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여름방학 숙제로 <아홉살 인생> 독후감을 써오게 했다. 소설의 내용은 잘 기억 나지 않지만, 책의 마지막 문장은 또렷이 기억난다.


"10살이 되었다."


싱거운 문장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여운이 강한 마무리였다. 주인공은 9살로 지내는 그 1년동안 여러 경험을 겪는다. 새로운 곳에 왔다는 기대감, 우정, 사랑, 이별의 아픔, 슬픔 등등..그런 일을 모두 겪은 9살 소년은 10살이 되었다. 그 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홉살짜리 아이에게도 어른처럼 삶의 희노애락이 있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 영화도 <아홉살 인생>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에는 오다기리 조, 아베 히로시, 키키 키린 등 유일본의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이들이 아니라 기적을 찾으려는 아이들의 모험과 인생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오사코 코이치.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하여 코이치는 어머니 오사코 노조미와 외조부모님 가정과 함께 살고 있다. 남동생인 키나미 류노스케는 아버지 키나미 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코이치의 소원은 언젠가 부모님이 재결합하여 다시 4명이서 같이 사는 것. 하지만 이는 요원하기만 한 꿈이다.


코이치는 화산이 폭발해서 가족이 모두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이사가면 다시 같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화산이 폭발하기만을 바란다. 그러다 같은 반 친구인 후쿠모토 유와 오타 신이 나누는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바로 새로 개통되는 신칸센이 마주치는 순간에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코이치는 그곳으로 가서 화산폭발 소원을 빌겠다고 생각한다. 코이치는 류노스케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 같이 모이기로 한다. 류노스케는 자신의 친구들도 데려간다. 이들이 펼치는 작은 모험담의 시작이다.


코이치를 비롯하여 이 신칸센 모험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소원이 있다.

학교 사서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이소베 렌토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하는 하야미 칸나

죽은 반려견 마블이 다시 살아나길 원하는 오타 신

여배우가 되고 싶지만 현실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리요시 메구미


저마다 자기만의 고민이 있고, 애환을 느낀다. 메구미는 아역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미 배우로 활약하고 있는 같은 반 친구를 보며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고 있고, 배우가 되고 싶지만 집안 사정과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다. 렌토는 사서 선생님과의 나이 차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 짝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소원을 빌어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늘 순수하고 걱정이나 고민 따위 없을 것만 같은 아이들의 세계에도 그림자는 진다. 그들의 세계에도 진지한 고민과 애환은 존재한다. 다만 표현이나 해결방식이 아이'적'으로 보일 뿐.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칸센이 보이는 곳을 찾아가는 이 작은 여행은 사실 그들 나름대로 삶의 고민을 돌파하고자 했던 시도였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여러 사람과 만나고 많은 것을 겪게 되고, 나름대로 방법을 고민해서 여러 장애물을 넘는다.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도 받았지만, 대개 자신들의 힘으로 성공시켰다. 아이들의 겪음은 그들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넓힐 수 있다.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결말에 이르면 코이치와 메구미에게서 여행 전과 달라진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화산 폭발 소원은 아이여서 귀여운 거지,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소원이다. 자기의 가족만 생각하고 타인은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코이치가 여행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게 된다. 신칸센이 지나는 순간에 자신의 소원을 빌지 않는다. 빌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역에서 동생에게 사과하며 그 이유를 말하는데, 자기는 "세계"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라는 말에는, 자신의 가족만 있던 코이치의 세계에 '다른 사람들'과 '그동안 몰랐던 소중한 작은 일상'들이 들어왔음을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영화 첫장면과 마지막에 언급되는 '화산재'도 비슷한 의미인 것 같다)


코이치를 중심에 놓고 볼 때, 이 여행은 표면적으로는 기적을 찾는 여행이었지만, 세계가 확장되고 일상을 깨닫게 되는 여정이기도 했다. 그런 내면의 변화가 코이치에게 일어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적이란, 기적처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일상으로 서서히 스미는 것이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코이치 할아버지의 떡이다. 떡집을 운영하는 코이치의 할아버지는 새로운 떡을 만들어서 코이치에게 시식해보게 했다. 코이치는 그 떡을 먹고 맛이 밍밍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다 여행 중에 동생에게도 그 떡을 주었는데, 그때는 처음엔 밍밍했지만 먹다 보면 은은한 달콤함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어떤 자극적인 요소도 없지만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할아버지의 떡, 꼭 그처럼 이 영화도 극적 갈등은 없음에도 진한 여운과 감동을 준다.


이 영화를 보고 읽고 싶어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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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10-12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요. 저 영화랑 어린이라는 세계랑 찰떡궁합이에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참 좋아요. 저는 잘생긴 오다기리 조는, 어떻게 입고 나와도 잘생겼구나 하며 침 흘렸어요^^;;;

mini74 2021-10-12 08:33   좋아요 1 | URL
저도 히로카즈 정말 정말 좋아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