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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김헌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3월
평점 :
굳이 답을 찾아야 하는 질문은 아니지만 신화 읽기를 왜 좋아하는지 궁금해질 때도 있다. 본격적으로 재미를 느낀 건 완역본이 제대로 출간되면서부터였다. 이전 관련 책들은 무척 조잡하거나 오역이 심하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편집이 지나친 내용들도 있었다.
완역본을 읽는 일은 다소 더듬거리며, 하지만 정직하게 문장 속에서 오래전 삶을 찾아가보는 일과 같다. 분업과 그 이상의 인간 소외가 본격화되기 전 도시 규모의 통합적인 삶은 의외로 복잡한 현대 사회 속의 부품도 못 되는 나의 위치를 바로 보게 해준다.
구분과 분류는 좀 더 세밀한 풍경을 볼 수 있게도 해주지만, 근시처럼 눈앞의 삶만을 알아보게도 한다. 살아보니 가장 무서운 일이 일상을 유지하는 일인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신화 속에서 시야를 드높게 하고 문명을 조망하는 고공관찰은 참 신나는 일이다.
세계를 상상하고 꿈꾸고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무모한 도전을 해보고 인간이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믿던 시절, 피부처럼 쪼그라든 내 세상의 경계를 한 번씩 늘리며 나는 매번 신화 읽기에 빠져든다는 생각이다.
그때 텍스트가 김헌 교수의 이 책처럼 분명하고 재미있고 쉽고 현실과의 접점이 많은, 그러면서도 총체적인 시선으로 신화를 다뤄준 것이면 즐거움은 더 커진다. 모르던 신화적 사실과 어원학etymological 지식 이외에도 신화와 현대를 잇는 맥락들을 만나 참 좋았다.
아테네는 겨우 100년의 영광을 누리다 쇠락하고 말았지만, 자손을 거듭하며 확장된 문화는 뿌리까지 깊게 내렸다. 어느 지역에서는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다른 지역에서는 찬란한 꽃을 피웠다. 인류 문명이 온존하는 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은 그치지 않고 섞여들 것이다.
문명사적 이해를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제 인류의 교양 과목으로 인정받아도 합당할 것이다. 어릴 적엔 미처 이해하지 못한 여러 은유들을 반평생을 살고서야 친구들과 편하게 얘기 나누어 볼 수 있었다. 뜻밖에 현대를 사는 인간의 윤리의식을 토로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의 가장 뚜렷한 장점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어색하지 않은 ‘현대적인 해석’일 것이다. 낯설어서 혹은 다른 두려움으로 거리감을 느끼는 분들은 가독성이 높은 내용에 놀랄 것이다. 강의를 녹취한 듯 편안한 말투로 글을 쓰셨다. 영상 자료*도 있으니 참고하셔도 좋을 듯.
* 최강1교시 등
필사를 하며 찍어 둔 책 사진을 보니 텍스트보다 아름다운 세밀화를 찍은 이미지가 더 많다. 학창시절 미술시간으로 돌아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을 석고 데생하는 시공간에 머무르듯 그리운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다.
신화의 세계와 세밀화가 가득한 친절하고 반가운 책이다. 꼭 종이책으로 만나시길 강권한다.
“우리 인간은 이 거대한 유기체인 지구 안에서 어떤 존재로 살고 있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무엇이, 어떤 제도와 믿음이 ‘스튁스강’의 역할를 하고 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정의롭게 사는 사람만이 정말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르 신화가 필요 없는 사회가 된다면, 플라톤이 꿈꾸던 이상 사회,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겠지요. 플라톤은 이런 나라를 ‘칼리폴리스Kallipolis’, 즉 ‘아름다운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어떤 나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