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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목소리, 다른 방 ㅣ 트루먼 커포티 선집 1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평점 :
1.
구부러진 세계의 속살이 나를 푹 감쌌다. 조엘은 ‘마녀의 사악한 거울에서 떨어진 유리 조각이 눈을 감염시켜 시각이 온통 뒤틀리고 심장은 쓰디쓴 얼음 덩어리가 되어버린’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에 나오는 소년 카이가 자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뒤틀린 시각, 쓰디쓴 심장은 기이하게 빛을 내뿜는 이 소설의 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른다.
2.
거대하지만 이제는 퇴색해져 버린 저택. 버려진 마을 같은 눈시티에서도 또 한참을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스컬리스 랜딩. 조엘은 태어나 한 번도 본적 없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외로운 여정을 밟는다. 환상과 현실이 뒤틀려 섞여버린 것 같은 이상한 장소로. 눈시티에서 스컬리스 랜딩으로 가는 수레를 끈 이는 늙은 흑인 하인 지저스 피버였고, 붉은 머리 아이다벨과 아이다벨의 언니 플로라벨 톰킨스를 그 여정에서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저기로. 경계를 넘어서는 그 대목을 읽어가며 벌써 나는, 이 소설은 책장 맨 위칸으로 가겠구나. 했다. 반딧불이를 허공에 날리는 밤, 산딸나무 향, 조약돌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우는 소리, 늙은 노새가 끄는 수레, 헤르메스의 분신 아닐까 생각되는 지저스 피버(그이는 정말로 깃털 달린 중산모를 쓰고 있다), 붉은 머리 여자 아이, 어둠 속에서 셋이 함께 부르는 노래. 이 강렬한 이미지는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3.
고딕. 이라는 장르로 분류되어 있었다. 서던 고딕(Southern Gothic). 비슷한 부류의 작가로 윌리엄 포크너, 코맥 매카시, 카슨 매컬러스, 플래너리 오코너, 유도라 웰티, 테네시 윌리엄스, 하퍼 리 등등… 코맥 매카시, 카슨 매컬러스, 하퍼 리를 읽어본 나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분류였지만, 윌리엄 포크너라면 과연. 이라고 끄덕거릴 수 있었다. 포크너의 미친 작품 <에밀리를 위한 장미>에서 느꼈던 기이하고, 어떤 면에서는 엽기에 가까운 인물, 사건, 분위기를 이 소설에서도 만나게 된다. 깊고 어두운 밤 질척거리는 강물, 흐물거리며 흘러가는 물가에 외로이 웅크려 있는 소년의 이미지가 내내 따라다녔다. 에드거 앨런 포의 세계에 근접한. 그 무엇. <<배트맨>>의 세계관과도 호응하는 그 무엇.
그러나 에드거 앨런 포와는 다르다. 포의 단편들을 읽은 후 내게 남은 것은 ‘지독한 물’의 이미지인데 반해, 커포티는 ‘물’과 싸우는 ‘불’의 이미지에 가깝다. 지독한 물에 잠긴 재(ash)의 왕국으로의 입성과 출성. 재에서 다시 태어나 날아오르는 불새의 신화가 내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4.
랜돌프, 랜돌프, 랜돌프. 스컬리스 랜딩의 기이한 주인. 기모노를 입고 있는 언캐니(uncanny)한 인물. 동성애적인 코드는 이 소설의 가장 큰 파국을 만들어내고야 말지만, 그 파국의 기이한 아름다움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의 인물 하나하나는 모두 극적으로 과대 표현되고 있어, 그래픽노블의 캐릭터처럼 느껴지고야 마는데 아마도 이런 느낌을 적확히 표현해 줄 말이 고딕. 이라는 말 밖엔 없겠구나. 하고는 끄덕.
5.
모든 기도는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중략)
딱 하나 예외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불확실하고 의미 없는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님, 제가 사랑 받게 해 주세요.
사랑 받을 수 있는 자리. 소년(조엘)의 저 바람이 이 소설의 전부고, 저 기도가 내 중심부에 있음직한 무언가를 결국 흔들리게 만들고야 말았다. 무너지는 소리.
6.
‘소설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그로테스크한 성장소설’이라는 카피는 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작가의 데뷔작 중 가장 아름다운 소설. 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거기에 한 표를 던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