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을 며칠전에 보았는데, 여운이 상당히 길게 남았던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 정보를 찾아보다가 놀라운 정보를 알게 되었는데, 이 영화도 원작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리스 컨스 굿윈의 <권력의 조건>이 그것이다.

 







21세기북스에서 역간하기도 한 이 책은 국내 번역본상으로 800쪽이 넘는, 말 그대로 대작이다.

그간 소설 같은 문학작품만 영화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링컨의 생애와 정치행적을 다룬 대중역사서도 이렇게 훌륭하게 영화화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다시 생각해보니,

한국 영화 중에서도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이 김충식 작가의 동명의 논픽션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비단 역사소설이 아니더라도, 잘 쓰인 역사서도 충분히 영화로 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기류 등으로 범위는 제한적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영화로 제작되었으면 싶은 책이 배명식 선생의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이봉창의 생애를 다룬 이봉창 평전이다. 저자는 "독립운동 영웅의 기록이 아닌 식민지 청년 노동자의 기록으로서의 이봉창의 삶" "민족 차별을 근간으로 하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이봉창 같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청년의 삶을 황폐화하는 과정" 등에 입각하여 이봉창의 삶을 서술했다.

 

이봉창은 1901년생으로, 신흥 자본가 아버지를 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가세가 기울어 형편이 어려워진 이봉창은 취직을 했고, 그곳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봉창은 그 차별에 체념하면서도 그 차별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별적 체제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혜택이 주어지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국세조사위원회 활동이 그런 예이다.

 

일본에서는 차별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이봉창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때부터 그는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지우고 더욱더 일본인이 되려 함으로써 차별을 없애려 하였다. 조선과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조선인 본명은 절대 밝히지 않았다. 그는 "신일본인"으로서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가 일본인이 되려 하면 할수록, 그가 느낀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기노시타 쇼조'가 아니라 '이봉창'으로서 살기로 결심한다. 이봉창은 31살에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났고 도쿄에서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영화 <링컨>, 수정헌법 13조를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때로는 비열한 수도 마다않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링컨을 그려내어 정치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면, <식민지 청년 이봉창>도 체제에서 소외된 식민지 백성의 내면을 통해 정치의 또 다른 한 측면을 드러낸다. 강유원의 서평을 옮겨보겠다.

 









"우리는 무엇이 이봉창을 분노케 하였고 자긍심을 돌아보게 하였는지를 알았다. 그것은 반드시 식민지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체제에서 소외되어 체제에서 떨려 나갈까 두려워 하면서 불안 속에서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해로 가기 전의 이봉창'처럼 체제에 순응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거짓 이름으로 살아간다면 체제에서 받아들여 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들에게 격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정치'임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챌 수 있다. 수많은 기노시타 쇼조들에게 본래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 333~334)

 

영화로 진짜 제작된다면, 흥행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인상깊게 볼 것 같다. (물론 잘 만들어진다면 말이다)

근데 꽤 스케일이 크겠다. 배경이 조선, 도쿄, 오사카, 상하이를 오가니

내 멋대로 캐스팅을 상상해봤는데,

이봉창 역에 배우 류준열 씨가 갑자기 떠오르더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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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모티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과 역사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 유서 깊은 역사만큼 복수 모티프를 다루는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햄릿>처럼 복수를 앞둔 개인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묘사한 작품도 있는 반면에

철저하게 복수가 성취되는 과정에만 집중하여 일종의 쾌락을 선사하는 작품도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시리즈는 후자에 속한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 제목만큼이나, 무척 단순하다.

킬러의 삶을 살던 블랙 맘바가 조직을 떠나 한 남자와 만나 새출발을 하려했지만

결혼식날 조직에서 온 킬러들이 자신의 남편과 친구들을 모두 죽이고, 그녀 자신도 죽을 뻔했다.

죽다 살아난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 한 인물들을 차례대로 찾아가 처치한다.

