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 - 『일본서기』의 허상과 실상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5
이재석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한일고대사, 내 독서 취향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이다. 한일고대사에 빠져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나라 고대사는 중/근대사에 비해 사료가 현저하게 적어서, 많은 부분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사료가 적어서 그런지, 이 분야 서적자체도 정말 흔치 않다. 더군다나 일반인을 상대로하는 한일고대사 교양서적은 뭐랄까, 대부분이 겉만 핥은 답사기에 그친다(실제로 관련 교양서는 거의 다 읽음). 나는 정말 깊이 있는 내용을 읽고 싶은데, 내 욕구를 채울만한 책은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다는게 슬플 뿐이다. 그나마 손에 꼽을 만한 책들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오늘 리뷰를 쓸 「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 : 『일본서기』의 허상과 실상」 이 책은 내 욕구를 채워준 정말 손에 꼽을만한 책 중 하나이다.



우리에게 고대사를 보여주는 (정사)역사서라곤 『삼국사기』에 그친다. 그마저도 당대에 쓰여진 역사서가 아닌, 고려시대 즉 중세에 편찬된 역사서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는 중세인들의 관점에서 고대사를 정리한 내용이기에, 실제 고대인들의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삶을 살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려시대에 편찬된 야사인 『삼국유사』도 동일하다). 『삼국사기』처럼 중세인이 쓴 고대사는 오롯이 중세인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작성되었기에, 중세인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삭제되거나 혹은 중세인의 언어로 다시 쓰여진다. 



기원전 660년부터 시작한다고 설정하여 697년까지 약 1350년간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여 이를 720년에 완성했는데 그 과정을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아마도 7세기, 즉 600년대의 역사는 『일본서기』에서도 가장 ‘현대사’에 해당하며, 당시 편찬자 입장에서 보아도 자신의 당대 또는 부친이나 조부 세대의 역사이므로, 비교적 기억도 선명하고, 역사 기술에 참고할 자료도 잘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시대의 역사는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물론 그렇다고 하여 6~7세기의 서술이 모두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이 실존 인물이라고 해도 특수 목적에 따라 왜곡, 윤색해 기술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적’의 의미는 이전 시기의 전승적 차원의 기술 부분에 비해 그나마 6세기 이후는 전승 속의 인물이 아닌 실존했던 인물이나 사건이 기사에 반영되어 있을 확율이 높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p 050 ~ 052



하지만 일본에는 고대에 쓰여진 역사서가 있다. 바로  『일본서기』다. 그러니까, 고대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당대에 기록으로 남겼다는 이야기다(720년 편찬). 그 내용의 사실유무를 차치하고서라도, 『일본서기』는 고대인들이 당대에, 고대인의 가치관으로 쓴 역사서이기에, 고대인들이 어떤 삶을 영위했는지, 왜곡되지 않는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대인 스스로가 왜곡을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대인 스스로가 왜곡을 한 부분은, 그 왜곡에서 왜 해야만 했는지 사회상을 찾아 볼 수 있는 또다른 사료가 된다.



이렇든 저렇든 『일본서기』 는 분명 당대에 집필된 역사서지만, 집필 목적이 그저 역사를 후대에 알려주기 위함은 아니다. 오로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해서,천황가가 일본을 통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서술한 역사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집필은 천황가 주도하였다.



『일본서기』 속 일본 역사의 전개과정은 신화의 세계와 인간 지상의 세계로 구분되어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 일본의 국토와 여러 신이 탄생하였으며 그 뒤에 비로소 지상(일본열도)에서 천황이 일본을 건국해 지배하기 시작한 인간의 역사가 이어져 갔다는 것이다. (…중략…) 그럼 왜 일본의 역사가 신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고 설정된 것일까? 그것은 일본을 건국하고 천황으로서 통치하기 시작하는 천황가가 바로 하늘의 천상계에서 내려온 천손의 후손이라고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p 042



『일본서기』 는 오로지 천황제 이데올로기 성립을 목적으로 하기에, 지금 천황가는 신의 자식이라는 ‘천손강림’ 사상을 주입했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누가봐도 허구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다. 근데 이걸 또 마냥 허구라고 손가락질 하기에는 우리나라 역사에도 환웅의 자손 단군이나, 해모수의 자손 고주몽 등 ‘천손강림’ 사상이 꽤 많다. 다만 우리 역사의 경우에는 이런 천손강림 사상을 ‘전설’이나 ‘신화’의 형태로 고착화시켰다면, 일본은 말그대로 ‘역사’화 시켰다는 점이 문제랄까(그래서 일본은 아직도 자국내 일왕을 신의 자손이라고 하지않나).



여기서 문제는 『일본서기』 는 시작부터 신이 나오다보니, 일본의 건국을 기원전으로 설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나온 건국연대가 기원전 660년. 왜 기원전 660년인지는 당대 중국의 참위사상등이 반영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책에 있으니 각설. 여튼 기원전 660년부터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써야하다보니, 자연스레 초대천황(기원전 660년) ~ 9대 천황(기원전 98년) 까지는 시간상 끼워맞춘 허구의 인물이며,  『일본서기』에도 주요한 내용은 없다. 



시간상의 이유만으로 초대 천황~9대 천황을 허구라고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천황’이라는 명칭은 7세기 후반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니, 7세기 이전, 그것도 기원전에 사용했을리가 만무하다. 거기다 초대~9대는 거의 부자계승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고대는 형제계승이 기본이었다. 부자계승이 고착화 된건 7세기 후반이 지나서다. 뿐만아니라 이들 천황의 명칭도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속속들이 나온다.



