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과학은 흐른다 4 - 쉽게 읽고 깊게 아는 과학 문명사, 17~18세기 과학혁명 1 만화 과학은 흐른다 4
정혜용 지음, 신영희 그림, 박성래 감수 / 청년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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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리 만화라고는 하지만 과학사를 읽는 다는 것은 내겐 만만치 않는 일이었다. 인물둘은 낯설었고 그들이 펼치는 과학이론들은 철학사상을 기반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모든 이론을 충분히 이해하며 과학사의 흐름을 파악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다섯 권이나 되는 과학사 책을 읽어야 했던 것은, 그 목적이 과학이론을 이해하는 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읽고 싶었던 것은 시대와 호흡했던 ‘과학이 어떻게 당시 사회를 변화시키며, 전개되었는가,’였다. 

17~18세기를 과학혁명1기와 과학혁명2기를 나누는 기점은 아이작 뉴턴의 출현으로 보고 있다. 과학혁명 1기에는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한 합리론과 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경험론을 철학적 기반으로 팽팽히 맞서며 연구발전해 왔다. 이런 과학혁명 1기의 기조를 뉴턴은 두 가지를 모두 수용하는 동시에 수학적으로 정리함으로써 과학혁명2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이로인해 과학은 더 이상 철학의 영역 권에서 머무르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과학은 흐른다. 4 -17~18세기 과학혁명 1기-

유럽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닫힌 사회였다. 신대륙 발견이후 아주 짧은 기간에 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했으며, 넓은 세계로의 진출은 유럽 내부 상황도 변화시켰다. 교황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던 유럽은 1571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이유로 종교개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종교개혁은 곧 온 유럽에 퍼져나갔고 유럽 인들은 동질감을 잃고 급기야 종교전쟁까지 일어나고 만다.

종교개혁은 여러 분야에 영향읠 미쳤는데, 예정설을 근거로 통치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영주들은 힘을 키울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되었다. 또, 상업이나 금융업을 신성시하고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기는 자본주의의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움직임에 맞서 가톨릭 진영에서도 개혁이 일어난다.

식민지와 교류가 늘어나면서 대서양 연안에 있는 항구들이 발전한다. 비교적 종교전쟁의 피해가 적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이 빨리 나라를 안정시켰다. 덕분에 유럽 정치와 학문의 중심지는 대서양 연안으로 옮겨졌다. 학문 풍토가 바뀌면서 과학연구가 지식인들의 유행처럼 번졌다. 재산이 넉넉한 지주나 상인, 법률가 출신들이 학문연구의 주류로 등장한다. 르네상스 시대엔 대학이 학문의 중심지였으나 이 시기엔 학회나 학술원이 학문 논의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학문의 특징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는 점과 학문의 실용성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 이런 변화는 시대의 변화에 발 맞추는 과정으로 공동체나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주의적 생각들을 형성해 간다. 이 것은 데카르트 같은 인물을 통해 ‘생각하는 나’라는 인식론적 자연주의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컨 - 경험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과학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베이컨(1561~1626)와 데카르트(1596~1650)는 철학이 과학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다. 그 첫걸음으로 근대과학의 방법적 토대를 마련하던 두 사람은 실험과학에 대한 의견 차이를 보이며 대립한다. 경험을 중시 했던 베이컨은 여러 가지 사례들을 모은 다음, 가설을 만들고 실험을 걸쳐, 버릴 것은 버리고 남은 것들은 더욱 세밀히 연구하여 과학지식을 얻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지식의 사다리’라고 4가지 기본 원칙을 정하게 된다.

4가지 원칙은 자료를 모으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라는 종족으로 다른 종족을 바라 볼 때 생기는 편견을 말한다. 둘째, ‘동굴의 우상’ 개인의 특수한 상황이나 환경에서 생기는 잘못된 판단을 일컫는다. 셋째, ‘시장의 우상’ 검증되지 않은 얘기들이 힘을 얻어 진짜처럼 들리는 데서 생기는 편견. 넷째는 극장의 우상‘ 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짜 일어난 일로 생각하게 되는 돼서 오는 편견이다.