주인공의 복수의 달성이라는 목표가 이 영화의 유일한 지향점이며,

그 과정에서 영화는 액션영화로서 장르적 쾌감에 집중하며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복수의 딜레마나 주인공의 내적 갈등은 이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복수 액션 활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작중 등장하는 액션 장면은 감독이 좋아하던 아시아 액션 영화에서 대부분 모티프를 따왔다.

영화를 좋아하는 비평가들이야 무슨 영화들이 차용되었는지 잘 알겠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아예 모르지만 (대충 이소룡이랑 성룡 영화 오마주는 보였다)

영화의 흐름이 너무나 재밌어서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원래 감독은 킬 빌 시리즈를 한 편의 영화로 기획했지만,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 때문에 1/2부로 나누어서 개봉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편의 영화였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1부와 2부의 느낌이 매우 다르다.

액션의 종류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B급 액션 영화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느껴졌다.

1부는 일본 액션 영화에 대한 오마주들이 느껴졌다.

블랙 맘바는 최고의 일본도 명인이자 검객이었으나 현재는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느껴 오키나와에서 스시 장사를 하는 핫토리 한조를 찾아가 칼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설정 많이 익숙하다)

한조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자신의 제자였던 빌을 저지하겠다는 블랙 맘바의 요구에 심혈을 기울여 그녀만을 위한 칼을 제작해주었다.

(찾아보니 한조 역을 맡은 배우가 과거 야쿠자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배우라고 한다)


 

이 칼은, 1부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청엽정에서의 전투씬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

블랙 맘바는 청엽정에서 자신의 죽이려 한 인물 중 한 명이자 도쿄 야쿠자계를 평정한 오렌 이시이

그리고 그녀가 이끄는 '크레이지 88'88명을 혼자서 처치해 무쌍을 찍는다.

 

 

2부는 과거 홍콩 액션 무협 영화의 오마주가 주를 이룬다.

블랙 맘바는 무림의 고수 파이 메이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받는다.

물양동이를 지고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주먹으로 나무판을 때린다거나 모두 무림 영화에서 흔하게 나오던 전형적인 수련법들이다.

이것도 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다만 주인공이 성룡이 아니라 금발의 백인으로 바뀌었을 뿐. 

2부에서 사용되는 플롯도 과거 무림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것인데,

자신의 목숨을 노린 인물이 사실 자신의 스승까지 죽인 것을 알게 되자 스승의 복수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참고로 파이 메이 역을 맡은 배우 '유가휘'도 홍콩 무술 영화로 명성을 떨친 배우라고 한다.

이쯤되면 그냥 감독이 자기 좋아하던 배우들 만나고 싶어서 만든 영화가 아닌가 싶다.

 

 

액션 영화이니만큼, 이 영화에서는 어딘가 웃기면서도 수려한 액션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앞서 말한 청엽정 전투는 1, 2부 통틀어서도 최고의 액선씬인데,

고고 유바리와의 전투도 액션 합이나 안무가 너무나 잘 만들어져 멋있었지만,

당연 최고는 오렌 이시이와의 전투였다.

눈이 내려서 눈이 소복이 쌓인 일본식 정원 위에서 두 인물이 일본도로 건곤일척을 벌인다.

이런 요소들이 합해져 감독은 매우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쉬한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액션 장면 못지 않게 영화의 OST를 적절하게 활용한 것도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특히나 한국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하면 바로 생각나는 노래인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의 박자에 맞춰

칼을 맞대는 오렌 이시이와 블랙 맘바의 전투 장면은 그중에서도 내 원픽.

 

영화 OST를 르자(RZA)가 담당한 것도 웃긴 부분이었다.

르자는 힙합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힙합 크루 우탱 클랜(Wu-tang Clan)의 리더이다.