일본은 석기시대에서 곧장 청동기+철기의 혼용 시대로 이행하였으므로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이러한 특이성은 일본 열도 내부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식 문화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농경과 철기 문화 단계의 금속에 익숙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함으로써 그러한 문화가 전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주역은 한반도 사람들이었다. p 064



농경과 금속문화로 상징되는 야요이 문화는 당시 일본열도 최고의 선진 문화였으며 이것이 사회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야요이 문화를 주도한다는 것은 곧 일본열도의 패권을 장악할 가능성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서일본 지역이 이러한 우위성을 갖게 된 것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부터 문물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p 068



대부분의 문명은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를 거쳐 철기시대를 맞이한다. 우리나라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예외인 나라가 있으니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세계 여러 나라들이 청동기에 도입했을때도, 석기시대를 유지했다. 4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외래 문화가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환경적 문제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대 한반도인이 청동기+철기문화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은 세계사적으로는 유래없는, 신석기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건너뛰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으니, 바로 한반도 도래인의 이동경로다. 왜 중요하냐하면, 한반도 도래인의 이동경로에 따라 일본열도의 발달(정치/경제부흥?)이 진행됬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뱃길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은 규슈를 향하는 길이다. 도래인들은 그 길을 따라 도래하여 규슈를 향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와 맞물려 규슈에서 야마타이국(소국 또는 연합국)이 성립되었다.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이 가야의 왕족이라고 말하는 연구자들도 있고, 가야와 관련된 지명이나, ‘캇파(=가랏파)’같은 단어들이 남아있는 만큼, 규슈 일대는 한반도 가야계 도래인과 관련이 크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만하다(사족이지만 천황가의 시조가 야마타이국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여튼, 야마타이국이  점차 세력을 키워 기나이(現 칸사이)로 넘어갔든, 혹은 다른 세력에 흡수되어 기나이로 넘어갔든, 확실한건 대체적으로 한반도 도래인은 규슈를 시작으로 점차 기나이 지역로 넘어갔다고 보는 사실이다.



반면 정치세력이 밀집했던 규슈나 기나이와 멀리 떨어져있던 관동쪽은 발달의 속도가 더뎠다. 실제로 관동은 고대국가가 해체되고나서도, 중세를 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장악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現 도쿄)를 건설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메이지유신을 지나 교토에 있던 천황가도 도쿄로 넘어오면서, 일본의 수도로 유래없는 경제발달을 맞이했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와 응신청황기의 한일관계 기사의 연대는 대게 2주갑(120년)을 더해보면 『삼국사기』의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므로…. p 086



무령왕 시기를 포함해 6세기의 왜국 관계는 주로 『일본서기』의 기사를 통해 엿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현존하는 한국의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내용이 『일본서기』에 집중적으로 수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무령왕과 성왕의 치세기간에 해당하는 왜국의 계체천황~흠명천황 기간의 『일본서기』 기술내용은 그 상당수가 백제를 위시한 한반도 관계기사로 채워져 있어 『일본서기』 안에서도 특히 계체/흠명천황기는 백제의 역사서를 보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p 148



하지만 굳이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고작 일본역사를 알고자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것일까? 그건 전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 고대사가 『일본서기』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백제사! 특히 계체천황(게이타이)~흠명천황(긴메이)의 기사내용은 내가 백제사를 읽는건지 일본사를 읽는건지 헷갈릴 정도로, 백제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만큼 『일본서기』에는 우리가 모르던 한국 고대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예컨데 국사시간에 배웠던, 일본에 각종 문물을 전해준 “왕인박사, 오경박사, 노리사차계 등”은 우리나라 역사서가 아니라, 『일본서기』에 나타난 인물들이다. 즉, 우리 역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던 인물을 일본 역사서에서 찾아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백제 왕릉 중 유일하게 누구의 무덤인지 비정된 왕릉, “무령왕릉”도 그렇다.



※사료14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461) 4월조


백제의 가수리군<개로왕> 은 지진원<적계여랑>을 태워 죽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협의하여 “옛적에 여인을 바쳐 채녀로 하였다. 그런데 무래하여 우리나라의 이름을 떨어뜨렸다. 지금부터 여인을 바치지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우 군군<곤지>에게 고하여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라고 말하였다. 곤곤이 대답하여 “상군의 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 원컨대 君의 부인을 주시고 그런 후에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 “내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 출산하면 부디 한 배에 태워서 어디에 있든지 속히 우리나라로 돌려보내라”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헤어져 (일본)조정에 보냈다. 6월 병술삭 임신한 부인은 과연 가수리군의 말대로 쓰쿠시의 가카라시마에서 출산하였다. 이에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島君)이라 하였다.



위는 이 책에 삽입되어 있는 『일본서기』 웅략천황(유랴쿠)의 기사다. 요약하면 개로왕이 만삭인 자기 부인을 아우인 곤지와 함께 배를 태워 일본으로 보냈는데, 만삭인 부인이 가카라시마에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의 이름이 도군(島君)이라는 점이다. 뒷 이야기는 생략했지만, 이 아이는 다시 배를 태워 백제로 보내지고, 백제의 왕이 되는데 그가 바로 무령왕이다.



이번에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묘지석을 보자. 그 묘지석에는 “묘지의 주인은 백제 사마왕(斯麻王)”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백제 사마왕. 이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고대에 ‘사마(斯麻)’ 의 ‘사(斯)’는 ‘시’라고 읽혔다. 즉 ‘사마’를 ‘시마’로 읽었다는 이야기인데, 때마침 일본어에서 섬을 뜻하는 ‘시마’라는 말과 같다. 더 놀라운 사실은 위 웅략천황 기사에 나오는 ‘도’군의 한자가 섬을 뜻하는 도(섬 도; 島)이다. 일본어에서는 ‘섬 도; 島’를 ‘시마’로 읽는다. 즉 당시 백제에서는 섬을 두 음절 단어인 ‘시마’로 발음했고, 오늘날 일본어 섬을 뜻하는 시마와 그 어원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실제로 사가현에 속한 섬인 ‘가카라시마’에서는 옛부터 “먼 옛날 한 여인이 이곳에 와 샘물을 마시고 아기를 낳았다. 훗날 그 아기가 아주 귀한 사람이 되었다.” 라는 전설이 전승되고 있었다. 이후 한국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표지석이 나왔다(무령왕릉 발굴 당시 우리만큼 일본도 열렬한 관심을 보냈고, 취재열기도 대단했다). 무령왕릉 표지석과 『일본서기』 웅략천황 기사로 인해서, ‘가카라시마’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게 명확하게 밝혀졌다. 현재 가카라시마에는 ‘무령왕 탄생 전승지’라는 비석도 세워져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그럼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사실 이 부분도 난해하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하지만 어떤 사료에는 곤지의 아들, 또 어떤 사료에는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되어있다. 『삼국사기』는 동성왕의 둘째아들설을 취하고 있다.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인 점은 분명하고, 연령에서 볼 때 무령이 동성보다 연장자였음 또한 분명한데 그런 무령이 동성왕의 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무언가 전승의 과정에서 상당한 착오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p 120



물론 명확한 부분만 있는 건 아니다. 위 내용처럼 무령왕이 정확하게 누구의 아들인지,  왜 연장자인 무령보다 연하의 동성왕이 왜 먼저 즉위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전부 명확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고대사의 묘미는 빈 공간을 상상으로 채워넣는거라 생각하니까.




