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주세요!

덕분에 신간평가단이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책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는 재미도 아주 쏠쏠했구요 ^^ 

다음 기에도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14기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한강, 소년이 온다


할 말이 정말 많아서 리뷰를 3부로 나누기도 했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 

개인적으로 시민행성 낭독회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던 한강 소설가의 낭독과 

그때의 그 분위기, 조르조 아감벤의 저작들과 소설이 겹치면서 극대화됐던 파토스, 

아마 처음인 것 같습니다. 소설 읽다 눈물 흘린 건... 

특히 소년이 온다 5부 동호 어머니의 들어본 적 없는 음성은 제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광주의 맑고 용기 있는 영혼들의 노래도요. 


- 14기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1. 한강, 소년이 온다 

2. 이승우, 신중한 사람 

3.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4. 성석제, 투명인간 

5. 토마스 핀천, 느리게 배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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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4-10-2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한강님의 낭독을 들으셨군요.
저는 한강님의 목소리를 정말 정말 사랑한답니다. 너무 매력적이고, 들을수록 빠져들고!!

즐겁게 활동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기수에도 지원해주세요~
좋은 계절 보내시고요

rendevous 2014-10-28 21:0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댓글을 읽다 보면 이동진 평론가가 빨간책방 시작하면서 느끼고 싶다 했던 느슨한 연대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하는데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말 건네지만 또 오히려 그래서 소소한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다음 기수도 꼭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제르미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르미날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그간 이 리뷰는 신간평가단 활동하면서 쓴 리뷰 중에 가장 허접한 리뷰가 될 것이다. 제르미날, 에밀 졸라, 자연주의와 내가 궁합이 맞지 않아서 책을 애정 있게 읽지 못했다. 예전에는 책장을 펼치면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책이 재밌듯, 재미없듯, 잘 읽히든, 잘 읽히지 않든 다른 책으로 외도하지 않았다. 그 당시 책을 읽다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번역상의 오류나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내 지식이 빈곤하고 독서력이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읽었다. 취향이 생길 만큼 다양한, 또 많은 작품들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 


 에밀 졸라의 작품은 읽은 적 있다. 목로주점. 딱히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부분이 없어 시간만 투자하면 읽어낼 수 있는 책이었다. 제르베즈의 핍진한 생존기와 삶의 눅진한 냄새가 베어나오는 노동자들의 삶 묘사를 흥미롭게 읽혔다. 


 약 4년 만에 제르미날로 다시 만난 에밀 졸라. 알고 보니 그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그러니까 서사의 리듬이 너무 촘촘해 지루하게 느껴졌다. 노동자들의 힘겨운 생애를 따라 읽고, 체험하고, 공감하는 작업들이 분명 의미 있을 거라는 생각을 들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 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다루게 될 보르헤스를 읽기 시작하면서 그의 '구라', 가짜 사실주의, 마술적 리얼리즘, 추리소설적 기법, 형이상학적-신비주의적 정신사적 편력에 완전히 심취했기 때문에 거의 정반대의 위치하고 있는 에밀 졸라의 소설이 시시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제르미날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방안으로 맑스와 겹쳐읽기를 계획했다. 맑스가 봤을 풍경들을 에밀 졸라의 텍스트의 창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소설 텍스트가 관념과 추상의 세계에 생생한 색과 냄새, 사람들의 표정을 부여해주리라. 최근 파주북소리축제에 갔다 창비를 구독하게 되었다. 주머니가 가벼워 고뇌하는 중생에게 직원 분이 자비를 베풀어 로베르트 쿠르츠의 <맑스를 읽다>와 표도르 쏠로구쁘의 <허접한 악마>를 선물로 받았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문제점, 심각성에 공감한 사람들의 요구에 힘입어 맑스 관련 책들이 몇 권 출간되었다.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공부>-경향시민대학에서 강의를 하신다고 했다, 양자오의 <자본론을 읽다>. 개인적으로 알랭 바디우의 공산주의 개념을 비판했다고 하는 브루노 보스틸스의 <공산주의의 현실성>과 최근 방한했던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읽어볼까 한다. 그렇게 읽다 보면 소설과 시의 품으로 자연히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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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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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20 인문까페 창비 11:15 ~ 1:10 

 

 인문까페 창비에서 천명관 소설가를 만났습니다. 가장 먼저와 위치선정을 제대로 한 덕분에 바로 옆에서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의 아버지와 동갑이셔서 왠지 모르게 더 정이 가더군요. 오, 아버지... 

