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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도시락이지만 웬만해서는 어김없는 도시락. 에서 탁 하고 숨이
막혔다.
웬만해서는 어김없는 도시락을 해 준 나기네 어머니 순자,
순자의 순은 어째선지 열흘, 이라는 의미의 순(旬).
어째서일까?
탁 하고 숨이 막힌, 웬만해서는 어김없는 도시락과 어째선지 열흘, 이라는 의미의 순을 이름으로 가진 순자. 이야기의 구조 한 귀퉁이에
애자라는 블랙홀이 있고 다른 한 귀퉁이에는 어째선지 열흘, 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순자가 있다. 열흘은 서수, 세기 위한 수. 하나, 둘. 세기 위한 수. 그저
도시락이지만 웬만해서는 어김없는 도시락 하나, 둘, 셋, 넷… 모종의 질서, 순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사랑(愛)만으론 안 된다는 말은, 실은 사랑 하나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들의
상투적인 변명일 뿐이지만, 사랑만으론 안 된다. 하지만 사랑이
일 순위인 삶은 가능하지 않을까. 이 순위는 밥 먹고 똥 싸기, 삼
순위는 남하고 심하게 다투지 말기 등등.. 사랑만으론 안되지만, 사랑이
첫 번째인 삶은 살 수 있지 않을까. 애자는 순서가 없다. 순서
없음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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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 하나도 안 맞는 말로 모세(나나 뱃속 아기의 정자제공자(?))에게 달려드는 소라, 그런 소라를 언니야, 라고 부른 것을 분해하는 나나. 소라와 나나는 애자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나나는 웬만해선 소라를 언니라 부르지 않고.
무언가를 써야 한다면,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무언가를 써야 한다면
소라와 나나처럼, 나기처럼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설 내용을 대상으로 삼는, 직접 가리키는 글을 이미 위에 써버렸으니 망했지만, 소설 내용은 한 마디 언급 없이 그저 내가 독서하는 사이에 어떤 행위들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했는지를 스스로 관찰하여 썼다면, 아니 스스로
관찰한 결과와 그렇게 관찰했다고 착각한 결과들을, 그저 했던 순서대로 나열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고 아직도 쐐기처럼 심장에 박혀있는 무언가가
저지한다. 그건 꾸미고 싶은 욕심과 꾸밈이 가능하지 않음의 간극이고,
나는 그 간극 그대로 놓아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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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은 간혹 심연의 간극까지 나를 데려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