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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런웨이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6
윤고은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8월
평점 :
어른이 되어 서점을 자유롭게 방문하고 책을 구입할 수 있기 전까지, 책을 만나러 가는 장소는 도서관이었다. 책이 목적이기도 했지만 도서관에 들어가는 그 순간의 ‘나’가 설레고 좋았다. 조용하고 정갈한 책의 거리, 서가 사이를 조용히 걸으면, 비염도 사라진 듯 책의 향기, 책 공간만의 냄새들이 심장을 떨리게 했다.
<도서관 런웨이> 책과 도서관을 사랑하는 독자 모두를 설레게 하는 작품의 시작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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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굽’이란 단어가 대학시절 도서관의 나를 소환한다. 브랜드 모델이 착용한 구두를 꼭 선물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굽이 딱딱한 신을 신고 아주 조심스럽게 걸어 다녔던 서가, 오후의 그 시간. 산더미 같은 과제에도 불구하고 흘낏 한 눈을 팔기도 했던 안온했던 장소였다.
그땐 도서관도 못 가보는 시절을 살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휴관이 늘고 언제가 휴관인지 헷갈리는 지경이 되어 불편해서 점점 더 안 가게 되었다. 지난 사진을 보다 마지막으로 찍은 도서관 사진이 작년 겨울이라는 걸 알고 놀랐고 슬펐다.
2년간의 영화와 책도 판데믹 시절을 굳이(?) 현실감 있게 묘사하거나 다루지는 않았다. 그래서 잠시 잊기도 했고 그래서 현실감 없는 작품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이 작품은 코로나 판데믹을 다큐처럼 묘사에 활용한다. 도서관은 제한 운영을 하고, 머무는 방문은 안 되고 겨우 대출만 할 수 있고, 결국 문을 닫고, 친구와는 줌으로 대화하고, 구체적인 거리두기 지침까지. 내가 경험한 현실의 풍경들이 서사에 펼쳐진다. 안나는 내내 마스크를 하고 도서 대출을 받으러 갔을 것이다.
결혼준비를 하는 중에 제목을 보고 대출한 몇 권 중에는 <지속 가능한 결혼생활을 위한 지침서>라는 책이 있었다. 가이드북이나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보험약관집’이다. 30년이 넘게 도서관을 열심히 들락거렸지만 보험약관집을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지 몰라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재밌기도 했다. 물론 내가 아는 그 매뉴얼 책자일 리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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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연한 비밀 혹은 상식처럼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다양한 신화와 아름다운 스토리로 장식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해피엔딩의 종착지로서 결혼은 계약관계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연애와 결혼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혼인 계약서에 양자가 합의하고 법적 관계를 성립시켰는지 아닌지의 차이이다.
혼인 외에도 현실에서 계약을 통하지 않고서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일들은 거의 없다. AS는커녕, 손해배상, 손실보상도 기대하기 어려운 결혼과 보험약관집이란 설정은 전혀 우습지도 생뚱맞지도 않게 느껴진다.
이런 현실은 ‘캐나다 동부를 여행하다, 지그재그로 뻗은 핼리팩스 도서관 내부를 걷는 런웨이를 계기로 만난 남자 정우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는 극도로 낭만적인 서사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여기 안심결혼보험에서요. 비동거에 따른 고독 항목이 있고 보험금을 지급하잖아요. 그럼 동거에 따른 고독, 거기에 대한 보장도 있었을까요?”
“결혼이란 게 동거에 따른 고독을 선택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건 예상 불가한 일이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 보험사에서 보장해줄 수 있는 게 아닐 듯하고요.”
도서관이 들어간 제목에 끌렸지만, 대거상Dagger* 수상자인 윤고은 작가의 작품이 어떤 내용일지 설레며 읽었다. 추리 스릴러 미스터리 요소가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단 생각에, 복선으로 보이는 것들을 찾아보려고도 했다. 완독 후 남은 것은 감정도 관계도 뒤엉킨 등장인물 네 명의 관계와, 조금 멍하니 ‘사랑’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보는 나였다.
“바닥을 보면 안나의 그림자와 거대한 나무의 그림자가 이미 꼭 붙어 있어서 서로의 실루엣을 무너뜨린 상태가 되어 있다고. 창밖에 바람이 불면 잎사귀의 그림자들은 더 요란하게 흔들리고 그 요동 속에서 그와 안나는 키스를 한다고. 그림자는 실체보다 더 빨리 닿는 거라고.”
“한 사람이 말하지, 우리 그럼 눈이 녹기 전에 끌어안읍시다.
눈이 있는 동안만 가능한 것처럼 서둘러 끌어안읍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거야. 그럽시다.”
친구 관계인 안나와 유리의 관계 묘사 중에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무척 많다. ‘어느 시기에는 많이 뭉쳐 있고 어느 시기에는 또 완전히 공백상태인 그런 관계’, 나도 이런 오랜 친구들이 있어서 읽는 중에도 문득 지난 시간을 돌아보곤 했다. 둘의 근무지가 이야기 소재와 찰떡인 여행사와 보험사인 것도 재미있다.
다소 평범하게 시작한다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이 서늘하게 내려앉기도 했고, 설레며 긴장하는 장면들도 있었다.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과 밖에 할 수 없는 찰나적이지만 체온을 교환하는 따뜻한 사랑이야기라니! 결론이 예상보다 따스해서 상상 속에서 뽀얗게 내린 눈보다 마음이 먼저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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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이라면 떡밥 회수를 잊으셨다고 알려 드리고 싶은 죽음도 완독을 하고 나니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다음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서관에 가면 <도서관 런웨이>가 꽂힌 서가 사이를 포스트잇을 붙이는 느낌으로 뒷굽을 내려놓으며 소심하게 걸어보고 싶다.
! 주의. 소설보다 더 공을 들인 것은 아닌가 싶은 ‘683쪽이나 되는 양장본 <안심결혼보험 약관집>’의 소개된 내용들이 기막히게 구체적이고 감탄스러워서 구해 읽고 싶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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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창립된 상. 추리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상 중 하나. 영국추리작가협회(Crime Writers' Association)는 각 부문별로 '대거(Dagger)' 상을 제정하고, 최고의 범죄, 스릴러 소설을 가리는 영예로운 상의 주인공들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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