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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비워둔 표지와 비슷한 매력을 지닌 문장들이 이어진다. 사유의 간격이 넓어서 많아서 서투르지만 생각과 상상을 채우며 읽어야했다. 그건 세상과 거의 완전하게 차단당한 주인공의 침묵의 순간처럼 들리는 전개였다.
소설 가독성이 무척 떨어진 상태로 가을을 보내다가 반가운 마음에 펼쳐 본 장편 소설에는, 판단을 유보한 인물의 삶이 있었다. 내 호흡의 속도를 늦췄다. 누가 누구를 경청하는지 궁금해 하지 않고도 경청하는 읽기의 시간이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관련된 대상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마땅히 그래야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신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의 감정이라면, 그 감정을 늘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고도로 진화되어 섬세하고 복잡한 인류의 감정을 태어난 지 몇 십 년 안 된 개별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상담사로서 해수의 일상은 중단되고 만다. 고통이 몇 배로 가중되는 모습에 안타깝고 답답했다.
그래도 해수는 움직였다. 편지를 쓰고 산책을 하고. 덕분에 나는 침잠하지 않았다. 충분히 살고 있는 해수였기에 길고양이의 아픔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믿는다. 천천히 조금씩 친해지는 시간이 좋았다. 조심스러움은 비폭력을 닮았다.
명백하게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범죄가 아닐 지라도, 때론 실수라해도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은 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잘못을 하지만, 책임에 따른 힘듦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되는 일도 있다. 그건 단지 법적 처벌의 유무나 경중만이 아니다.
좀 더 인간과 세상을 모를 때는 잘못을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비난하거나 욕하면 안 된다고만 생각했다. 어찌된 일인지, 어른이 되고 오래 살수록 세상에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을 모함하고 처벌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벌어진다.
그래서 더욱 어떤 입장도 취할 수가 없다. 구속되고 징역을 산 이들조차 세월이 지난 후에 힘겹게 조작이 밝혀지고, 정작 타인의 삶을 제 이익을 위해 멋대로 망가뜨린 범죄자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자격 박탈 소식이 없다.
현실이 자꾸만 소환되어, 묵묵하게 대가를 치르며 삶을 견디는 모습이 우직해보일 지경이다. 세상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종류의 고통들이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랄한 자들, 반성도 사과도 없는 가해자들, 사건의 피해자만이 아닌 누명을 쓴 피해자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자칫 한 발만 잘못해도 나락으로 떨어져버리는 구조 속의 좌절한 이들...
“이 순간은 이 순간일 뿐이다. 그녀가 과거에 겪은 어떤 일의 결과도, 원인도, 이유도 아니다. 시간은 곧게 나아가지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인과의 직선을 따라가지 않는 것처럼.”
지나치게 재빠른 판단과 말을 잠시 멈춰보는, 경청의 의식을 배운 기분이다. 차분하게 묵직하게 메시지가 스며드는 멋진 작품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선택일 수 있고, 때로는 뭔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말을 그녀는 삼킨다. 그런 이유로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니까. 이것은 결정이라기보다는 보류에 가까운 선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