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김포공항 쏜살 문고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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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린 작품으로 만난 세대가 아니라어느 해 어머니의 책장에서 무심코 꺼낸 작품으로 만난 작가가 박완서이다<이별의 김포공항>은 1966년 창립된 민음사의 로고 쏜살을 달고 재출간된 불안하고 아슬아슬하고 순수하고 더 쌀쌀맞고 거침없는 젊은 작가가 1974년에 발표한 동명 단편 소설을 포함한 4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한 페이지에 담기는 단출한 분량에 느긋해졌다가는 어느 한 문단에서 뼈 맞고 눈물 콧물 흘리는 꼴을 면치 못하리란 것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고이번 역시 거침없이 그러했다차마 혼자 하는 필사를 이어하지 못할 만큼 민망한 날 것으로 드러낸 누추하고 저열한 망가진 인간과 삶의 모습들이 작정하고 독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젊어 더 날카롭고 거침없고 준열한 호통들이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했던 시절의 사방팔방에 울리는 느낌이다특정한 누군가를 대변한다고 공표하지 않음으로써 무엇도 빠트리지 않는 예민하고 영민한 작가는 상스런 시대를 통째 후려치기도 한다일상의 바닥과 이면까지 훑으며 기어이 드러내야할 것들을 기어코 불러낸 그는 또한 그 모든 아픔과 분함과 원한을 기막힌 완결성을 지닌 문학으로 재탄생시킴으로써 용서 없지만 맑은 사회의 거울처럼 비춘다.

 

사람이 어떡허면 편하고 재미나게 사느냐를 생각하지 않고사람은 왜 사나뭐 이런 게지돈을 어떡허면 많이 벌 수 있나 하는 생각보다 돈은 왜 버나 뭐 이런 생각 말이야그리고 오늘 고깃국을 먹었으면 내일은 갈비찜을 먹을 궁리를 하는 게 순선데내 이웃은 우거짓국도 못 먹었는데 나만 고깃국을 먹은 게 아닌가 하고 이미 배 속에 들은 고깃국조차 의심하는 바보짓 말이다이렇게 자꾸 생각이 빗나가기 시작하면 영 사람 버리고 마는 거야. [카메라와 워커]

 

말랑한 위로 따위 한 마디도 없는 작가는 이 작품들에서도 역시 권력이든 금력이든 가진 자들의 야만성에 토악질하듯 글로 고발하고 생존의 위기 상황일지라도 속물성과 위선에 진저리치는 세계관을 망설임 없이 표현한다<82년 생 김지영>에 떠들썩하고 뜨거운 욕설 한 마디씩 토해낸 이들은 박완서 작품을 읽지 않은 이들이 분명하다쌀쌀맞고 거침없는 그의 언어들을 만난 적이 없음이 분명하다잡다한 버라이어티도 말끔한 다큐도 아닌 살아 있는 여성들의 처지와 삶을 어떻게 생생하게 고발했는지 모르는 이들이다온갖 환상과 허위의식에 관해 그의 언어들이 얼마나 사납고 불편할 정도로 차가웠는지 그의 존재 자체가 후대 여성 작가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이자 힘인지 전혀 이해 못하는 이들이다.

 

어릴 적엔 뭐가 재미난 지 잘 몰랐고 젊어서는 중견작가분의 옛 이야기처럼도 들렸다그 환한 웃음이 나비가 된 듯 그가 세상을 폴폴 날아 떠난 이후작가와 작품들은 해마다 젊어지고 나는 점점 더 지지부진 비겁한 중년이 되어간다그리고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노파는 운다삶의 뿌리가 뽑혔다고 여기며.

 

마침내 기체가 이륙한다는 것을 노파는 심한 충격과 함께 의식한다그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라 노파 하나만의 것인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크나큰 충격이다몇 백 년쯤 묵은 고목이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몽땅 뽑히는 일이 있다면 그때 받는 고목의 충격이 바로 이러하리라노파의 의식이 비로소 혼돈을 헤치고 뿌리 뽑힌 고목으로서의 스스로를 인식한다. [이별의 김포공항]

 

뿌리는 내리고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내 자리라고 믿는 것은 또 무엇인가더 나아지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절이라 다들 흔들리는 눈빛으로 매일 결심을 한다그 와중에 나는 매일 더 쭈그러드는 자신을 가만 지켜보며이렇게 계속 더 나빠질 수는 없지 않냐고...... 그렇게 묻기만 한다.

 

분명히 내 내부에는 유독 부끄러움에 과민한 병적인 감수성이 있어서 나는 늘 그 부분을 까진 피부를 보호하듯 조심조심 보호해야 했다그러자니 나는 늘 얌전하고 말썽 안 부리는눈에 안 띄는 모범생이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작가가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냉큼 꺼내 놓은 장면이 내 실상을 더 부끄럽게 한다어쩔 수 없이 살아 내야만 했던 노년의 여성의 모습에 작가는 과장도 포장도 없이 실감할 수 있냐고 만 묻는다이 구별되는 태도가 박완서 작가가 박완서 문학이 되는 지점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학대와 살해와 자살이 그치지 않는 현실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가 여성일 때 어떻게 세련되게 여성(작가로 소비되는 지는 인터뷰 사진 한 컷으로도 모두 설명될 때가 있다그래서 여전히 박완서’란 존재는 여성 작가와 독자들의 아픔과 삶에 있어 귀한 자긍심과 자부심과 의지 처로 실존하고 있다.

 

두 표현 다 전혀 좋아하진 않지만 박완서 작가는 국민어머니로 감히 소비할 수 없는 인물이자 어른이 귀한 시대의 어른이 맞다나는 지키고 싶은 귀한 가치가 있는 보수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늘 그를 통해 재확인한다치졸하고 저열한 그럴싸한 가짜들은 사정없이 까발리고 고발하는 자긍심과 용기와 능력이의 없이 인정하고 마는 품격 있는 한국 사회의 진짜 보수는 박완서 작가이다도깨비 말고 한 겨울 눈으로 박완서 작가나 다시 오셨으면 좋겠다그립다그립다.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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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김포공항>을 통해 정확히 배운 말.

 

1. 지청구까닭 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짓.

2. 금시발복어떤 일을 한 보람으로 당장 복을 받아 부귀를 누림.

3. 서발막대 거칠 것 없는가난해서 세간이 없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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