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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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친구가 직접 이혼 소식을 알려왔다. 적당한 반응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이혼 이유도 말해줬다. 아주 행복한 감옥이었다고. 행복해도 감옥은 감옥이었단 뜻이라고 이해했다.

 

제목이 무서워서였을까. 구매해두고 기어이 해를 넘기고서야 뭔가를 쓸 결심이 생겼다. 매 해 읽고 기록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책 탑이 올라가는 것이 심적 부담이 되기도 하고,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해서, 새해 핑계로 해치울 결심.

 

현실이 더 구체적인 위협이라면, 문학은 농도가 높아서 더 위협적인 현실 같을 때가 있다. 백룸은 내게 감금, 폭력, 살해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지키고 선 입구 이외에 출구가 없다면 탈출은 불가능하다.

 

꼭 문으로 나가야된다는 선입견을 버리면 벽을 부수고 나갈 수도 있다. 그럴 힘이나 도구가 있는 지가 문제지만. 소설 속 작가들 사이의 세월의 간극만큼이 갇혀 산 혹은 벽을 두들긴 증거품 같기도 해서 서늘하고 두렵기도 했다.

 

새해라는 이유만으로 힘을 내어 희망과 미래를 일단 바라보고 싶은데, 차곡차곡 만들어간 모든 것을 외면하고는 한 발도 나아갈 수 없다는 엄중한 경고처럼, 마주보고 똑바로 보라는 듯 장면들이 펼쳐진다.

 

국가적 식민지는 형식적으로 끝났을지 모르나, 여성이 살고 있는 식민지는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잠시잠간의 해방의 기운 이후에는 더 극심한 백래시가 몰아닥칠 가능성도 높다. 퇴행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기는 시절이 반복될 지도 모른다.

 

이런 은밀하고 깊은 절망감에 비춰봐서일까. 식민지 조선을 살았던 여성의 심리가, 묘사가, 글이 더 눈부시게 놀랍게 빛난다. 게으른 좌절 대신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자신의 글로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만드는 작업이 담대하다. 멈추지 않는 모든 노력은 용기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제정신으로 견디기 어려운 굳건한 지옥, 가짜라도 행복한 지옥의 안온함과 갖가지 새로운 위험이 도사리는 현실 밖에 선택권이 없다고 느낄 때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지금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시한폭탄을 품은 것 같은 세계를 가까스로 통과해 걷는 중이다. 이대로 가면 길을 잃지 않고 그들에게 닿을 테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하긴 가정 내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다치고 죽는지 통계를 보면, 그 구분이 무의미하기도 하다. 가족이 안전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낯선 자가 더 위험한 세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숫자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피해의식과 보상심리 운운하는 것은 뻔뻔한 어불성설이다. 조용히 죽어가면 좋을 자들, 편할 자들이 누구인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아무 날이나 기사를 검색하면 어디선가 여성이 살해당했다.

 

밝고 맑게 살아보려 했는데, 현실도 문학도 봐주지 않는다. 악착같이 내가 누군지 기억하면서 제정신으로 백룸의 출구를 찾거나 없으면 만들어가는 수밖에. 더 교묘하게 고안된 착취와 폭력의 시절에, 누구의 생존도 타인의 선의나 호의에 좌우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백룸은 일종의 미궁이다. 현실의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고, 숨겨진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 백룸에서는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이 무한히 펼쳐진다. (...) 어두침침하고 축축한 복도를 따라가는 내내 자신의 위치나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장치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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