경험론적 출발은 지금까지 숭배해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반박하면서 시작한다. 학문의 논증에 있어서 연역적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고 귀납법의 논증구조 택했다. 그러나 귀납법은 경험과 실천을 강조하는 데에는 장점이 있지만, 실험을 하기 위해선 연역적 추론과 가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현대 과학에서는 이 둘을 모두 쓰고 있다. 그러나 베이컨의 귀납법은 19세기 들어 수 많은 연구 자료를 정리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베이컨은 효과적인  과학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왕립 학회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데카르트 - 합리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과학

베이컨과는 달리 데카르트는 연역법의 단점을 보안하여 취했다. 확실한 전제를 얻기 위해 ‘방법적 회의’ 고안하여 과학현상들 설명했다. ‘방법적 회의’는 의심이 여지가 것은 모두 제외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회의적 방법론은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연역법의 출발점을 삼았다. 따라서 정신의 존재와 신이 창조한 자연 세계의 존재를 각각 독립시켜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 데카르트는, 물질세계는 정신과 상관없이 존재하며 이성적 능력으로 신이 주신 물리법칙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라고 생각했다. 이런 기계적 세계관은 몇몇 물리법칙들을 이끌어냈고 인간과 동물에 적용했으며 새로운 우주관을 세우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 ‘운동량 보존의 법칙’이고 ‘관성의 법칙’이다.

기계론을 바탕으로 세운 물질관은 학문의 우선순위를 바꿔 놓았다. 신이 주신 물질은 똑같은 자연법칙에 지배받는 기계일 뿐이라, ‘자연에 동물혼, 식물혼, 이성혼은 같은 게 있고 거기에 계급이 있다‘라는 스콜라철학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덕분에 과학은 신학에서 분리 될 수 있었으며 과학계는 변할 수 있었다.

베이컨의 경험론과 데카르트 합리론의 논쟁은 100년간 계속되었는데, 뉴턴이 나타나 이 두 이론을 모두 수용한다.

학회의 성립

17세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하는 학자들이 대부분 대학을 차지했기 때문에, 과학혁명을 추진하던 과학자들은 학회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는 상공업주와 지주들의 지원 하에 대부분의 학회가 만들어졌고 왕립 학회는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실용산업만 연구해야 했다. 이것은 영국 산업혁명의 원동력으로 전개 된다.

프랑스 학회는 왕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다. 이 두 나라는 학회의 연구 성과를 서로 교류하면서 여러 가지 실험기구들을 발명하였다.

17세기의 천문학

17세기에 강세를 보였던 과학 분야는 천문학이다. 티코 브라헤는 치밀한 관측을 통해 수많은 자료들을 만들었다. 그 결과 천동설과 지동설의 사이에서 절충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를 신봉했으나 신비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를 도와 관측 자료들을 정리했다. 그러나 케플러의 연구 성과물을 수학적으로 너무 어렵게 설명했기 때문에 일반화하지 못했다. 반면 갈릴레이는 태양중심설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손쉽게 증명해 낸 덕분에, 지동설에 관련된 모든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과학은 흐른다. 5  17~18세기 과학혁명 2기- 

진자에 관해 연구해 오던 호이겐스는 빛의 여러 가지 현상을 입증한다. 이제까지 첨예하게 대립해 오던, 입자설과 파동설 중 파동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뉴턴에 이르러 프리즘을 이용한 ‘스팩트럼’를 설명하여 빛의 입자설을 재증명한다. 현대에는 아인슈타인에 의해 1905년이후 입자설과 파동설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18세기 물리학에서 뉴턴(1642~1727)과 견줄만한 인물로는 코르트 조각를 통해 세포 구조를 발견한 로버트 훅(1635~1703)이 있다. 그는 실험뿐만 아니라 이론에서도 뛰어난 학자였으나, 당시로써는 이미 어떤 발견이나 이론을 주장하는 것만으론 업적을 평가받을 수 없었다. 갈릴레이가 “자연의 책은 숫자들로 쓰여 진다”라고 얘기 했듯이, 수학적 증명이 가능했던 뉴턴에게 밀리 수밖에 없었다.
 

