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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는
등장인물 이름을 그냥 짓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인터뷰 같은 걸 본 것은 아니지만, 『지상의 노래』도 그렇고 『식물들의 사생활』 등장인물 이름도 그렇고. 똑딱단추처럼
딱 맞춘 이름을 짓고 싶어하는 스타일이라고 느꼈다. 형제의 이름은 이렇다. 우현, 기현. 한자로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나는 그냥 습관에 젖어 이렇게 해석하고 만다.
愚賢, 起賢. 여주인공 순미는 順美로도 純美로도 읽힌다. 우현과 순미를 구성하는 한자들은 어떤 ‘상태’를 표현한다. 이미 그렇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기현은 일어날 기(起)로 인해 움직임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느낌을 준다. 현명함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 즉
성장한다는 뜻이므로 이 소설은 기현의 성장소설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지만, 그것만은 아니겠지.
우현과 결부된 사물은 ‘카메라’다. 시대 사건을 찍어 기록하고자 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청춘. 그는 ‘증거하는 자’로
살고 싶어한 자였다. 기현과 결부된 사물은 렌즈가 들어간 또 다른 사물, 망원경. 그것은 기현이 ‘탐색’, ‘탐사’, ‘탐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현이 겪은 사고로 카메라는 이제 사용되지 못하고 형을 질투한 기현은 밖으로
돈다. 불구된 카메라와 방황하는 망원경. 덧붙여 유린된 노래(목소리). 세 인물이 형성하는 꼭지점은 이렇다. 물론 이 꼭지점들은 유동하는데, 그건 개인의 정념 때문이기도, 규범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게 만드는 시대의 악착같음, 집요함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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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많은 부분, 기현의 회상이다. 기현의 회상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화자의 기억과는 달리 선명한다. 이 소설 형식을 한마디로 말하면 ‘신화’인데, 잊을 수 없는,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이라는 소설적 장치는 이 신화를 든든하게 뒷받침한다.
그래. 이 소설은 신화다. 때죽나무-소나무, 야자나무, 물푸레나무가 상징하는 이야기들이 신화고, 우현-순미의 사랑, 우현-순미-기현의 관계, 형제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스물한 살 어머니가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 또한 신화다. 그렇기에 만남의 장면 또한 신화적이다. 환상적이다. 기현이 순미를 처음 만났던 ‘집 앞의 벚꽃들이 화르르 떨어져내리던 4월의 마지막 날’, 다시 만난 순미가 ‘나를 그 호텔에 넣어줘요’라고 뱉었을 때, 야자나무 아래 평상 위에서 두 남녀가 하나가 되었을 때, 독자는
수 천년 동안 농축된 이야기의 원형을 접하게 된다. 현실과는 멀리 동떨어져 보이는 신화의 형식을 취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신형철의 해설처럼 사랑의 한 논리를 탐구한 것이기도 했을 테지만 나는
논리보다는 이미지, 선행하는 이미지가 더 강렬했다. 인상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이 사랑을 시계장치 분해하듯 분석했을 때 내가 느낀 약간의 해방감과는 달리, 이승우의 사랑은 다시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다. 다시 숭고하다. 다시
거리를 둔 것이다. 바로 이 느낌, 거리를 둠으로써 사랑이
더욱 성스럽게 느껴지도록 하는 기제. 통유리를 칸막이 삼아 이편에서 저편의 사람들을 볼 때 느끼는 기분.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오고 급기야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나는
신화의 형식을 통해 사랑을 다시 대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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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앵글, 도덕적 초점’은 독자를 ‘비좁은 외딴 골목으로 몰아’ 간다.
『태엽감는 새』, 『칼의 노래』 그리고 앤드루 와이어스의 템페라화에서 내가 느꼈던, 근본적 선택에 대한 압박을 다시 한 번 받았다.
음엽. 이라는 어휘가 나온다. 같은 식물에서 햇빛을 잘 받는 쪽의 이파리가
양엽, 약한 빛에 의해 형성되는 이파리가 음엽이다. 면적이
보다 넓고 두께가 얇다. 세계가 내재하고 있는 불평등은 우선 이쪽에서 해결해야 한다. 햇빛이 약하게 드는 쪽은 이파리를 넓게 해야 하듯, 사랑이 희미한
시대에는 감성의 이파리를 최대한 넓혀야겠지. 나는 ‘희생’이라는 말에 예전만큼 감동받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은 내겐 좀 멋쩍었다. 하지만 현실에 투명한 칸막이를 내려보는 일, 촉을 최대한 넓게 조밀하게
세워보는 일에 대해 탐구해 보고 싶은 마음은 강해졌다. 그것은 엄연히 말하면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 그 가능성에 대한 사랑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