우탱 클랜의 멤버들은 모두 홍콩 무협 영화의 팬인데(우탱이라는 이름도 무당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들의 1'Enter the Wu-Tang (36 chambers)'90년대 뉴욕 붐뱁 감성을 대표하면서

또 수록곡 곳곳에 무협 영화를 오마주한 부분이 인상적인 앨범이다. 앨범 제목 자체도 '소림 36'의 영어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 인물이 아시아 액션 영화의 오마주로 가득 찬 영화의 OST를 담당했다는 것에서 감독의 진심(?)이 느껴졌다.

 

 

음악, 액션 등을 통해 감독은 액션 오락 영화로서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것 같다.

복잡한 설정이나, 무거운 주제의식과 복수의 딜레마 같은 것은 없다.

감독은 액션 영화로서 장르적 쾌감에 집중할 뿐이다.

따라서 <햄릿>과 달리 복잡하지 않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영화의 맛은 좀 떨어졌을 것 같다.

 


간혹 교복을 입고 모닝스타를 들고 싸우는 17세 여고생 고고 유바리처럼

말도 안되는 설정이 등장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설정의 존재가 도리어

이 영화의 픽션성과 오락성을 강화하여 장르적 재미는 도리어 배가 된다.

그래서 유혈이 낭자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기 예사인 잔인함 속에서도

이 영화는 특유의 유쾌함과 리드미컬함을 잃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뒤에는

복수를 달성한 뒤 차를 타고 돌아가는 블랙 맘바의 얼굴이 흑백에 클로즈업된 채 보여준다.

아무 대사 없이 그녀의 얼굴만이 나오는데,

여러번 죽을 위험을 넘기고 목표를 이룬 인물의 표정을 잘 보여준 것 같아

인상적인 마무리였다.

 

액션, 음악, 코믹 등 오락영화로서 갖출 것은 모두 갖추었고

거기에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쉬한 연출까지 가미되었으니, 

매우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머리 뜨거운 여름철에, 머리 식힐겸 가볍게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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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9-26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트맨 <다크나이트>처럼 약간의 철학도 담겨 있어서 더 여운이 남았던 영화였어요! OST도 너무 좋고요.

Redman 2021-09-26 21:09   좋아요 3 | URL
여러가지로 좋은 영화였습니다

mini74 2021-09-26 2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독이 본인이 좋아하는 모든 걸 넣은 느낌 ㅎㅎ 그런데 영화도 재미있었던 ㅎㅎ 이소룡옷이 그렇게 멋져보인데는 우마서먼이라서 그렇겠지요. 저는 ㅠㅠ ㅎㅎ

Redman 2021-09-26 21:09   좋아요 3 | URL
저도...ㅋㅋㅋ ㅠㅠ
 

















종종 한 작품의 번역본을 여러 종 구매한다. 여러 번역본을 구매하는 이유는 다른 역자의 번역이 궁금하다기보다는(그것도 없지는 않지만), 평균 20쪽가량의 역자 해설이 궁금해서이다.

 

역자는 자신이 옮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으로 규정하며, 이 작품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고려사항으로 무엇을 꼽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현대에 어떠한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는지. 그래서 이를 통해서 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시야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새로운 번역본을 산다.

 

이렇게 보면, 역자의 해설에는 대략 다음의 것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작품에 대한 일반적 의미 규정, 작품의 구조와 형식, 시대적 정황, 현대적 의의 등이 그것이다. 대다수의 고전 번역은 시대적 배경이나 저자의 생애를 길게 서술하는데, 정작 나는 저자 생애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시대적 배경도 최소한의 수준만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3개월 전에 민음사에서 출간한 <오만과 편견>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이번에 조선정이 번역한 을유문화사 <오만과 편견>을 구매했다. 역자 조선정은 영국소설과 여성 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로, 민음사 서울대 인문 강의시리즈로 <제인 오스틴의 여성적 글쓰기: <오만과 편견> 새롭게 읽기>라는 고전 해설서이자 교양서적을 낸 적이 있는 인물이다. 제인 오스틴 역자로서는 매우 안성맞춤이고, 다른 번역자들이 놓쳤을 중요한 발견이나 사실이 있지 않을까 하여 조선정 역을 구매했다. 여기서는 역자의 해설만을 요약 정리하겠다.

