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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의 철학 여행 - 소설로 읽는 철학
잭 보언 지음, 하정임 옮김, 박이문 감수 / 다른 / 2020년 10월
평점 :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20세기에 정말 큰 도움을 받은 감사한 박이문 선생을 21세기에 다시 감수글로나마 만나 뵙게 되니 그리운 마음이 가득하다. 2017년 소천한 선생이 잠시 현장 복귀를 하신 듯 반갑다. <소피의 세계Sophie's World>는 명불허전 재미있고 좋은 책인데도 비교 우위라고 하시니 576쪽이나 되는 이 책, 철학의 주제들을 다룬다는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동했다. 네, 이제 철학책에 손이 잘 안 갑니다. 세상엔 다른 재미난 책들도 많다는 걸 알아버렸…….
‘라떼는’ 입문서라도 참 천편일률적 구성에 힘을 들여야 꾸준히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었고, 수업 교재는 영어책이나 독일어책이 선택되었다. 장단점이야 있겠지만 진지하고 묵직한 분위기와 학습 방식에 엄청 지쳐서 내용 이해와 발제에 모든 체력을 쓰고 정작 중요한 질문들을 떠올릴 여력이 없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술기운을 빌어 술자리 뒤풀이 토론이 활발했……. 그러니 ‘여행journey의 시작’이라고 적힌 목차가 기분 좋고 매력적이고 아주 조금은 억울하다.
압박과 억압에서 벗어나 여유만만 책을 뒤적이다 보니, ‘라떼에’ 한동안 유행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의 구성이 떠오른다. 논문보다 대화에 최적화된 추론과 예시들이 많아서 철학 주제의 화술에 능숙해지고 싶은 이들이라면 두고두고 유용할 책이다. 나도 청소년기에 만났다면 청년기에 철학적 방황(?)을 덜했으려나 아쉽기는 하지만, 꼭 청소년만을 위한 책도 아니다. 혹시라도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질문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던 과거의 기억이 있는 분들은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말끔한 기분을 맛보거나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각각의 주제에 대한 설명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이 책은 The Dream Weaver: One Boy's Journey Through The Landscape Of Reality. 원제처럼 신비롭고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언이란 주인공의 꿈속에 현명한 노인이 나타나 철학 훈련을 시켜준다 - 이런 꿈꾸고 싶으신 분~. 노인과의 꿈속의 대화, 부모와의 아침 시간의 토론, 친구 제프와의 하루.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꿈인가. 의외로 미스터리 추리물처럼 혼란스러운 재미난 설정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다. 이 부모 수상하다! 이 친구 이상하다! 그래서 노인은 미리 이런 이야기를 해두었을 지도.
“나는 철학이 일종의 범죄 현장 수사와 같다고 생각한다. 중략.
당신의 세계는 우리의 범죄 현장이다. 중략.
철학은 결국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최첨단 기술이다.”
“이언, ‘사물이 나타나 보이는 방식’과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단다.
전자, 즉 사물이 나타나 보이는 것을 ‘현상’이라 하고,
후자 즉 인식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을 ‘실재’라고 한단다.
알겠니?”
여기서 질문!(그냥 떠오른 질문, 책 내용과는 거의 상관이 없......)
1. 실체가 확실한 나의 육체인 뇌가 경험하는 일 -꿈- 이 실재 현상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2. reality란 언제나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realise한 것만이 실재하는가 - make your dreams come true.* realise your dreams. materialise your dreams. 이런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현실의 구현성과 동작성이 언어 표현에 남은 것이 아닐까.
3. 그렇다면 reality와 intelligence는 어느 쪽이 더 큰 세계인가.
* true와 dream이 무슨 관련이 있나, 하고 이상한 표현이라 늘 생각했다.
여러 해 전 어원학etymology하는 분께 문의해보니 14세기 후반에 true가 real과 동일한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속이 시원하게 이해되진 않지만 언어란 “우린 이렇게 해!” 면 족한 것, 그런 것.
이미지와 영상 조작은 구별이 불가능할 수준에 오른 듯하고, 가짜뉴스조차 매번 진위 판단이 어려운 시대이다. 조카의 부탁으로 함께 한 VR 체험에서 내가 경험한 어떤 현실보다 더 생생한 실재적 체험을 했다. 뇌가 섹시하다는 표현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 다들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진심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뇌는 자극을 정말 좋아하니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즐거워할 것만은 분명하다.
