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부호의 뚜. . 신호음처럼, 인터넷에 On - Off - On 하는 그 사이. 문이 열리고 닫히는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이 궁금해진다.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그 다음 번 포스팅이 올라오기 전까지 각자들은 어떠한 사정 속에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에 포함된 일흔 여덟 편의 글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격. 그 시간의 간격 안에는 직장, , 지하철, 버스에서의 시간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 시간의 간격 사이에 있었을 독서에 집중했던 시간, 공감을 느낀 순간, 등장인물들과의 교감으로 거리감이 성큼 가까워진 지점. 글로 남겨진 것들과 머리 속에서 맴돈 것들 사이에 있었을 희미한 목소리들이.

 

책을 다 읽고, 모니터 앞에 앉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낮엔 일로, 밤에는 술로. 연말이니까. 그렇지만 그 간격, 책을 읽고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한 시점까지. 지난 일주일새 회사는 희망퇴직 신청 자격기준을 공개했고 퇴직 신청을 받았고 마감까지 완료했다. 아직 정확히 몇 명이나 신청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이에,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100명이 신청해도 상관없지 않나. 오히려 많이 나가는 게 좋지 않나. 직급이 높은 선배들에 대한 내 태도는 어쨌든 좀 이랬던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와는 함께 일을 했었고, 같이 일은 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자리에선가 밥 한끼, 술 한잔 정도는 했었을 그 사람들에 대해서, 나의 공감지수는 제로에 가까웠던 것.

 

신청자 기준이 공지된 날, 나는 두 명에게 메신저를 날렸다. 한 명은 남았고, 한 명은 떠나기로 지난주 금요일에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내가 잘 아는, 아니 회사에서 제일 친하게 지낸 동료 베스트 파이브 중 한 명이. 그러자 모든 게 달라졌다. 책을 읽고 사람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말에 상당히 수긍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으면 사람과 사물과 사건을 대하는 감수성이 훨씬 예민해질 수 있다는 것은 믿는다. 그것이 사람을 얼마만큼 긍정적으로 바꾸는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나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그 친구가 최종적으로 클릭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들었다. 백 명의 동료들과 한 명의 친구를 대하는 내 감성의 비대칭. 이 낯선 감각. 순간적으로 절벽에서 떨어진 듯 아찔한 현기증에 휩싸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그 한 명이 백 명보다 내게 더 중요함을 바로 인식하고 말았으니까.

 

감수성이 예민해 진다는 사실. 공감능력이 더 자라났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사건들에 대한 것은 아니라는 진실. 물리적, 생물학적 세계에서는 대칭이 세계의 진리일지 모르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비대칭이 진리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진실.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의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서. 작가의 비대칭적 관심사들이, 그 관심사들에 대한 작가의 비대칭적 애정들이 결국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친밀성. 그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은 내 감수성을 다시 녹인다.

 

결국 나는 100명의 사람들과 친밀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그 친구가 현재 어떤 마음일지만 생각한다. 여전히 친구 한 명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그 한 명을 비대칭적으로 생각하는 나의 사소한 사정이,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바랐고 남자로 그득한 숲과 여분의 사람을 바란 작가의 사소한(?) 사정이, 애정이, 쏠림이. 자기 중심의, 자기 본위의 사정들이. 결국 공감을 작동시키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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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주 일요일, 라이언 맥긴리 사진전을 봤고 지난주 일요일, 영화 그래비티를 봤다. 언제부터 영화와 멀어졌나. 생각해보니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다. 바로 그 시점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갤러리 방문이 시작되었고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일은 드물어졌다.

 

의식적, 무의식적 이유들이 잔뜩 붙어 있긴 하겠지만, 라이언 맥긴리 사진 전시회에서 그 이유 중 하나를 보다 확실히 느꼈다.

 

사진(또는 그림)이 벽에 걸려있고.. 다른 관람객이 내가 보고자 하는 그림 앞에 있는 경우 또는 관람객들이 서로 엉켜있어 그 사이사이를 끼어들듯 헤쳐나가야 하는 경우. 다른 관람객의 뒷통수와 그림의 일부를 함께 보는 걸 내가 은근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관람객과 관람객 사이로 발걸음을 살짝살짝 비틀어가며 지나다니는게, 마치 근사한 자작나무 사이를 산책하는 것처럼 느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어떤 전시회에서 50대의 어머니와 20대의 장성한 아들이 그림 한 점 앞에서 서로의 감상을 나누던 것을 훔쳐 들었고, 언젠가는 젊은 연인들이 조르주 앙리 루오의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서 진지하게 서로의 종교관과 인생관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이 내가 보고자 했던 그림(사진)만큼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팅을 할 때처럼 차려입은 사람들, 미술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은근히 내 보이는 사람들, 형태와 색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 사진, 조각들. 그들 사이사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움직인다. 사람들과 그림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속에서 부유한다. 뜨듯한 온천수 속에서 부드럽게 유영하듯. 

