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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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도 혹시 늦게 꽃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색하고 애잔한 소망


이 문장에 사로 잡혔다.

어릴 적 상 몇 번 받고 표현력 좀 있었다는 사람치고 비밀스럽게 자신이 예술과 학문의 분야에서 언젠가 빛나는 성공을 거두리란 상상 안해본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대가가 된 이들은 또 몇이나 있을까.

근거 없이 문소영 작가에게 혼자만의 친밀감을 한껏 느끼고 그가 들려 주는 글과 소개해주는 작품들을 열독하였다. 그런데 문소영 작가는 나의 비밀스럽게 좌절된 꿈과 열망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꿈이 큰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뭔가를 이루는게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


극소수보다는 좀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거나 생각을 전환시키고,

장기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


을 꿈꾸던 그리고 아마도 백세까지 꿈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꿈만 꾸는 사람도 아니고 많은 분야의 많은 이들과의 만남과 배움과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글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모든 것들로 꽉 채워 세상에 내어 놓는 그야말로 벅차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제공하는 훌륭한 강연자이기도 했다.

그것도 이론의 어느 부위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화자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 예를 들면, <페미니즘과 모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라면 2018년 개인전에서 만난 윤석남 작가의 말,


모성은 타인을, 특히 약자를, 아우르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당한 희생만을 강요하고 좁은 가정의 틀에 갇히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겁니다.

를 통해 묵직한 한 방의 기분좋은 충격을 머리와 가슴에 남겨 주는 식이었다.


<송광사 불일암 무소유길 여성 혼자 걷기>와 같은 직접 경험을 통한 섬세한 정서적 문제제기 또한 여성 독자인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공감과 감동을 동시에 전해주기에 넉넉했다.


더욱더 감동스러운 점은 문제제기와 사례 나열에 그치지 않고 마치 막 타오릭 시작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듯한 <~해야 한다>라는 문장들 또한 내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 혼자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비(非)유럽계 인종들이 인종차별 받지 않고 돌아다닐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내 불편함을 말해야 한다. 비록 그 변화가 산을 숟가락으로 떠서 옮기는 일 같더라도……

참으로 강단 있고도 온건하고도 아름다운 발언이다.


그 외에도 공장식축산업과 윤리, 기후문제의 상관성, 마치 괴테의 'Light theory'를 연상시키는 색채와 빛의 예술에 대한 설명, '나대지말라'는 한국식교육의 아픈 일화 등, 이런 에피소드들이 하나하나 모두 문소영 작가가 함께 실어 준 그림들을 제대로 감상하고 나아가 색채예술과 회화와 학문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인식에 배울거리를 제공한다.

굳이 고루한 논쟁인, 순수예술이냐 참여예술이냐의 구분과 논쟁을 떠올리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어쩌면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었던, 예술과 그 창작 터전인 사회에 대한 문제인식과 문제제기와 노력하는 이들의 활동과 작가가 지지하는 대안 예시 등이 묘하게 전체적으로 균형을 잘 이루면서 이야기를 한 시도 지루할 틈 없이 이어 나간다.


우리는 세상이 참 똥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 참다운 대책도 있으니까. 이 똥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똥 같은 세상을 그나마 낫게 만드는 것은 피해자를 비난하며 ‘나는 더 조심해야지.’라고 다짐하는 게 아니다. 가해자가 부당한 폭력을 저지르는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게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그리고 인식을 교육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물론 나쁘다, 하지만……’에서 제발 ‘하지만’ 뒤부터는 말하지 마세요.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함께 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 내가 언젠가 열심히 말했지만 그다지 들어주는 이들이 많지 않아 좌절했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가 또 해주는 것, 그건 우연히 마주친 행운보다 더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문소영 작가가 기발하고 황당한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좋아해주길, 그래서 이토록이나 기분좋게 산뜻하고 발랄하지만 단호하고 통쾌한 발언들이 이어지길 진심으로 응원하고자 한다. 다행히 블로그와 출간된 책들이 있으니 여름에 녹아 내릴 듯한 무거운 어깨가 조금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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