17, 18세기 과학혁명은 많은 실험 도구들이 개발되면서 생물학, 화학, 의학 분야에서도 다양한 연구 성과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천문학, 물리학, 수학분야 였다. 이시기 과학분야 중심적인 인물로는 뉴턴을 놓는 까닭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기존에 양립했던 경험론과 합리론을 수용하는 동시에 수학적 개념정리를 만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과학이 사회와 인간, 물질과 함께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연구를 위해 개발된 기구들은 새로운 실험를 가능하게 했고, 철학적 상상력은 새로운 과학 이론을 만들었으며, 시대적 상황은 과학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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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못 말리는 여자들 -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
비키 레온 지음, 최재호 그림, 손명희 옮김 / 꼬마이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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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권에서는 ‘못 말리는 여자들’이라는 표현이 못 마땅해 했다. 고대와 중세에 이어 르네상스시대 여인들을 보니 그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쓴 비키 레온은 숨겨진 여인들의 역사를 들어내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지, 역사 속 여인들을 옹호하려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한 의지의 여인들이, 역사 속에서 이렇게 숨쉬고 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의지’는 정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많은 역사가 남성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로인해 여성들의 역사적 위치가 불리하게 자리 매김 되어진 부분에 있어서는 형평성을 갖고자 노력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창의적인 활동과 학문이 기운차게 일어났어. 기도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타트 사이의 갈등이 심했어. 종교개혁의 결과 탄생한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교회와 오랫동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어.
이 시대를 살던 여자들은 고대나 중세에 누렸던 지위를 잃기도 했고, 전 유럽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마녀 사냥의 주요 표적이 되기도 했어.'

백년전쟁을 종식시킨, 잔 다르크(1412~1431)역시 예외는 아니였다. 그녀는 순수한 신앙심으로 나라를 위해 싸웠으나, 자신이 싸워 지키고 보호하려 했던 프랑스에 배신당한다. 목적을 달한 프랑스 왕은 비천한 출신이 그녀를 구출하거나 보호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현상금에 눈이 어두운 프랑스 병사들은 ‘오를레앙의 처녀’를 영국 군에게 넘긴다. 그녀는 고문 끝에 화형당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영국을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만든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를 중심으로 르네상의 여인들의 얽히고설킨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는 ‘천일의 앤’이란 영화로도 유명한 핸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다. 핸리 8세의 첫째 부인 캐서린은 스페인 여왕 이사벨의 막내딸이다. 우리에게도 왕가들의 정략적 혼인관계를 볼 수 있는 데, 기독교를 중심으로 뭉친 유럽의 경우, 이런 현상은 더욱 흔히 볼 수 있었다.

이사벨((1451~1504)여왕은 콜럼버스를 후원한 여왕으로 유명하다. 이사벨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카스타야 왕국의 공주였다.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오빠의 음모를 물리치고 아라곤 공국의 왕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신의 땅을 남편에게 주지 않고 자기가 권리를 가지면서 독립적으로 통치했다. 나중엔 통일 왕국을 이룩해 스페인(에스파냐)이 된다. 

이사벨과 남편 페르난도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자신들의 영토에 가톨릭 신자만을 남길 생각이었다. ‘국토 회복 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700년동안 스페인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무어인(이슬람교도)들을 쫓아냈다. 무어인들에 이어 유대인들도 쫓아냈다. 이런 유대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종교 재판소’가 생겨났다. 종교 재판소는 유대인, 무어인, 마녀나 이단 혐의로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처벌했다. 이것은 이사벨 여왕의 업적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핸리 8세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어머니인 평민 출신 앤 불린과 사랑에 빠져, 캐서린과 이혼하고 싶어 했다. 당시 영국은 엄격한 교리를 따랐기 때문에 왕이라고 해도 절대 이혼을 할 수 없었다. 핸리 8세는 고민 끝에 당시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토머스 모어[유토피아의 저자]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올곧은 사람이었던 토머스 모어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반대했고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이런 토머스 모어에겐 정신적인 동반자와 믿음과 애정을 함께 했던 딸 마가렛(1505~1544)이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어려운 번역 작업을 했고 영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영국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었다면 아일랜드에는 그레이스 오말리(1530~1603)라는 해적 여왕이 있었다. 그녀는 열 살 때 선장이 되어  지휘했다. 결혼한 뒤에는 해적 선단을 이끌며 해적질을 했다.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일랜드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레이스는 이에 맞서 반란군 대장이 되어 끈질기게 저항한다. 이 둘은 직접만나기도 했다. 결국, 아일랜드의 독립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지금도 아일랜드와 신대륙에서는 아일랜드의 위대한 해적 여왕이자 자유 투사로 오말리를 기억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 여성 인물로, 황진희(1500)와 민회빈 강(1611~1695)씨가 있다. 민회빈 강씨는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의 부인이었다.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된다. 전쟁에 패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그 부인들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보낸다. 영리한 민회빈 강씨는 그 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무역으로 경제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는 한편,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노예가 아닌 농민으로 살도록 도왔다. 조선으로 돌아와서 경제적인 힘을 통해 자신과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고 했으나,  청나라 정책에 순응한 것으로 인조에게 오해를 받는다. 결국 소현세자가 죽게 되고 그녀 또한 궁 밖으로 내처져 사약을 받는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동시대 과학자로는 소피 브라헤(1556~1643) 가 있다. 그녀는 덴마크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의 동생이다. 소피는 별에 대한 연구는 물론 화학, 의학, 원예 공부를 하였고 다른 나라에서도 인정받는 생물학 및 식물 전문가였다. 그녀는 무능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경제적 파탄에 이르자, 생계를 위해 별점을 쳐서 먹고살았다. 유명한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도 소피처럼 별 점을 쳐서 돈을 벌었다고 하니, 천문학자들이 점치는 일이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닌 듯 하다. 
 
