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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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에 출간된 이 작품을 2024년에 읽으니, 배명훈 작가와 관련된 내 저장 데이터 공간이 우주 어딘가의 중력장 변화에 영향을 받아 형태를 바꾸는 기분이 든다. 낯선 곳을 방문한 듯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작품의 설정은 어떤 의미로는 고전적이다. 제목에서 느낀 궁금증은 전쟁과 사랑이라는 클래식한 두 소재의 공존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부재에, 어둡고 광대한 공간으로 확장되는 막막함에 더 깊어만 갔다.

 

그래, 그건 조난이야. 무언가에 깊숙이 잠겨버리고 만다는 뜻이지. 어둡고 고요하며 거대하고도 막막한 무언가에.”

 

허무감이 밀려왔어. 원래부터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거대한 공허를 비로소 발견한 건지도 몰라. 우주 출신의 태생적 존재론 같은 것 말이야.”

 

주인공 캐릭터는 지구생명체이자 지구문학독자인 내가 알고 있는 독립 개체가 아닌 듯도 하고, 우주 어딘가를 떠도는 의식체인 것도 같고, 작가의 의식 한편과 연결되어 마치 연kite처럼 우주로 날아간 지능체인 것도 같다.

 

이 전쟁은 왜 발발했는지, 누가 누구와 싸우는 건지, 퇴행한 지구에서 21세기에 벌어지는 학살과 파괴의 현장에서, ‘착한 편이라고 자칭한 이들의 거침없는 무자비함을 목격하듯, 공간이 확장된 만큼 더 막막하고 무의미하다.

 

그래서 사랑은 어디, 언제, 라고 조금은 불안해질 때, 나는 그 서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몰라, 애틋한 그리움만을 겨우 이해하는 사랑의 문장들을 만난다. 우주공간이란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이 배경이라서, 잘 모르는 그 사랑도 귀하디귀하다.

 

그냥 사랑하는게 아니고, 내가 날아온 거리만큼, 그 지긋지긋한 우주 공간만큼 사랑하는 거라고. 그래서 너를 한자리에 매어두고 싶다고.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어. 정말로 너를 매어두는 게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 부분이 애매했지. (...) 영혼에 관한 문제였으니까.”

 

이 사랑은 정말 타자간의 연애일까, 이름 없는, ‘반란군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주인공은,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가 문학이란 중력에 꼼짝없이 붙들려서, 존재와 세계와 허무에 대해 내내 고심하는 것처럼, 중력장으로 증거하고 복원으로 존재하는 존재 자체의 무게와 관계에 대한 고민과 소통에 대한 어려움을 읊조린다.

 

아무튼 지구 출신들은 여러모로 이상해.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윤리는 식인이나 근친상간에 관한 금기가 아니라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능력이래. 사람의 귀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자아의 소리나 양심의 소리를 알아듣기 훨씬 이전에 중력이 몸을 끌어당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나.”

 

독백처럼 들리는 문장들이 쓰라리고 서글프다. 찰나의 실존을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왜 이다지도 깊은 허무를 때로 느끼며 견뎌야할까. 대화와 응답은 물리적 거리보다 더 먼 이해의 차이를 확인시켜주는 경우가 더 많다.

 

우주에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어둡고 작은 행성 지구, 그 중력에 맞춰 태어난 우리는 이런 외양을 하고, 우주 공간에 겁먹으면서도 대담하게 우주로 나선다. 직접 가지 못하면 의식이라도 보낸다. 혹은 우주를 지구로 데려온다. 그건 지구에서의 삶이 때론 무척이나 외롭기 때문일까. 아무리 확장해보아도 여전히 외롭기 때문일까.

 

그리고 평화가 찾아왔어. 천천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혹은 반드시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는 시간이.”

 

전쟁도 사랑도 청혼도 모를 일이다. 다만 지구인간임Earth-humanness’*에 조금 울었다. * 이 작품에 없음. 내가 만든 조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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