자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있어서  『일본서기』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았다. 뭐든지 비꼬아서 읽는 현재 일본의 입장에서, 우리에게는 탐탁치 않는 문제가 있으니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이야기의 출처도 역시  『일본서기』다.



※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49년(249) 3월조


아리타와케와 가가와케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 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괘에게<이 두사람은 그 성(性)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장군이다.> 정병을 이끌고 사백, 개로와 함꼐 가도록 명하였다. 함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부자와 아라타와케/목라근자 등이 의류촌에서 함께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치쿠마나가히코와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만년 영원토록 늘 서쪽 변국이라 칭하며 봄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치쿠마나가히코를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딸려서 보냈다. p 089~090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이 되는 사료다. 대충 요약하면 신공황후 군대가 가라 7국(가야 7국)을 평정했다는 이야기다. 현대 일본은 이 기사를 토대로 주구장창 임나일본부설을 말하며, 고대 한반도 도래인 덕택에 문명국이 되었다는 피해의식을 뒤집으려고 아주 노력을 노력을,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가 독도 문제에서도 잘 알듯, 일본이라는 나라는 글의 문맥과 당시의 상황을 확인하는게 아니라, 그저 글에 쓰여있는 글자 중 잘못쓰여진 한, 두글자를 잡아내어 꼬투리를 잡는데 아주 선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지배하려했던 그들에게, 신공황후 섭정기사는 ‘한반도 지배’에 대해 정당성을 확보하였고, 한반도를 상대로 우월감을 갖게하는 강력한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자세히 검토해보면 주어(행위의 주체)가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바로 여기에 기사의 비밀을 푸는 담서가 감추어져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따라서 목라근자 등을 파견한 주체도 응당 신공황후가 되어야한다. 흥미로운 점은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라고 특별히 주기가 붙어있다. 즉 목라근자를 파견한 사람은 신공황후가 아니라 백제 근초고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구저는 백제의 사신으로 이미 <사료11>에서도 나온 인물이며 사백/개로도 전형적인 백제인의 인명이지 왜인은 아니다. 또한 목라근자의 군대는 나중에 백제왕 부자가 이끄는 부대와 합류해 4읍의 항복을 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보면 상기 군사 행동은 백제군이 주체가 되어 움직인 작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p 091



하지만 우리나라 연구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면, 당연히 방어를 해야하는 것. 덕분에 우리나라 연구자들도  『일본서기』를 연구하고 또 연구하였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기사의 모순들! 예를 들어 백제식 이적 표현인 ‘남만 침미다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다. 결국 위 신공황후 섭정기사를 작성할 당시, 출처로 한 사료는 백제의 사료가 된다는 이야기다(한성백제 당시 신라를 남만;남쪽 오랑캐 으로 인식). 



결국 백제의 사료를 토대로 후대에 『일본서기』를 편찬 과정에서 신공황후 이야기가 뒤섞이며 저렇게 모순이 얽히고 얽혀버린 기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백제군의 활동이라는 전제하에 위 기사가 전부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이 역시도 의아한 점이 있다. 주어를 백제로 바꾸면 백제가 신라와 가라 7국을 평정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정말 백제가 신라와 가야를 평정했다면, 아무리 후대에 작성된 『삼국사기』라 한들 그 중요한 내용이 빠졌을리가 없을테니 말이다.



결국 이 기사는 목라근자를 비롯한 백제군이 신라와 가야7국 방면으로 진출했다는 정도로 보아야 하고, 요점은 왜의 활동이 아니라 백제의 활동이라는게 이 기사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 기술된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런 실체도 없는데 『일본서기』 편자가 무리하게 만든 가공의 존재일까? 아니면 어떠한 실체가 있었는데 그것을 『일본서기』가 임나지배의 기구인 양 임나일본부라고 명명하며 기술한것에 불과한것일까? p 169



현재는 『일본서기』를 비롯하여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 (일본 빼고)임나일본부를 대부분 외교 사신으로 보는 추세라고 한다. 



애초에 고대 사료가 많이 남아있었다면 일본이 저렇게까지 역사왜곡에 힘을 쓰지도 못할텐데, 이럴 땐 또 사료가 부족한 게 참으로 한스럽다. 한국 고대사는 우리의 역사임에도, 우리는 일본과 중국에 남은 사료를 토대로 연구를 해야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분명 우리의 역사임에도 말이다. 하다못해 건물터든, 제사터든 무언가의 흔적이라도 발견하여 연구를 하면 좋은데, 우리나라는 발견하는 족족 문화재보다는 아파트 단지를 짓고, 도로를 건설하는게 우선이라는게 현실이랄까? 실제 지금도 가야고분군이 있는 지역에서는, 태양광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가야 고분군이 말살될 위기에 처해있으니 말 다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사에 관심을 두는 거에 반에 반만이라도 고대사에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나 좋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밀리터리 세계사 1 - 고대편
이세환 지음, 정기문 감수 / 일라시온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무심코 TV채널을 위로 쭉죽 올렸는데, 국방TV라는 채널이 나왔다. 그리고 그 때 방송되고 있던 프로그램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교양 방송이라던가, KBS 특유의 역사다큐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근데 그렇다고 내용이 비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임용한 교수님이나 이세환기자, 허준MC, 윤지연 아나운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분명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완전 알맹이가 꽉꽉 들어찬게 아닌가. 정말 나름대로 역사 다큐를 비롯하여, 꽤 전문적인 방송도 나름 봐왔는데 뭐랄까, 이 프로그램은 정말 신박했다. 그 프로그램 덕분에 처음으로 국방tv 홈페이지를 들어갔고, 다시보기를 시청했다. 지금은 종영한 프로그램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대한 이야기다.



