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이해
존 버거 지음, 제프 다이어 엮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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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라는 행위를 도중에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지 않은 것을 너무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게 만드는 극소수의 작가들이 있다. 그들을 알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존 버거가 그렇다.

 

 

 

 

그리고 삶에서, 의미란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는 관계를 짓는 과정에서 발견되며, 진행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야기 없이, 전개 없이, 의미는 없다. 사실이나 정보가 그 자체로 의미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컴퓨터에 입력될 수 있고 계산에서 변수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컴퓨터에선 아무 의미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의미를 둘 때, 그 의미는 알려진 것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미와 수수께끼는 뗄 수 없는 것이고, 둘 다 시간의 흐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확실성은 즉각적으로 전해질 수 있지만, 의심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의미는 이 둘에서 나온다. 사진에 담긴 어떤 순간은 보는 이가 그 순간을 넘어 확장된 시간의 지속 안에서 그것을 읽어낼 때에만 의미를 얻는다. 어떤 사진이 의미가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사진에 과거와 미래를 덧붙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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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박철은 옮김 / 동아시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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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가 떠올랐다. 일본인들은 천성적으로 정리의 천재들인 듯. 가라타니 고진도 칸트를 누구보다 깔끔하게 정리했던 것을 기억한다. 들뢰즈의 푸코론 정리를 통해 들뢰즈의 정치적 가능성을 엿보게 한 5장「욕망과 권력」은 어려웠지만 다른 챕터들은 들뢰즈를 이해하는 좋은 밑받침이 됐다. 우치다 타츠루의 책과 묶어서 다시 읽어봐야지.

 

 

 

 

들뢰즈에게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그려진 경험이 중요했던 것은 그것이 사유의 새로운 상을 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해독 방식이 습득되어야만 하는 기호란 우연적 만남의 대상이다. 기호와는 만나려고 생각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기호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 대해 강한 작용을 행한다. 마들렌은 `나`에게 비의지적-무의식적인 상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강제`이다. 이 폭력 내지 강제의 작용에 의해서 비로소 사람은 사유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진리에 도달한다. 앞의 인용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그러한 것이다. 사람은 적극적 의지(`...를 하자`)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진리는 항상 어쩔 수 없이 사유하게 됨의 결과로서 획득된다. 사람은 사유하는 것은 아니다. 사유하게끔 된다. 사고는 강제의 압력에 의해서만 개시되는 것이고, 그것을 강제하는 기호는 항상 우연적 만남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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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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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를 읽어 봐야겠다. 한 사람의 철학적 개념을 일관하는 것은 여전히 무리다. 실은 관심도 없다. 다만 개념이라는 거창한 말 대신에 한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친다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은 재미있다. 고진과 들뢰즈, 스피노자와 로티의 아이디어는 끌리는 지점이 있다.

 

 

 

 

이오니아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을 노모스가 아니라 피시스에 의해 보는 태도, 즉 인간을 폴리스, 부족, 씨족, 신분과 같은 구별을 괄호에 넣고서 보는 태도와 분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온 것이 이소노미아다. 이소노미아(무지배)는 단순히 개개인이 참정권에 있어 대등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 생산관계에서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금노동이나 노예와 같은 시스템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피시스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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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광기, 좀 이상하게 미친 사랑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환희’의 이야기. 라동 부인의 말은 이 소설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애도가 대단한 바캉스로 변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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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의 생말로 근처 바닷가 동네를 묘사한 문장들을 읽어나가면 묘하게도 더위를 잊게 된다. 짜증이 날라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담긴 얼음을 깨뜨려 삼킨 것 같다. ‘퇴적된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소진해 버릴 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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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가 꼭 뜨거울 필요는 없다. 미친 사랑은 뜨거울 것이 틀림없지만, 미친 사랑을 표현하는 법이 꼭 뜨거울 필요는 없다. 파스칼 키냐르의 어휘는 나른한 단어가 없다. 송장 위로 붕붕거리는 파리떼 같진 않다.

