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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과 가죽의 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4
구병모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4월
평점 :
핀시리즈로 만나는 구병모 작가가 설레고 반갑다. 어릴 적 무척 좋아했던 동화의 일러스트가 기억나는, 어쩌면 구두처럼 생긴 집에서 사는 꿈을 기쁘게 꾸었을 지도 모르는, 흥분으로 살짝 숨이 가빠지는 기대만발 동화 모티브이다. 인간의 옷과 구두를 선물 받아 인간이 된 요정들을 만날 수 있다.
The Elves and the Shoemaker by Charles Folkard
The Elves and the Shoemaker by Anne Anderson & The Elves and the Shoemaker by Louis Rhead
그림형제Jakob Grimm, Wilhelm Grimm의 <구두장이와 꼬마요정 The elves and the shoemaker>에서는 요정들이 구두를 멋지게 만들어 주어 가난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 어떻게 되었어? 궁금하지 않았고 동화적 결말처럼 행복하게 사셨겠지, 하고 말았을 것이다.
요정들은 애초에 어떤 존재들이었는지,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어째서 구두 만드는 일을 그렇게 잘 할 수 있는지 구병모 작가의 이 책을 받아 드니 나도 끝없이 질문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 세상에 익숙해진 요정들이 어쩌면 답을 들려 줄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는 옷과 구두를 선물 받은 요정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였는데 이 책의 내용은 달라서 왠지 엄청 기쁘다. 풍성해진 애프터 이야기를 만나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인간과 어울려 사는 결심을 하게 만든 선물의 의미란, 선물이 가진 힘은 무엇일까 진지해져 봤다. 인간 세상에서 막 형성되던 근대 역사 속 풍경처럼 물물교환, 감사, 보은 이런 가치들을 요정들이 배우는 장면들은 어찌나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던지.
애써 알아내려 해봤자 알 수도 없지만, 몰라도 좋은 천년을 넘게 산 요정들의 이야기, 구병모 작가가 감사하게 그들의 생각을 짚어 들려주니 나는 어릴 적처럼 무책임한 상상력을 팽글팽글 돌리며 ‘바늘과 가죽’이 저 홀로 살아 만들어낸 시와 같은 문장들을 읽어 본다.
“존재들이 자기키의 반쯤 되는 바늘을 들고 춤추듯 흐르듯 거니는 동안 창틈으로 스미는 달빛이 바늘귀에 부딪친다.”
“어쩌면 신은 존재로 하여금 또 다른 존재와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하고 싶은 강렬한 소망과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데서 비롯한 절망만을 존재 안에 배열했을 뿐.”
기대수명에 비추어 반평생쯤 살아 버린 지라 간혹 노후도 죽음도 아직 전혀 대비할 필요가 없는 나이가 어쩔 수 없이 부럽긴 하다. 요정들에게 인간이 ‘몇 년 혹은 몇 십 년 뒤까지 꾸준히 찾아 올 리 없는, 세상에 잠깐 머물다 부서지는 한 알의 모래에 불과’한 존재가 인간이라니. 영원을 산다는 것은 인지 외부의 것이라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안은 숙명이나 법칙과 무관하고 부나 명예나 아름다움에의 탐닉이 아닌, 다만 누군가의 미소와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 구두를 지은 것이 그들의 시작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 그들이 이 같은 불완전한 몸, 신이 배열하고 조율한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육신을 입게 된 것이 오랜 노동 끝의 선물인지 저주인지, 이 몸의 의미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굳이 알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더는 쓸데없어진 것이라는 이유로, 아름답게 완성시키면 안 되나?”
다 읽고 나니 내내 슬픔이 찰랑거리는 짧은 글이었다. 영속하는 삶에 의미를 전해 줄 마음들을, 공간을 채워줄 만남들이 없다면, 끝이 없다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은 어떤 모습의 처참하게 시린 고통일 것인가. 사랑은 그래서 다 알고도 모르고도 유일하게 채워진 의미가 아닌가 한다.
“당신은 언젠가 사라질 테고 미아가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은 유실되어 흘러내릴 것이며…… 미아는 어쩌면 당신의 장소에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이 특별하고도 초월적인 자격을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부여할 수도 양도할 수도 없는 자리를 사람이 대체하는 날은, 언제까지나.”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알지 못하는 세계가 풀리지 않은 실타래처럼 실존의 양감만을 전해주는 닫힌 느낌이지만 그래도 좋다. 구병모 작가라 이런 편애적 감정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난해하든 아니든 신기하고 아름다운 글을 계속 써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고 싶은 심정.
핀시리즈 ‘시’가 매번 어려워 헤매고 우는 독자로서 ‘소설’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마음이 없지도 않은데, 이번 작품 제목에 ‘시’가 등장하는 이유는 읽고 나서야 짐작하였다.
아름답고 난해한 황홀한 시적 동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