토전사를 처음 본 이후로 매주마다 챙겨보고, 주말 재방도 다 챙겨봤다. 토전사 덕분에 한국사 뿐만아니라, 정말 쥐약이었던 세계사까지도 머리속에 콕콕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정말 아주 갑자기 200회를 끝으로 종영하고 말았다. 그렇게 내가 사랑한 토전사 패널들 4명도 사라졌다. 그런데, 불과 얼마전 YTN에서 <토전사>와 아주아주 비슷한 프로그램이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방송국만 바뀌었지, 토전사 시즌2라고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이름은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정말 제목부터 토전사를 이은 느낌? 제일 중요한건 패널들이다. 토전사 패널이었떤 임용한 교수님과 이세환기자, 허준 MC가 고대로 돌아왔다. 윤지연 아나운서가 없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ㅜㅜ 무튼, 정말정말 볼 거 없으면 YTN뉴스만 주구장창 틀어놓던 내 쓸데없는 습관덕분에 얻어걸린 행운이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뭐냐하면, 이 책 「밀리터리 세계사」는 <토전사/전쟁과사람> 주요 패널인 이세환 기자님이 쓰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읽다보면 <토전사>를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  리더란?


최근 몇 주간 <토전사> 초반부를 다시 보고 있었다. 근데 때마침 그 내용들이 바로 서양전쟁사 고대편! 그리스-페르시아, 그리스 내전, 로마제국의 확대, 로마-카르타고 등등등. 정말 방송을 다시본지 얼마 안된 상황이었는데, 이 책 덕분에 제대로 복습한 느낌이랄까? 그래도 방송을 보는 것과, 책으로 다시 읽는 것에 차별점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라는 건 개뿔, <토전사> 보는 것 만큼이나 「밀리터리 세계사」 읽는 것도 흥미진진하고 재밌어서 그냥 폭 빠져서 빠르게 읽었다.



그럼에도 조금 짚어볼 점이 있다면, 역시 리더의 모습이랄까? 어떤 리더가 전쟁을 지휘하느냐에 따라 승리로 이끌거나, 혹은 패배로 이끌거나?!



“역사상 살라미스 해전만큼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시을 명백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그 불굴의 정신을 가질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을 냉정히 판단하고 미래에 대한 건전한 혜안을 가진 리더의 존재와 판단이다. 만약 테미스토클레스의 함대 건설론이 먹히지 않았다면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는 한낱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위기의 순간에 냉철한 판단을 할 줄 아는 리더의 존재는 모든 시대에 요구되지만, 항상 그런 리더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걸출한 리더는 항상 역사에서 귀하고 찬양받는 법이다. p 057



“아테네가 세지면 스파르타를 지원하고, 스파르타가 세지면 아테네를 지원해서 서로 지치게 만들어라. 그래야 페르시아에 이득이 된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바로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을 다시 아테네 쪽으로 돌려세우는 데 성공한다. 단 한명의 사나이가 에개해 모든 국가들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순간이다. p 075



전권을 잡은 옥타비아누스는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먼저 군제개편이 있었다. 카이사르나 안토니우스 몰락의 공통점은 사병제도에 있었다. (중략) 필연적으로 암살이나 배반 등의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폐지하고 국가상비군제도를 도입한다. 시민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군인들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상속세를 신설해 부자들이 낸 세금으로 군인에게 월급을 줌과 동시에, 군 전역 시 특별 보너스와 약간의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를 확립했다. p 232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를 격파시킨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 그리스/페르시아를 오가며 그 존재를 제대로 각인시킨 알키바데스, 그리고 세계사 시험에서 단골로 나오는 옥타비아누스까지. 어째서 그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어떻게 나라를 꾸려갈 수 있었는지, 리더란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대체 이런 리더들은 어디 살아있는건지, 왜 주변에는 없는건지 알수 없는 자괴감까지 ㅜㅜ..



어찌되었든 위대한 정복왕은 요절했고, 이후 마케도니아는 심한 분열끝에 별 볼 일 없는 나라로 전락한다. 정복왕이었으나 성군은 되지 못했던 알렉산드로스는 전사였지만 제국을 경영하는 경영자는 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정하는 곳마다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했고, 군사적 측면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전술은 모든 현대 전술의 교본이 될 정도로 시대를 앞서나간 혁신적인 것이었다. p 107



사실 카르타고의 문명은 찬란한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아파트도 카르타고에서 나왔고, 진흙과 조개껍질을 섞어 방수하는 방법도 카르타고가 원조였다. 이렇게 찬란했던 카르타고가 왜 정치나 외교, 그리고 전투에서는 로마에게 궁극적으로 패배했을까? 카르타고는 상업에 치중한 나머지 그 외의 성장은 지지부진했다. 특히 군사력을 지속해서 용병에 의존하는 매우 좋지 않는 정책을 고수했다. 뭐든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p 184



반면에 리더가 갖춰야할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리더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지도. 예컨데 정복왕 알렉산드로스는 전쟁은 탁월했으나, 정치는 잘 몰랐기에 그가 죽은 뒤 마케도니아는 대 제국이 되지 못하고 분열했다. 부자 나라 카르타고는 돈만 너무 믿은 나머지 몰락해버렸다. 마케도니아도 몰락하고, 카르타고도 몰락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로마가 꿰찼고, 로마는 대 제국이 되었다.



우리 회사를 포함하여 수 많은 기업체는 자사 직원들에게 ‘좋은 리더’가 되라며 수 많은 책을 읽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대체 좋은 리더란 무엇인가? 회사에서 말하는 책들을 읽으면, 좋은 리더가 가져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에게 이런 책을 읽고 좋은 리더가 되라고 하는 상위 직책자들은 과연 그런 책을 읽었을까? 본인들은 어떤 리더인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확실한 사실은 지금까지 내가 본 리더들은 ‘좋은 리더’는 아니었다. 오히려 책 속에 나온 조직을 망가뜨리는, 기업의 효율을 떨어트리는 리더들만 있었을뿐이다. 다만 그 사실을 본인들만 모를뿐!




2. 그 유명한 삼국지, 정사와 소설의 차이!


