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딥하고 이토록 슬프고 이토록 어둡지만

이렇게 아름답고 순수한 동화가 또 있을까.


영화의 배경은 1944년 스페인. 

내전은 끝났지만 시민군과 파시스트정권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주인공 오필리아는 임신한 어머니와 함께 새아버지 비달 대위가 있는 산간으로 이동 중이다. 비달 대위는 파시스트 정권에 충성하는 인물로, 강박 관념이 지나쳐 주변 인물은 물론이고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도 냉혹하게 대하는 냉혈한적인 인물이다. 오필리아의 친부는 봉제공이었으나 작중 시점에는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안 나오지만, 아마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오필리아가 처한 상황은 참담 그 자체이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요정과 판이라는 기이한 생명체가 등장한다. 판은 자신을 그녀의 시종이라고 소개하며, 오필리아가 사실 지하 왕국의 공주 '모안나'의 환생이라고 한다. 판은 보름달이 뜰 때까지 세 개의 임무를 완수하면, 고통과 슬픔이 없는 지하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오필리아는 갑자기 일어난 동화 같은 일에 당혹스러우면서도 들뜬다. 그녀는 판의 조언에 따라 차례차례 임무를 완수해 간다. 때로는 이 때문에 진흙탕을 굴러 어머니한테 혼나기도 하지만, 지하왕국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만 하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현실은 너무도 차갑고 버겁기만 하다. 엄마는 임신 중에 무리하게 장거리를 이동하여 비달이 있는 곳으로 와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양아버지란 인간은 사랑 따위 없고 곧 태어날 아기에게만 관심을 가진다. 엄마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던 인물인 메르세데스와 야반도주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비달에게 들켜 독방에 홀로 갇히고 만다. 현실은 차갑고 동화 같은 건 없다.


작중 가장 큰 대립선은 오필리아 vs. 비달 대위이다. 비달의 잔혹함과 오필리아의 순수함은 시종일관 대비된다. 비달 대위는 전쟁을 형상화한 듯한 인물이다. 작중 주치의를 통해 그에게 내려진 규정은 '아무 의문 없이 복종만을 위한 복종'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상당히 정확하다. 비달 대위는 군대식 상명하복, 권위주의, 가문과 아들에 대한 강박관념으로만 움직인다. 전쟁, 군대, 계급, 가문과 같은 요소들이 그를 규정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전쟁이라는 상황에 매몰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캐릭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동화를 좋아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따뜻한 심성을 지닌 오필리아는 이런 비달에 대한 안티테제적 캐릭터이다. 비달이 냉혹한 권위주의자라면, 오필리아는 늘 타인을 진심으로 대하고 사랑할 줄 아는 인물이다. 비달이 그저 권위에만 순종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어떤 행위도 개의치 않는다면, 그녀는 권위 있는 인물의 명령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타인에게 해가 된다면 하지 않는다. 자기보다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안다. 마지막 세 번째 임무를 수행하면서 판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비달과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오필리아는 비달 대위로 상징되는 전쟁 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 매몰되어 인간성을 버린 모든 이들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이러한 두 인물의 대조를 통해서, 영화는 시종일관 오필리아처럼 동화를 좋아할 뿐인 순수한 어린아이의 삶까지 망가트리는 전쟁의 잔혹함과 무가치함을 비판한다. '지하 왕국'이라는 거짓도 고통도 없는 아름다운 세상의 존재는 1944년의 스페인뿐만 아니라 현재의 세상을 거울처럼 비추어 돌아보게 한다.


오필리아의 체험은 실재였을까? 즉, 현실에서 동화는 있었을까? 영화의 내용과 결말은 이 부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오필리아가 겪은 동화 같은 환상적인 체험들은 그 자체로 전쟁으로 인한 참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팠던 한 소녀의 절박한 절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지하왕국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행복할 길을 찾을 수 없던 그녀의 삶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비단 전쟁이 아니더라도 혹독한 현실과 폭력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오필리아'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현실은 지하왕국이 되어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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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11 21: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정말 좋아해요. 괴물도 역대급으로 무서웠던 거 같아요. 암울했던 역사와 오필리아의 희생 등 넘 좋았어요. 글 넘 잘 써주셔서 맞아맞아 하면서 읽었어요 *^^*

김민우 2021-10-11 23:19   좋아요 2 | URL
오 미니님도 좋아하시는 영화군요!! 저도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10-12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넷플에 있네요. 바로 검색했어요. 민우님 미니님 진짜 좋아 누르셨으니 믿고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