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 여성 잔혹사
서명숙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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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다. 어딘가에서 기억된 이미지에서 비롯된 고정된 형태이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 하얀 담배를 가볍게 잡고 한숨처럼 긴 호흡을 천천히 뱉는 일... 판타지를 실행하기엔 기관지가 너무 허약했다. 담배 없이도 온갖 질환을 겪으며 겨우 숨 쉬고 산다.

 

학창시절엔 어딘가에서 쓰레기를 소각하면 가장 먼저 알아서 친구들이 지표생물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새벽에 누벨바그 영화감독 트뤼포에 관한 책을 조금 읽다가 사진 자료들을 보니 담배와 담배 연기가 뽀얗게 가득...

 

출처를 알 수 없는 내 판타지 이미지와 흑백사진 속 무해하게 보이는 담배와 달리 잔혹사란 제목을 가진 이 책에는 잔혹한 서사가 있을 것이다. 굿즈를 구입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지 꽤 되었는데 참지 못하고 설레며 구입했다. 결심이 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차별의 영역은 우주처럼 넓어서 온갖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않은 곳이 없다. 히잡은 시각적으로 분명하니 저항의 이유로는 아주 설득력이 있다. 한국 사회의 성차별은 현란한 치장과 노련한 위선들에 싸여 본질을 알기 힘들기도 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경우도 많다.

 

““그냥 피웠어. 난 담배가 좋아.” 이런 심플한 대답을 하거나 아예 사건거리도 되지 않는, 담배에 대한 그런 사유를 바랍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이것마저통제하려드는 시도들에 뭐 이런 치사한 인간들이 있나 싶을 때가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토콘드리아 추적이라는 과학적 정보를 근거로 호주제를 폐지한 것이 인류 문명의 찰나적인 빛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담배 피는 여성에 대한 온갖 음해들... 은 별로 옮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저질스러웠다.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로도 사용되었다. 우아하게 살고 싶은데 욕이 또 나오려 한다. 오랜 시간 흡연을 한 저자가 겪은 생생한 체험과 사유와 역사가 된 삶을 따라가 보았다.

 

아직도 이 세계에서 여자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사태는 버림받고 제외되고 억눌리는 일이다. 그 세계의 더러움과 쓸쓸함을 한 대의 담배 속으로 절박하게 빨아들이는 문장들이 서명숙의 가장 좋은 페이지를 이룬다.” 김훈 작가의 추천사 일부

 

기우이겠지만, 항의 쪽지나 댓글 방지용으로 미리 언급하자면, 평등권을 위해 여성 흡연을 권장하는 내용 따위가 당연히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속속들이 차별 당한 논픽션이자, 태어나 살아온 시대의 기록이자, 동료 여성들의 흡연/금연기이자, 우리 모두의 선입견과 편견을 살피고 배워보는 자료이다.

 

지구상에서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그 모든 억압과 차별, 금기와 강요, 잔혹한 범죄가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이 책을 감히 세상에 다시 내보낸다.” 서문 저자의 말 일부



 

짐작보다 방대한 시공간 속의 여성들을 만나게 되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여러 차례 교차한다. 잔혹하고 통쾌한 일화들의 고유한 재미를 망칠 듯해 간략 소개는 생략한다. 대학시절 영초언니’(천영초) 자취방에서 처음 담배를 배운 저자는 현재 금연 7년째이다. 피는 대신 걷고 있다.

 

! 그림들이 글만큼 아주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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