나이도 나이지만 무엇보다 사람냄새-땀냄새 나는 글을 쓰는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이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천명관 소설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명색히 애독자를 모아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데 신간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완독하지 못한 상태로 자리에 착석했거든요. <봄, 사자의 서><파충류의 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까지 부랴부랴 읽었으나 다른 분들이 <우이동의 봄><동백꽃>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얘기하는 데 어려움이 겪기도 했습니다. 


가장 재밌게 읽은 작품을 뽑는 시간을 가졌는데 <우이동의 봄>이 1위로 뽑혔습니다. 천명관 소설가는 이 작품과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실린 <二十歲>와 같이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소개해주시면서 사람들은 '진전성'이 담긴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덧붙여주셨습니다. 저는 '진정성'이란 단어를 맞닥뜨렸을 때 미학적 보수, 휴머니즘 같은 낡은 서정의 권위에 기댄 개념 어쩌구저쩌구 비판적인 생각들이 휘몰아쳤지만 이윽고 문학동네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진정성이란 개념이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진정성의 참뜻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진정성. 저는 진정성이 작가라면 당연히 갖춰야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해서 되려 진정성을 강조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졌는데 이내 기본에 충실하기가 어렵다는 생각까지하지 못한 제 자신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쁜 의미에서 제가 평론가들의 프레임에 많이 갇혀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예술/문학작품을 감상-감각의 대상이 아닌 평가의 대상으로 먼저 바라보진 않았는가. 이런 반성들을 하면서 꿋꿋이 하고자 했던 질문을 꺼내들었습니다. 

 

 배수아 작가가 지향하는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가 지워진 소설, 물 흐르듯 결말을 향해 돌진하는 근대소설이 아니라 서사의 흐름을 일부러 타지 않음으로써 '사유'의 공간을 창출하는 현대소설, 영상과 문학이 은밀하게 몸을 섞고 있는 시대에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소설적인 것'에 대한 천명관 소설가의 생각을 듣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천명관 소설가가 거의 정반대의 소설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재밌는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서로 다른 소설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소설관을 비교해봄으로써 '소설이란 무엇인가/무엇이어야 하는가'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명관 소설가의 답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기질'이었습니다. 배수아 소설가는 제발트, 로베르트 무질 같은 소설가와 기질이 맞기 때문에 그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지우는 소설실험을 하는 것이고, 자신은 자신의 기질에 맞는 작품을 창작하고, 자신과 기질이 맞는 독자들이 작품을 읽는 것이라고.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 생각난 이야기는 푸코였나 사르트르가 했던 이야기인데 책은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독자수를 갖고 태어난다는 말. <말과 사물>이란 어려운 책이 바게트 땅 팔리듯 베스트셀러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푸코가 이런 말을 했다고... 또 그러면서 재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국소설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을 인용해주셨는데 내용은 이랬습니다. 모옌이 윌리엄 포크너와 헤밍웨이 같이 서사가 강한 작품들을 즐겨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과 그 작가들의 영혼이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 말을 받아서 박민규 소설가와 천명관 소설가의 영혼이 닮았기 때문에 잘 통하는 게 아닐까요? 물었는데 오히려 박민규 소설가와 자신은 거의 정반대에 가깝다고,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좋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 다음 책 읽는당 모임 때는 박민규 소설가를 초청해주셨으면 ㅜㅜ 가을에 신간 출간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창비에서 출판하시길 ㅜㅜ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단편 쓰는 몸과 장편 쓰는 몸이 어떻게 다른지, <핑크>를 쓰실 때 마감에 쫓겨 3일 만에 쓴 소설이라는데 당신의 친구 분 중에 대리운전하는 친구가 해준 이야기 '몸무게가 많이 나오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에서 시작한 소설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평소 단편을 쓰실 때 그런 식으로 상상력을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씨앗 같은 한 문장에서 시작하시는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서처럼 칠면조로 싸움을 패는 인상적인 이미지에서 착상해서 작품을 쓰시는지, 초반과 결말을 먼저 쓰시고 작품을 쓰시는지, 작품을 써나가면서 결말을 만드시는지, 정영문 소설가처럼 (김중혁 소설가의 빨간책방 방송에 의하면) 침대에서 구상을 다 하시고 집필에 들어가시는지, 김연수 소설가처럼 (문학동네 팟캐스트 방송에 따르면) 서사와 서사가 충돌시킴으로써 서사가 다른 층위로 점프되는 식으로 끝에 가셔야 결말이 정해지시는지, 아침에 쓰는지 밤에 쓰는지 등등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사실은 천명관 소설가의 작품을 다 읽어본 다음에 스스로 생각해볼 때 더 의미 있는 질문/답변이 나올 것 같아서 아껴두기로 했습니다, (라고 쓰고 시간이 없었다고 읽는다)