소설은 소설일 뿐, 위촉오의 진짜 역사는 위나라 다름 왕조인 사마씨의 진나라 시절, 역사가 진수가 쓴 <삼국지>에서 봐야한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엄청난 각색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 <삼국지>내용은 정사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p 238



또한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유비, 조조, 손권의 모습은 정사와는 많이 다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소설 <삼국지>는 셋을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묘사하는데 (중략). 예를들어 유비를 이야기해보자. 유비하면 덕으로 상징되기 때문에 소싯적부터 공부를 열심히 한 착한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정사에서 유비는 옷과 음악, 그리고 여자를 꽤나 좋아했던 사람이다. 또한 소설에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돗자리 짜는 청년으로 나오는데, 실상 유비네 집안은 지방 토호 수준은 되는 나름 중산층 집안이었다. p 244



소설에서 이들의 무기는 전문 무기 제작자의 손을 거친 무기가 아닌 동네 대장간에서 만든 것으로 묘사되는데, <삼국지연의>의 원작자 나관중은 진수의 <삼국지>에 주로 유랑극단의 연극 등에서 수집한 자료를 집대성해 소설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중국인 특유의 과도한 각색과 창작이 오히려 역사적 사실을 압도하며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각인된 것이다. p 249



내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은 바로 삼국지 부분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불과 2달전에 「설민석의 삼국지」를 읽고 정말 답답한 마음을 금치 못했었기 때문이다. 오죽 답답하면 리뷰조차 안했다. 리뷰를 쓰다보면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것이 자명하다보니. 하하. 그래서 삼국지에 대한 답답함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 책 「밀리터리 세계사」 덕분에 답답함이 뻥 뚫린 느낌이랄까?



 

<토전사>에서도 종종 삼국지 이야기가 나오면 임용한 교수님을 필두로 진수의 「삼국지(정사)」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소설)」가 얼마나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 나관중이 어떤 상상을 해서 썼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그도 그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삼국지는 정사가 아닌 소설 쪽 이야기다. 예를 들어 도원결의라던가, 뭐 그런 거? 한마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건 소설쪽인데, 그 소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즉, 역사왜곡! 



그런데!  이렇게 왜곡하는 행위를 설쌤의 삼국지가 그대로 답습한다. 물론 서문에서 본인이 인용한건 소설인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라고 명백하게 밝혀두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문일뿐이다. 제일 중요한 본문에 소설 삼국지 내용을 나열하고, 본인의 생각도 소설에 맞춰서 쓰셨기에. 하다못에 본문 중간 중간에 ‘정사 삼국지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라는 내용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내용조차 없었다. 덕분에 설쌤의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레 소설 삼국지를 정사로 인식하게 되어, 본인도 모르게 역사를 왜곡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분통이 터졌는지. 휴(이래뵈도 방송에서 역사를 널리 알려주는 설쌤을 좋아합니다. 물론 조미료를 많이 치시기는 하지만...).



그 답답한 마음을 이세환기자가 쓴 「밀리터리 세계사」가 뚫어주었다. 아주 뻥-!. 정사와 소설을 찬찬히 비교해주면서, 정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흑흑흑. 내가 원한건 바로 이런거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다음 편은 언제나오려나..........하 벌써부터 읽고싶다 ㅠㅠ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20-09-26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전사는 제가 설겆이할때 늘 동영상으로 봤던 최고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ytn에서 새로 하는군요 챙겨봐야겠네요.
그나저나 윤지연 아나운서 ㅠ.ㅠ 역사저널 진행 아나운서와 강지영 아나운서같이 정말 공부많이 하는 아나운서같아요^^
 
아름다운 사찰여행 - 인생에 쉼표가 필요하다면 산사로 가라
유철상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다운 “사찰”여행이라니, 간만에 내 취향에 꼭 맞는 책이 나왔다. 역시 상상출판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듯.



나에게 여행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취미이고, 그 여행에서 사찰 역시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내가 여행지를 수립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이 바로 사찰의 유무니까. 블로그에 있는 내 여행기만 봐도 사찰 답사기가 한가득이다. 그만큼 나에게 사찰여행은 내 여행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찰여행관련 책으로 일전에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산사순례』편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유홍준 교수의 책보다, 이 책이 훨씬 내 마음에 와닿았다. 왜일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사찰의 수가 훨씬 많아서? 아니, 그렇지 않다. 그저 순전히 내 주관적으로 보자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산사순례』는 매우 딱딱하다. 고지식하다고 해야할까? 전문가가 썼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반면 이 책, 『아름다운 사찰여행』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의 저자는 불교 전문가도 아니고, 미술 전문가도 아니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사랑하는 마음은 전문가 못지 않아서, 두 발로 뛰며 많은 문화유산을 만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 속에는 저자의 그런 마음이 곳곳에 흐른다. 꼭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보는 그 시선으로 사찰을 바라본 느낌이랄까? 거기다 사찰이 품고 있는 속 이야기까지. 이 책은 박종인 기자님의 책과 함께, 꽤 오랫동안 내 여행의 또다른 길라잡이가 될 것같다.



여행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펼쳐진 자연을 단순히 느끼고 즐기기만 하는 여행과 여행지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고 봐야 제대로 느끼는 여행. p 044



내 여행은 후자다. 단순히 자연을 느끼는 여행도 좋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여행지에 대한 배경지식을 사전에 알아야만 하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 역시 ‘알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라는 말에 오백프로 찬성. 그 덕분에 나는 사찰에 대한 공부도 조금은 했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일부러 사찰에 대한 공부를 하려고 한건 아니었다. 관광통역사 자격증을 딸 때 공부했던 것이, 어쩌다보니 사찰에 대한 부분도 조금 있었던 것 뿐이었다. 아니, 솔직히 꽤 많았다. 문화유산으로써의 사찰에 대한 것도 공부해야했고, 건축물로써의 사찰도 공부해야했다. 심지어 불교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그 결과, 취득한 관통사 자격증은 그저 취미로 딴 것이라 서랍속에 고이고이 넣어두었지만, 이 때 공부한 것들은 전부 내 여행의 뼈가 되고 살이 되었다. 덕분에 가족여행을 갈 때마다, 여행의 풍부함을 더해주는 가족 전담 여행 가이드가 되었달까?




과거 포스팅에서도 몇번 이야기한적이 있긴한데, 이 책 주체가 ‘사찰’여행이니만큼, 사찰을 가기 전에 이것 만큼은 알고 가면 좋겠다는 부분이 바로 법당 구분이다. 각 사찰마다 본존불로 모시는 부처님이 다르다. 쉽게 말하자면,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다 같은 부처님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각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들의 수인, 그러니까 손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선정인이나 항마촉지인을 맺고 계시는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천지인을 맺고 계시기도 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은 지권인을 맺고 있으며, 아미나부처님은 아미타여래구품인인 9가지 종류의 수인을 맺고 계신다. 약사여래부처님은 약함을 들고 계신다.



