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정의(Poetic Justice)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을 대상화(Objectification)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마사 누스바움은 대상화가 사람을 사물과 같이 바라보는 경향으로, 결국 개인의 특수성과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한 텍스트는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과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이다. 그런데 책 전체를 볼 때 이 두 텍스트보다 더 중요한 존재는 ‘리처드 포스너’라는 판사인 것 같다. 헌사에서 ‘리처드 포스너에게’ 라고 해놓고는 상당히 비판적으로 그의 판결을 다뤄 처음에는 놀랐다. 그와 학문적인 입장에서 결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에는 오히려 책의 내용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짐을 느꼈다. 입장이 다르더라도 논쟁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것. 서로를 존경하면서 하는 이런 행위는 그 자체가 ‘시적 정의’를 태동하게 하는 성숙한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
‘시적 정의’가 궁금해서 읽은 것 보다는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이름 때문에 읽었다. 저자의 명성에 혹해서는 아니고, ‘마사~ 누스바움!’ 이라는 이름 자체. 소리 내어 읽으면 꼭 그리스 신전의 한 모퉁이에 고요히 놓여있는 정육면체의 우윳빛 대리석 같은 느낌이 든다.
수의 곱셈 ↔ 물체의 합성.
상태공간 : 물체는 여러 상태의 모임이다.
곱집합 : 합성의 운동학
소수(素數)와 수의 관계는 기본입자와 물체의 관계와 같다.
수식들은 대부분 이해 못했다. 이언 스튜어트의 수학 책들보다 어렵다. 그럼에도 저런 문장, 개념, 비유들은 좋았다. 수의 곱셈이 즉 물체의 합성이고 그것은 또한 상태공간을 생성하는 운동이라는 통찰. 수학은 잘 모르지만, 저자의 유추 과정을 읽다 보면 어느새 통렬함을 느낀다.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고, 전에 몰랐던 것도 아니었지만.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귓속에서 계속 웅웅 거렸다. 단 하나. 언제나 사람을 맹목적으로 순수하게 만드는 말 아닌가.
그래. 원씽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게는 섬씽도 필요해.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 욕망 아닌가 의심하는, 우려하는 마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공간(내 방)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미니멀리스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