 

역자 해설의 제목은 일상의 발견, 그 미학과 윤리이다. 여기에는 역자가 생각하는 제인 오스틴의 문학적 성취와 역자가 내리는 <오만과 편견>에 대한 의미 규정이 들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일상의 발견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에도 나름의 치열한 생존 투쟁이 있고 그에 따른 희로애락의 진실이 녹아 있음을 빼어난 소설 언어로 보여준다는 데에 오스틴의 성취가 있다. 그것을 일상의 발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392p)

 

(참고로 민음사판 윤지관/전승희 역 <오만과 편견> 해설의 제목은 제인 오스틴의 삶과 문학, 그리고 <오만과 편견>”이다. 해설의 상당 부분은 제인 오스틴의 삶을 설명했다. 제목만 봐도 차이점이 느껴진다)

 

일상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저자는 풍속 소설의 본령이라고 재규정한다. ‘풍속이란 영어 단어로는 매너(mannars)’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지켜야 하는 적절한 예법과 규범의 체계를 의미한다.”(393p) 매너에는 식사 예법 등의 예절도 포함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태도, 그리고 그 태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까지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매너가 좋다라고 할 때는, 예의범절은 물론이며 사람의 품성, 그가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력까지 끼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매너가 적절하다라고도 표현하는데, 제인 오스틴은 바로 적절한 매너에 대해 묻는 작품이며, 그런 의미에서 풍속 소설의 본령이라는 것이다.

 

오스틴이 그린 풍속 세계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오늘날 중산층과 의미가 어느 정도 통하는 중상류 신사 계층인 젠트리(gentry)이다.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다아시, 빙리, 베넷 가, 위컴 등은 사회적 지위나 재산, 교양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젠트리 계층에 속한다. 오스틴은 같은 젠트리 계층이지만 매우 상이한 배경을 가진 남녀를 내세워, 이들이 어떻게 적절하게어울리며, 그것이 적절한지는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요 개념이 제목에 쓰인 오만’(pride)편견’(prejudice)이다. “제목에 쓰인 오만편견이라는 두 단어는 젠트리의 정체성에 직결된 개념이자 좋은 매너의 핵심적인 기준이다.” (398p)

 

오만은 지위나 재산, 교양에서 깨나 가진 사람이라야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오만을 상징하는 인물인 다아시 씨가 바로 오만함의 자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여기서 오만은 정확히 말해 자존심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수월하겠다. 그는 작위는 없지만 부유한 가문의 상속자로 연 수입 1만 파운드에 귀족적 지위를 누리는 독신 남성이다. 그는 젠트리 계층에서도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오만하게 구는 것은 젠트리 계층의 일반적 매너 기준에서 봤을 때는 당연한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이 다아시 정도의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그의 오만을 수긍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 편견확고한 자기 믿음을 의미한다. 작중 유일하게 다아시를 거리낌 없이 대하거나, 캐서린 드 버그 여사와 기 싸움을 벌이는 등 엘리자베스가 유쾌한 장난기를 보여주는 것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장난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재기를 과시하려는 욕망에 크게 빚지고 있다.”(401p)

 

제인 오스틴은 두 개념에 모두 비판적 자세를 취한다. 오만에 대한 비판은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한 부분을 비롯하여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오만이 신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다아시가 충격을 받았을 부분은, 젠트리로서 한 번도 의심한 적도, 의심받은 적도 없는 오만이라는 정체성이 젠트리로서의 신사다움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엘리자베스의 편견은 극단적인 경우 젠트리 계층 전체와 자신의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리디아의 갑작스러운 사랑의 도피는 확고한 자기 믿음이 지나치게 발현되어 건방지고 경솔하고 까부는 태도”(401p)가 되어버린 사례이다. 이것 역시 적절한 매너는 아니다.

