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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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진 많은 모순 중 하나는, 동서를 막론하고, 장르를 불문하고, '역사'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감상을 즐기지 못하는 주제에, 호기롭게도 젊고 어린 20대에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죽기 전에 조선왕조실록은 한번 읽어본다!"라고 맹약(?!)을 맺은 점이다.

 

물론, 그 호기롭던 맹서는 매년 새해 결심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빠지지 못하고 오르는 목록으로만 진전을 보고 있다. 그러니 내 마음 속엔, 역사 관련 문학이나 저술이 눈에 띌 때마다, 갈 곳을 잃은 맹렬한 호기심과 한편에 처박혀둔 열등감이 늘 솟아오른다. 그래서 이리저리 뒤적이는 노력은 하지만, 재밌게 잘 읽히는 경험도 학습이 제대로 되는 경험도 늘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 언저리 어디쯤을 맴돌고 있다는 점이 가끔은 제대로 된 도움을 받거나 행복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는데, 이번 민음사 출판 [대소설의 시대 1,2]는 그런 드문 경험 중 하나이며, 실상 기대 이상이기도 하였다.

 

<소설 조선왕조실록>이란 부제가 있고, 18세기 배경으로, 들어본 적 없는 '대소설'을 소재로 삼아, 실제 학술논문과 연구 자료들을 줄줄 달고 나온 추리소설! 실로 나에게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유혹들이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놀랐다. 재미있다!!!

 

디자인도 문체도 시대배경도 어찌나 단정한지 설마 이토록 죽죽 읽히는 와중에 흥미진진 추리가 논리적으로 펼쳐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거라면 <조선왕조실록> 이번 생에 읽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8세기 시대적 배경인데, 작가의 묘사력 덕인지, 배경이 되는 공간조차 생생히 떠올랐다. 인물의 대화 또한 어색한 점 하나 없이 그야말로 술술 읽힌다. 블랙아웃이 와서 뭘 빠트렸나 싶을 정도로 1권을 속도감 있게 읽었다.

 

작가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으나, 18세기 대소설 작가로서의 여성을 다룬다기에, 그 부분에서는 기대를 키우지 말자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산해인연록]이라는 200권에 가까운 대소설을 남성을 연상시키는 필명으로 23년간 써내려온 작가의 회상, 심정, 세계관 등을 서술하는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뻐근해져 왔다.

 

어떤 글은 눈물이 송송 차오르게 하는 반면, 이 책은 그 여성의 삶과 한과 자존심과 어려움 등을 시대는 다르지만, 삶은 그다지 나아진 것 같은 않은 사회의 여성을 살아가면서 겪은 크고 작은 직/간접 경험들을 떠오르게 하고, 무엇보다 공감의 감정을 깊숙이 느끼게 이끌어 주었다.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백탑파 시리즈]2003<방각본 살인 사건>으로 시작되어, 16년 간 510권이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이번 독서 경험을 통해 받은 감정의 흔들림이 큰 덕인지 성별을 떠나 김탁환 작가의 소설 세계를 더욱 잘 알고 싶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커져갔다.

 

다른 한편 소설을 전공한 독자라면, 이 글은 한편으론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친절한 내용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울 것이다. 물론, '소설은 시대의 거울'이라는 점에서 18세기의 소설과 21세기의 소설은 다르겠지만, 이런 소설의 역사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나로서는, 방대한 분량과 대단한 구성력을 가진 여성 문학이 조선시대에 각광을 받았고, 연구자들이 그 부분에 관해 열심히 연구하고 자료를 제공해왔다는 점이 상당히 감동스럽다.

 

어쩔 수 없이 처음 접한 '대하소설' [토지]박경리 작가가 떠오르는데, 반갑게도 책의 시작에 박경리 작가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


 

 

자주 드는 감정이고 이 분야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 무지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 연구목록과 책의 각 장이 시작될 때마다 소개되는 대소설을 읽은 바가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마지막으로 명실상부 6, 여름이 시작되니, 늘 하던 버릇대로 추리소설 생각이 가득하다. 추리소설의 애독자로서 지금껏 살아 온 독자로서 단언컨대, 이 책은 '메타소설' 장르 이외에도 '추리소설'로 분류되어야 하고 추리의 재미도 발군이다. 등장인물들도 쉽게 호감을 느끼는 캐릭터들과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의 적절한 등장으로 신선하고 기분 좋은 전개를 펼쳐 나간다. 마지막까지 결말이 어찌나 궁금하던지, 그래도 한 줄이라도 감히 건너 뛸 생각도 못하고 차근차근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라다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흔히 서평을 올릴 때 인용을 하는데, 그 분량을 극도로 줄여 본다. 스포일러는 제대로 이 소설 읽기의 재미를 결단코 망칠 것이다!)

 

한 작품에 매력적인 소재와 질문들이 가득하고 분량이 많을수록 제대로 재미를 줄 것 같고 정체를 흥미진진 드러내줄 것만 같은, 참으로 특별한 소설이다. 통상 유명세를 반기진 않지만, 오래도록 유명한 이유도 분명히 있는 게 맞는다면 김탁환 작가와 그의 작품들은 실로 그러하다. 언젠가 작가가 10권 이상의 역사장편소설을 출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는 의심도 주저도 없이 반갑게 그 작품을 읽을 것이다. 두 권으로 끝나 아쉽기만 한 [대소설의 시대 1,2]이다.

 

"임 작가님이 얼마나 귀한 소설가인지는 안다 이 말이오. 그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여태껏 살아오며 마음에 품었던 여인들과의 추억이 떠오르고, 또 제대로 잘 살기 위해 내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도 되돌아보게 되오. 소설이 읽는 이들에게 그처럼 귀한 선물을 준다면, 소설을 읽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오." 309


죽는 날까지 소설을 쓰다가 서안에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자랑하듯 떠드는 소설가도 있지. 무책임한 짓이야.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소설은 마무리 지어야 해.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는 인간이 소설가이듯 끝내는 자도 소설가여야 하거든. 끝내지 못한 채 쓰다가 죽어 버리면, 그 소설은 영영 미완성으로 남아.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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