이사벨여왕이후 스페인은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남아메리카 정복에 나선 스페인 장군의 코르테스를 도운 통역사이자 조언가는 노예였던 말리날리(1530~1603) 이다. 그녀는 유카탄 반도의 북쪽 끝, 마야족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린시절, 이 부족 저 부족에게 노예로 넘겨졌다. 그러는 가운데 여러 부족의 언어와 풍습을 배웠다. 그런 그녀의 도움으로 코르테스는 몇 안 돼는 군인으로 아스테크와 멕시코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말리날리보다 더 큰 ‘비밀 병기’는 유럽 사람들을 따라온 천연두였지만 말이다. 

후아나(1651~1695)의 부모는 스페인으로 스페인이 멕시코를 지배하던 때에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후아나는 스페인 왕실까지 가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엔, 여성이 학자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선 수녀가 되는 길 밖에는 없었다. 후아나는 여성이 학문을 탐한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종교 재판까지 받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후아나는 1695년 멕시코시티를 휩쓸기 시작한 페스트 환자들을 밤낮없이 돌보다, 감염되어 죽었다.

1500년대에서 1800년대 사이의 유럽에서는 남자 옷을 입고 남자 행세를 하는 젊은 여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 카탈리나 데 에라우소(1585~1650)는 어려서 수녀원에 들어 갖지만, 도망 나와 뱃사람이 되었다가, 스페인군 대위가 되어 전쟁터에 나가 싸웠다.  남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몰 프린스(1589~1659)는 거칠고 험악한 암흑가를 장악한 여인이다. 그녀가 태어난 시기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쳐부순 기쁨으로 들떠 있던 때였다. 그녀들은 비록 모범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유명인으로 생각했다.

르네상스 미술계엔 이탈리아 천재 화가 엘리자베타 시라니(1638~1665)가 있다. 그녀는 화가였던 아버지에게 미술 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로부터 모든 사생활을 침해당하고 27세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당시, 엘리자베타 말고도 ‘소포니스바 안구이솔라’와 ‘아프테미스아 젠틸레스키’가 여류화가로 유명했다. 특히, 아프테미스아의 그림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라는 작품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감정을 그림에 실어, 인상 깊게 다가온다. 

특이한 인물은 스웨덴의 황금시대를 연, 크리스티나 여왕(1626~1689)이었다.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난 그녀는 개성이 강하고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왕위를 사촌 오빠에게 물려주고 가톨릭으로 종교를 바꾼 뒤 예술과 학문에 관심을 쏟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창의적인 활동과 학문이 장을 열었다는 고는 하지만 여성들에게선 역동적인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지배층 여성들이 종교적 권위를 신봉했고, 학문적 성과는 남성들의 업적에 묻혀버렸다.