 

영화는, 교실을 떠올리게 한다. 빅브라더(어떤 형태든)가 거대한 화면을 장악하고, 나는 어둠 속 작은 의자에 꼼짝 못하게 잡혀있다. 무조건 그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 회의실에서 두 시간 동안 줄창 떠들어대는 팀장 앞에서 스무명의 부하직원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자코 있을 때. 그렇게 미칠듯 무기력감을 느낄 때를 상기시킨다는 사실을. (다행히 그래비티는 이런 느낌을 주는 영화는 아니었다)

 

내 발로 움직인다는 것. 수 많은 그림들 중 마음에 드는 한 작품 앞에서 다른 99점의 작품들 앞에서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갤러리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확실히 책을 읽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20대 연인들이 라이언 맥긴리의 누드사진을 관람했다. 내가 20대였을 때, 나는 못했을 일. 아마 선입견때문에 시도조차 못해 봤을 일. 하지만 미술관 안에는 무언가 고양된 에너지가 부드럽게 차 있었다. 그건 값싸게 매도할 그런 것도, 지나치게 숭고한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건 성(聖)은 아니고 속(俗)에 속한 것이었지만, 성숙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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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6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티카를 읽는다 철학의 정원 18
스티븐 내들러 지음, 이혁주 옮김 / 그린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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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 윤리학의 연관 구조를 보다 분명하게 알았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에도 관심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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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를 읽는다 철학의 정원 18
스티븐 내들러 지음, 이혁주 옮김 / 그린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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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서를 완화하고 억제하는 인간 역량의 결여를 예속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정서에 종속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닌 운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인데, 그러한 사람은 그 운의 힘 아래 아주 강하게 놓여 있어서 자신에게 더 좋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흔히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된다. (에티카 4부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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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던 것 같다. 황정은이 이런 소설을 쓸 거라는 사실을.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면. 묻는다면이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린 채 며칠을 이리저리 굴려봤다. 굵은 것 서너 가지로 결국 뭉쳐졌지만. 사소한 것 하나,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건 모래알갱이 만하게 뭉쳐진 소똥 경단 하나.

 

 

백의 그림자은교씨와 무재씨의 대화에서 그 대화가 이뤄지는 방식의 독특함.

상대방이 했던 말의 일부 또는 전부를 그대로 사용하여 반응함으로써 말을 건넨 사람의 심리적 부담을 경감시켜 보다 정확하고 안정된 소통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제. 라포르를 형성하는 그 첫 단계를 인물들간의 대화에 적극 활용했다는 그 사실이, 작가가 독자인 내게 착오 없이 정확하게 건네주고 싶어하는 그 무엇. 틀림없이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할 그 무엇에 대해, 그 무엇의 내용을 알기도 전에 이미 그 무엇에 대한 내 태도를 정하게 만든, 흐트러진 매무새를 다시 가다듬게 만든 그 선행하는 형식. 선행하는 의식(리추얼)으로 기능하는 대화.

 

두 번째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독특함.

자폐증 걸린 이들처럼. 큰 충격(아픔, 상처)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알싸한 광기의 맛.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나서 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황정은의 인물들은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

 

 

작가가 무엇보다 얘기하고 싶었던 그 무엇은 폭력과 기만의 세계 구조. 자본과 개발논리에 의한 폭력과 기만의 증폭 과정 그 자체다. 독자가 그것들의 내용을 의식적으로 알아채기 전에 이미 선행하여 작동되고 있는 그 형식에 대해.

 

외부에 실재하는, 선행하는 형식으로서의 폭력과 기만. 인간 내부에 실재하는, 선행하는 형식으로서의 정신 반짝 차림(자기 보존에의 욕망).

 

그 선행하는 형식이 만들어 낸 풍경 = 목이 매어 눈물을 떨굴 것 같은 그 시점에서 끝끝내 주먹을 부르르 꽉 움켜쥐고 눈물을 삼켜내고야 마는 그 지점. 바로 그 지점으로 독자인 나를 정확히 데려다 놓는 매트릭스의 빨간 약. 그것이 황정은 소설 속 '대화(이자 선행하는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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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1-1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 이번 황정은의 작품을 읽기가 망설여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패쓰하자, 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마도 최근의 작품집이었던 [파씨의 입문]이 [백의 그림자] 보다 조금 실망스러웠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아요. 그래서 실망할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드림아웃님의 이 글을 읽으니 실망이고뭐고, 일단 읽어보자는 생각이 드네요.

목이 매어 눈물을 떨굴 것 같은 그 시점에서 끝끝내 주먹을 부르르 꽉 움켜쥐고 눈물을 삼켜내고야 마는 그 지점, 에 저도 한 번 다녀올게요.

dreamout 2013-11-19 21:35   좋아요 0 | URL
굵은 것 서너 가지. 라고 쓴 부분.. 실제 그걸 다 풀어내면 몇 페이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모든 것을 주저리 주저리 다 풀어낸다면 그건, 무슨 무슨 이론대로 써낸 것에 불과할 것 같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 어제 쓴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그럼에도 무슨무슨 이론 냄새가 많이 풍기는 듯 해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부르르... 그렇게 마음이 요동치는 한 순간.에 대한 황정은의 감각은 천부적인 것 같아요. 저는 한 가지라도 제대로 제 마음을 붙잡는 포인트가 있으면, 그것만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충분히 좋아하는지라.. 다락방님이 읽고 어떤 평을 쓰실지 궁금하기도, 조금 걱정되기도 하네요. ^^