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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울티모가 자동차 경주대회를 구경하러 간 날, S자 도로를 보고
감탄하며 한 말. “참 아름다워요”. ‘아름답다’의 어원이 ‘한 아름 가득’의
그 ‘아름’에서 나왔다고 들었다. 두 팔을 크게 벌려 딱 안을 수 있는 크기. 촌, 뼘, 인치, 피트 등
신체를 통해 세계를 재려고 했던 인간들. 제 몸을 척도로 삼아 어떡하든 무한의 세상을 헤아려보려고 한
조그만 인간들. 무한을 헤아리기 위한 유한의 수. 라는 소설
속 문장을 나는 만트라처럼 속으로 되뇌었다. 울티모의 ‘시작과
끝이 같은 서킷’, 엘리자베타의 ‘두 손을 감추고 품속에서
연주하는 슈베르트’는 그 척도의 개인화된 어휘가 아닌가.
‘역사’는 ‘그들’의 역사, 역사와
관련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들러리를 서지 않는 것. 이라고 말하는 엘리자베타. 그녀의 말에 크게 끄떡거리며, 남의 들러리를 서지 않음은 또한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그건 남들이 만든 부지기수의 서킷이 이미 존재하더라도 자신만의 서킷을 꿈꾸고 설계도를 그리는
일, 품속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슈베르트를 연주하거나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상정해
두고 허구적인 일기를 쓰는 일, 한 사람의 무죄증명을 위해 남은 평생 회고록을 쓰는 일 같은 것 아니겠냐고, 작가는 제시하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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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겸 식당의 여주인이 서킷에서의 자동차 경주를 노상에서의 자동차 경주와 빗대 하는 말. ‘이제 시(詩)나 영웅적인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들은 똑같은
트랙을 수도 없이 돌죠. 얼빠진 동물처럼 말이에요.” 그건
진짜 길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짜 길은 진짜 세계의 은유다. 서킷은
‘자기만의 완성’을, 1차
세계대전의 전쟁형식을 바꾼 참호는 ‘지표에 난 상처, 함정의
길’이고, 사랑하는 여인 엘리자베타는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가볼 만한 길’이다. 길은 시적 현현이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카레이싱으로 시작하는 소설이지만, 소설은 철저히 ‘길’을 모티프로 작동된다. 제목 『이런 ‘이야기’』는 『이런 ‘길’』로 치환할 수 있겠다. 길은 내가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모티프 가운데
하나다. 소설은 이 모티프를 마치 울티모가 그린 서킷의 설계도처럼 수 많은 우여곡절이 담긴 굽잇길로, 아름다운 속도의 곡선으로 구현한다.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이끄는 여정’만이 아름답다던 울티모. 그의 생각대로 소설의 형식은 완성된다.
여관 겸 식당에서의 엇갈림, 울티모의 추상적 아이디어가 엘리자베타의 체험이 되는 마지막 장면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다. 입이 근질근질하다. 아니다. 말하지
않겠다. 다음에 이 아름다운 여정에 동참할 사람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