 

제인 오스틴은 이런 식으로 기존의 오만과 편견을 비판하는 동시에 재정의함으로써 그때까지의 적절한 매너의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의 가능성을 연다. 다아시는 자신의 오만을 반성하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편견을 반성한다. “오만할 만한 다아시는 자신의 풍부한 자원을 적극 활용하고 베푸는 방식으로 오만을 극복한다. 오만은 악덕이 아니라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비로운 권력으로 환원된다.”(403p)

 

제인 오스틴이 탁월한 부분은 이런 주제를 전개하는 데 있어 시종일관 일상의 맥락을 놓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19세기 영국 시골의 풍속, 젠트리 남성들의 경제적 상황이나 가부장적 의식, 그 속에서 젠트리 여성의 열악하고 위태로운 지위 등이 오스틴은 소설에서 묘사한다. 이러한 일상성은 오스틴 소설의 큰 특징인 결혼 플롯과도 연결된다. “<오만과 편견>이 이전의 결혼 플롯 소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결혼과 일상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결혼이 보상이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일상과 밀착되어 그려진다.”(394p) 샬럿, 리디아, 제인, 엘리자베스 등의 캐릭터를 통해 그려내는 로맨스와 결혼의 과정은 로맨틱하기보다는 현실적이며 치열하다. 이렇게 볼 때, ‘일상의 발견이라는 역자의 규정은 적절하다.

 

영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제인 오스틴을 혹은 소설로 오스틴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을 뽑았다는 소식을 가끔 듣는다.”(389p) 같은 굳이 쓰지 않아도 되었을 문장이 첫 문장으로 들어간 것 정도를 빼면, 좋은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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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특히 고전 번역에서 번역가가 우선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정확성? 혹은 가독성? 물론 원문의 뉘앙스와 의미를 그대로 살리면서 읽기도 어렵지 않은 문장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번역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양자택일을 하게 되는데, 정확성과 가독성 중에서 전자를 당연히 더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의미 전달부터 제대로 이루어질 때 읽기 좋게 다듬어진 문장들도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 번역서를 고를 때 문장이 '너무' 깔끔한 번역은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읽기 편하다는 것인데, 그말인즉슨 원전의 고유성이 훼손되고 지나치게 한국 독자 친화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고전이란 낯설고 불편한 책이다. 고전의 어휘, 문체, 책의 구조, 그리고 고전에 전제된 당시의 가치관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다. 고전을 쓴 저자는 우리와 역사적 맥락이 상이한 시공간에서 산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당연하고 보통의 것이 우리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음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고전을 읽을 때 어떤 식으로든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는 요소이며, 그 또한 고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에게 너무 친숙하다는 느낌이 들 때 위화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고전을 번역할 때는 그 낯설음과 불편한 느낌까지 살려야 고전을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할 수 있겠다.



고전 번역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 생각할 때, 하비 맨스필드가 번역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The Prince, University of Chicago Press)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하비 맨스필드는 고급 영어 문장을 구사하는 학자이고, 학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삼는 인물의 글쓰기는 어떠한지 알 수 있는 글을 쓰기에, 그가 쓴 <군주론> 서문(Introduction)과 번역에 관한 주석(A Note on the Translation)을 반복해서 읽어볼 만하다.


특히, 3 페이지 가량의 번역에 관한 주석을 통해 우리는 번역에 관한 하비 맨스필드의 견해를 알 수 있다. 그는 여타의 <군주론> 번역과는 차이가 나는 자신의 번역론의 우월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Since I am convinced that Machiavelli was one of the greatest and sublest minds to whom we have access, I take very seriously the translator's obligation to present a writer's thought in his own words, insofar as possible. It did not seem to me my duty, therefore, to find a rough equivalent to Machiavelli's words in up-to-date, colloquial prose, and to avoid cognates at all costs.

