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5
이소호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생을 함께 해도 이해할 수 없어 근원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나 자신인 경우가 있다타인은 다른 존재라서 그러려니 하는 관대함이 가능하고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향한 오해와 무지도 당연한 귀결이라 여기면 그뿐이다하지만 최초의 이유가 무엇이건 자신과 불화하기 시작한 이는 해법도 중단도 탈출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불화의 시간이 오래되고 내용이 구체적일수록 생존을 위해 일정 정도의 자아 분리는 필수불가결하게 된다자신을 타인처럼 뜯어낼 수 있다고 믿어야 바라볼 대상으로 대상화할 수 있고그 얼마간의 거리만큼 불화의 속도는 느려진다이것이 가능하려면 자신만의 요령과 비법으로 거듭 시도와 실패를 거듭해야하는 실험의 주체자로 상당한 시간을 살아야 한다.

 

나처럼 대체로 평범한 불화를 겪으며 적당히 자신을 타자화하는 것으로 견딜만한 경우와 달리존재의 구성물들을 철저히 분석하려는 이소호 시인이 불화를 대하는 방식은 신랄하게 해체적이고 지독스럽게 구성적이다전작에서 가족과의 불화에 결별을 고하고 난 뒤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듯 자아와의 불화를 총체화한다.

 

작품으로 남기로 한 이상원래 소호가 무엇이었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다이 시는 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나는 쉽게 불행해졌고 소비했고 앙상하게 껍데기만 남은 진짜 나를 남기고 싶었다읽고 싶은 소호를 배제하고 배열된 이 는 어떻게 읽히는가다행히 이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열렬히 사랑했고 처절하게 버림받았다조금 더 죽고 싶고 조금 덜 살고 싶었다이 작은 차이하나이면서 다수인영원히 반복되는 나는어쩔 수 없는 이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언급했듯이 시인은 분리와 해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기록과 작품과 전시와 설명의 방식을 동원해서 스스로의 불화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정리함으로써 재구성한다분명히 활자화된 기록이자 시의 형태를 유지하는 텍스트이지만일부의 구절을 떼어내어 유의미하게 보고 듣고 감상하기란 힘들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곳에 있는 무언가 있어야 하는 곳에 없는 것을 작업하던 이소호 시인은 데페이즈망 시는 이미 존재하지만 진정한 본질로 돌아가 오로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작업물을 만들어보겠다고 밝혔다. (...) 매일 꿈을 꾸고 꿈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오브제를 현실로 가져와 창작자 말고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을 쓰는 것이다시인의 만족감 외에는 전부 배제된 초현실의 평행세계를 만들어고립시키고혼합시키고수정하고우연히 만나고크기를 변화하고개념에 개념을 붙이고이중 이미지를 덧대면서 비논리를 논리적으로 쓰는 것이다.

 

시집처럼 보이는 이 책은 참전 기록이자 전시도록이자 오직 독자와 관객의 참여가 더해졌을 때 감각적 감상이 작동하는 예술 공간이기도 하다우리가 알던 방식으로 명명할 수 있는 기법과 소재들 사진그림텍스트 로 구성된 점이 평범한 독자로서의 나의 접근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느꼈다.

 

최초의 일독 후에는 할 말이라곤 떠오르지 않았다가까이 쳐다본다고 작품 이면의 메시지가 패턴처럼 떠오르지는 않았다옅은 감각처럼 남은 감상을 차라리 그림이든 몸부림이든 고함이든 여타의 매체로 표현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표현 가능한 방식인가 생각해 해보았다.

 

글쎄시가 뭘까이미지를 포착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글씨로.”

 

한동안 책과 시간을 함께 보내다보니 시인이 불온하게 직시하는 것을 나도 볼 수 있게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뭐라도 써보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뜨거운 불화들은 주체의 별스러움 탓이 아니다.

개별적 욕망이 끌어낸 사적 해프닝이 아니다.

오직 지난하고 집요하고 악의적으로 여성들을 조련하고 학대하는

폭력적 사회의 시선과 강고한 시스템을 고발한다.

 

우리끼리 통하는 언어로 쓰인 편지를 주고받은 기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