각기 다른 이런 부처님들이 계신 불당은, 부처님에 맞게 이름이 다 다른데 그걸 구분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이게 다 관통사 공부로 인해 얻어진 지식들이랄까).



-적멸보궁: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불상이 없다. (5대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평창 상원사, 영월 법흥사, 인제 봉정암, 정선 정암사)


-대웅전: 주로 석가불을 모신다.


-대적광전/화엄전/비로전: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극락전/무량수전: 아미타불을 모신다.


-약사전/유리광전: 약사여래를 모신다.


-미륵전/용화전: 미륵불을 모신다.


-천불전: 천분의 부처를 모신다.



반면 절에는 부처님이 중심이 아닌 보살이나, 가르침, 제자, 토속신앙을 중심으로한 법당도 있다.


​1) 보살 중심의 법당


-관음전/원통전: 관세음 보살을 모신다.


-지장전/명부전: 미륵불이 오기 전, 이 세상을 제도하는 지장보살을 모신다.



2) 가르침과 제자 중심


-영산전: 석가불이 설법하는 모습을 재현한 곳으로 좌우에 깨달은 부처 제자인 아라한이 함께 한다.


-팔상전: 팔상도를 그린 그림을 모셨다. 영산전에 팔상도를 모시는 경우도 있다.


-응진전/나한전: 16나한, 500나한을 모신다. 역시나 영산전과 비슷하다.


-대장전/장경각: 부처님 가르침에 해당하는 경전을 모신다. 간혹 불당을 조성하여 중앙에 비로자나불 또는 석가불을 모시기도 한다.


-조사전: 훌륭한 스님을 모신다.



3) 토속신앙 관련 법당


-칠성각/북두각: 별신앙과 약사신앙을 결합한 법당으로 북극성(치성광여래), 북두칠성(칠여래)를 모신다.


-독성각/천태각: 천태산에서 수행하는 나한을 모신다.


-산신각/산령각: 사찰이 있는 산의 신, 즉 산신을 모신다.


-삼성각: 위의 세 분을 모두 모신다.



아주 간혹 이 법칙에 안맞는 불당들이 나오긴한다. 유홍준 교수님의 말에 의하면 조선후기 불가의 율법을 등한시한 결과로 나타난 것들이라며. 그렇다고 한다. 아, 또 추가로 덧붙이면 사찰에는 3종류의 문이 있다(간혹 4종류가 될수도: 금강문이 있을 경우). 사찰의 정문인 일주문, 악귀를 막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 그리고 마지막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불이문. 불이문은 사찰에 따라 누각의 형태로 조성되기도 한다.




자 이제 책 본문으로 돌아와보면! 이 책에는 정말 많은 사찰들이 나온다. 내 나름대로는 정말 많은 사찰들을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와! 난 정말 새발의 피였구나. 아직 내 발길이 닿지 않은 사찰이 이 땅에 이렇게나 많다니.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반면에, 내가 갔다온 사찰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어느 절에서도 느낄 수 없는 장엄한 풍광을 거느리고 기억속에서 깨어난다. p 038



2018년, 봄. 아침 새벽같이 집에서 출발해 경북 영주 부석사에 도착했다. 부석사 안양루에 올라서서 풍광을 내려다보는데, 와. 진짜 책속의 문장 그대로 ‘장엄한 풍광’이 나를 반겼다.






아마 내 여행 인생을 통틀어서, 언제 또 이렇게 맑은 하늘에, 이렇게 녹음이 짙고, 이렇게 아름다운 연등이 수 놓인 풍광을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지금 우리 하늘은 1년에 반 이상이 중국발 미세먼지로 뒤 덮인 잿빛이니까. 그뿐인가? 중국발 어마무시한 역병이 전 세계를 휩쓸어 당장 집 앞에 있는 공원도 가기 거렵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책 속의 부석사편을 읽으며 그 날 보았던 부석사 풍광이 계속 눈 앞에 아른거렸다.




반면에 2017년 어느 겨울에 갔던 수덕사는 조금 달랐다. 수덕사에 가기전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대웅전이 있다는 것과, 근/현대에 이르러 세 여성(일엽스님, 화가 나혜석, 박귀희 여사)의 굴곡진 삶이 담겨있다는 정도 였다. 다만 여기서, 고려와 근/현대의 간극에 대해서는 생각치 않았다. 그런데 왠걸? 수덕사에 도착하니, 그 입구부터 각종 상업시설로 얼룩덜룩. 적어도 수덕사 입구는 내가 생각한 고즈넉한 사찰이 아니라, 자본에 쩌든(?)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나마 수덕사 대웅전 만큼은 내가 생각한 그대로의 모습이라, 나에게 조금 위안이 되었달까, 하하하. 



수덕사에 얽힌 전설도 재미있다. 백제시대에 창건헤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세월 동안 수덕사는 퇴락이 심해 중창 불사를 해야했으나 당시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 공양주를 하겠다고 청하였다. 여인의 미모가 워낙 뺴어나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인근에 소문이 퍼지면서 여인을 구경하러 온 이들로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중략) p 106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수덕사에 얽힌 전설을 모르고 있었다. 수덕사는 부석사의 선묘낭자 처럼, 수덕각시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었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난 평생 몰랐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그렇게 또 책을 읽다가 눈에 딱 걸리는 구절이 나왔다. 과거 모든 이의 수학여행지였던 경주 불국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불국사를 떠올리면 대부분 수학여행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수학여행 때 만난 불국사와 오로지 여행으로 찾은 불국사는 천지차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궁궐의 건축양식의 불국토의 이상향을 재현한 불국사는 정말 볼수록 신기하고 감탄사가 나오는 사찰이다. p 346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전, 코흘리개 꼬마시절 초등학교 수학여행으로 갔던 경주 불국사. 솔직히 그때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그저 졸업사진을 찍는 것? 나에게 경주 불국사는 그랬다. 하지만 그 이후, 꽤 오랜시간이 흘렀고 내 여행 취향이 어느정도 자리잡힌 뒤. 나는 경주 불국사를 다시 찾았다.