만취한 듯 글을 쓰고 있는 듯한데…… 어쨌든, 독해와 이해의 최고봉 칸트 철학 포함 등등의 철학서들을 외국어로 죽자 살자 읽어본 전공자로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뿐이다. 혹시 이 소설을 읽다가 화들짝 놀라거나 멈칫할 내용이 나와도 책을 덮지 마시고 호기롭게 무시(?)하고 흥미로운 부분들만 맛나게 먼저 읽으시길, 그렇게 즐기시길 바란다.
13개의 철학적 주제에 대한 답을 찾거나 외우지도 마시고,
13개의 기차역처럼 생각하시고 내리고 싶은 곳에 내려서 머물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하며 여행을 즐기시길.
153명의 인용된 철학자들을 모두 찾아서 공부하지도 마시고,
153명이 이 책의 여기저기서 등장하더라도 친하고 싶은 이들과만 통성명을 하시고 대화를 나누시길.
정보와 지식보다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방식과 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니,
2000년이 넘게 다뤄지는 주제들이 한 눈에 파악이 안 되도 괴로워하지 마시길 바란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관한 정보로서의 지식의 축적이나 무엇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의 연마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믿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해 반성적 물음을 던지고 거기서 ‘경이’를 발견하고 그 경이를 풀기 위한 논리적 사유를 추구하는 능력의 행사 자체라는 것이다. 박이문.
논리학은 수학적 사고에 필요한 기술이 아니라 자체가 철학분과이다.
“모든 것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무가 존재했을 거예요.
그러나 존재는 스스로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이 항상 존재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무만 있겠죠.”
예전에 이런 구절을 만나면 오른쪽 뇌가 지끈거리면서 암호 해독과도 같았던 하이덱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막 이런 책이 떠올라 괴로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문장들에 휘둘리지 않고 그런 생각들 다 내려놓고 내 존재와 세계의 존재에 대해 그저 차분히 한번 생각해보기만 하는 - 문제를 풀려하지 말고, 정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 시간을 보냈다. 20대에는 머릿속이 시끄럽고 마음이 복달 거려 수업 준비하다 울기도 했는데 뭘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제 뇌가 비명을 지르진 않는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일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과 교감도 해야 해.
그러면 결국 세계와도 교감할 수 있겠지. 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 거야.
그게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
뭐, 인생의 의미The meaning of life는 찾지 않은 지 오래이다. 포기한 게 아니라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 그보다는 의미의 수명The life of meaning을 정확히 아는 것이 더 자주 중요하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사안들도 모두 정해진 수명이 있다. 그걸 하염없이 붙잡고 헤매고 있는 건 짧디 짧은 인생을 확실히 낭비하거나 모범적인 꼰대가 되는 지름길이다.
너는 사실에 대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단다.
너는 생각하는 법을 배웠어.
어떤 것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의심하는 자세 말이야.
현실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속에 무한한 깊이를 감추고 있다는 것도.
꿈, 꿈, 꿈들을 여행하며 철학적 사고를 훈련받는 14살짜리를 따라다니며 통통한 책을 다 읽고 나니, 동시에 내 과거와 꿈속을 덩달아 헤매고 다녔더니, 그 번다한 층층 사이로 자유연상처럼 시가 한편 떠올랐다. 형이상학이라 우겨야 될 혼란스러운 서평의 마지막에 이게 다 고려된 철학적 배치였다 끝까지 우기며 남기려한다.
쓰러진 의자 박소란
고아처럼 웅크려 잠이 들었네
얘야,
무슨 꿈을 꾸었니?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저는 의자가 되었어요
의자로 살다 의자로 죽었어요
저런, 악몽이로구나
무서워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요 자꾸만 죽은 몸을 일으켜 세워요
자꾸만
무슨 꿈을 꾸었니? 물어요
저는 거짓말해요
아무 꿈도 꾸지 않았어요
마지막이라 했지만 덧붙이는 말 - 완전 주정 수준이네……. 이 책을 통해 철학적인 태도와 생각에 빠진 첫 번째 계기는 뜻밖에 표지의 띠지였다. 띠지의 각도를 바꾼 것만으로도 인상적인 사고의 회전을 경험했다. 대단히 철학적인 디자인이라고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감탄했다. 내용은 잊어도 이 띠지와 표지의 존재감만은 잊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한다.
네, 진짜utterly totally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