<The Prince>, A Note on the Translation, xxv.


"해석: 마키아벨리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지성들 중 가장 위대하고 또 가장 미묘한 사상가이므로, 나는 저자의 사상을 그 저자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다는 번역가로서의 의무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쓴 용어와 의미가 얼추 맞는 요즘 단어나 구어체를 쓴다거나, 어원이 같은 단어를 어떻게든 피하는 것은 나의 의무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길지 않지만 읽기 까다로운 작품이다. 비단 마키아벨리뿐 아니라 고전에 속하는 다른 작품들(성경, 호메로스의 서사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플라톤의 대화편, 그리스 비극 등)도 현대 독자에게는 넘기 힘든 벽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 원인은 고전이 쓰인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의 간격이 크다. 이때 번역자는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정결하게 다듬거나 독자에게 친숙한 용어를 쓸 수 있다. 그러나 하비 맨스필드는 그러한 노력은 번역가의 의무가 아니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저자의 사상을 저자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만이 번여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에 따르면, 원문의 문장이 복잡하게 되어 있으면, 쉬운 문장으로 고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옮겨야 한다. 설령 현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원전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 단어를 써야 한다. 그는 이 원칙이야말로 원전의 의미를 가장 충실하면서 역자의 해석이 개입되지 않는 고전 번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 번역과 달리 자신의 번역은 이 원칙을 지켰으므로, 결국 자신의 번역이 가장 우월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하비 맨스필드가 말하는 번역 원칙은 비단 단어와 문장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 읽은 한 기사(하단 링크 참조)에 따르면, 최근 출판계 동향 중에는 '젠더 개정'과 '성인지 감수성의 향상'이 있다고 한다. 과거 출간된 문학 작품 중에서 성차별적, 여성비하적, 가부장적 표현과 문장들을 대폭 개정하여 책을 다시 내는 것이다. <유진과 유진> 등을 저술한 이금이가 이 기사에서 소개된 사례이다. 가령 이금이는 "소라는 세번은 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너무 쉬운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다나."라는 <유진과 유진>의 한 구절을 "소라는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린 거라고 했다. 내가 잡고 싶으면 잡고 싫으면 말고."로 문장을 수정하였다.


이러한 젠더 개정의 흐름은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문학전집'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유명한 열린책들이 이 흐름을 주도하는 출판사이다. 이들은 여성에 대한 비칭을 수정하는 한편, 남자는 반말을 쓰고 여자는 경어를 쓰는 가부장적 번역 등 성인지 감수성에 맞지 않는 번역을 수정하여 지속적으로 개정판을 내고 있다. '열린책들'의 이사 김영준은 "책의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필요하다"고 '젠더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얼마 전 개정판이 나온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유)도 젠더 개정이 시도된 다른 사례이다. 역자 이정순은 보부아르의 유명한 경구 ""에서 '만들어지다'는 "여성의 수동성이 부각된 표현"이라며 "여성에게 자율성이 없으면 여성 해방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표현을 '되는 것이다'로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이금이처럼 저자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개정하는 것은 일개 독자로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번역의 경우는 다르다. 앞에서 언급한 열린책들이나 이정순의 경우, 번역의 기준은 사용된 번역어나 표현이 얼마나 가까운지가 아니라 성인지 감수성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이다. 특히나 <제2의 성>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헌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역자 이정순은 그리 신중치 못한 듯하다.