다시 찾은 불국사는 그 때와 달랐다. 장소는 동일한데, 왜 그 의미가 달랐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때와 머릿속에 든 지식차이와 사찰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게 첫번째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시간 만큼, 내가 느끼고 싶은 만큼 이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게 두번째 이유랄까? 이번 연말이나 그즈음, 역병이 조금 잠잠해지면 경주를 다시 가볼까 싶다. 5년 전이랑 지금, 내 머리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경험의 차이가 분명히 있을테니, 아마 이 차이가 불국사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또 한번 바꾸어 놓았으리라 생각해보면서.




그렇게 책을 다 읽어갈 즈음에 나온 사찰이 화순 운주사였다. 운주사는 내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 사찰이었다.



운주사 일주문을 통과하면 미지의 세계에 온 것처럼 낮선 풍경들이 펼쳐진다. 아니 소박하면서도 독특하다고 해야 될까? 운주사의 돌부처들을 보면 세련된 불탑에서 보아 오던 근엄한 표정은 도무지 찾아볼 수 조차 없다. 이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매력이다. p 378



어렸을 때, 소설 『퇴마록』을 읽으면서 꼭 한번 가고 싶었던 장소가 되어버린, 천개의 부처님과 천개의 석탑이 있는 신비로운 사찰 운주사. 



  



그 운주사를 갔을 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생각했던 부처님의 모습이 아닌, 전혀 생소한 부처님들이 즐비했으니까. 석탑도 익숙한 모양도 있는 반면, 생소한 모습의 석탑들도 있었다. 물론 전설과 기록 속에서 말한 천개의 부처님과, 천개의 석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정말 많은 부처님이 있었고, 많은 석탑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운주사를 처음 보았을 때, 그 감정을 잊지 못했다. 아마 그 어떤 사찰을 가도, 운주사에서 받은 그 감정을, 다시 느낄 수는 없으리라.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다시금 내가 갔던 사찰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고즈넉함이 바로 떠오르는 사찰들도 있었고, 상업적이라 느껴진 사찰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즈넉한 사찰이든 상업적으로 느껴진 사찰이든,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싹 가라앉는다. 왜 불가에 귀의하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랄까?이 리뷰를 쓰는 지금도, 창궐하는 역병만 아니었다면 아마 난 당장이라도 사찰로 달려나갔을거다.



언제쯤 마음 편히 가볼 수 있을까. 올해가 끝나기 전에는 못가본 사찰들을 다닐 수 있으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성실의 우리집 요리 백과 - 행복한 우리 가족 밥상 레시피 330
문성실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이 싸그리 바뀐지도 벌써 반 년하고도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의 여가활동이 급변했다. 제일 크게 변한 건 여행이나, 공연관람, 운동 등 외부에서 하던 모든 행위들이 사라졌다. 반면에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각종 취미 생활들이 급증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요리!



요리는 우리의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행위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영양소를 섭취해야하는데, 그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선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행위를 해야하는데! 그 행위가 바로 요리다. 그러니까 요리는 우리의 삶에서 일절 뗄 수 없는 행위라는 것. 



하지만 바쁘디 바쁜 삶을 사는 요즘 현대인들에게 요리란 어렵기 그지 없는 행위였다. 심지어 이거 하랴, 저거 하랴, 사람들 만나랴, 요리를 할래야 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평일에는 재택근무로(하지만 나는 언제나 회사출근..), 주말에는 그냥 집안에 처박혀 있는 요즘 같은 시기. 집안에만 있기 따분한 사람들이 하나, 둘 요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바로 지금 이 시기가 내 요리 실력을 향상시키기 딱 좋은 타이밍이랄까? 요리는 내 집, 내 부엌만 있으면 언제는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어려운 줄 알았던, 우리 엄마만 할 줄 안다고 생각했던 수 많은 집밥 레시피가 담긴 책들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이 분의 레시피북은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요리가 이렇게 쉬운거였어?”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책 한 권에 330가지의 요리가 있다고 하는데, 대체 어떤 음식들이 있는지 목차를 살펴보았다.



Part1은 밥과 면요리 레시피 37개, Part2는 국물요리 레시피 39개, Part3은 집밥의 꽃! 밥반찬 레시피 145개 , Part4는 김치/짱아찌/피클류등 일명 저장식 레시피 14개, Part5는 몸 건강히, 맛은 최고 샐러드류 레시피 28개, part6은 한끼 대접하기 좋은 별미요리 레시피 21개, Part7은 간식배가 따로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간식 레시피 46개.



와 진짜 레시피 수량이 어마어마하다. 



특히 내 눈에 뛰는 레시피들이 있었다면 밥과 면 요리에 있는 여러 종류의 죽! 개인적으로 죽을 참 좋아하는데, 솔직히 죽 쑤기는 어려워서 언제나 ㅂ죽을 애용한다. 그런데 집에서 쉽게 죽을 쑬 수 있다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잣죽은 레시피북에 없다는 것, 흑흑 ㅠㅠ



레시피북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밥 반찬은 정말 두말할 것도 없다. 두부! 하면 구이나 조림정도인데, 이 조림 방법이 여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동안 난 두부를 가지고 무슨 짓을 했나 자괴감이 들고ㅠㅠ. 무는 무국이나 무생채만 생각했는데, 무려 스테이크가 탄생하다니. 심지어 콩은 튀김조림으로 재탄생한다. 



요리의 세계가 이렇게 무궁무진할 줄이야.



  


아! 이 책에는 단순히 요리 레시피만 있는 게 아니다. 요리를 쉽게 하기 위해선, 쉬운 계량법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계량도 손 쉽게 한다. 이 책에서 이용하는 계량 도구는 딱 3개. 밥 숟가락, 종이컵, 손. 어쩜 이렇게 간단한지. 이건 계량하기 어려워서 요리를 못하겠다는 불만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계량법인가!! 이 외에 이 책에서 사용하는 기본 양념은 전부 마트에서 파는 것! 재료 구하기 어렵다고 투덜대는 것도 원천 봉쇄한다ㅋㅋ



이제 레시피가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확인해볼 차례!



  

 



대부분의 레시피는 위와 같이 1페이지로 끝난다. 요리과정은 딱 4컷. 죽이나 각종 국물 요리, 밥 반찬 등등등. 정말 대부분이 단 4컷으로 요리 완성이다. 아주 조금 어렵다 싶거나, 조금 과정이 많은 요리들은...





이렇게 2페이지로 나오는데, 그 마저도 과정이 단 6컷이다. 진짜 이것조차도 못 따라하면 완전 요똥인증하는 정도랄까? 



