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흐릿한 먹빛 세계를, 몇 개의 은색 화살이 비스듬히 달리는 가운데 흠뻑 젖은 채 마냥 걸어가는 나를, 나 아닌 사람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시가 되기도 하고 하이쿠가 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히 잊고 순수 객관에 눈을 줄 때 비로소 나는 그림 속의 인물로서 자연의 경치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다만 내리는 비가 괴롭고 내딛는 발이 피곤하다고 마음을 쓰는 순간, 나는 이미 시 속의 사람도 아니고 그림 속의 사람도 아니다. 여전히 시정의 풋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 미학의 중심이 무관심성이라지. 소세키의 저 구절이 그걸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에서는 비인정이라고 표현되는데.

 

사색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행인의 초반에서 조용히 물러난 경력이 있는 나로서는 풀베개의 이런 묘사 중심적, 사색 중심적인 특징이 편히 다가왔다.

 

 

2.

사색 중심적이지만, 논리 중심적이지는 않다. 수묵화를 볼 때, 붓 터치와 여백, 구도를 보면 우리 머리 속에서 뉴런과 뉴런 사이에 긴 꼬리의 빛이 차분하고 폭넓게 물결치는 것이 느껴지듯. 몰입된 관조를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다.

 

묘사가 극히 정제되어 있고, 때때로 기막힌 풍경을 보고 절로 감탄하듯 자연과 사람과 삶을 묘사하는 문장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바슐라르가 말한 시적 돌출의 경험이다.

 

 

3.

시시각각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사이로 보니 여인은 숙연하며, 초조해하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으며 같은 정도의 걸음걸이로 같은 곳을 배회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에게 떨어질 재앙을 모르고 있다면 순진함의 극치다. 알고도 재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단하다. 검은 곳이 원래의 거처이고 잠깐의 환영을 원래대로인 어둠 속에 거두어들이기에 이처럼 조용하고 단아한 태도로 유와 무 사이를 소요하고 있을 것이다. 여인이 입은 후리소데에 어지러운 무늬가 없어지고, 옳고 그름의 구별도 없는 먹물로 흘러드는 곳에 자신의 본성을 넌지시 비추고 있었다.’

 

 

여주인공인 나미 씨를 묘사한 문장이다. 사색적인 작품이라고는 말했지만 스토리 자체도 자못 흥미롭다. 화가인 화자가 도쿄를 떠나 한적한 온천마을을 방문한다. 묵게 된 온천장의 어여쁜 딸이 이혼한 후에 친정에 돌아와 있다. (나미 씨)에 대한 쑥덕공론이 온 마을에 퍼져있지만, 화자는 외관만인 아닌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본다. 라는 간단한 스토리지만.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독자를 어느새 매혹시키는 여주인공. 그녀에게는 다른 사모하는 남자가 있었다. 집안의 강권으로 도쿄에서 은행을 경영하는 부자 집으로 시집가게 되었는데, 그 집안이 러일전쟁의 여파로 망한다. 망한 시댁을 뒤로 하고 친정으로 돌아왔으니, 그 시절 사람들 모두 쑥덕공론을 펼 수 밖에. 이제는 이혼녀 신세가 된 그녀지만 기개(그렇다. 기개라고 말해야 할 듯)는 살아있다. 저 어둠 속의 슬픔은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은 채이야기는 나름의 반전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로.

 

 

4.

화자의 사색은 자기만의 미학에 대한 것들이 중심을 이룬다. 이야기 전체를 조망해 보면 풀베개는 남에게서 건네 들은 얘기를 자기가 직접 확인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사색의 내용과 이야기 형식이 아귀가 딱 들어 맞는다. 남에게 들은 것과 자기기 직접 확인한 것을 대비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서양식 미학과 거리를 두고 작가 자신만의 미학을 추구하겠다는 다짐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5.

차분해진다. 시끄러운 세상사에서 한 걸음 물러난 기분이 든다. 소설의 내용은 충분히 속세의 요란함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산사에서의 새벽 이미지가 내내 마음 속을 차지했다. 새벽바람에 둔중했던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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