 마지막으로 책 추천을 부탁드렸는데 중국소설들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일본문학에 느끼는 양가적 감정. 우리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일본을 동경하고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일제감정기의 기억, 콤플렉스 때문에 그 사실을 부정하는... 그래서 오히려 자신은 작품에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일본어 표현을 그대로 쓴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 한국이 일본/문화를 동경하는 것처럼, 일본은 미국/문화를 동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키는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일본인'이라고. 하루키의 작품을 하나도 안 읽어봐서 잘 와닿지는 않았지만 주변 지인들이 하루키에 대해 말했던 내용들이 생각나면서(대부분 부정적 내용) 어떤 맥락인지 감은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런 컴플렉스가 거의 없고, '우아하고 고상한' 맛은 없지만 사람냄새 나는 글을 쓴다고. 허삼관매혈기의 위화, 개구리-붉은 수수밭의 모옌, 쑤퉁... (그러면서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하진 소설가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삶>이 좋아서 김연수 소설가가 번역한 <기다림>을 읽어보기로 했는데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있네요 ㅜㅜ)최근 황현산 평론가의 <말과 시간의 깊이>에 수록된 <르네의 바다-김현 론>을 읽으면서 '컴플렉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한 적 있는데 이렇게 또 만나게 되는... 그러면서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박민규 작가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창비 팟캐스트 마지막 부분에 했던 말로 기억나는데 침략당하는 피지배자, 약소국의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지배자, 강대국의 국민으로서 문학을 해보고 싶다고(정확한 인용은 아님). 콤플렉스와 박민규 작가의 말이 만나면서 빚어내는 오묘한 물결무늬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여기서 그만 글을 줄이고자 합니다.  


...


리뷰 :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통틀어 몇 번의 밭은기침이 나왔을까? 아마 이동진 영화평론가라면 필히 그 숫자를 세워봤을 것이다. 밭은기침. 병이나 버릇으로 소리도 크지 아니하고 힘도 그다지 들이지 않으며 자주 하는 기침. 나는 밭은기침의 사전적 정의를 보고 '병든 닭처럼'이란 직유를 떠올렸다. 어딘가 아픈 사람들. 병원에 가서 진찰받아야할 정도로 큰 병은 아니지만 기침을 습관적으로 해야 할 정도로 아픈 느낌을 주는 사람들. 어쩌면 이성복 시인의 시구처럼 모두 병에 걸렸기 때문에 아프지 않을, 아픈 줄도 모를 사람들. 천명관 작가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창비 책읽는당에서도 추천해줬던 중국문학처럼, 이를 테면 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허심관 같은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 잘난 사람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다 추락하는 비극이 아니라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 보이는 부족한 사람들이 아둥바둥 버티는 희극적인 이야기. 라면국물을 담은 냄비바닥에 종양처럼 남아 있는 검은 조미료 같은, 바닥에 밀착된, 까맣게 타들어간 속내를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 