젠더 개정 같은 현재주의적 번역은 몇 가지 문제점이 곧바로 드러난다. 우선 젠더 개정은 성인지 감수성 같은 주먹구구식 개념을 기준으로 원전을 인위적으로 재단함으로써 원문의 의미를 제한시키고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고전을 좋아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이런 번역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앞에서 말했듯 고전 독서에서는 불편함까지 독서의 한 과정이 된다. 이 불편함에는 익숙치 않은 단어나 문체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현대와 다른 가치 체계에서 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과거 텍스트에서 현대적 페미니즘이나 성인지 감수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성차별적 단어이든 "유교 패치"이든,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원전의 의미와 뉘앙스를 살려 온전히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단어를 써야 한다(이 말을 내가 성차별에 찬성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구태여 다른 단어나 표현을 찾을 필요가 없다. 번역가는 고전 속 불편함도 전달할 의무가 있다. 다른 것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독자로서도 이 불편함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넘느냐가 고전을 읽을 때의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자의적 번역의 행태가 낣은 인식을 버리고 책을 새롭게 하여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명분에 의해 합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치관에 맞게 새롭게 번역을 한다는 것은, 고전의 불편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전 텍스트를 우리 시대 속에서만 살게 하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김영준은 젠더 번역이 책을 현재의 가치와 부합하여 책의 생명을 늘리고 독자가 느낄 위화감을 줄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려는 번역 시도는 실제로는 원문의 풍부함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죽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위화감이 적은 번역이 좋은 번역일까? 과연 젠더 감수성이라는 한 가지 기준에 맞춰 현대적으로 재단된 텍스트가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통할 수 있을까? 김영준의 천박한 발언은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출판사의 이사나 되는 인물이 할 말로는 적절치 않은 것이다. 반대로 출판사의 신뢰성까지 떨어트린다.


김영준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정으로 책의 생명력을 연장하여 영구적으로 남는 번역물을 만들고 싶다면, 하비 맨스필드의 다음 말을 가슴에 새기라고.


"마키아벨리의 글은 우리의 도움 없이도 살 것이다. 우리가 오직 우리 시대의 말 속에서만 살도록 만드는 호의로 그의 텍스트를 질식시킬 때, 그의 글은 죽을 것이다."

(Machiavelli's text will live without our help, and it will die if we suffocate it with the sort of hospitality that allows it to live with us only on our terms.) <The Prince>, 같은 곳


마키아벨리를 현대 친화적으로 만들 경우, 마키아벨리의 글은 생명력을 상실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책의 생명을 늘리는 방법이 과연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것일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성인지 감수성이 향상된 번역이 아니라 원전의 불편함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번역이다.




기사 링크: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6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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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24 0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 개정판에서의 ‘되다‘ 보다는 ‘만들어지다‘ 가 보부아르 <제2의 성>의 맥락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에 좀 유감이거든요. 그런데 원문인 프랑스어에서도 그리고 영어 번역본에서도 ‘되다‘란 뜻의 동사(become)가 쓰였다고 친구가 알려주더라고요. 흠.

그레이스 2021-09-24 0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전은 시대를 반영하는 글인데...
비판적 독서를 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번역, 반대합니다.
젠더개정, 왜 이런 발상이?

하비 맨스필드의 번역에 대한 글! 완전 찬성입니다.

추풍오장원 2021-09-24 0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깊이 공감합니다.

청아 2021-09-24 10: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민우님 덕분에 또 배우고 갑니다.👍

초란공 2021-09-24 10: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진 못했는데 생각거리를 던져주셨네요~ 서양 문학 번역에 우리 속담이나 ‘곤룡포‘ 같은 용어가 나오면 불편하고 생경한 느낌이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대로 번역하고 문화적인 특징이나 차이를 설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기억이 있네요. 정답은 정해져있진 않겠지만 특히 일반 독자로서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네요... 어쩌면 독자를 위한 과한 ‘우대‘가 게으른 독자를 낳고 있는 것일까요... 독자로서도 반성이 됩니다~^^;;

mini74 2021-09-24 16: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전의 불편함까지 받아들이는 것 가치관의 변화에 맞추는 것. ㅠㅠ 고전번역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글. 고맙습니다. ~ 저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