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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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지고 손상되고 상처 나고 부서진 모든 것에 자꾸만 끌리는 것,

이것이 나의 증상이다. 32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끼적이기도 한다.

박물관의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놓은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35

 

페이지 수에 연연하고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은 아니지만, 600페이지가 넘는 책의 무게감과 그에 비례하는 기대감은 기분 좋게 묵직하다. 노벨상에 수상 작가에 대한 기대감도 더해져서 장대한 서사의 이야기가 장쾌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116편의 단편들이 엮어져서 하나의 큰 이야기로 완성된 책이었다. 물론 읽어나가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들과 인물들과 사건들이었는데, 시간적 배경도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데, 그 모든 다채로운 시공간들에서 다채로운 사건들이 다른 생각을 더 할 여지를 주지 않고 몰입하게 만들고 저항 없이 전개를 순순히 따라가게 한다.

 

그러다보니 이 장편소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파악이 안 된다. 어쩌면 등장인물들과 시공간들이 여행지들이고 작가가 독자들을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하는 장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사는 일이 지속적인 이동이고 시공간을 차지하고 떠나는 일이고 다른 이들의 시공간과 교차하는 일이고 운이 좋으면 시공간이 확장되기도 하는 것이고 보면, 살아가고 살아온 일 전체가 ‘방랑’이자 ‘여행’이라 할 법하다는 늦은 깨달음이 들었다.

 

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버스의 진동, 자동차의 엔진 소리, 기차와 유람선의 흔들림. 19

 

유동성과 기동성, 환상성은 문명화된 사람들의 특성이다. 야만인들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거나 침략할 뿐이다. 82

 

그녀가 시간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내게 설파했다. 그녀에 따르면 농업에 종사하는 정착민들은 순환적 시간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길 원하는데, 그러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사건이 항상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며, 배아 상태로 쪼그라들어서 성장과 노화와 죽음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82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 여행지로 들어가는 여정이지만, 그곳의 시공간은 또한 다른 누군가의 일상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내 일상의 떠나 다른 이들의 일상을 엿보고 다른 세상의 단면들을 만나러 자신의 시공간과 일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니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나’의 여행기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저 넓은 세상에서 멈춤 없이 일어나서 늘 가득한 에피소드들을 내가 그 때 그것에서 경험해보는 것일 뿐이다. 그런 경험은 떠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의 방랑 혹은 여행은 순환을 계속되는 것일지도.

 

여행 심리학의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욕망입니다. 바로 이 욕망이 인간에게 이동성과 방향성을 부여하고 어딘가로 향하려는 성향을 일깨웁니다. 욕망 그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그저 방향만을 가리킬 뿐, 목적지를 드러내진 않으니까요. 목적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고 불확실한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애매해지고 수수께끼 같아집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목적지에 다다르거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118~120

 

무(無)에서 온 사람에게는 모든 이동이 다 귀환인 법이었다. 공허만큼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은 없기에. 136

 

삶이 이동이라면 죽음은 그 이동의 멈춤일 것이다. 심장이 움직이는 동안 열심히 방랑하고 여행하며 풍경과 이야기들을 보는 것, 가능하다면 사고도 자유롭게 움직이고 전환하는 것. 처음에 가졌던 의문과 어리둥절함의 원인이었던 116편이라는 단편들의 구성이 이제와 보니 세상의 경계들과 물리적 이동 시공간들로서 여행지들인 것도 같다. 그래서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는 일은 기억도 상상도 기분도 움직이고 사유하는 여행과도 같다. 그 과정에서 어느 여행지에서 경계에서 더 오랜 방랑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의 물리적 여행과 마찬가지로 몰랐던 새로운 세상의 여러 모습들과 마주하게 되고 마음이 정지하거나 이동하기도 한다. 사고도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는 말랑해져서 과거에 이해할 수 없다고 버티던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이해하게도 된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지인이 내게 말하길 그는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뭔가 새롭고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 다른 누군가와 감상을 나누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곁에 없으면 불행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과연 진정한 순례자가 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251

 

고대의 순례자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장소를 목적지로 정하고 거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성함을 체험하고 정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성지가 아니라 죄 많은 장소를 여행할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요? 사막이나 황무지를 여행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면 활기 넘치고 생산적인 장소를 여행한다면요? 264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280

 

다시 한 번 새삼 경계를 수없이 뛰어 넘겨주는 이런 한 권의 책을 만나 경외심이 든다. 매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창작이란.

 

자꾸만 평온과 무탈과 안전한 일상에 심신이 더 의존하게 되는 상황에서 가끔은 머리를 곧게 들고 책이든 물리적 시공간이든 자주 방랑하는 여행을 떠나볼 일이다.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나무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과 천장에 고정될 거야. (...)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391~392

 

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미소에는 일종의 약속이 담겨 있다. 그 미소가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 이번에는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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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esis 2019-11-3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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