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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브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평점 :
책임질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몹시 사치스럽게 존재론적 고민에 탐닉하던 짧은 시절도 있었지만, ‘눈을 뜨고 나니’ 물리적 현실은 한편 고난의 바다였고 다른 한편은 지옥도처럼 보였다. 일단 보게 되면 물릴 수는 없다. 당시에 함께 성장하던 친구 몇이 우울증 진단을 같이 받은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삶이 다채로운 맛과 향으로 구성된 서랍장이라면 성곤은 계속해서 한 가지 서랍만 열고 있었다. 분노, 짜증, 울분, 격분, 우울, 좌절이 가득 담긴 서랍 , 어느새 그는 다른 서랍을 여는 방법을 망각했다.”
“퇴화된 감각들은 토라진 아이처럼 안으로만 촉수를 뻗었다. 자연히 성곤은 자신의 슬픔과 절망에만 과도하게 집중했고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특히 가족을 탓했다.”
그래봐야 선택지는 뻔하다. 계속 살기로 하거나 마는 것. 살기로 했다면 살기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상담 시간들 중에 가장 투명하게 기억에 남은 조언은 ‘발가락이라도 움직여보라는 것.’ 나는 정말 발가락을 꼼지락해보았고,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었다.
자살을 시도하고 실패한 김성곤은 성공한 CEO의 텔레비전 토크쇼를 보다가 마음속에 변화를 향한 스파크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니.. 뭐든 움직여 보는 것, 인간은 움직일 수 있으면 아마도... 살 수도 있다. 그 순간을 견딜 힘이 생긴다.
속담 중에 참 이상한 것들도 많다. 예전에도 지푸라기를 잡아봐야 뭐하나 싶었는데... 간절함과 절박함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물에 안 뜨는 돌멩이라도 뭐라도 잡고 싶을 때가 테지... 지금은 지푸라기와 튜브 없이도 물에 뜰 수 있지만, 안전한 물 밖에서 한없이 가라앉아 바닥에 눌어붙는 때가 더 많아졌다.
“생각의 스위치는 끄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세요. 우린 항상 무언가를 판단하느라 에너지도 감정도 너무 많이 쓰고 있잖습니까. 그러다보면 자꾸만 소모적인 생각이 날아들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돼요.”
읽다 보면 손원평 작가의 글이 아닌 것 같은 내용도 만나고, 다시 예의 날카롭고 깊은 문장들도 보인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워서 반가운. 뭔가 내가 가진 작가에 대한 이미지와 기대가 딱딱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나보다.
“지금은 미래 같은 거 생각 안 해. 충분히 많이 해봤거든. 근데 도착해야 할 미래의 이정표를 너무 먼 곳에다 세워놓으니까, 현재가 전부 미래를 위한 재료가 되더라고.”
경험이 일천해서 나를 위로하는 시시한 방법은 알아도 타인을 제대로 위로하고 응원할 방법은 참 모르겠다. 그래도... 아무 것도 아닌 듯하다는 판단을 먼저 말고 자신의 주변을 쓱 둘러보고... 조금만 몸을 꼼지락하면 할 수 있는 뭔가를 해보길.
집 전체를 뽀득뽀득 치우고 청소하진 못해도 자신을 탓하지 말고, 조금만 하나만 치워보길. 물을 한 잔 천천히 다 마셔보길. 손을 깨끗하게 씻어보길. 뭐라고 그게 도움이 되길 염원한다. 우리가... 그래도 계속 좀 더 오래 함께 살아가길 바란다.
“삶을 관통하는 단 한가지 진리는, 그것이 계속 진행된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