 무엇보다 이야기꾼이란 별명에 걸맞게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좋았다. 아마 신간평가단하면서 가독성으로만 따지면 하진의 자유로운 삶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듯 싶었다. 개인적으로 배수아 소설가의 반서사적 소설관 같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쭉쭉 읽히는 소설보다 멈칫하게 만들고, 주저하게 만들고, 몸을 차분하게 만들고, 리듬을 한 템포 혹은 두 템포 낮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소설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고 있지만 김승옥 소설가가 소설의 abc라고 정의한 바 있는 '재밌는 이야기'로서의 소설을 읽는 일은 거의 언제나 즐겁다. "봄, 사자의 서"를 제외하곤 막힘 없이 한 번에 내려갈 수 있었다. 김연수 소설가의 "산책하는 자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 떠오르기도 했던 "파충류의 밤",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혀주신 "우이동의 봄", 특유의 입담과 고래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동백꽃", 박민규 소설가의 "루디"가 떠오르기도 했던 장르소설 "핑크", 봄, 사자의서-파충류의 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만 읽은 상태에서 파충류의 밤을 최고의 단편으로 뽑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책읽는당에 참석한 다른 분들처럼 "우이동의 봄"에 마음이 더 갔다. 진정성. 신형철 평론가가 어디선가 보수적 미학관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악용되는 진정성의 용례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했었는데 "우이동의 봄"은 좋은 의미에서 진정성이 있는 작품이라 느꼈다. 할아버지와 손자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도 어려운 관계인데 할아버지와 손자는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발이 하얗게 날리는 할아버지의 주름 깊은 얼굴 뒤로 꽃비가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마지막 문장이 보여주듯 서정적 분위기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책읽는당 행사 이후 김미월 소설가와 진행한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스테이크를 아주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작업 중이라고. 영화도 기대되지만 <고래>, <나의 삼촌 브루스리>에 애정이 깊은 독자로서 천명관 소설가의 장편소설이 기다려진다. 천명관 소설가 당신은 밭은기침을 하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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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줄거리 그의 대표작 <개미>에서 DNA 서사세 가지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서사전략을 자주 차용하는 베르베르는 이 작품에서 다비드 웰즈 등의 인간들과 지구를 화자로 내세운다지구 화자는 흡사 가이아 신을 연상시킨다지구는 자신의 인 석유를 무분별하게 추출하고환경파괴를 일삼는 인류의 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자연재해를 일으켜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 하지만 지구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고생물학자 샤를 웰즈는 남극에서 17미터에 달하는 거인을 발견하지만 이를 세상에 공표하지 못하고 빙하에 묻혀버린다이 책의 제목 제3인류는 이 거인이 제1인류이며현 인류가 제2인류이고현 인류가 안고 있는 방사능과 환경오염의 문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진화된’ 인류를 지칭한다초소형 인류 에마슈가 그 주인공이다.

 


 

 

 

 

리뷰 나는 누구인가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중학생 때는 자아탐색을 위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나는 질문을 받았다기보다 질문을 알게 되었다이 질문이 내게 답을 요구한다는 느낌보다 일반상식처럼 사춘기에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정보를 건네받은 느낌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이 질문이 나오기까지 사유의 과정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 질문을 왜 해야 하는지가 차라리 더 궁금했다이런 걸 궁금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질문의 실마리가 조금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책에서도 선생님에게서도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예시답변조차 얻을 수 없었다너 자신을 알라하던 소크라테스가 엄청 싸가지 없어 보였다위대한 철학자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질문이 아닌 속이 배배 꼬인 할아버지의 빈정댐으로 느껴졌다아마 중즈음이었을 것이다(이때 당시 교과서에 <개미>가 수록됐던 걸로 기억한다).


이 질문이 내게 다가온 건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읽으면서부터였다. <>로 시작해 타나토노트아버지들의 아버지나무파피용개미 순으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사후세계는 실제로 존재할까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타나토노트’), 진화론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인류의 조상은 무엇일까또 최초의 생명의 조상은 무엇일까생명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아버지들의 아버지’), 인류는 새로운 지구를 찾을 수 있을까만약에 찾는다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또 그곳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다면 지구에서보다 나은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까외계인은 존재할까그들의 문명은 우리보다 진보했을까?(‘파피용’) 같은 질문을 막연히 던졌다(너무 깊이 알면 다쳐). 그때부터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도덕윤리교과서에 나오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장이 아니라 흥미진진하며 가끔 에로틱하기도 한 이야기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지적 모험을 떠날 수 있다는 점이 나를 매료시켰다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한 반에 두세 명씩은 꼭 베르베르를 읽었던 것 같다탈출구가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제3인류는 미싱 링크’, 원숭이와 인간 사이 진화상의 빠진 고리를 찾아 인류학적 근원을 찾고자 했던 <아버지들의 아버지>와 우주범선을 타고 새로운 지구를 찾아 신인류문명을 건설하고자 했던 <파피용>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우리가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로 인간존재의 근원을 탐사하는 작가의 유형은 아니라는 점이다그는 이야기꾼이다매너리즘에 빠졌다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고 실망하고 등을 돌린 독자들도 꽤 되지만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여전하기 때문에 아직도 수많은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그는 올 8월에 예스24에서 진행한 한국인이 사랑하는 해외작가 투표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급행열차’ 급의 이야기를 타고 달려온 독자들 중에는 하차 이후에 헛헛함을 경험했을 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공백을 어떻게 채우는지 알고 있다마르지 않는 샘지적 호기심은 우리를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채운다질문하는 자여그대에게 즐거움이 있을지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5) :

 

아버지들의 아버지(베르나르 베르베르), 파피용(베르나르 베르베르),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른스트 슈마허), 센스 앤 넌센스(케빈 랠런드길리언 브라운),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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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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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고민하다 리뷰를 쓸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나도 신중한 사람인 걸까? 섬세함과는 별개의 신중하기만 한, 신중함의 자의식이 빚어내는 무게에 짓눌려 아둔하게 움직이고, 신중함의 무의식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자기진단을 다 해놓고 확실한 대안을 찾지 못해 현상을 유지하는, 그런 사람. 


