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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김영롱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9월
평점 :
살아서 하는 이별, 그 서늘함을 두려워하기만 했지, 함께 지낼 수 있는 다른 삶에 대한 상상은 부족했다. 회복을 못하시는 어머니, 오래가는 섬망에 정신이 녹는 듯한 시간, 사랑, 확신, 행복 이런 단어로 짜인 글이 반갑고 조심스럽다.
“환시는 환자의 심리가 드러나는 영역이기도 했다. (...) 낯설어 긴장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자의 할머니가 경험하는 섬망 증상 중 내 어머니가 경험하는 비슷한 것들이 적지 않다. 읽으면 기분이 더 복잡해질까 했던 우려와 달리, 안도가 된다. 자극적 절망이 아닌 솔직하고 담담한 내용들이라 그런 듯하다.
1주일에서 한 달 정도에 사라지지 않으면 좋지 않다는 의사의 최초 의견에 묶여서, 나 역시 ‘치료’에 조바심이 났다. 그냥 차분히 옆에 앉아서 한참 얘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세계관과 취향과 외양... 뭐 하나 닮은 점이 없는 모녀라서, 본원적 사랑은 있지만 친한 친구로 살지는 못했다. 그러니 서로 잘 모르고 지나치지 않은 관심과 많이 않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오히려 관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열이 오르내리거나, 혼잣말을 오래 하거나, 잠에 든 어머니 옆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뜻밖의 위안이 되었다.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며 내 생각도 갈무리해보고, 할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만나 이해의 폭도 조금이나마 넓혀 본다.
무엇보다 유튜브 영상 기록을 결심하고 실행한 행동력에 놀랍고, ‘상대를 오래 본다는 것’이 불러온 변화가 감동이다. 사이가 좋았던 저자와 할머니 간이 아닌, 원망과 상처가 깊고 오래된 할머니와 어머니(딸)의 관계 변화가 놀랍다.
무엇보다 유튜브 댓글의 내용과 오해의 면면을 보면, 누군가의 삶을 단편적으로 접할 때 인간이 판단하는 방식의 오류와 위험성을 절감하게 된다. 무엇이 타인의 삶에 대한 판단을 그리 무모하고 단호하고 자신만만하게 만드는 지.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기억 위호 잊어도 되는 수만 가지의 기억을 쌓으며 살아간다. 어쩌면 그래서 치매에 걸리지 않은 내가 치매에 걸린 할머니보다 일상 속 소중한 기억을 더 쉽게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를 일이다. 내가 쭉 어머니의 보호자로 앞으로 살아가게 된 것인지, 그 시간이 좀 더 늦춰질지. 생각해보면 그리 두려워할 일만은 아니다. 변화가 불편한, 루틴을 좋아하는, 통제욕구가 강한 탓에 불필요하게 불안이 큰 것뿐일지도.
“이제 보호자는 바뀌었다. 그건 생각처럼 슬픈 일만은 아니다.”
언급했듯이 과장된 자극적인 슬픔과 비극이 없다. 관계란 모두 얼마간 어설프고, 모두가 애매한 타인일 뿐이었다면, 상황과 처지가 어떻게 달라졌든 담담하고 차분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건 극한으로 몰린 가족이나 보호자들을 몰라서, 무시하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각자의 상황에서 변화의 여지를 찾아내고 싶은 이들에게 분명 도움이 될 책이다. 담담해서 참 용기 있는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