요즘 백파더가 요린이를 구원하고자 매주 요린이 교육을 하고 있는데, 감히 말하건데 이 레시피북은 백파더가 알려주는 레시피보다, 따라하기 더욱 쉬운 레시피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있을 법한 연애소설 - 당신이 반드시 공감할 이야기
조윤성 지음 / 상상앤미디어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름 독서 편식을 없애려고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 손이 안가는 장르가 있으니 연애소설. 그도 그럴것이 연애소설류는 그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면서 느끼는 내 감정들이 꽤 부정적인 감정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스테리, 추리, 호러소설은 읽으면서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이 긴장감, 스릴에 국한된다.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느끼기 어려운 감정들이다보니 오히려 그 감정들이 신기하고 놀라울정도다. 하지만 연애소설은 아니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느낄수 있는 감정들이다. 그런 감정들이 설렘, 두근거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라면 참 좋겠지만, 아닌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오늘날의 연애를 담아내는 가장 ‘요즘스러운’ 현상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용인되는, 이전에는 없던 개념들.


원나잇 스탠드, 섹스 파트너, 어장 관리, 불륜과 같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많이 이야기하게 되니까 그 개념에 이름이 필요했겠구나 싶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라면 그저 “남자(혹은 여자) 여러명 만나는 걔 있잖아” 라고 하면 될 일이지, 굳이 어장 관리라는 단어를 만들어 함축시킬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실상을 파고들어 적나라하게 풀어놓고 싶었습니다. p 269(에필로그)



이 책의 주인공 수아는 남들 보기에는 한 회사에서 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어엿한 커리어 우먼이다. 수아의 시선으로, 수아의 연애를, 정확히는 오늘날의 연애를 담담히 그려낸다. 문제는 요즘 세대의 오늘날의 연애가, 내 머리속으로는 공감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랄까. 그런데 또 이 소설이 브런치에서 170만 뷰에 달하는 인기 연애소설이었다고 하니, 하하. 나도 분명 나이로는 요즘 세대가 맞는 것 같은데, 이상도 하다. 덕분에 내 머리속은 그저 꼰대인 것인지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말한 원나잇 스탠드, 섹스 파트너, 어장관리, 불륜 등. 이 모든 일을 주인공인 수아가 겪는다. 결혼까지 이야기한 오래만난 남자친구는 바람을 폈고, 그렇게 헤어졌다. 이 때까지만해도 그저 똥차를 만난 수아가 안타까웠다. 똥차가 떠났으니 볼보급(요새 볼보에 완전 꽂힘, 안전성100%) 외제차가 오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수아에게는 계속 똥차들만 나타난다. 문제는 수아 스스로도 그 똥차들을 끌여들였다는 사실이랄까. 사람보는 눈이 없다고 하기에는, 수아는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여성이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 수아는 몸만큰 어른아이였다. 그날 그날의 분위기에 휩쓸리고, 충동적인 선택을 하는 수아를 보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른아이의 연애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것인지 조금은 경각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 충전기에 꽂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었다. 음악을 틀고 침대에 걸터앉아 노곤하게 일주일을 돌이켰다. 그 사이 몇 번의 거절을 해왔나. 사진을 찍는다던 그 남자, 건우를 닮은 소개팅남. 서로의 패를 반쯤 가려둔 채 사랑을 두고 눈치 싸움을 하는듯한 관계가 지겨웠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물에 빠지듯 그 사람에게 빠져 내 모든 삶이 그를 기준으로 웃다가 울다가 하는 짙은 사랑이 하고 싶었다. p 156



그럼에도 다시한번 무시하지 못할 부분은, 브런치 인기 연애소설이라는 점이다. 다들 저렇게 말하는 수아와 같은 사랑을 꿈꿔온다는 이야기일까? 연애에서 내가 사라지고, 상대방이 기준이 되는 연애를 하고 싶은걸까? 정말 앞뒤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랑을 원하는걸까? 아니면 이런게 정말 오늘날의 보통 연애인걸까. 확실한 사실은 이 연애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열광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이 많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조금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 꼰대인가, 하하.




그래도 소설 막바지 수아에게도 볼보급(내 기준 최고) 외제차가 나타난다. 만날 때마다 항상 “밥 먹었어?”, “오늘 하루 어땠어?” 라고, 수아의 하루를 물어봐주는 남자 종욱. 적어도 내가 볼땐, 수아에게 종욱을 붙이기엔 종욱이 너무너무 안타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아도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로 나름대로 교훈을 얻고, 변화한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 옆에 있으면,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거니까. 하지만 수아는 그럼에도 본인 스스로 충동적인 선택을 했다. 종욱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앞선 여러 차례 연애로 수아는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 본인이 받은 그 상처를, 종욱에게 주고 만 것이다. 나는 정말 이런게 오늘날의 연애라면,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연애라면, 심지어 상처를 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상처를 주는 연애라면 차라리 다들 연애를 안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본인 스스로도 본인의 감정 조절을 못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연애를 한다면, 상대방만 상처줄게 뻔할테니.



다리에 힘이 빠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어린애처럼 쏟았다. 저지른 과거의 내가 미웟고, 상처를 준 주제에 다시 나타난 이기심이 죽도록 싫었다. 이번에는 정말 잘 사랑하고 싶었는데, 잠깐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헀던 자제력 없는 철부지에게 사랑은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p 260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항상 내 옆을 지켜주는 우리 신랑에게 한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연애시작부터 지금까지 만나온 햇수를 따지만 만 12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난 우리. 싸움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옆에 있다. 나에게 우리 신랑은 연인이면서, 가장 친한 친구이고, 항상 내 옆을 지켜주는 가족이다. 어딜가든 같이 가야하고, 뭘 먹든 같이 먹어야 하고, 곁에 없으면 심심해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우리는 그렇게 12년 이란 세월을 만나왔는데, 그래서 나에게 연애란 이런 것이었는데. 심지어 내 주변에 있는 여러 커플들, 부부들도 우리와 별다르지 않았는데.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오늘날의 연애를 보니 공감이 안되고, 이해가 안 될 수밖에. 그런데 이런게 정말 오늘날의 연애라면, 나는 오늘날의 연애를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모습이 정말 오늘날의 연애라면 너무 삭막하고, 각박하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