p 140



박정희 정권 때 있었던 한일국교 정상화, 이른바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엄청난 족쇄를 채웠다. 뭐 이건 두 말하면 입아프다. 박근혜 정권 때도 제 2의 한일기본조약 비스므리하게 위안부 밀실협상을 하기도 했었다. 문재인 정권 때 협상을 파기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외에도 징용, 징병문제도 동일하다. 



과거 ‘경제살리기’를 위해 한일기본조약을 맺었던 박정희 정권과 ‘미래’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낮은자세로 다가서는 윤석열 정부.


박정희 정권은 경제를 완벽히 살렸다. 대신 대일관계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커다란 족쇄를 채웠다. 미래를 선택한 윤석열 정부의 선택은, 과연 미래의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지금의 선택이 정말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선택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철거’가 가진 폭력적인 모습이나, 대기업들이 고도성장의 과정에 있었던 정권의 강압과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 이 역시도 우리가 꼭 배워야 할 현대사다. 생략할 역사가 아니라.



야권을 대표하는 두 후보인 김영삼은 부산과 경남, 김대중은 호남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공주 출신인 김종필은 충청권에서, 그리고 대구 출신인 노태우는 대구와 경북권에서 맣은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각 후보들이 자신의 지지기반에서 벌이는 유세에는 경쟁적으로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 열광적인 반응을 보냈지만, 다른 후보의 유세때는 종종 돌멩이가 날아들어 아수라장으로 변하곤 했다. 이 선거에서 노출되었던 그런 지역간 충돌 양상은 이후 한동한 한국 정치에서 지역 변수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p 212



3당 합당을 통해 새로 만들어진 당의 이름은 민주자유당이 되었으며, 노태우 대통령이 당 총재를 밭고 대표최고위원은 김영삼이, 최고위원은 김종필과 박태준기 각각 맡았다. 합당에 참여한 3당의 의석수는 220석에 가까웠기 때문에 언제든지 개헌을 할 수 있었고 조만간 내각제로 개헌하기로 합의한 뒤 각서를 작성하기도 했지만, 결국 대통령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기 원했던 김영삼에 의해 그 합의는 무산되게 되었다. (…) 3당 합당은 1990년대부터 최소한 2000년대까지 한국 정치의 기본적인 구도를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후 호남의 야당과 비호남의 여당이라는 구도가 자리 잡았고, 그런 왜곡된 구도 위에 거대 여당과 소규모 야당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3당 합당의 결과물민 민주자유당은 합당과 재창당, 당명변경 등의 과정을 거치며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으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2023년 현재 국민의 힘으로 이어지고 있다. p 236~238



지금의 지역갈등과 현재의 여당/야당이 자리잡은 계기도 전두환 정권에서 만들어졌다. 따지고보면 이승만 정권까지 거슬러 갔을 때 국민의 힘이나 민주당이나, 그 뿌리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긴 한데, 뭐 여튼. 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게 그놈이고, 매번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며, 내로남불 오지는건 똑같으니, 내 눈엔 다 같은 놈들이라는 생각만 든다.



국민을 위한 진정한 국회의원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듯. 특히 이름 난 정치인들은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7.4남북공동성명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 보수주의와 반공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에 의해 주도되고 공언된 원칙인만큼 ‘자주적 평화통일’은 누구도 부정하거나 후퇴시킬 수 없는 고정된 원칙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무력통일을 주장하는 의미 있는 세력이 등장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p 137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도 꼭 배우는 내용 중 하나인 7.4남북공동성명. 이 이후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유로 남한과 북한에서 기나긴 독재가 시작되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뭐 결과야 어찌되었든, 보수의 상징이라는 박정희 정권에서 나온 7.4남북공동성명은 진보, 보수 그 어느 쪽에서도 흠집을 낼 수 없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은 군사정변을 통해 등장한 군인들을 제외하면, 역대 대통령 중 갖아 대중에게 덜 알려진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이력은 대중의 관심사와 동떨어진 검찰 조직 내에서 쌓았고, 국정감사장에서 했던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발언을 통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 불과 10년이 되기 전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그는 국회의원 선거를 비롯한 어떤 선거에도 나선 적이 없었고, 따라서 대중과 여론의 검증대에 선 경험도 없었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이미지’,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 있던 민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을 기반으로 선택했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취임 직후부터 그에 대한 실망감이 표출된 배경이었는데, 애초에 국민들은 윤석열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당선은 한국 정치가 가진 몇 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경우에 따라 정치 신인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유동성이 작용하고 있으며, 대중의 판단도 이념적으로 고착회되어있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하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97년에야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었던 한국 정치는 30년 도 채 지나기 전에 ‘어떤 정치 세력도 안심할 수 없는’ 치열한 정치적 경쟁의 무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p 413~414



역대 모든 정권에는 ‘공’과 ‘과’가 있었다. 물론 아주 탁월하게 ‘과’가 많은 정권도 있었지만. 지금 정권부터는 모쪼록 ‘과’보다는 ‘공’이 훨씬 많은 업적을 이뤄냈으면 좋겠다. 이 나라는, 장차 내 딸이 살아갈 터전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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