 

어제 『프로듀사』 보면서, 김수현과 아이유의 이불빨래 씬. 신디(아이유)의 파란색 가로줄무늬 치마. 절반쯤 읽은 이 소설의 느낌 가운데 한 가지는 그것과 접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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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에는 한 아이의 숨이 영원히 각인되어 있고, 명단은 피로 물들었다. 소설에서의 목록은 정체성의 표현이며, 명단은 소속감의 상징처럼 보인다. 개인, 가족, 문화권을 아우르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절실한 물음이 나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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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명단. 리스트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읽은 책의 별점 기준을 알라딘 새로 나온 책 리스트에서 얻는 쾌감으로 하기 시작했다. 새 책이 많이 나왔을 때 그 리스트를 쭉 훑어 내릴 때의 좋은 기분을 별점 네 개의 기준으로 삼고, 책을 읽고 그 보다 더한 느낌을 받으면 다섯, 못하면 셋. 리스트는 서사와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하다. 은유보다는 환유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도. 그것이 기능하는 방식의 한 사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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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외국어만은 아닐 것이다. 사투리나 전문용어, 은어도 마찬가지겠지. ‘언어에는 방패가 있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이중적인 의미를 띤다. 비즈니스 모델에 ‘해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그건 이쪽과 저쪽을 구분한다. 그리고 곧 차별이 되고야 만다. 구분이라는 말이 전후 좌우 느낌이라면 차별은 상하(위 아래)의 느낌. 그 상하를 가르는 기준이 핏줄이든 언어든 돈이든 학력이든 외모든 간에, 그런 것들보다는 우리가 만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측심연을 내려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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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하게,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 점멸하는 빛. 아주 높은 곳에서 보지 않더라도, 기껏해야 다 큰 성인의 눈높이에서 보아도 희미하게 점멸하는 빛. 우리는 각자 우리에게 그런 빛이다. 하지만 반딧불이가 그렇듯이 점멸하는 빛들이 격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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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없이, 원한 없이, 저항 없이 존재하기. 니체 철학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또 꼬아서 반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욕망 없이, 원한 없이, 저항 없이 존재하기. 잠자는 존재? 꿈을 꾸는 존재?

 

‘없이’는 꿈이다. ‘작게’라면 어떨지. 욕망을 작게, 원한을 작게, 저항을 작게 하며 존재하기. 아, 또 뻔한 우리 동시대의 논리로 흐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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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은 괄호 속에서’ ‘가짜 죄수’는 서성거리다 주저앉고 만다. 점멸하는 다른 빛들을 주시하기, 펌프질 하기. 그러다가 또 풀려버리고 마는, 태엽을 감아야만 하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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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보에 관한 이야기지만, ‘인과’를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인과라는 논리는 어쩔 수 없이 제1원인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 보통은 ‘신’으로 수렴되는. 캔터 선생님은 인과의 삶, 책임의 삶을 산다. 그에 반해 화자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비극은 다신교적 문화였던 그리스에서 비롯된 것. 그건 삶의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암시하다. 그렇지만 단순하진 않다. 캔터 선생님과 화자의 태도를 옳다 그르다의 논리에 포함하면 위험하겠지.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다 보면, 인과가 분명한 일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낀다. 그건 지식의 양과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누적되어 온 우주를 다 뒤덮더라도 여전히 ‘인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인과의 문제인가 우연의 문제인가를 우리가 어떻게 판단할지. 언제까지 해보다 중단할지. 개인의 삶은 유한하고 한 번뿐이기에. 하지만, 그렇다. 그런 판단은 인과나 우연만큼이나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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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이 떠오르긴 하는데,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캔터 선생님이 지닌 양심(죄의식)은, 그로 인해 그를 추락시키고 만 그 양심은 사회적으론 필요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너무 성급히 다른 문을 닫아버렸다. 《영원한 이방인》에서 이런 표현을 보았다. ‘기성의 보격을 깨부수는 신중한 단어’. 기성의 보격을 깨부수는 신중한 행동, 언어, 또는 한 수. 그건 정말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성의 보격’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전의 다른 생각들, 모든 사람들이 가질만한 그냥 보통의 판단은, 깨부수는 게 개인에겐 필요하다. 그건 인과응보를 비극으로 바꿔 부르는 작은 습관으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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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최고로 사랑 받던 아이가 전염병(폴리오)으로 죽는다. 그 애가 컸다면 이러저러한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며 아이의 이모가 주절거린다. 이모부가 그런다. “하지만 그게 무슨 도움이 되냐?” 베커먼 씨가 물었다. “저렇게 계속 주절거리는 게?”. 그 부부의 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움이 돼요. 어머니한테 도움이 돼요.”

 

각자에겐 각자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 따로 있을지 모른다. 평상시의 습관(리추얼)을 그대로 따르는 것도 하나일 테고, 세상에서 도주하거나, 은신처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일 테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걸 하는 것을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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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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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문, 두 자루의 칼과 쌍둥이, 날짜에 따라 색색 리본으로 묶어 구분해 놓은 이천여 통의 편지. 숙명. 숙명. 이 단어의 칼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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