 신중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자신감의 부족과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했을 때에 예감하게 되는 불편함에 대한 불안이 신중함의 핵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신중한 사람은 현재에 신중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지만 도래할 가까운 미래를 걱정하고, 그 미래에 대한 치열한 염려와 계산으로 인해 현재의 자신을 소외시킨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가. 그는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지금'을 놓친 사람이라고. 가능태에 온갖 심혈을 기울인 바람에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어 불가능한 밀도를 앓는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이 소설은 신중한 사람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계몽소설인가? 이것은 이 소설을 읽는 가장 나쁜 독법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오히려 <하지 않은 일>을 읽으며 신중함의 부재가 일으킬 수 있는 재앙을 아프게 느낀다. 신형철 평론가는 팟캐스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이 폭력이 아니라는 생각보다 이것이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기습에 더 큰 아픔을 호소한다. 무심한 얼굴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의 모서리에 배여 간결하게 흐르는 피. 무심히 고통을 견디는 편이 가장 고통스럽지 않은 고통이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신중한 사람은 이런 고통조차 피하려 들까? 고통에 대한 키치적 태도, 고통과의 인위적 거리두기가 삶은 곧 고통의 연속이라 하는 존재론적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존재와 고통 사이의 거리가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신중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았다. '매우 조심스러움'. 조심스러움은 위험이란 부정을 전제한다. 섬세한 사람은 신중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신중한 사람이 섬세한 건 아니다. 신중함은 오히려 섬세하게 불안의 원인은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취하게 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은 어떤 기미를 포착해 위험/고통을 피해갈 수 있을진 몰라도 정답을 골라내진 못한다. 더 나쁜 것을 피할 순 있을지언정 더 좋은 것을 선택하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판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사물을 대하는 태도, 마음의 운동방향의 문제이다. 낙관주의자에게 신중함은 자신의 감각으로 감지해내지 못하는 위험을 포착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만 긍정하거나 선택(행동)하지 않고 회의하고 부정하기만 하는 신중함은 결국 재귀를 통해 자기를 복제하게 되고, 이 폐쇄적 닫힌계는 결국 퇴화적 보수가 되면서 구더기 무서워 평생 동안 장 못 담그는 비극적 코미디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소한 고통, 실패가 아닌 <하지 않은 일>에서처럼 '돌이킬 수 없는' 재앙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망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은 도망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관점의 전환을 통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지혜의 잠언 같지만 실은 이 초월에는 굉장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만약 삶을 지탱할 수 없는 만큼의 절망적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닌 자살일 지도 모른다. 도저히 초월/해탈할 수 없는-즐길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도망칠 수 없다는, 그래서 너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즐기라'는 명령을 하는 건 굉장한 폭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보통 어떤 상황에서 누가 했는지 회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내게 이 말을 많이 했던 건 고등학교 선생님들이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을 (정언적 텔로스로부터 벗어난) '도망'으로 만들어 열패감, 죄의식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그렇게 그 어떤 부조리도 '현실'이란 생뚱 맞은 개념으로 고정시켜버림으로써 다른 가능성을 사유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진창에서 구르면서도 웃을 수 있는 해탈정신은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이 해탈의 전제조건인 고통/폭력이 구조적으로 상재하는 상태에서 해탈을 강요하는 건 구조적 부조리를 은페하면서 고통을 강요하는 야만적 폭력일 것이다. 힘이 없는 학생들은 해탈도 풍자도 아닌 자살을 선택한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05/2014090501264.html) 


 <하지 않은 일>을 읽으면서 답답하고 많이 아팠다. 잊고 있었던 타블로 사건. 최근에 독서모임을 위해 다시 읽는 '소송'과 연결되면서 소송적 사건의 짙은 그림자가 나를 드리웠다. 존재론적 고독과 존재론적 소외.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피고. 여기에는 이미 '행위'가 잠재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행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았다면 행위의 부재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잘못된 의심/믿음이 대중의 광기란 조잡한 접착제에 의해 확신으로 굳어졌을 때 한 개인의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한순간에 '변신'할 수 있다는 것,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초고화질 동영상을 찍어 몇 초만에 전 세계로 공유시킬 수 있는 과잉연결 미디어 시대에 '신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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