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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와 칸타의 장 - 마트 이야기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5
이영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4월
평점 :
체르노빌은 역사적 사실 같았다, 과거의 일이니 반성만 잘 하면 현재와 무관한 일이 되는. 그러나 2011년 후쿠시마는 그런 내 망상을 완전히 부수었다. 소위 기술강국 일본의 핵참사, 수습은 불가능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몇 달 전부터 바다로 냉각수를 뺀다고 했으니 - 실제론 이전부터 해왔을 지도 - 지금쯤은 착실하게 바다를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고 있을 것이다.
“나도 다른 식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기 생존 조건을 자기 손으로 파괴해서 멸망하게 된 걸 타살이라고 하긴 어렵잖아.”
강진 소식은 연일 들린다. 와중에 체르노빌과 유럽최대핵발전소 기지 주변에는 폭격이 가해지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괜찮을 거라고 일어나고 먹고 일하고 웃고 약속을 정하고 계획을 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모든 일이 문득문득 무용하고 미친 짓 같다.
“달짝지근함을 맛본 건 저희들이었는데 입 안 가득 먼지를 씹는 건 왜 나여야 하는데? 따스함을 즐긴 건 저희들이었는데 똥물에서 뒹구는 건 왜 나여야 하는데?”
이렇게 매일 불안하게 걱정에 휩싸여 살다가 어떤 형태든 멸망과 멸종을 맞으면 원귀가 될 것 같다. 찰나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다 때려치우고 이탈리아로 가서 휘발유 들이마시는 클래식카나 몰면서 콩스프조차 맛있는 진짜 맛있는 음식들만 먹으며 세상 따위 몰라라 살고 싶다. 그리고 현실은... 막 살고 싶은 위기의 순간마다 책을 잡고 버티기.
“이봐, 인간. 우리 환상존은, 뭐랄까, 불치병으로 섬망에 빠진 사람이 보는 환각 같은 거야. 빈사상태인 인류가 울고 웃으며 보는 환상이지.”
이 책 속 세계는 방사능으로 뒤덮인 아포칼립스! 생명체가 살기에 완벽하게 조화로운 세계를 추악하게 망친 인류를 뭐 하러 다시 세우려는지. “헛수고야...” 머릿속 비웃음을 견디며 계속 읽는다. 문학이 없이는 인류도 의미 없다는, 무려 시암송과 시문답을 인간 부흥의 핵심으로 여기는 아이디어가 환상... 다워서 마음에 든다.
“네가 목숨을 걸고 얻은 거니까 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야, 시하. 그건 네 것이 아냐. 그 노래들은 인간의 것이야. 넌 그걸 인류에게 돌려줘야 해.”
“인류의 정수야! 그걸 다운로드하지 못하면 우리 아이들은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뿐인 다른 생물이 될 거라고!”
시하는 모든 구전을 기억하는 존재이다. 칸타는 지금부터의 삶을 기록으로 문학으로 남길 존재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자신이 수명이 제한하는 삶의 경계를 넘어 수많은 타인과 다른 삶을 경험한다.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이해한다. 이야기를 믿는 존재의 운명이다.
SF와 디스토피아와 판타지 문학이라는 일반적인 장르 구분 이외에도 내부적으로 무수한 결의 차가 있는 것이 작품들의 실상일 것이다. 누구는 이 작품이 SF라고, 판타지라고, 독특한 환상문학이라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낯설고 새로워서 좋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누군가는 익숙한 판타지 게임을 해본 적이 없어서일까.
쥐, 요정, 동물원, 드래곤, 사랑의 묘약, 인간 무리, 갓파, 간다르바, 하늘비늘, 환상종들... 상상과 짐작이 두려운 현실의 미래를 피해 한참 잘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