르네상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던 인물은 말리나리나 몰 프리스, 카탈리나 데 에라우소, 하슬라 같은 하층민 여인들에게서였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서 기질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체 여인들에 비해 미약한 사례이기는 하나, 고대나 중세에서는 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으로, 새로운 기회를 제공되고 있으며,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중학생들과 초등 고학년들도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시대적 사건이나 인물을 연결하여 마인드맵 형태로 그려나가며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세권의 책을 읽고 다른 책이나 영화를 통해 역사적 사건들을 대하게 되면, 시대적 흐름이나 얼게 짜기가 쉬어지고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화려하게만 보였던 역사 속 여인들의 상처를 드려다 보면서, 오늘 내게 처한 현실을 극복하는 힘을 얻게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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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못 말리는 여자들 -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
비키 레온 지음, 최재호 그림, 박종윤 옮김 / 꼬마이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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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E.H.카는 역사란 ‘역사가들에 의한 역사’라고 하였다. 역사는 객관적인 사료를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료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역사적 사실은 달라진다. 이런 사료들은 역사가의 일정한 목적에 따라 선택되어지는 것이다.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려는 목적 역시 역사가에 의해 정해진다. 따라서 역사는 객관적 사료를 토대로 이루어진 ‘역사가들에 의한 역사’ 라는 주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 사회에 영향력을 갖지 못했던, 여성들의 역사가 얼마나 왜곡되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 왜곡되고 숨겨진 여성들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역사책을 통해 남성중심의 역사 답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대략적 역사를 배우게 되는 청소년들의 역사에서는 더욱 여성의 존재를 찾아보기 어렵다.

<못 말리는 여자들>시리즈는 청소년들을 위해 여성의 역사를 재 해석한 흥미로운 책이다. 고대에 이어 암흑기라고 하는 중세에도 여성들 역사는 잠들지 않고 여기저기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고, 사업을 하느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여자들은 넓은 장원(토지 소유의 한 형태)과 작은 농장을 운영했어. 세금을 거두고 법적인 문제들을 처리 했지. 때로는 적의 손에서 집과 마을과 성을 방어했단다’

그런 여인들 중 하나인 오드는 남편을 잃고 무시무시한 바이킹 여족장이 되었다. 종족을 이끌고 새로운 땅 아이슬란드에 정착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흐트러짐 없이 꿋꿋이 이겨냈다. 선덕여왕,  마틸다, 에레오노르, 코켄는 왕가의 딸로 태어나 왕이 되거나 왕과 같은 권을 가졌다. 특히,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비였으며, 직접 십자군전쟁에도 참여하기도 하였다.

1300년 초반에 시작되어 중세의 유럽 전 지역으로 퍼졌던 마녀사냥은 당시 억압받던 사람들의 불만과 저항을 해소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많은 여성들이 희생되었는데 그중에 마오도 두 번이나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두 나라에 해당할 만큼의 큰 영토를 다스리는 귀족이었다. 마오는 중세라는 어두운 시대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도 자신의 땅을 훌륭하게 다스렸던 멋진 여자였다.

그 누구보다도 중세 여인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것은 다미아 알 카히나다. 북 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을 통치했던 족장으로, 이집트의 왕자 하산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와 맞서 자신의 땅을 지켜 냈던 여자다. 서로 다른 종교와 혈통을 지닌 사람들을 끌어안을 줄 아는 통큰 여자였다.

나라와 대륙을 뒤흔드는 권력을 가졌던 여인들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흥미롭다. 측천무후를 폄하하여 평가는 것에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 중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의 황제든지 일단 권력을 가지고 나면 많은 이성과 정을 통하는 게 보통이야. 권력을 가졌었던 옛날의 왕이나 황제들은 뻔뻔하게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 하지만 여왕들의 행실은 늘 사람들의 비난을 듣기 쉬웠단다.’

이렇게 놓고 보니 사실 그렇다. 남자들은 처첩을 줄줄이 거느리면서도 여자들에겐 칠거제약이니 마녀사냥이니 하며 억압해 오지 않았던가? 뒤주 속에 사도세자를 갇어 죽인 영조보나 측천무후가 더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여성이라는 원죄 때문일 것이다.

여성에게 있어 가장 큰 족쇄는 모성애라 할 수 있다. 오랜 역사 동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포장되어 모성애를 강조해 왔다. 반면 남성들에겐 가족사랑은 사사로운 정으로 치부하였고 대장부의 면모를 갖추려면 가족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어야 했다. 모성애는 여성에겐 미화된 사회 도덕적 규제였고, 남성들에겐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왔다. 지금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보이지 않는 제약 요소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망론하고 여성의 활동을 더욱 찾아 보기 어려운 곳이 종교계이다. 만약 역사 속에 여자 교황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믿겠는가? 남성 종교지도자는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장을 하고 수도원 생활을 하던 '조안'이라는 교황이 있었다는 사실를 감추었다.

또, 귀족의 딸로 태어나 청빈한 성직자로 살았던 클라라같은 성녀도 있었다. 힐레가르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견줄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다방면에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성직자로서 활발히 활동을 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850가지가 넘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 내기도 했다. 또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를 도운 아내 하디자의 공노를 잊어서는 안 된다. 

문화예술 분야에는 일본의 무라사키 시키부가 단연 돋보인다. 시부키의 <겐지 이야기>는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면 구성이 치밀하고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로 유명하다. 이청조는 중국 송나라 여인으로 스스로 ‘이안거사(편안하게 지내는 사람)’로 칭하며 남편과 더불어 학문과 시를 사랑했고 금석문을 연구하여 <금석록>과 많은 시를 남겼다.

동로마 제국의 안나 콤네는 <알렉시아스>을 통해 십자군 전쟁을 기록에 남기고 부상병을 돌보았다. 그녀는 아버지 알렉시우스와 황실의 역사를 기록한 책 <알렉시아스>를 완상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당시 십자군의 진모를 기록했다.

이탈리아 살레르노는 당시로써는 보기 드물게 몇몇의 여의사들이 있었다. 트로툴라는 남자의사들에게 치료받는 것을 거부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안타까워 의사가 되기로 했다. 그녀가 쓴 <여자의 질병과 치료><약물의 조제>라는 책은 유럽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간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트로툴라와 비견할 우리나라 여성으로 박에스터가 있다. 트로툴라는 1080년 경에 활동한 인물이고 박에스터는 1876년에 태어났다. 이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이 외국에 비해, 더 오랜 세월 남성의 권위 앞에 고통과 피박 받아 왔는지 비교해 알 수 있다.
 
<못 말리는 여자들>시리즈를 통해 많은 여성들이 원대한 꿈을 갖고 대륙과 나라를 호령하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성인의 인품을 지닌 여인들이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고 많은 부분 왜곡되어 일반인에게 알려지거나 남자들의 이름에 가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한 그녀들의 삶을 읽다 보면 딱딱하게만 보이는 세계사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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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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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나는 마르크스 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자신이 생각한 자본론에 대한 비판과 자신을 추종한다고 말하는 이들과 거리를 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자가 보듯 래디컬하지도 않지만,  공산주의 혁명이후에도 동의 하지 않는다. 사선을 넘어 혁명을 이룬 동료를 숙청하는 공산주의는 마르크스 상사과 다르다.

마르크스가 뉴욕에 온 까닭은, 그가 예측했던 자본주의 폐해가 극에 닿았기 때문이다. 공산혁명이 일어났던 러시아와 중국의 사황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1%로의 소수자들을 노동을 착취당하는 사회. 그 정점에서 세계화라는 스로건을 걸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자본가의 상징 뉴욕에 나타나 경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잠시 동안이지만 무정부 상태였던 코뮌이 이루 성과를 하나의 모델로 마르크스의 이상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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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1-27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는 경제에 엄청 약했다네요 오늘 신문서 보았어요

수양버들 2006-01-27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셨군요. 마르크스는 경제를 통해 사회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를 보니까, 가정 경제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코멘트 고맙습니다.
 
새들이 전해 준 소식
에릭 오르세나 지음, 김용채 옮김 / 샘터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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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미에’라는 인물 설정에서 의미를 찾아보았다.

섬에서 탈출하려는데 굳이 예술이나 관념적 사고를 필요로 하지는 않을 텐데도, 그녀는 멋지게 한자리를 차지한다. 괴팍한 동료들도 자미에의 말을 완전해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사다리를 만드는 것에 동의한다. 작가는 과학과 기술부분뿐만 아니라, 예술과 관념적이 부분도 그들이 만든 비행기 안에 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끝 부분에서 새들이 전해주는 소식에 대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이 또한 난해하다.  

새들의 권유에 귀 기울이고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에 관한 한, 새보다 더 잘 아는 존재가 있을까요? 너무도 귀중한 도움 준 새들에게 경의를 표해야겠습니다.‘ 

새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은 동화책이지만 내겐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다. 익숙하지 않은 특이한 문체 때문에 책을 읽어 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문화적 차이가 느껴지는 책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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